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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共同體의 백결선생, 조강지처糟糠之妻의 강수
《삼국사기》 〈열전〉 중 ‘백결선생’ 전문
백결 선생은 어디 사람인지 알 수 없다. 그는 낭산 밑에 살았는데 매우 가난하였다. 백百 군데나 기워結 마치 메추라기를 매달아 놓은 듯한 옷을 입고 다녔기 때문에 ‘백결百結선생’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즐겁고 화나고 슬프고 기쁜 일과 불평을 모두 거문고로 풀었다.
한 해가 저물 무렵 이웃에서 곡식 찧는 방아소리를 듣고 백결선생의 아내가 중얼거렸다.
“남들은 모두 찧을 곡식이 있는데 우리는 곡식이 없으니 무엇으로 설을 쇠리오?”
백결 선생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말했다.
“무릇 죽고 사는 것에는 운명이 있고, 부귀는 하늘에 달려 있는 까닭에 그것이 와도 막을 수 없고 그것이 가도 좇을 수 없는데 어찌 그대는 그것으로 마음아파 하는가? 내가 그대를 위하여吾爲汝 방아소리를 내어 위로를 해드리리다.”
백결선생이 거문고를 타서 방아소리를 내었다. 이 노래가 세상에 전하니 ‘대악’이라 한다.
[내 생각] 설 쇨 준비를 할 수 없는 백결선생은 그 때문에 마음이 아픈 아내를 바라보며 ‘내吾가 그대汝를 위爲하여’ 방아소리를 내겠노라 말합니다. 삼국사기에 적혀 있는 내용이 간략하여, 부인이 백결선생의 거문고 방아소리를 듣고 속상한 마음을 풀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추측해 볼 때, 남편의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부인은 마음의 위로를 받았을 듯합니다. 해마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었을 텐데, 만약 부인이 남편의 거문고 소리에 오히려 짜증을 내었다면 김부식이 이 일을 《삼국사기》에 게재했을 리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백결선생의 전기는 읽는 사람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우선 백결선생이 대단한 음악가라는 사실을 알게 해줍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독자들의 마음이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설을 앞둔 가난한 예술가 부부의 어려운 처지가 가슴을 더욱 아프게 흔듭니다.
아내에게 현실적인 보탬이 되지 못하는 백결선생이 거문고 소리를 내어서라도 그 마음을 위로하겠다는 장면 또한 참으로 애틋합니다. 아내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남편의 심정이 눈물겨운 대목입니다. 기록에는 없지만, 아마도 백결선생의 집에서 울려나오는 방아소리를 듣고 이웃사람들이 몰려왔을 것입니다. 저 가난한 집 에서 웬일로 방아를 다 찧을까?
가 보니 방아 찧는 소리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백결선생의 거문고 소리를 들으면서, 그리고 미소를 머금거나 아니면 눈물짓고 있는 선생의 아내를 바라보면서 모두들 감동에 젖었을 것입니다. 선생은 거문고 소리로 아내의 마음을 달래고, 마을사람들은 훌륭하고 애틋한 연주를 들은 답례로 곡식을 내놓고 … 틀림없이 일은 그렇게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작은 것이라도 내놓으려고 애쓰는 사람, 우리도 그런 마음가짐을 가져야겠습니다. 공동체共同體는 그렇게 하여 점점 아름다워지는 법이니까요.
《삼국사기》 〈열전〉 중 ‘강수’ 일부
강수는 신문왕(681∼692) 때 세상을 떠났다. 강수의 아내가 먹을 것이 없어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다. 신문왕이 소식을 듣고 벼 백 섬을 주었지만 그녀는,
“오랜 세월 남편에 의지하여 나라의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홀몸이 된 지금 어찌 또 후한 은혜를 받겠습니까?”
하면서 그것을 받지 않고 맨몸으로 귀향하였다不受而歸.
일찍이 강수는 총각 시절 대장간집 딸인 그녀와 연애를 했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고을 안에서 용 모와 행실이 뛰어난 처녀를 중매하여 결혼시키려 하자 강수가 거절했다.
“장가를 두 번 갈 수는 없습니다.”
화가 난 아버지가 아들을 꾸짖었다.
“너는 이미 나라 안에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그런 미천한 여자를 배필로 삼겠다니 부끄럽지도 않느냐?”
강수가 아버지에게 두 번 절하고 대답했다.
“가난하고 낮은 신분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도를 배웠으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실로 부끄러운 일입니다學道不行誠所羞.”
그러면서 강수는 덧붙였다.
“조강지처는 버리지 아니하고糟糠之妻不下堂 어렵게 살 때 사귄 벗은 잊어서 안 된다貧賤之交不可忘고 배웠습니다. 미천한 신분이라 하여 아내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
[내 생각] 곡식으로 술을 빚으면 술을 걸러내고 난 뒤 찌꺼기가 남습니다. 이를 지게미라 하는데, 한자로 조糟입니다. 벼나 보리 등을 찧으면 쌀, 보리쌀이 나오고 껍질인 겨가 남는데, 한자로 강糠입니다. 불不은 ‘안 된다’는 뜻이고, 하당下堂은 ‘집堂에서 길로 내려놓다下’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조강지처불하당糟糠之妻不下堂은 지게미槽와 겨糠를 먹으며 함께 가난하게 살았던 아내妻를 뒷날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을 때 집堂에서 내쫓아서는下 안 된다不는 가르침입니다.
