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경부터 원산에서 마르다윌슨 여신학교에 재학중이던 유명화(劉明花)와 그의 교수 백남주(白南柱), 그리고 장로교
조사 한준명(韓俊明) 등이 중심이 되어, 유명화에게 친림하는 주(主)의 임재를 확신하고, 이를 토착화하려는 신비주의 신앙단체가 형성되었다.
1931년부터 이들과 개별적인 활동을 펴오던 이용도 목사가 이들 단체에 깊숙이 간여하면서 예수교회 공의회가 설립되었다. 이 교단은 창립 당시부터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적 사랑이라는 신앙의 순수성을 전면에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신학과 교리의 배격, 유일회적 계시의 무시, 유명화의 신비체험과
관련된 주술적인 특성 등으로 인해 기성교단으로부터 많은 비판과 배척을 받게 되었다. 1933년에 이 교단의 창립예배가 있었고, 116명의 대표자
가운데 이용도 목사를 포교관리자인 선도감(宣道監)으로 선출하고, 교회의 헌장과 세칙의 마련을 위해 기초위원으로 이용도·백남주·이호빈(李浩彬) 등
3명을 선임했다. 같은 해 10월에 이용도 목사가 죽음으로써 후인 선도감으로 이호빈 목사가 다시 선출되었으며, 11월에 오직 예수만을 따른다는
취지하에 예수교회 설립이 선포되었다. 교단 창설이후 기관지 〈예수〉를 발행했고, 조직체계는 중앙선도원을 중심으로 하여 중앙집권적인 형태를 취하는
것으로 감리교회의 것과 유사한 것이었다. 그러나 체계적인 재정 및 인원관리와 지도자간의 규약적 접속 등이 불투명했으며, 특히 이용도 목사가 죽은
후 그를 이을 만한 인물이 나타나지 않았고, 기성교단의 많은 비판 등으로 교단의 외형적 발전은 대단히 더디게 되었다. 현재 전국적으로 23개
교당에 2,000여 명의 신도가 있으나, 연합체제를 뚜렷이 형성하지 못해 단일교단으로서의 협력과 교류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