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양이의 특별한 외출
안녕하세요? 저는 하양이라고 해요. 지난여름, 시장에서 예진이 엄마의 눈에 띄어 이곳에 온 원피스랍니다. 여름방학 때 예진이와 푸른 산과 들을 신나게 뛰어다니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행복하고 즐거워요. 여름이 지나고 종이 상자에 담겨 긴긴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괜찮아요. 이제 조금만 참으면 이 상자를 벗어나 예진이와 함께 이곳저곳을 다닐 수 있거든요.
상자 안에서 저와 함께한 친구들을 소개할게요. 형형색색의 꽃무늬가 수 놓인 분홍이는 외국에 사는 예진이 이모가 보낸 원피스예요. 비행기를 타고 바다 건너왔다며 자부심이 대단하지요. 그 옆에 있는 노랑이는 풍성한 레이스 장식이 달린 친구예요. 귀여운 예진이의 이미지에 딱이라 예진이 학교에서 인기가 아주 좋아요.
아, 유명 백화점에서 온 빨강이도 있어요. 예진이의 생일날 예진이 할머니가 선물하셨는데, 화사한 장미색에 반짝이는 구슬이 달려 있어 시선을 사로잡는 데다 허리의 리본 장식은 고급스러운 느낌까지 준답니다. 빨강이는 주로 특별한 날에 예진이와 외출을 하고는 해요.
그때마다 빨강이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지요.
"얘들아, 이렇게 특별 대우를 받는 건 내가 너희들과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야."
으스대는 빨강이를 분홍이와 노랑이는 못마땅해하지만 그래도 전 예진이를 돋보이게 하는 빨강이가 부러워요. 각자 개성이 강한 세 친구들과 달리 저는 하얀색에 장식이라고는 치마 밑단에 놓인 자수가 유일한 원피스거든요. 평범하지만 예진이가 시원하고 편하다며 저를 자주 입어주는 것만으로도 기뻐요.
"엄마! 엄마! 어디 계세요?"
예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엄마를 찾네요.
"아니, 예진아. 무슨 일 있니? 왜 그렇게 숨이 차도록 뛰어왔어?"
"엄마, 있잖아요. 저, 상 받는대요."
"상?"
"네, 예전에 제가 학원 가는 길에 가방을 주워서 경찰서에 갖다 준 적 있잖아요."
"그래. 그때 직원들 월급이 담긴 가방을 잃어버린 아저씨가 가방을 찾았다고 무척 기뻐했잖니."
"그 일로 제가 시민의 날에 어린이 선행상을 수상하게 되었대요."
"정말이니? 우리 예진이가 그런 큰 상을 받다니, 정말 대견한걸."
"그런데 상을 받는다니까 조금 쑥스러워요."
"어디 보자. 시민의 날이면 돌아오는 일요일인데, 시상식 때 입을 예진이 옷을 서둘러 준비해야겠구나."
"작년에 입었던 원피스 중에서 골라 입을게요."
"그럴래? 안 그래도 날이 더워져서 여름옷을 꺼내려고 했는데 잘됐네. 엄마랑 같이 골라보자."
우리가 있는 방으로 걸어오는 발소리에 제 가슴이 다 쿵쿵거려요.
"야호! 드디어 이 답답하고 어두운 상자에서 나가는구나."
친구들처럼 저도 여기에서 나가 예진이와 함께할 수 있는 게 기뻐요. 더구나 선행상을 받는다니 예진이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르겠어요.
마침내 종이 상자의 뚜껑이 열렸어요. 상자 안으로 밀려드는 눈부신 햇살과 상쾌한 공기.
와! 너무 반가워요. 오랜만에 보는 예진이는 더 예뻐졌네요.
"예진아, 시상식에 이 빨간 원피스를 입고 가는 건 어떠니?"
"음, 너무 화려해 보이지 않을까요?"
상자를 뒤지던 예진이가 노랑이를 꺼내 들었어요.
"엄마, 친구들은 이 노란 원피스가 저하고 잘 어울린대요."
"그렇긴 한데… 분홍색 원피스도 괜찮을 것 같구나. 하얀 원피스도 나름대로 깔끔하고."
예진이가 분홍이와 저를 차례로 몸에 대고 거울 앞에 섰어요.
"아!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며칠 시간이 있으니까 좀 더 생각해 보렴. 일단 엄마가 네 벌 다 세탁해 놓을게."
