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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 Monday미스터 먼데이.
사람이 살고 있었네.
주차장으로 내려온 주마는 자동차 문을 열고 뒷좌석에 놓아둔 가방을 여자에게 건네주었다. 여자는 가방을 열더니 작은 보따리와 생수통을 꺼내 들었다. 주마도 과일을 담은 검은 봉지와 생수통을 트렁크에서 꺼내들고 개울을 따라 아래쪽으로 걸어 내려갔다. 숲길 아래로 아담한 개울이 흘러내리고, 개울가에는 너부러진 자갈들과 바위들이 군데군데 있어서 걸터앉거나 물에 발을 담그고 간단한 점심을 먹기에는 괜찮은 장소로 보였다. 개울가에 평평한 바위가 보였다. 주마가 손가락으로 그 바위를 가리키자 여자도 고개를 까딱이며 비스듬한 비탈길을 조심조심 내려가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주마도 여자의 뒤를 따라 바위에 나란히 앉았다. 흐린데다 10월 초경의 날씨라 덥지는 않았지만 졸졸 흘러내리는 맑은 물을 보자 갑갑한 신발을 벗어버리고 물에 발을 담그고 싶었다. 주마는 구두를 벗고, 양말을 마저 벗고 나서 바짓단을 걷어 부치고 개울물에 발을 담갔다. 시원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개울물이 주마의 두 발을 매끄럽게 받아들였다. 발가락 사이로 물이 흘러 다니자 좀 간지러운 듯했다. 개울은 구불구불 제 몸을 비틀어가며 여러 개의 물굽이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저어, 물이 차갑지 않으세요?” 여자가 두 쪽의 샌드위치 중 한 개를 주마에게 권하면서 물었다. “아뇨, 미지근한데다가 미끈한 느낌이 기분 좋은데요.” 여자는 손가락으로 물을 두어 번 튕겨보더니 샌드위치 한 쪽을 과일을 담은 네모난 통 위에 올려놓고서 옆으로 돌아앉아 구두를 벗었다. 두 사람은 바위에 나란히 걸터앉아 물에 발을 담그고 샌드위치를 먹었다. 샌드위치를 먹고 나서는 과일통을 사이에 놓아두고 과일을 집어 먹었다. 회색 구름을 밀어내고 하늘 한쪽이 푸르스름하게 열리면서 둥근 해가 나올 듯 나올 듯 턱걸이를 하더니만 마침내 힘에 부치는지 다시 구름 속으로 스르르 밀려들어가 버렸다. 이따금 개울 저 위쪽에서 바람이 불어 내려올 때면 하늘에 가득한 구름 냄새가 사방으로 은은하게 퍼져왔다.
“작은 샌드위치 한 쪽과 과일 몇 조각으로는 식사가 제대로 안 되시지요?”
“그야 뭐 충분하지는 않지만 괜찮습니다. 그리고 여기 까만 비닐봉지에도 사과가 몇 개 들어 있습니다. 내가 많이 먹어서 그렇지 원래 점심이라는 말의 근원이 점심點心 곧, 마음에 점을 찍는다.라는 뜻이라고 하지요. 점심은 그렇게 가볍게 먹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이야기이겠지요.”
“그래요? 점심이라는 말 속에 그런 뜻이 들어있었네요. 그럼 아침식사나 저녁식사에도 특별한 뜻이 들어 있나요?”
“그렇지요. 요즘에야 그런 말을 별로 쓰지 않지만 예전에는 아침식사를 꼭 조반朝飯이라고 했거든요. 조반이란 아침식사에는 반飯, 곧 밥을 먹는다.라는 뜻이지요. 여기에서 반飯이란 곡식을 불에 익힌 것을 말한답니다. 그래서 하루 세 끼 중 가장 잘먹어야하는 것이 원래는 아침식사였답니다. 하기야 옛날에는 아침을 잘 먹어야 하루 내내 일을 할 수가 있었겠지요. 그리고 예전에는 생일잔치 상도 아침에 차려서 식구들이 둘러앉아 아침식사를 걸게 먹었거든요. 요즘에는 생일파티를 저녁에 하지만요. 그리고 저녁식사는 다른 말로는 약석이라고 했답니다. 약석藥夕이란 저녁에는 약처럼 먹는다는 말이랍니다. 그러니까 저녁식사로는 소화가 잘 되고 위에 부담이 없는 죽 같은 부드러운 음식이 좋다는 말이지요. 옛 어른들께서는 하루 중 음식을 먹는 방법도 조반, 점심, 약석으로 하루 세끼 식사를 구분지어 놓았는데 요즘에는 아무 때나 지나치게 잘 먹으니 몸에 탈이 생기는 거겠지요.”
