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시리 콩나물 김칫국, 국밥
2023년 마지막 달 12월은 유난히 추웠고 전국이 꽁꽁 얼었다. 전국적으로 한파 주의보가 발령되고 중부 지방에는 대설 주의보까지 발령되었다.
그렇게 추운 겨울날에는 문득 어릴 때 어머니께서 끓여 주시던 까시리 콩나물 김칫국, 국밥의 얼큰하고 시원하면서 까시리 바다 내음과 함께 쫀득한 까시리의 감칠맛이 어우러진 그 맛이 생각난다.
까시리는 불등풀가사리의 부산 기장 지방의 방언이라 한다. 아마 부산 인근 울산과 경남지방은 이 불등풀가사리를 까시리라고 부르지 않았나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까시리는 바다의 바윗돌에서 자라고 겨울철에 채취를 하며 대량으로 채취되지 않아서 가격도 다른 해조류에 비해서 비싼 편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어릴 때 우리 집에서는 다른 해조류 보다 까시리의 비싼 가격 때문에 평소 때보다는 주로 제사 때 제사 나물로 사용하기 위해서 기장 새벽 재자(시장)에서 구입하곤 하였다.
까시리는 내가 어릴 때 바다가 지금처럼 오염되지 않았던 그 당시에도 대량으로 채취되지 않았던 해조류였는데 연근해 바다가 많이 오염된 요즘은 귀한 몸이라 한다.
필자가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에는 우리나라의 경제가 낙후되어 일자리가 별로 없었으며 농촌에는 더더욱 겨울철에는 일자리가 거의 없었다. 요즘은 영농 기술이 발달되어 농한기인 겨울철에도 온실 재배 등 특수 작물을 재배하고 그렇지 않으면 산업시설이 발달된 산업현장이나 건설 현장으로 농사일이 뜸한 농한기인 겨울철에 돈벌이 하러 나가기 때문에 농한기라는 개념이 희박하지만 1960년대 농촌의 겨울철에는 일거리가 거의 없었다. 가을에 파종한 보리밭에 가서 잡풀을 뽑거나 아니면 난방용 겸 취사용인 땔감을 구하러 산으로 갔다. 1960년대 우리나라 농촌은 극히 일부를 빼고는 난방이나 취사를 땔감나무에 의존하였기 때문에 어느 집이든 땔감 나무를 준비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행사였다.
초등학생들도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면 고사리 손으로 소쿠리와 갈쿠리를 들고 야산으로 가서 갈비를 긁어 올 정도로 땔감을 준비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요즘은 우리나라의 어느 곳의 어느 산에 가도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가끔 텔레비전에 탈북민들이 출연하는 방송을 보면 그들이 대한민국에 와서 놀라는 것 중의 하나가 전국 곳곳에 나무가 우거져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산은 물론 도심지의 공원이나 도로의 가로수까지 너무도 나무들이 잘 관리되고 있는 것에 감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탈북민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깊은 산, 야산, 도심지 공원과 가로수를 막론하고 푸르게 잘 가꾸어져 있지만 대한민국도 1960년대까지만 하여도 탈북민들이 말하는 북한의 벌거숭이산 못지않게 벌거숭이산이었다.
1960년대 대한민국의 벌거숭이산이나 탈북민들의 증언에 의하여 알게 된 북한의 산이 벌거숭이가 된 이유 중의 한 부분이 가정의 난방이나 취사용의 땔감이 나무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산들이 벌거숭이가 될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다행히 대한민국은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 후 경제를 발전시켜 한강의 기적을 이룸과 함께 세계가 놀랄 정도의 산림의 조림사업을 하여 지금의 대한민국이 국토는 푸르름으로 뒤덮여 있는 것이다.
이야기는 다시 1960년대 농촌으로 되돌아가서 겨울철 농한기에 농촌에서 하는 일이란 보리밭에 가서 까마귀 떼들이 먹을 것을 찾느라고 헤쳐 놓아 보리밭의 뒤집어져 뿌리를 들어낸 보리들을 흙으로 덮고 잡풀을 뽑거나 지게를 지고 나가 이산 저산 벌거숭이산들을 돌아다니며 땔감 나무 한 짐을 해 오는 것이다.
이 땔감나무 한 짐이 요즘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얼마큼의 값어치가 될까. 이것이 1960년 우리나라 농촌 모습의 한 단면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않는 집에서는 크게 힘을 들여서 일도 하지 않는 상황에서 하루 세끼 꼬박꼬박 격식을 갖춘 밥상을 차려 먹는 것을 낭비라고 생각들 하였다.
그래서 아침은 아무리 할 일이 별로 없는 겨울철 농한기라 하여도 하루의 시작이니 따뜻한 흰쌀밥에 뜨끈한 국과 반찬들을 한 상 가득하게 차려 배부르게 먹고는 점심은 그냥 대충 때우는 경향이었다. 아침에 점심까지 해 놓은 밥을 가마솥 안에 넣어 두었다가 아침에 해 놓은 국을 데워서 반찬들을 대충 차려서 먹었다.
이럴 때 어머니께서 가끔 해 주시던 것이 까시리 콩나물 김칫국이나 국밥이었다. 국이나 국밥이라고 별반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제사 때 사용하고 남은 까시리와 김장김치를 숑숑 썰고 콩나물 그리고 텃밭에 가서 꽁꽁 언 땅에서 파 몇 뿌리를 뽑아와서 물에 씻은 다음 다시용 메레치 몇 마리와 조그마한 국솥에 넣어 끓여서 단출한 밥상에 올리면 그것이 곧 까시리 콩나물 김칫국이고 끓일 때 아침에 가마솥에 남겨놓은 밥을 몇 주걱 퍼 넣어 끓이면 그것이 곧 까시리 콩나물 김치 국밥이다.
국이든 국밥이든 그 당시 어려웠던 시절에는 그 맛이 일품이었다. 적당히 숙성된 김치의 얼큰하고 시원한 맛과 콩나물의 아삭한 맛 그리고 바다 내음이 물씬 나는 까시리의 맛이 어우러진 그 맛은 최소한 그 시절 간단한 시골의 점심 한 끼 삭사로는 환상적인 맛이었다.
환상적인 맛이었다는 것은 1960년대 그 당시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추운 겨울날 그 따끈한 까시리 콩나물 김치 국밥이 그 당시의 입맛으로 참 맛이었다는 것이지 지금 대한민국이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고 먹을 것이 지천으로 널려 있어 맛 여행을 하면서 이름난 맛집을 찾아서 산해진미를 즐기는 현대인둘의 입맛에는 음식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보릿고개를 넘기며 어렵게 살던 시절에 그렇게도 진절머리나게 먹기 싫었고 우리나라의 비약적인 경제발전으로 먹거리가 풍족할 즈음에 생각도 하기 싫었던 꽁보리밥이 건강식이라는 이름으로 우라 곁으로 다가왔고 식당 차림표에도 떡하니 자리를 잡는 것도 부족해 식당 간판 자체가 보리밥전문집이라는 곳도 생긴 것이다.
보리밥처럼 언젠가는 얼큰하고 시원하면서 짭조름한 바다 내음이 어우러진 까시리 콩나물 김치국밥을 식당에서 먹을 날을 기다려 본다.
2024년 1월 12일
김상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