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물리치료학생학술대회’의 역사
물리치료사 김용관
1992년02월11일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창천리 567번지 청소년수련관,,,
제1회 전국물리치료학생학술대회 그곳에서의 감동을 나는 잊지 못한다.
배우고 싶고, 만나고 싶은 열정을 가진 10개교 70여명의 학우들이
한 자리에 모여 물리치료(학)과 학생들만의 학술대회를 연 것이다.
학생학술대회를 만들게 된 계기는,,,
1991년 여름, 당시 대구대학교 물리치료학과 3학년이던 ‘박정’ 형님의 제안으로 타 대학 물리치료(학)과 탐방에서 출발되었다.
처음엔,,,
다른 대학 학생들은 물리치료를 어떻게 공부하고 있으며,
우리와는 무슨 차이가 있는지 비교하고
장점을 벤치 마킹한다는 목적으로 출발하였다.
우선 전국 14개 대학 학생회에 방문을 하고 싶다는 공문을 보냈고,
유선 혹은 서신으로 연락이 온 학교부터 방문하게 되었다.
처음 연락이 온 곳은 안동대학이었으며
1991년 9월말에 개최되는 학술제에 초대한다는 내용으로 기억한다.
초대를 받고 박정 형님과 나는 안동으로 향하였고,
2시간여의 학술제를 참관하고
학생회 임원들과 상호 관심사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학술제 뒤풀이 행사에 참석하였었다.
안동을 다녀온 우리는
우리가 너무 편협한 부분에 치우쳐 있음을 자각하였고,
더 많은 학교를 방문하기로 결심하였다.
1991년 10월에는 주로 타 대학 학생들과 서신으로 방문 시기 등을 조율하였으며,
마침내 1991년11월07일
부산, 목포, 광주, 이리(현재 익산)에 있는
지산대학, 목포대학, 광주대학, 원광대학을 방문하게 되었다.
목표일 오후 부산에 도착하여
학생회 임원들과 ‘학생들 간의 연합 모임’ 등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밤 기차로 목포로 출발하였고
다음날 새벽 5시30분 목포역에 도착하였다.
목포에 도착해 전과 동일하게 서로의 관심을 확인하고
광주로 출발하려 하였으나
박정 형님과 목포대 학생들과의 대화가 길어져
나와 박미영 선배만 우선 광주로 향하였다.
광주에 도착하자 1,2학년 학생 전원이 강의실에 모여 있었으며
뜨거운 환영을 받았고
박정 형님이 도착하기까지 학우들에게
우리가 각 학교를 순회하는 이유와 동기를 설명하고
모임 결성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박정 형님이 생각보다 늦게 도착하여 우리는
택시를 이용 약속 시간을 맞추기 위해 이리(지금의 익산)에 도착하였다.
원광대 학우들과 학교에서 얘기를 나누고
자리를 옮겨 닭도리탕을 먹으며 소주잔을 기울이며
서로가 그 동안 하고 싶고 묻고 싶은 이야기를 밤이 새도록 나누었다.
마지막으로 1991년11월 중순에
연세대와 고려대, 안산1대, 대전보건대 등을 방문하였다.
각 학교 방문 결과,,,
전문대의 경우
2년제에서 3년제로의 학제 개편으로
학생들의 지식 탐구 욕구는 증대한 반면
그것을 채워줄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으며
특히 다른 대학들보다
어느 부분을 잘하고 있는지 어느 부분이 부족한 지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또 4년제인 연세대와 대구대도
단지 4년제라는 것 외에는 딱히 다른 전문대와 다를 바가 없었으며
오히려 어떤 부분들에 있어서는
몇몇 전문대학들에 뒤지는 부분이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cf.당시 신구전문대 2학년 학생이던 김중환 학우를 대구대학교 재활과학대학 물리치료학과 학생회 학술부 명의로 초빙하여 특강을 실시하였었음.)
이런 사실은 우리뿐 아니라 모든 대학의 학우들이 공통으로 느끼고 있었으며,
특히 임상 선배들에 대한 불만이 상당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우리들이 바라본 임상 선배들 대다수는
그냥 그냥 물리치료를 하고 있다가
적성이 맞지 않으면 이직하는 사례가 빈번하여
학생인 우리들에게
공부하고 연구할 의욕을 상실시키게 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1991년 11월 30일 토요일 오후 1시,,,
12개 물리치료(학)과 대표가 대전보건대에 모였고,
5시간의 논의 끝에 학생들만의 학술대회를 만들기로 의견을 모았으며,
개최는 대구대학교 물리치료학과에서 하기로 하였었다.
