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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4권, 5권, 6권
로마인 이야기 4_율리우스 카이사르 상
사진_ “로마가 낳은 창조적 천재” 율리우스 카이사르
카틸리나를 탄핵하는 키케로
갈리아 부족의 대반란, 베르킨게토릭스
<목차>
1. 유년시절 (기원전 100년~94년):
팔라티노 언덕의 수부라에서 유년. 카이사르는 카르타고 말로 “코끼리”를 뜻한다.
파트로네스(보호자)와 클리엔테스(피보호자,후원자)의 관계가 로마의 중요한 인관관계.
2. 청년시절 (~기원전 70년):
가정교사, 체육, 술라 집권, 결혼(킨나의 딸)
독재자 술라, 살생부, 망명, 귀국, 변호사 개업, 키케로(변호사의 아버지),국외 탈출, 해적, 유학(로도스 섬), 귀국(27세의 카이사르, 제사장 취임), 품페이우스와 크라수스,회계감사관 선출
3. 장년시절(~기원전 61년, 39세):
품페이우스의 대두(해적 소탕), 안찰관 취임, 37세에 출세 시작(최고 제사장), 카틸리나 역모사건, 카이사르와 여자(카이사르 암살의 주모자 브루투스의 어머니 세르빌리아),
카이사르와 돈(크라수스에 부채)
4. 중년시절(~기원전49년, 50세):
원로원파(카토, 루쿨루스, 키케로),
삼두정치(트리움비라투스,카이사르(민중지지)+품페이우스(군사력)+크라수스(경제력)),
집정관 취임, 율리우스 농지법, 갈리아 총독, 수족의 확보(클라우디스 폴케르),
갈리아 전쟁기(기원전 58년~51년, 8년간), 게르만 문제, 폼페이우스의 소극적인 처신,
호민관 클로디우스의 폭주, 카토의 귀국과 키케로의 추방 해제,
루카회담(삼두, 군사동맹 성격), 라인강 도하작전(라인강 최초의 다리), 독일 쾰른 (콜로니아,군사도시),
도버해협 도하(기원전 55년, 영국역사 시작, 윈스턴 처칠), 수도개조의 첫걸음,
2차 브리타니아 원정, 15개 대대 궤멸(사비누스,갈리아),
크라수스 (파르티아 원정,유프라테스강 경계선),
로마의 패배 (기원전 390년 켈트인(갈리아인) 로마점령, 기원전 321년 카우디움의 굴육(삼니움족),
기원전 216년 킨나이회전의 한니발, 파르티아 원정 실패, 크라수스 사망),
수도의 혼미(크라수스의 죽음, 크로디우스의 죽음, 폼페이우스의 단독 집정관 취임),
갈리아전쟁 7년(베르킨게토릭스, 갈리아 총궐기, 카이사르 철수,
알레시아 공방전_앞뒤 양쪽의 적에게 거둔 전쟁역사상 최초, 갈리아전쟁 8년(카이사르 49세),
전후 처리(로만 갈리아, 후세의 프랑스 문명의 탄생, 율리우스 성),
프랑스 출판 연작만화 “아스테릭스”(로마의 우등생 조상 풍자), 카이사르의 긴 손(청년 쿠리오, 호민관 안토니우스),
원로원 최종 권고(기원전 49년, 갈리아 총독 카이사르 귀국명령),
루비콘강 앞에서 (부장 라비에누스의 거취문제,폼페이우스의 클리엔테스 관계),
주사위는 던져졌다! (기원전 49년, 50세)
<책속으로>
카이사르는 여러 가지 조치를 한꺼번에 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붉은 깃발을 내거는 일. 이것은 무기를 놓아둔 곳으로 달려가 무기를 들라고 병사들에게 명령하기 위해서다.
