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궁 [迷宮]
2-1. 이상한 나라의 기묘한 세상
그녀는 닥터 화이트와 통화를 마치고, 월차를 내기 위하여 회사에 연락하였다. 팀 매니저가 사전에 상의도 없이 갑자기 월차를 내는 건 곤란하다며 짜증을 내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회식 때마다 추근거리는 (그녀야 말로 짜증나는) 매니저였다. 평상시에도 그녀를 바라볼 때마다 위 아래로 훑어보는 못된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저런 (변태적 성향이 느껴지는) 상사 밑에서 하루 하루 일해야만 한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욕의 나날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오래 근무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구인 수요가 가장 많은 대리 직급의 경력 있는 사원이었고, 회사는 장기적으로 근무하기에 너무나 비전이 보이지 않았다. 언제고 사직서를 제출할 용의가 있었다. 그리고 만약 그날이 온다면 망할 매니저의 못된 버릇을 단단히 손 봐주고 말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신축 한지 3년이 채 안되는 4층짜리 계단식 빌라에 살고 있었다. 2년전 굉장히 저렴하게 3층으로 이사 와 이제껏 별 불편함 없이 살고 있었다. 직장 근처의 집을 알아보러 부동산 여기 저기를 돌아 다니던 중 혼자 사는 여성이면 굉장히 싸게 살수 있는 곳이 있다며 특별히 소개 받은 곳 이었다. 주인이 홀로 4층에 살며 창의적인 작업을 하다 보니 조용한 세입자를 받고 싶다는 이유였다.
주인은 43세의 중년 남성 이었지만, 실제로 (계약하며) 처음 대면했을 때에는 30대 초반으로 짐작이 될 정도로 매우 동안의 얼굴이었다. 키는 그녀보다 조금 더 큰 정도였고 (그녀의 키는 167cm) 체형이 여리 하여 중년 남자의 똥배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피부도 관리가 잘 되어서 계약서를 쓸 때 집주인의 손을 보고 여느 여성들 이상으로 피부가 고와 그녀가 (속으로) 감탄할 정도였다. 한 마디로 어딘지 모르게 여성스러운 데가 있는 43세의 중년 남성이다 고 말할 수 있었다.
계약 내용에 외부인과 방문객을 들여서는 안된다는 다소 억지스러운 조건이 붙어있기는 하였지만, 주변 시세의 반값 정도 밖에 안되는 금액에 (홀라당 넘어가)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계약 하였다. 막상 이사하고 보니 신축 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빌라여서 마치 새집에 입주한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만한 조건이면 상당히 괜찮은 거래였다. 고 그녀는 만족해 하였다.
또한 이상적이게도 집주인은 매우 친절하였다. 이사 때부터 직접 방문하여 주변 상가며 관공서 위치 등 각종 동네 정보를 상세히 알려 주었고, 여성 혼자 하기 힘든 일이라며 이삿짐센터 사람들을 직접 독려하여 짐 정리 하는 것을 도와 주었다. 그 이후로도 집에 문제가 생기면 (신축이라고 문제가 없지는 않았다.) 언제고 귀찮아 하거나 싫은 내색 하나 없이 신속 깔끔하게 해결해 주었고, 혼자 살다 보니 음식이 많이 남는다며 여러가지 값비싼 음식을 가져다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답례는 일절 거절하였다. 그것이 처음엔 부담스러워 (체면상) 사양도 해 보았으나 (고급 진 음식을) 점점 받아 먹는게 익숙해 지면서 가끔은 기다려 지기까지 할 때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희한하게도 집주인이 음식을 가져다 줄 때는 마침 집에 먹을 것이 떨어져 있을 때가 많았다. 왠지 홍반장과 같은 주인이다 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 날도 집을 나서다 계단에서 집주인과 마주 쳤다. 집주인은 친근하게 다혜씨 안녕 하고 인사하였다. 그리고 편의점 봉투에서 막 사온 듯한 냉장 커피 몇 개를 꺼내 주며 말했다.
“다혜씨 알어? 우리 동네에 바바리맨이 있데. 다혜씨도 조심해.”
“바바리맨이요? 처음 듣는데요.”
“이른 새벽에 저기 저 골목길 알지? 저 안쪽에 숨어서 대기하고 있다가 여자가 지나가면 바바리를 훌쩍... 알지? 조심해.”
“으윽... 정말 싫다.”
“근데 오늘 새벽에 용감한 한 아줌마가 가방에서 가위를 꺼내들고 막 쫒아 가는 바람에 바바리맨이 식겁해서 도망쳤다 더라구. 어쩌면 다시는 안 나타날지도... 아무튼 다혜씨도 조심해.”
“와~ 그 아줌마는 전생에 용사였 나 보네요.”
“그 아줌마 차밍 미용실 주인 아줌마래. 마침 가방에 잘 갈아 논 미용 가위가 있었다 나봐. 서슬 퍼런 가위 들고 니 부랄 맛 좀 보자며 막 쫒아 가는 데야 바바리도 뭐 어쩔 수 없었겠지. 조금 전 편의점 사장이 말해 주더라고. 다혜씨도 편의점 사장한테 직접 들었어야 했는데. 모션까지 써가며 무지 웃기게 이야기해 주더라고.”