빈貧은 가난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현진건(1900∼1943)의 소설 제목 <빈처貧妻>는 ‘가난한貧 아내妻’입니다. 천賤은 신분이 낮다는 뜻입니다. “직업에 귀천貴賤 없다” 등에 쓰이는 한자입니다. 불가不可는 ‘가능하지 않다’, 망忘은 ‘잊다’입니다. “나를 잊지忘 마시오勿”라는 꽃말을 가진 물망초勿忘草에 쓰이는 한자입니다. 따라서 빈천지교불가망貧賤之交不可忘은 가난하고貧 신분이 낮을賤 때 우정을 나누었던交 친구를 나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졌다고 해서 잊어서는忘 안 된다不可는 가르침입니다.
강수는 ‘조강지처불하당糟糠之妻不下堂 빈천지교불가망貧賤之交不可忘’의 가르침을 스승으로부터, 또 책에서 배웠습니다. 인간의 도리를 배웠으면서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강수는 생각했고, 또한 배운 대로 실천하였습니다. 훌륭한 스승과 양서로부터 배운 그대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 그런 사람이 많으면 사회는 저절로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내 생각] 남편이 죽자 강수의 아내는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지어서 생계를 유지하려 합니다. 신문왕이 강수의 아내가 먹을 것이 없어 귀歸향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벼 백 석을 줍니다. 하지만 그녀는 받지受 않습니다不. 평생 남편 덕분에 잘 살았는데 어찌 혼자 된 몸으로 또 나라의 재산을 축내겠느냐는 것이 그녀의 생각입니다.
강수가 아버지의 권유를 따르지 않고 대장간집 딸인 첫사랑을 끝까지 지켜낸 까닭이 충분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강수의 인격이 훌륭해서이기도 했겠지만, 이런 아내를 버리고 어찌 강수가 다른 여자와 결혼할 수 있었겠습니까? 다만 안타까운 것은 강수가 일찍 죽어 아내와 백년해로百年偕老를 다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백년해로, 부부가 둘 다 백년百年까지 살아 함께偕 늙어간다老는 뜻입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 남편과 아내 사이에 영원한 이별은 정말 슬픈 일이지요.
물론 벗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대가야를 멸망시키는 데에 선봉장 역할을 했던 화랑 사다함은 죽을 때까지 우정을 지키자고 맹세했던 친구 금관랑이 병으로 죽자 충격을 받고 앓다가 일 주일만에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때(564년) 사다함의 나이, 불과 17세였습니다.
김부식은 ‘문장은 강수, 제문, 수진, 양도, 풍훈, 골번이다’라는 기록이 《신라 고기新羅古記》라는 책에 전한다면서, 그러나 강수 이외의 ‘제문 이하의 사람들은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전기를 쓸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신라 최고의 문장가 강수! 그는 가난하고 미천한 집 딸과 부부로 살아가는 약속을 지킴으로써 글만 최고가 아니라 인격도 최고임을 멋지게 증명하였습니다.
[내 생각] 사람답게 사는 길道을 배운學 사람이 아는 것을 실행行하지 않으면不 그것이야말로 정말誠 부끄러운羞 일所입니다. 그래서 조선 시대의 선비들은 언행일치言行一致를 최고의 덕목으로 여겼습니다. 말言과 행行동이 하나一로 같아야致 한다는 것입니다.
새 나라의 왕 이성계를 섬기지 않은 이색(1328∼1396) 등 고려 충신, 오늘날의 대한민국 국경을 개척한 김종서(1383∼1453)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을 인정하지 않다가 처형당한 성삼문(1418∼1456) 등 사육신, 왜적에 대항하여 싸우다 부자가 모두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고경명(1533∼1592) 등 임진왜란 의병들, 재산을 다 팔아 군자금을 마련한 후 가족 전체가 만주로 건너가 항일 전선에 뛰어드는 이상룡(1858∼1932) 등 독립운동가들 … 이들은 모두 ‘배운 것을 실천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정말 부끄러운 일’이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보여준 위대한 인물들이었습니다.
《삼국사기》 〈열전〉 중 ‘강수’ 일부
신라 사람 석체의 아내가 머리에 뿔이 돋은 사람 꿈을 꾸었다. 그 후 머리 뒤에 뼈가 불거져 있는 아기를 낳았다. 아이가 장성하여 글을 읽는 데 통달하게 되자 아버지가 물었다.
“너는 불교를 공부하려느냐, 유학을 공부하려느냐?”
아이가 대답했다.
“불교는 세상 밖의 종교라고 들었습니다. 저는 세속에 사는 사람이므로 유학을 배우고 싶습니다.”