집합 나팔을 부는 일. 이것은 진영 설치 작업에 종사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작업을 중단하고 집합할 것을 명령하고, 진영 설치에 필요한 자재를 모으러 간 병사들도 불러들이기 위해서다. 게다가 대열을 갖추도록 하기 위한 나팔도 불 필요가 있었고, 병사들을 독려하는 연설도 필요했고, 전투 개시를 알리는 나팔도 불어야 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적의 기습을 받았을 때는 이런 일이 대부분 불가능해진다. 카이사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일에 집착하지 않았다--- pp. 257-258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다음 다섯 가지다. 지성, 설득력, 지구력, 자제력, 지속적인 의지. 카이사르만이 이 모든 자질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 이탈리아의 일반 고등학교에서 쓰이고 있는 역사 교과서--- 머리말 중에서
주사위는 던져졌다.--- p.507
인상깊었던 구절은..당연히 루비콘강을 건널때가 아닌가 싶다. 4권을 마무리 지으면서.. 카이사르의 역사에서 제일 큰 변화를 만든 것이 이 루비콘강의 도하니깐... 카이사르는 가까이에 있는 참모들에게 말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중략)' 그리고 병사들에게 말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 강을 건너면 인간 세계가 비참해지고, 건너지 않으면 내가 파멸한다.'
'나아가자, 신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우리의 명예를 더럽힌 적이 기다리는 곳으로. 주사위는 던져졌다!'
병사들도 일제히 우렁찬 함성으로 응답했다. 그리고는 앞장서서 말을 달리는 카이사르를 따라, 한 덩어리가 되어 루비콘 강을 건넜다.--- p.508
누군가에게 일을 맡겨야 할 경우,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아주 자세한 지침을 주고 맡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임무는 주더라도 자세한 지침까지는 주지 않고 그 사람에게 일임해버리는 사람이 있다. 상대를 전적으로 신뢰하느냐의 여부는 거의 관계가 없다. 전자는 자세한 지시를 받아야 일하기 쉬운 사람이고, 후자는 그 반대일 뿐이다. 카이사르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후자를 택한 경우는 도박이니까, 잘 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런 경우에는 일을 맡긴 사람이 뒤처리를 해야한다.
잘 되지 않은 경우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모든 일이 잘 되지 않을 수도 있고, 어떤 것은 잘되었지만, 다른 일은 잘 되지 않은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뒤처리도 당장 해해야 하느냐, 아니면 당분간은 그대로 방치해두어도 되느냐를 판단해야 한다.--- p.234
결혼
마리우스의 후계자를 자처하고 있던 킨나는 오리엔트에서 술라가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언젠가는 귀국할 술라에 대한 대책을 확립해 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민중의 박수를 받은 정책을 많이 입법화했기 때문에 민중의 지지에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데모크라티아의 어원대로 '다수파의 독재'였던 지난 3년 동안..--- p.48
로마인 이야기 5권_ 율리우스 카이사르 하
사진_ 율리우스 카이사르,
“사람은 누구나 모든 현실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현실밖에 보지 않는다.”
카이사르의 죽음(나폴리 카포디몬테 미술관)
카이사르 포럼
<목차>
5. 원숙기(기원전 49년~44년 3월. 카이사르 50세~55세)
루비콘 직후 (33세 안토니우스)/ 폼페이우스 수도를 포기하다/ 코르피니오 입성(제8군단)/
폼페이우스 본국을 포기하다/ 대전략/ 키케로 대책/ 수도 로마(내정 레피두스)/
서쪽을 치다(에스파냐 원정)/ 마르세유 공방전/
에스파냐 전쟁/ 파업(제9군단, 10분의1형, 종군거부-한니발과 술라)
카이사르 집정관이 되다/ 화폐(선전매체로 활용, 로마인이 최초, 로마인은 법의 민족)/ 그리스를 향하여(안토니우스 2진도착)/ 디라키움 공방전(포위망,치열한 전투,철수,유인작전)/
파르살로스 평원 결전
역사상 유명 전투.회전
(이수스 평원, 기원전 333년, 알렉산드로스 그리스(마케도니아식 중무장 보병)와 페르시아의 회전
칸나이 평원, 기원전 216년, 한니발 5만대 로마군 8만
자마 평원, 기원전 202년, 로마의 스키피오와 한니발
