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강고향사례 서 (江皐 鄕射禮 序)
옛날에 국도(國都)의 제도는, 도성[國]을 아홉으로 나누어 도성의 중앙을 왕궁(王宮)으로 하고, 앞은 조정, 뒤는 시장이며,
좌우는 6향(鄕)인데 둘씩 서로 향하고 있으니, 향(鄕)이란 곧 향(嚮)한다는 뜻이다. 4여(閭)를 족(族)으로 하고, 5족을 당(黨)으로 하며, 5당을 주(州)로 하며, 5주를 향(鄕)으로 하였다.
향의 제도는 우리나라의 5부(部)와 같다.
그러나 향대부(鄕大夫)는 예(禮)로 어진이를 천거하고, 주장(州長)은 예로 백성을 모으고, 당정(黨正)도 예로 백성을 모았다. 술 마시는 것을 향음(鄕飮)이라 하고 활쏘기를 향사(鄕射)라 하니, 모두 어른과 어린이의 질서를 정하고, 높고 낮음을 밝히고, 현명하고 어리석음을 분별하는 것으로 백성을 가르쳐서 풍속을 돈독히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후세(後世)에 향수(鄕遂)의 제도가 허물어져서, 도성[國]을 서울[京]이라 하고 야(野)를 향(鄕)이라 하였다. 그래서 향음례(鄕飮禮)ㆍ향사례(鄕射禮)를 혹 군현과 촌야(村野)에서 행하고 경성(京城) 안에서는 행하지 않았다. 오직 명(明) 나라 홍무(洪武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 초기에는 응천부(應天府)ㆍ직례부(直隷府)의 유사(有司)와 학관(學官)에게는 학교(學校)에서 행하도록 하였고, 외방의 주현(州縣)은 경사(京師)를 본받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근고(近古)의 제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옛날에는 선비와 농부가 처소를 달리하였다. 대체로 선비는 모두 6향의 안에 살았고, 수(遂)로부터 밖으로 기전(畿甸) 경계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농부만 있고 선비는 없었으니, 이것이 향음례와 향사례가 왕성(王城) 안에서만 행해진 까닭이다.
지금은 백성 거주시키는 법제가 없어서, 도(道)를 배우고 문예(文藝)를 익히는 선비가 교야(郊野)의 밖에 흩어져 살고 있으므로, 어진이를 천거하고 백성을 모으는 예를 유사자(有司者)가 거행할 수 없으니, 향례(鄕禮)를 초야(草野)에서 행하는 것도 그때그때의 사정에 알맞은 일이라 하겠다.
야(野)를 향(鄕)으로 하고, 처사(處士)를 주인(主人)으로 하고, 붕우(朋友)를 빈(賓)으로 하고, 자제(子弟)를 악정(樂正)으로 한다. 땅을 그어서 궁(宮)으로 하고, 땅을 그어서 조계(阼階 섬돌)로 하고, 빈계(賓階 손이 서는 섬돌)와 두 기둥 사이에 땅을 그어서 문으로 한다. 쟁반[槃]을 베풀어 술그릇으로 하고,
횃대[架]를 베풀어 화살그릇으로 하고, 산을 만들어 중앙으로 하고, 장막을 쳐서 과녁으로 하고, 전비(纏臂 팔을 동이는 것)를 팔찌[拾]로 한다.
소채(蔬菜)를 포혜(脯醯 포와 젓갈)로 하고 마른 고기[乾肉]를 절조(折俎)로 한다. 작은 술잔을 치(觶 향음주례에 쓰는 술잔)로 하고, 접시를 두(豆 옛날 제기)로 하고, 싸리나무[荊]를 복(扑 종아리채)으로 하고, 피리[觱栗]를 생(笙)으로 하고, 해금(奚琴)을 슬(瑟)로 하고, 긴 소리로 읽는 것을 노래[歌]로 한다.
이런 것을 가지고 함께 초야에서 행하니, 만일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 때 사람이 다시 일어나서 이 일을 본다면 크게 비웃지 않을 수 없겠지만, 선(善)을 좋아하고 옛것을 사모하는 마음에 대해서는 또한 가엾고 불쌍하게 여길 것이다.