하지만 위원장은
4년제가 다 해먹는다는 비판을 일소하고 화합하는 의미에서
신구대 김중환 학우(현, 용인대 물리치료과 교수)로 선출하였으며
내가 총무를 맡고 학술대회 준비를 맡기로 하였다.
이 결정이 있은 후 나와 박정 형님은 교수님들에게 불려갔으며
다른 대학 학우들도 비슷한 경우를 겪었다고 한다.
교수님들은
학생들이 모여 시위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우리에게 여러 가지 제약을 가하였으며,
다음해 1월 국가고시 후에 개최된 전국물리치료과 교수협의회에서
우리의 실명이 거론되며
교수협의회의 따가운 견제를 받아야 했으며,
일부 학교에서는
교수님들의 통제로 학술대회에 참여하지 못한 학교도 있었고
이 때문에
학교 차원이 아닌 개인 차원으로 학생학술대회에 참여한 학우도 있었다.
학생학술대회는 기존 학술대회와는 다른 컨셉으로 만들어졌다.
보통의 학술대회는
학술대회에 아무런 준비 없이 참가하여
나눠주는 학회지 등을 보며
주입식 강의를 듣는 형태였다.
하지만 우리의 학술대회는
사전에 모든 논문이 각 학교에 배포되고,
약 1개월 정도 공부해 와서
(cf.각 학교에서 자체적으로 실시하는 이 1달 공부에 참여하지 않은 학우는 학술대회 참여가 허락되지 않았음)
발표는 간단하게 20여분에 마치고
발표된 논문에 대한 토론을 2시간 이상 진행하며,
논문집은 그 완성도를 높이기 위하여
학술대회가 끝난 후
학술대회에서 나온 질문과 답변을 첨부하여 만드는 것으로 하였다.
그때 그곳에서의 열정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목포대학의 정경신 학우와 그의 일당들이 보여주었던 ‘백두산 개구리’ 춤도 기억에 남지만,,,
자발적으로 나와서 열띤 토론에 참여했던 그 많은 학우들,,,
아무도 하품을 하지 않던 그 열정적인 무대,,,
누군가에게 바라기보다는 우리가 한다는 그 자부심에 찬 학우들의 눈빛,,,
각 학교의 교수님들에게만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길 수가 없고
우리의 인생길은 우리가 헤쳐나간다는 사실을 머리에 각인시켰던
그날의 그 시간들,,,
우리는
대한민국 물리치료(학)과 뿐만 아니라
세계의 물리치료학과 커리큘럼을 구해놓고
서로 비교하며 장단점을 토론하며 장점을 벤치마킹 하였다.
처음엔 서로 익숙하지 않아 엉뚱한 질문도 많이 했던 것 같다.
오전 6시 기상해서 식사하고
9시부터 오후6시까지 하루 8시간 일정을 소화하고
저녁에는 다시 분임토의 등으로 무척 힘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물리치료에 대한 열정을 가진 벗들이 있음에
서로가 즐거웠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지금도 학생학술대회가 이어지고 있음에 후배님들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처음 우리가 만들었을 당시의 열정과 헌신을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끝으로 학생학술대회를 같이 만들었던 학우들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네요.
박정, 박미영, 한동욱, 김형수, 김한나,
남건우, 한혜선, 박정택, 정경신. 고경현,
박영석, 김대연, 박은주, 하종만, 송윤희.
김중환, 이종원, 모민상, 개구락스 등등등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궁금하고,,,
모두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대한민국 물리치료 화이팅!
첫댓글 ㅋㅋ 부끄럽네요.. 4회때 까지만 참여하고 그후론 참여 못했었는데... 벌써 20년 이네요 .. 감회가 새롭고 그때의 열정이 다시금 느껴지네요 ^^
2월20일 밤 10시부터 새벽까지 임상선배와 학생들의 만남의 시간에 너도 참여하렴. 용관이와 같이.^^&
기대되요^-^v
헉~~ 기억 저편에 있었던 학술대회~ 민상이랑 같이 일정표 만들어 붙이고 각 학교 학우들 발표듣고 토의하고 밤에 각 방을 돌며 다른 학교 학우들 만나서 얘기 나누었더랬는데 거기에 회장님이 계셨었군요~ 와우
그 민상이가 모민상???^&^
사랑하는 선배님들과 동생님들을 만나러 내일 대전 올라갑니다^^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