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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성남 제17집(2013년 7월) <자유를 꿈꾸는 파도>에 실었습니다*
반찬 전쟁
심양섭
행복한 가정은 행복한 식탁에서 시작된다.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정겹게 식사하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그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이 세상 어디에 또 있겠는가. 아침식사만 같이 하는 게 아니라 저녁식사도 가족이 함께 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행복 밥상’을 위하여 충분한 시간 여유를 가지고 요리를 할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현실은 어떠한가. 우선 한국의 기성세대 남성들은 저녁에 일찍 집에 들어가면 졸장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엄존한다. 졸장부가 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저녁모임을 만들곤 한다. 아내는 아내대로 저녁 준비하는 것이 귀찮아서 남편이 밖에서 밥을 먹고 들어오는 것을 선호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산동성이나 상해 같은 중국 남부지방에서는 남자가 퇴근 후에 요리도 하고 아이들도 돌보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물론 신세대는 다른 것 같다. 아내도 남편이 저녁에 일찍 들어와서 같이 식사하기를 바라고 남편도 직장 회식보다는 일찍 귀가하는 것을 더 좋아한단다. 맞벌이라면 한 사람은 어린이집에 맡긴 아이를 찾아 데려가고, 다른 한 사람은 저녁상을 차려야 할 것이다. 도시의 광역화와 점점 길어지는 출퇴근시간을 고려하면 퇴근 후 젊은 부부의 발걸음은 종종걸음이 될 수밖에 없다. 어린 자녀를 둔 젊은 맞벌이부부는 출근시간에도 허둥지둥, 퇴근시간에도 허둥지둥한다. 아빠가 협조하지 않으면 젊은 엄마 혼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전쟁의 연속이 된다.
밥상을 차리려면 밥만 있어서는 안 되고 반찬이 있어야 한다. 서양요리와 달리 한국 밥상에는 국이나 찌개가 있어야 하는데다가 반찬 한 가지를 하려고 해도 조리과정이 복잡하다. 오늘날과 같이 바쁜 현대 한국사회의 맞벌이부부에게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음식문화인 셈이다. 한국 사람들도 서양 사람들처럼 주된 요리(main dish) 한두 가지만 하고 나머지는 밑반찬으로 식사하면 좋을 것 같다.
나처럼 국을 안 먹는 사람을 만난 아내는 운이 좋은 경우인지도 모른다. 며칠 전에 서울대학교 학생회관 구내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그 식당을 맡아 운영하는 대형급식업체에서 1주일에 하루는 ‘국 없는 날’로 삼겠다고 써 붙여 놓은 것을 보았다. 저염식(低鹽食)을 권장하는 조선일보 캠페인에 부응한 조치로 보였다. 한국인의 염분 과다 섭취의 제일주범이 ‘국’이라는 것이다. 이참에 한국 밥상에서 국을 추방함으로써 식단을 간소화하여 맞벌이부부의 부담 한 가지를 줄여주면 좋을 것 같다. 국을 끓이지 않고 고기를 굽거나 생선을 구워서 밑반찬과 더불어 밥상을 차린다면 요리시간의 절반은 줄어든다.
요리든 반찬이든 그 맛은 만드는 사람의 정성에 달렸다. ‘엄마손 식당’이나 ‘시골밥상’ 같은 식당 이름 자체가 그런 정성을 상징한다. 가정의 모든 밥상도 그런 정성어린 밥상이어야 하는 것이 이상(理想)이다. 그 이상을 포기하지 말고 추구해야 한다. 그래야 ‘웰빙(well-being)’ 밥상을 마주할 수 있고 삶의 질이 높아진다.
문제는 현실이다. 한국에서도 맞벌이 가구가 점점 늘어나서 이제 배우자가 있는 유배우가구의 43.5%에 이른다. 전업주부가 없기는 ‘한 부모 가구’도 맞벌이 가구와 마찬가지다. 맞벌이 가구에 한 부모 가구를 합치면 57%가 넘는다. 절반을 훨씬 넘는 가정의 부모가 직장근무와 가사의 이중부담을 지고 살아간다. 그 중 젊은 부모들은 육아의 부담도 져야 하므로 삼중고에 시달린다.
이들에게 요리를 손수 하고 반찬을 직접 만들라고 강요할 수 없다. 남성전업주부를 자처하는 나도 요즘 친환경식품 매장인 한살림과 전문 반찬가게를 오가며 반찬을 사 나르고, 아내도 가끔 대형할인마트에서 즉석 매운탕 거리 같은 것을 사다가 바로 끓이곤 한다. 이런 부부를 과연 탓할 수 있는가. 끓이기만 하는 되는 즉석 탕이나 찌개 거리를 사다가 끓이고 반찬가게를 들락거리는 부모를 심판대에 올린다면 나는 단연코 ‘무죄’를 선고하고 싶다. 반찬 쇼핑이나마 정성껏 한다면 부모로서의 기본의무는 다한 셈이다. 채무의식이 남는다면 주말에 시간을 내어 온가족이 함께 맛있는 요리를 하는 것으로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야흐로 반찬가게의 전성시대요, 식품회사들의 반찬 상품 아이디어가 폭발하고 있는 시대이다. 인터넷에서 즉석 탕이나 찌개 거리를 검색하다 보니 아예 회사 이름을 ‘아빠가 차린 밥상’이라고 지어놓고 각종 덮밥 소스, 찌개 소스, 볶음밥, 그리고 탕이나 찌개류 서른 가지를 팔고 있는 회사도 있다. 전화를 걸어서 그 볶음밥에 밥이 들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덮밥 소스에는 밥이 없지만 볶음밥에는 밥도 들어 있기 때문에 전자레인지에 데우거나 프라이팬에 살짝 볶아 드시면 된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기사에서는 캠핑족을 겨냥한 반(半)조리식품을 소개하면서 요리를 잘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즉석 캠핑요리가 ‘가정식’으로도 활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러한 세태 변화의 속도에는 환경 적응성에 있어 뒤처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나도 충격을 받는다. 심지어는 편의점에서도 삼십대와 사십대 주부들을 상대로 시장조사를 실시한 후에 그 결과를 바탕으로 많게는 서른 종류의 반찬을 팔기 시작했다는 보도가 있다. 부모들은 반찬 확보 전쟁, 회사들은 반찬 판매 전쟁에 돌입한 것이다.
신혼 초에 아내가 해 준 요리 중에서 가장 맛있었던 것은 참치김치찌개였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직장 일과 아들 키우기로 바쁜 아내가 가장 빨리 쉽게 할 수 있는 요리가 냄비에 김치와 두부를 썰어 담고 참치캔을 따서 넣고 물을 부어 끓이면 되는 참치김치찌개였던 것이다. 세상만사는 상대적이다. 잘잘못을 따지지 말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사하게 먹으면 그것이 행복 밥상이요, 행복 가정이 아닌가 싶다. 여보,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