파르살로스 회전, 기원전 48년, 카이사르 2만대 폼페이우스 5만, 기병의 기동성 활용)
카이사르 중무장 보병(3열 횡대, 하스탈리, 프린키페스, 트리알리)
이집트 알레산드이아로 폼페이우스 퇴각/ 클레오파트라(절대왕정, 알렉산드로스의 장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알렉산드리아 전쟁(헬레니즘 문화의 본산, 알렉산드로스도서관 40만권의 장서 불타)/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유대인 환영, 폰투스 파르나케스, 말보로 담배_ VENI, VIDI, VICI 라틴어)/
카이사르와 키케로/ 아프리카 전쟁/ 타프수스 회전(기원전 46년,메텔루스 스키피오군)/
개선식(갈리아, 이집트, 폰투스, 누미디아의 승리)/ 국가 개조/ 달력 개정(율리우스력, 태양력, 365일 6시간, 서기 158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 그레고리우스력, 365일 5시간 48분 46초)
/ 통화개혁/ 문다 회전(기원전 45년, 품페이우스의 마지막 저항 분쇄)/ 제국의 가는 길/ 시민권 문제/ 정치개혁/
해방노예 등용/ 속주 통치
최고의 신 유피테르, 아내 유노, 미네르바 여신을 로마의 주신으로 정함(그리스의 제우스,헤라,아테나)/
인간의 행동원칙을 바로잡는 역할을 유대인은 종교, 그리스인은 철학, 로마인은 법률에/
카이사르의 생각은 600년 후 동로마 제국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의 <로마법 대전>으로 실현/
수도 재개발/ 카이사르 포럼/ 제5월(퀸틸리스, 카이사르가 태어 난 달,율리우스, 줄라이 July)/
기원전 44년, 파르티아 원정 발표
6. 3월15일 (기원전 44년 3월 15일~42년 10월)
암살자 14명(마르쿠스 브루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3.15의 실질적인 주모자) 리갈리우스…툴리우스 킴브로,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 데키우스 브루투스(“부르투스! 너마저~”의 주인공)..),/
타협/ 옥타비아누스 후계자, 아그리파/ 안토니우스 탄핵(필리포스 탄핵)/ 복수/
제2차 삼두정치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옥타비아누스)/ 살생부, 키케로의 죽음/ 신격 카이사르/ 브루투스의 죽음/
7.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대 옥타비아누스
제일인자 안토니우스, /
브린디시 협정(삼두정치, 동부는 안토니우스가 서부는 옥타비아누스가 남부 아프리카는 레피두스가 분담)/
미세노 협정(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섹스투스 품페이우스 삼자협약)/ 리바아 결혼/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결혼/ 파르티아 원정(안토니우스) 실패/
악티움 해전(안토니우스의 세력권이었던 로마세계의 동부가 옥타비아누스의 세력권으로 바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멸망(클레오파트라 자살)
로마인 이야기 6권_ 팍스로마나
사진_ 로마의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의 아내 리비아
아우구스투스의 “평화의 재단”
마르켈루스극장
균형감각이란 서로 모순되는 양극단의 중간점에 자리를 잡는 것은 아니다. 양극단의 사이를 되풀이하여 오락가락하고, 때로는 한쪽 극단에 가까이 접근하기도 하면서, 문제해결에 가장 적합한 한 점을 찾아내는 영원한 이동행위이다.
시오노 나나미
<목차>
제1장 통치 전기 (기원전 29년~ 19년, 아우구스투스 34세~44세)
젊은 최고 권력자 / 군비 삭감 / 국세조사 / 영묘 건설(훗날 “황제묘) / 정보 공개 / 원로원 '재편성'(600명으로) /
공화정 복귀 선언 (집정관,호민관,프리켑스 유지) /
옥타비아누스의 정식명칭은 ”임페라토르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 이미지 작전 / 작가가 본 아우구스투스, 심모원려 / '내각' 창설 / 속주 통치의 기본방침 (원로원 속주와 황제 속주) / '안전보장' /
서방 재편성 / '국세청' 창설 / '행운의 아라비아' /
'호민관 특권'(신변 불가침권, 거부권(베토), 평민집회 소집권,정책입안권)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임페라토르+호민관 특권(트리부니키아 포테스타스) / 화폐개혁 / 선거제도 개혁 / 로마 시대의 '노멘클라투라' / 핏줄에 대한 집착 / '식량 안보' /
동방 재편성 (아그리파)/ 유대 문제, 일신교와 선민의식이 결부되면 폭발이 일어난다. /
파르티아 문제 / 이집트(관개공사와 가로망 정비,농업 생산성 비약, 정교분리) /
수도 로마로 돌아오다
제2장 통치 중기 (기원전 18년~기원전 6년, 아우구스투스 45세~57세)