집주인 아저씨와 헤어지고 다혜는 1층 주차장으로 내려가 자동차에 탔다. 1년전에 나름 큰맘 먹고 32개월 할부로 구입한 구리 빛 소형차 였다. 다혜의 생애 첫 자동차 였다. 애칭은 구리 라고 지었다. 커피는 집주인 아저씨한테 받았고 간단히 먹을 것을 좀 챙겨 가야겠다 고 생각하며 다혜는 구리를 몰고 집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편의점에 들어서자 편의점 사장이 좀 전에 집 주인에게 들었던 바바리맨 이야기를 여럿 되는 손님들 앞에서 과장되게 떠벌리고 있었다. 다혜는 간단하게 포장 샐러드와 샌드위치를 골랐다. 카운터에서 계산하고 편의점을 나설 때 까지도 편의점 주인은 바바리맨 고추는 번데기 고추 였다는 둥 돋보기로 봐야 보였을 거라는 둥 시답지않은 말을 여전히 떠벌리고 있었다. 아마도 오늘 하루 쥔 종일 저럴 것이다 고 다혜는 생각하였다.
닥터 화이트와 만나기로 한곳은 한적한 교외의 외진 곳 이었다. 네비게이션에는 도착까지 2시간 38분 소요 예정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닥터 화이트와 통화할 당시에는 거리가 멀어 망설였지만, 답답한 마음에 기분이라도 전환해 볼 겸 일단 떠나 보기로 결정하였다. 가는 도중이라도 언제든 마음이 바뀌면 그냥 되돌아 오자 고 다짐한 기약 없는 출발이었다.
약 한 달 정도 이곳에 머물 계획입니다. 언제든 생각이 바뀌면 찾아오세요. 라고 닥터 화이트는 말했다. 지금이라도 전화를 해 두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잠시 잠깐 고민하였지만 언제 또다시 마음이 바뀔지 몰라서 그냥 도착해서 하는 걸로 하자 고 결정하였다.
구리를 몰고 번잡한 시내를 벗어나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지나고 교외로 접어들자 도로 위 차량이 많이 줄어 있었다. 다혜는 과감히 엑셀을 밟으며 추월차선으로 진입하였다. 속도계가 120을 지나 130에 접어들자 소형차의 한계치가 느껴졌다. 차체가 불안하게 흔들리며 엔진에도 무리가 느껴졌다. 왠지 구리가 몸살을 앓으며 다혜야 이제 그만 좀 하지 하고 외치는 것 같았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국도로 접어들자 도로에 차량이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차량의 속도를 줄이며 에어컨을 끄고 운전석 창문을 내렸다. 한여름의 후덥지근한 바람이 차량 안으로 불어 들었다. 불쾌지수가 느껴지는 바람결이었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방구석에 쳐 박혀 있는 것에 비한다면) 한결 싱그러워 졌다. 그대로 창문을 내린 채 30분정도 달리자 어느덧 차선이 없는 1차로의 산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산림이 울창한 산길에는 나무줄기가 도로 위를 온통 애워싸고 있었다. 하늘을 가릴 만큼 나무 줄기에 나뭇잎이 풍성히 자라 있었고, 그 사이로 간간이 햇살이 비쳐 들 때면 마치 티브이 자동차 광고의 한 장면 속으로 빠져 들 어 가는 것만 같았다.
외길이라 무작정 달리다 보니 어디쯤에 선가부터 네비게이션에도 없는 길을 달리고 있었다. 지나는 차량도 한참 동안이나 마주치지 못했다. 도로 한편 공간에 자동차를 세우고 차에서 내렸다. 햇살도 들지 않는 그늘진 산속이었다. 낯 설은 풀 벌래 소리와 이름 모를 새소리만이 들려오고 있었다. 어쩐지 길을 잃고 헤매 이다 어딘지 모를 외딴곳에 홀로 남겨져 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공기도 바뀌어 있는 것 같았다. 한 여름 치고는 선들바람이 제법 쌀쌀하게 느껴졌다. 닥터 화이트가 (전화 통화 중) 말했었다.
오시면 아시겠지만 이 곳은 더위를 피해서 휴양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입니다. 한 여름에도 긴 소매의 옷을 입고 다녀야 할 정도이니까요. 오시게 된다면 꼭 챙겨 오시기 바랍니다.
설마... 했던 마음에 새까맣게 까먹고 있었다 고 생각하였다. 다혜는 이대로 계속 갈 것인가 아니면 이쯤에서 그만 돌아갈 것인가 고민하였다. 순간 한차례 돌풍이 거세게 불어오며 나뭇잎들의 떨리는 소리가 으스스하게 들려왔다. 다혜는 오한 기를 느끼며 다시 차량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한번 네비게이션을 확인해 보았다. 비록 도로의 표시는 없었지만 목적지는 확실하게 찍혀 있었다. 한 15분 정도만 더 가면 도착할 것 같았다. 외길이다 보니 이대로 그냥 쭈욱 달리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길을 잃을 염려는 되지 않았다. 운전대에 머리를 기대며 다혜는 말했다.
구리야 가야 하니? 말아야 하니?
물론, 그 어떤 대답을 기대하고 말을 한 건 아니었다. 그저 습관적인 혼잣말 이었다. 잠시 후 다혜는 가다가 양 갈래의 길이 나오면 그냥 집으로 되 돌아가는 것으로 하자 고 결심하며 차량의 시동을 켰다. 또 다시 엔진소리가 힘차게 울리며 어디선가 구리가 말했다.
이대로 계속 간다면….
아마도 다혜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될 거야.
당연하게도 그 소리는 다혜에게 들리지 않았다.
구리 또한 더 이상 멈추는 일 없이 신나게 앞을 향해 달려 나갔다.
물론, 도착지는 이상한 나라의 기묘한 세상 이었다
첫댓글 다혜와구리가 외곽으로 닥터화이트를 만나러가는장면 잘보았습니다
소중한 댓글 감사합니다. 언제나 힘이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