그날, 고급 원단인 빨강이는 세탁소에 맡겨졌어요. 다음 날, 저와 분홍이, 노랑이는 거품 목욕을 하게 되었지요. 오랜만에 목욕을 하니 상자 안에서 웅크리고 있느라 잔뜩 굳었던 몸이 사르르 녹는 듯했어요. 마지막으로 부드러운 섬유 유연제를 푼 물에 들어갔다 나오니 온몸에서 향기가 났어요.
예진이 엄마는 우리를 마당에 있는 빨랫줄에 널었어요. 오후 내내 산들바람에 몸을 맡기고 햇살을 한껏 받고 나면 우리의 여름맞이 준비는 끝이 난답니다.
어? 예진이 엄마가 세탁소에 간 빨강이를 데리고 오네요. 향긋한 냄새가 나는 우리와 달리 빨강이에게서는 머리 아픈 기름 냄새가 나요. 그 냄새를 날려 보내려고 빨강이도 빨랫줄에 걸어두나 봐요.
따스한 햇살에 나른해지며 스르르 잠이 드려는데 갑자기 휙 하고 몸이 날렸어요.
"야, 너희들 참 안됐다. 빨랫줄에 매달려 꼼짝 못하는 모습이라니, 정말 불쌍하다 불쌍해. 어때, 내가 시원한 바람 한번 불어주랴?"
심술쟁이 바람돌이가 담장을 넘어온 것이었어요. 작년 여름에도 바람돌이가 우리 옆에서 심술을 부리는 통에 여러 번 땅에 떨어졌거든요. 그때마다 우리는 다시 목욕을 해야 했어요.
"됐거든. 네가 우리를 골탕먹인 게 어디 한두 번이니?"
우리는 정색을 하고 바람돌이를 밀쳤어요. 하지만 바람돌이는 계속 우리 주위를 맴돌았어요.
"어머, 얘! 넌 어쩜 그렇게 빨리 돌 수 있니? 한 번 더 돌아볼래?"
"헤헤, 이 정도 가지고 놀라긴."
빨랫줄에 처음 걸려 본 빨강이는 바람돌이가 그저 대단해 보이나 봐요.
"안 돼, 빨강아!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바람돌이 쟤 조심해야 돼. 언제 돌변할지 모른다고."
"맞아. 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정신 바짝 차려야 해."
"왜 남의 일에 참견이니?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잔소리하지 마."
이미 바람돌이에게 마음을 빼앗긴 빨강이는 우리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어요.
"바람돌이야, 너는 어디서 사니?"
"이 세상이 다 내 집이나 마찬가지지. 난 어디든 가고 싶은 곳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거든."
"이야, 진짜 좋겠다. 난 말야. 이 집이 너무너무 좁고 답답해."
"하긴, 넌 이 담장 너머 세상이 얼마나 재미있는지도 모르겠구나. 난 오늘도 저 앞산에 있는 과수원에 놀러 갈 건데."
"정말? 나도 좀 데려가주면 안 되겠니?"
빨강이의 말에 우리는 화들짝 놀랐어요.
"빨강아! 넌 날 수도 없는데 어떻게 과수원에 가겠다는 거야. 그리고 예진이의 시상식에도 가야 하잖아."
"됐어. 난 이제 시상식 따위 관심없어. 가고 싶으면 너희들이나 실컷 가."
아무리 말려도 빨강이는 바람돌이를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피웠어요.
"자, 내가 뒤에서 밀어줄 테니까 하나, 둘, 셋 하면 있는 힘껏 뛰어. 알았지?"
"응, 알았어."
바람돌이는 재주를 뽐내기라도 하듯 우리 주위를 빠르게 빙그르르 돌고는 세찬 바람을 일으켰어요
.
"하나, 둘… 셋!"
순간 빨강이의 몸이 쉬익 하고 날아올랐어요.
"야호! 난다, 날아! 난 이제 자유다. 얘들아, 안녕. 잘 있어!"
담장 너머로 날아간 빨강이는 금세 사라져버렸어요. 이렇게 갑자기 빨강이와 헤어지게 될 줄은 몰랐어요. 빨강이가 없어진 걸 알면 예진이가 얼마나 속상해할까요.
"휴, 잠깐 쉬었다 가야겠다."
처음 보는 참새 한 마리가 빨랫줄에 앉았어요.
"넌 누구니?"
"난 앞산에 사는 참새야. 강 건너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야."