자식을 적게 낳으려는 풍조에 대한 대책 / 신앙심 / 알프스(주요루트 4개) / 도나우 강 / '평화의 제단' / 군대 재편성 / 종합 전략(수비전략) / 근위대 창설 / 세제개혁 /
아그리파(군사전담) / 마이케나스 (외교전담, 문화예술 옹호 하는 것을 “마이케나스” 프랑스어로 “메세나”) /
게르만족 (방어선이 라인강에서 엘베강으로 바뀜, 티베리우스 & 드루수스) /
행정개혁 (모든 길은 로마에서 비롯한다는 편이 실정에)/
드루수스의 죽음 (로마인의 생사관_비종교적,비철학적, 인간이라는 표현 대신 “죽어야 할 자”로 표현, “오오, 거기 자나가는 길손이여. 이리 와서 잠시 쉬었다 가시게. 고개를 옆으로 흔들고 있군. 아니, 쉬고 싶지 않은가? 하지만 언젠가는 그대도 여기에 들어올 몸이라네” “이 글을 읽는 이에게 말하노라. 건강하고 남을 사랑하라. 그대가 여기에 들어올 때까지의 모든 날들을” 묘비 /
티베리우스의 은퇴 (게르마니아 전선에서 로도스섬으로)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자질_지성,설득력,지구력,자제력,불굴의 의지..카이사르만이 이 모든 자질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제3장 통치 후기 (기원전 5년~서기 14년, 아우구스투스 58세~77세)
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딸의 추문(외동딸 율리아 불륜,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를 총재로 소년단 창설(유벤투스)) / '국가의 아버지' (원로원 부여), 예수 탄생, 로마에 기독교 보급에 300년?/
티베리우스의 복귀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게르마니쿠스를 양자로) / 반란(판노니아와 달마티아) /
가족의 불상사 / 시인 오비디우스 / '숲은 게르만의 어머니'(아르미니우스, 게르마니아 중부에서 3만5천명 전멸) /
죽음 (나폴리)
<책속으로>
아우구스투스는 누구한테나 마음을 여는 사람이 아니었다. 상황이 괴롭든 즐겁든 관계없이 항상 주위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던 카이사르의 그 밝고 쾌활한 성격은 주면 사람들까지 끌어들여 분위기를 명랑하게 만들었다. 그런 카이사르와는 반대로 아우구스투스의 주변에는 언제나 정적이 흐르고, 사람들음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그를 지켜보곤 했다. 그것이 아우구스투스의 대인관계였다. 카이사르가 사람들을 감동으로 끌어들인다면, 아우구스투스는 사람들을 감탄으로 가득 채웠다.--- p.292
당신 덕택입니다. 우리의 생활이 이루어지는 것도.
당신 덕택입니다. 우리가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는 것도.
당신 덕택입니다. 우리가 자유롭게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이 예기치 않았던 찬사는 늙은 아우구스투스를 진심으로 행복하게 해주었다. 그는 그 사람들에게 1인당 금화 40닢을 주라고 지시했다. 다만 그 금화의 사용처에 조건을 달았다. 그 돈으로 이집트 물산을 구입하여 다른 곳에 팔라는 것였다. 늙어서도 아우구스투스는 여전히 현실적인 남자였다. 물산이 자유롭게 유통되어야만 제국 전체의 경제력도 향상되고 생활 수준도 높아진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팍스였다.--- p.379
공화주의자인 역사가 타키투스조차도 신에 버금가는 재능이라고 칭찬한 사람이 카이사르이다. 후세의 역사가 몸젠도 카이사르를 로마가 낳은 유일한 창조적 천재로 평가했다. 아우구스투스는 표지판이 세워진 곳에 확실하고 오래가는 제국을 쌓아올린 점에서는 천재였다. 그러나 표지판을 세운 사람은 카이사르였다. 창조성이 있어야만 진정한 지성이라는 사고방식을 택한다면, 아우구스투스에게 줄 수 있는 점수는 80점이 적당하지 않을까.
문제는 '설득력'이다. 문장이나 연설로 자기 생각을 남에게 전달하고, 그것을 남에게 납득시키는 능력이다. 무엇을 전달하느냐 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전달하느냐 도 중요하다. 이 두 가지가 더해져야만 비로서 남을 설득할 수 있다. 이 면에서는 아우구스투스에게 몇 점을 주는 것이 타당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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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위대한 카이사르는 21세기에도 살아있다.
주사위는 던저졌다는 견탄력과
사람들은 모든 현실을 볼 수 있는게 아니다. 자기가 보고싶어하는
현실만을 볼뿐이다.의 세상을 보는 혜안에서
위대한 영웅의 일부분을 잠시 느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