가경(嘉慶 청 인종(淸仁宗)의 연호) 경진년(1820, 순조 20) 4월 23일임. 에 우리 향(鄕)의 사우(士友)들이 모여 의논하고서 철마산(鐵馬山) 아래 강고(江皐) 위에서 향사례(鄕射禮)를 행하였는데,
고랑(皐浪) 신대년(申大年) 이름은 억(億)임. 을 주인으로 하고, 귀음(龜陰) 김여동(金汝東) 이름은 재곤(在崑)임. 을 빈으로 하고, 신대년의 종질(從姪) 신성여(申成汝) 이름은 만현(晩顯)임. 를 사사(司射)로 하고, 석림(石林) 이예경(李禮卿) 이름은 노화(魯和)임. 을 사정(司正)으로 하였으며,
나의 두 아들 학연(學淵)과 학유(學游) 및 4~5가(家)의 자제와 빈객(賓客) 등
모두 20여 인이 사우(射耦)가 되기도 하고 집사(執事)가 되기도 하였다.
70세가 된 노인은 신대년(申大年)의 아버지 신공(申公), 나의 형 진사공(進士公 정약용의 맏형 약현(若鉉)임)이고, 60세가 된 사람은 김여동(金汝東)의 아버지 김공(金公)과 나였다. 이들은 늙어서 예를 차릴 수 없으므로 모두 예석(禮席) 밖의 별석(別席)에 앉아서 구경하고 있었으니, 아, 이것을 예라고 할 수 있겠는가.
비록 그러나, 그 읍(揖)하고 사양하고 오르고 내리고 나아가고 물러나고 앉고 서는 의용(儀容)과
바쳐 올리고[薦獻] 권하고[酬酢] 노래 부르고[吹誦] 음악 연주[戛擊]하는 절차와
왼쪽엔 활줌통, 오른쪽엔 시위를 잡고, 화살 3개는 꽂고 1개는 끼며, 활을 부리고 활시위를 얹으며,
내려와 절하고 올라가 술 마시는 예문을 이미 모두 고례(古禮)에 의거하였다. 그리고, 신공(申公)과 김공(金公)의 두 아들이 또 우뚝이 서서 의용을 가다듬으니 그 엄숙한 것이 볼 만하였고,
사정(司正)과 사사(司射) 등도 모두 단아하고 민첩하여 법도를 잃지 않았다.
이러므로 여러 벗과 여러 자제가 각기 그 자리를 바르게 지키고 각기 그 직책을 잘 봉행하여 떠들거나 예문에 이반되는 잘못이 없었으니, 아, 이 또한 어려운 일이었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랴.”
하였으니, 이 행사가 비록 감히 ‘고례를 행하였다.’고 할 수 없으나,
만일 ‘배우고 때로 익혔다.’고 한다면 또한 아마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니
어찌 숙손통(叔孫通)의 면체(綿蕝)가 되지 못하겠는가.
예를 마치자, 여러 벗들이 나에게 서문을 지으라고 청하기에 위와 같이 서술한다.
모인 사람들의 이름과 나이는 서열대로 왼편에 적는다.
[향수(鄕遂)의 제도 : 주(周) 나라 제도에 왕성(王城)에서 50리부터 1백 리까지의 사이를 향(鄕)이라 하여 6향(鄕)으로 나누고, 백 리 밖을 수(遂)라 하여 6수(遂)로 나누었음. 그리고 5가(家)를 비(比)로 하여 서로 보전하게 하고, 5비를 여(閭)로 하여 서로 받게 하고, 4여를 족(族)으로 하여 서로 장사지내 주게 하고, 5족을 당(黨)으로 하여 서로 구제하게 하고, 5당을 주(州)로 하여 서로 구휼하게 하고 5주를 향(鄕)으로 삼아 서로 빈(賓)이 되게 하였음.《周禮 地官 大司徒》 5가를 인(隣)으로 하고, 5인을 이(里)로 하고 4이를 찬(酇)으로 하고 5찬을 비(鄙)로 하고 5비를 현(縣)으로 하고 5현을 수(遂)로 하였음.《周禮 地官 遂人》[절조(折俎) : 쇠고기나 양고기를 썰어서 접시에 담는 것. 효증(殽烝).《儀禮 士冠禮》[숙손통(叔孫通)의 면체(綿蕝) : 면체는 야외에서 예의(禮儀)를 익히는 것. 대나무를 죽 이어서 세우고 거기에 띠로 꼰 새끼를 둘러서 존비(尊卑)의 위차를 표시한 것을 말함. 한 고조(漢高祖) 때 박사(博士) 숙손통(叔孫通)이 제자 1백여 인과 함께 야외에서 면체를 베풀고 예를 익혔음.《史記 卷99 叔孫通傳》
첫댓글 어제 행사에서 뵙게 되어 너무 반가웠습니다.늘 좋은 자료 국궁사랑에 감사드려요.
'국궁사랑, 석호정 사랑'이야 늘 호무사님이지요!
언젠가 우리 석호정에서 '향사례'를 거행해볼 수는 없겟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