"그래? 그럼 너 혹시 여기 오는 길에 빨간 원피스 못 봤니? 바람돌이랑 같이 앞산 과수원에 간다고 했는데 잘 가고 있는지 궁금해서 말이야."
"빨간 원피스? 혹시 놀이터 흙탕물에 빠져 있는 구슬 달린 원피스 말하는 거야?"
"뭐? 흙탕물?"
"어, 흙탕물에 빠져서 울고 있더라고. 나보고 좀 꺼내 달라는데 내가 무슨 힘이 있어야 말이지. 보다시피 난 벌레 한 마리 겨우 잡아 올릴 힘밖에 없거든."
"아휴! 바람돌이 이 나쁜 녀석. 책임도 못 질 거면서 괜히 빨강이를 꼬셔가지고…. 그나저나 빨강이를 어쩌면 좋아."
"그러게 우리가 말릴 때 말을 들었어야지. 빨강이 걔는 만날 잘난 체하더니 그게 뭐니?"
"우리를 무시한 대가를 치르는 거지 뭐. 그런데 참새야, 네가 사는 앞산은 어떤 곳이니? 얘기 좀 해주라."
"그래, 그래. 그렇지 않아도 따분했는데 바깥세상 얘기 좀 해봐."
"뭐, 너희들이 정 원한다면."
참새는 분홍이와 노랑이 사이에 앉아 앞산에서 있었던 일들을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하기 시작했어요. 분홍이와 노랑이가 넋을 놓고 들으니 혼자 우쭐해져서는 이쪽저쪽 방정맞게 오가며 쉴 새 없이 떠들어댔지요. 참새 때문에 분홍이와 노랑이도 딴마음을 품을까 봐 걱정됐어요.
"얘, 너 친구 만나러 간다고 하지 않았니? 해 지기 전에 빨리 가."
몸을 움직여 빨랫줄을 흔들자 참새가 멀리 날아갔어요.
얼마나 지났을까요. 예진이가 현관문을 열고 걸어오는 게 보였어요.
"어? 엄마! 빨간 원피스가 없어요."
"그럴 리가, 엄마가 세탁소에서 찾아와서 곧바로 빨랫줄에 널었는걸."
"혹시 바람에 날려서 담장 너머로 떨어진 건 아닐까요? 밖에 가서 찾아볼게요."
한참 뒤, 흙탕물에 젖어서 축 처진 빨강이가 예진이의 손에 들려 왔어요. 끔찍한 빨강이의 모습에 깜짝 놀랐어요.
"내 꼴 정말 우습지? 아, 창피해."
"어쨌든 다시 돌아와서 천만다행이다. 예진이 엄마가 또 세탁해주면 예전처럼 깨끗해질거야. 힘내, 빨강아."
언제나 도도하던 빨강이의 풀죽은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요.
"예진아, 이 빨간 원피스는 내일 못 입겠구나. 다른 옷으로 골라보렴."
"알았어요. 어? 엄마, 이게 뭐죠? 노란 원피스에 뭐가 묻었어요."
"아니, 이게 뭐야?"
노랑이에게 묻은 것을 자세히 살펴보던 예진이 엄마가 얼굴을 찌푸렸어요.
"냄새도 고약하네. 이런! 분홍 원피스에도 묻었는걸."
아까 그 참새가 분홍이와 노랑이에게 더러운 걸 묻혔나 봐요. 이를 어쩌면 좋아요.
"아무래도 이 옷들은 다시 빨아야겠다."
"그러면 엄마, 시상식에는 하얀 원피스를 입고 갈게요. 햇빛에 잘 말라서 더 뽀얘졌어요."
"그래, 그렇게 하는 게 좋겠구나."
"지난번에 아빠가 사주신 꽃 브로치를 달면 더 예쁠 것 같아요."
"오, 그거 좋은 생각이네."
이게 어찌된 일이죠? 예진이의 시상식에 제가 가게 되다니…. 정말 꿈만 같아요!
그날 밤, 예진이 엄마는 저를 정성껏 다림질한 후 가슴에 브로치를 달아 예진이 방에 걸어 두었어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진짜 멋지네요. 내일이면 예진이와 함께 수많은 사람의 박수를 받겠죠? 벌써 가슴이 뛰어요. 오늘 밤은 쉽게 잠들지 못할 것 같아요.
첫댓글 귀엽고 따뜻해지는 글이네요 잘 보고 갑니다 ^^
은혜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