아버지가 말했다.
“네가 좋아하는 대로 하여라從爾所好.”
뒷날 무열왕(654∼661)이 당나라 황제가 보내온 문서를 해석하는 데 어려움을 겪던 중 ‘석체의 아들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렀다. 처음 만난 청년이 한번 보고 막힘없이 풀이하자 무열왕은 크게 기뻐하며 고향과 이름을 묻고는,
“머리뼈를 보니 ‘강수强首 선생’이라 할 만하오.”
하고 말했다. 예로부터 선생先生은 최고의 존칭이었다. 실 제로 무열왕은 그 이후 결코 강수의 이름을 부르는 법 없이不稱名 “임생”이라고만 불렀다言任生. ‘임나 출신 선생’이라는 뜻이었다.
그 후 모든 신라인들이 그를 “강수 선생”이라 부르게 되었다.
(무열왕 다음 임금인) 문무왕(661∼681)도,
“선왕先王께서 무력으로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하셨지만 문장을 자기의 임무로 삼아 우리 뜻을 중국에 잘 전달해 낸 강수의 공文章之助 强首之功을 어찌 소홀히 여기겠는가!”
하며 강수의 벼슬을 높여주었다.
[내 생각] 아버지는 강수에게 “네爾가 좋아하는好 바所를 따르라從.”고 합니다. 자녀 스스로 장래의 길을 선택하라는 뜻입니다. 이미 신라 시대에 이렇게 적성과 소질, 본인의 의사 등을 중시한 수준 높은 자녀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강수 부자와 비슷한 사례는 아버지 원효와 아들 설총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 원효는 신라가 낳은 세계적 고승입니다. 원효는 결혼하지 않아야 하는 승려이면서도 요석 공주와 부부가 되어 아들 설총을 낳습니다. 하지만 설총은 승려가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거꾸로 유학자가 됩니다. 원효 역시 아들에게 “네가 좋아하는 바를 따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강수와 설총만이 아닙니다. 신라의 화랑들은 틀에 갇힌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연을 벗 삼아 마음과 몸을 키웠습니다. 그래서 신라의 화랑 교육은 학교 건물 없이 이루어졌습니다. 《삼국사기》 〈열전〉 중 ‘김흠운’ 부분은 화랑들이 ‘산수를 찾아 즐겨 아무리 먼 데라도 갔으며 도의로 서로를 가다듬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단체 생활과 국토 체험 교육으로 공동체 의식과 건강한 심신을 연마한 화랑들은 세 나라 중 가장 약했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내 생각] 무열왕은 강수를 대할 때 그의 이름名을 부르지稱 않고不 항상 “임생任生”이라 말言했습니다. 그만큼 인재를 존중한 것입니다. 요즘도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 하여 사람人을 그의 능력에 맞게 배치하는 일事이 모든萬 일事의 근본이라고 합니다. 지금부터 무려 1,400여 년 전이었는데 무열왕은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지도자가 되려는 꿈을 가진 사람은 이렇게 남을 존중하고, 그의 능력을 인정할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내 생각] 문무왕은 삼국 통일의 위업 달성이 군사력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외교 문서 등 글文章을 훌륭하게 써서 중국 등 다른 나라들을 설득한 강수의 도움助이 큰 공功이 되었다고 고마워합니다. 실제로 국가는 누구 한 사람의, 어떤 한 분야의 힘만으로 발전해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국민의 총체적 힘이 바로 국력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나당연합군으로 백제에 왔던 소정방이 일찍이 말한 바 있습니다. 《삼국사기》 〈열전〉 중 ‘김유신’에 보면 소정방은 “왜 내친 김에 신라까지 정벌하지 않았느냐?”는 당 태종의 질문에 “군인애민君仁愛民 신충사국臣忠事國 하인사기상여부형下人事其上如父兄 불가모不可謀.”라고 대답합니다. 신라는 왕君이 어질어仁 백성民을 사랑하고愛, 신臣하들은 충忠성으로 나라國를 섬기며事, 아랫下사람人은 윗上사람을 아버지父와 형兄처럼 받드니事 나라가 작아도 도모謀하기는 불가不可능하다는 뜻입니다. 모두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진심과 최선을 다하는 나라는 비록 조그마하다 해도 국력만큼은 결코 약하지 않다는 사실을 당나라 장수 소정방도 익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경덕왕(742∼765) 때의 승려이자 화랑인 충담사가 남긴 향가 <안민가安民歌>는 이 점에 대해 더욱 논리적으로 말해줍니다. 경덕왕이 “백성民들이 편안安하게 살 수 있는 길을 말해주는 노래歌를 지어 달라.”고 하자 충담사는 ‘임금이 임금답게, 신하가 신하답게, 백성이 백성답게 산다면 나라가 태평하리라’는 요지의 <안민가>를 지어 바칩니다. 충담사는 나라의 모든 구성원들이 각자 자신이 맡은 분야에서 제몫을 다하면 살기 좋은 세상이 온다는 진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무슨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어야 마땅한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