“듣고 보니 그렇군요. 맞아요, 저도 조반, 약석이란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점심이야 지금도 사용하는 말이니까 당연하고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걸 잘 알고 계셔요? 설명해주시는 것이 꼭 선생님 같으세요.”
“하하~ 선생님은요. 사람들이 대부분 알고 있는 이야기지요.”
“그리고요, 선생님. 오늘 각연사에는 특별한 용무는 없이 기도도 하고 절 주변을 돌아보시려고 오셨어요?”
“네, 뭐 그런 셈이지요. 이곳 괴산 연풍면에 전원주택을 지어놓고 집 이름을 ‘연풍연가’라고 부르면서 주말주택으로 사용하고 있는 우드라는 친구가 있는데, 지난 해 늦은 봄에 몇 명이 몰려와서 하룻밤을 재미있게 지낸 적이 있었거든요. 다음날 서울로 올라가기 전에 내가 절을 즐겨 다니는 줄 알고 이곳 각연사를 안내해주었는데, 그때가 유월이었으니 함께 왔던 일행들이 각연사로 들어오는 조붓한 숲길하며 푸르른 녹음, 그리고 주변의 아름다운 산세에 반해버렸단 말이지요. 그렇게 잠깐 각연사를 다녀간 뒤로 언제 한번 꼭 다시 다녀와야지 하고 생각만 하고 있다가 한 해가 훌쩍 지나가버렸어요. 그러다가 며칠 전에 각연사 이야기를 우연히 듣고는 오늘 갑자기 각연사를 보러왔답니다.”
“평소에도 절을 자주 다니시나 봐요.”
“네, 뭐 그렇지요. 절집 분위기도 좋아하고, 절 건축물도 좋아하고, 절 주변의 산이나 숲도 좋아하고, 불교교리도 좋아하고, 절음식도 좋아해서 그러다보니 스님 친구들도 몇 분 있게 되어서 절을 가끔은 가게 되는 것 같네요.”
“어머 어머, 여기를 좀 보세요. 발이 왜 가렵나했더니 발 주변에 송사리들이 몰려와서 발등을 주둥이로 물고 있나 봐요.”
“글쎄, 나도 어쩐지 발등이 가렵더라니까요.”
개울 옆 숲길로는 이따금 차들이 지나다녔다. 어쩌다 두세 명의 아랫마을에 사는 동네 사람들도 지나갔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 주변을 지나가는 것은 단지 차와 사람 뿐만은 아니었다. 정오를 지나 오후로 향하는 시간도, 하늘을 덮고 있는 회색 구름도, 그들 사이를 유유히 돌아다니는 이야기의 묶음들도, 말하고 듣는 만큼씩 어디론가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저 구름 흘러가는 곳, 아득히 먼 그곳, 그리움도 흘러가라. 파아란 싹이 트고, 꽃들은 곱게 피어나 날 오라 부르네.” 여자는 발로 물장구를 치면서 한 옥타브 낮춰 낮고 부드럽게 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산 정상으로부터 굴러 내리는 그리움덩이들이 계곡을 따라 개울을 가득 채우면서 흘러내려오고 있는지 주마의 주변을 감돌며 그리움의 파도들이 넘실대고 있었다. “저 구름 흘러가는 곳, 이 가슴 깊이 불타는 영원한 나의 사랑, 전할 곳 길은 멀어도 즐거움이 넘치는 나라,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저 구름 흘러가는 곳, 내 마음도 따라 가라 그대를 만날 때까지 내 사랑도 흘러가라.” 여자의 노래는 그리움의 바다를 떠도는 사랑의 배가 되어 넘실넘실 항해를 계속하고 있었다.
주마는 빈 봉지를 챙겨들고 앞장서서 숲길을 걸었다. 한 십여 분을 아래쪽으로 내려가다가 돌아서서 주차장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말없이 옆에서 나란히 걷던 여자의 어깨나 가슴이 자신의 몸에 스치면 몸을 움츠리고 그만큼 거리를 띄워가며 걸었다. 그 사이로 산기슭을 타고 내려오는 골바람이 부드럽게 돌아다녔다. 저만큼 일주문이 보였다. 주마가 여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선산이 있는 곳이 어디지요?” 여자는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들어 올리면서 말했다. “잠깐만요, 전화 통화를 해서 물어봐야 하거든요.” 그러고 나서 여자는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안부의 말을 한참 주고받더니 네에, 네에, 하고 대답을 하면서 수첩에 간단한 메모를 하는 듯했다. “그러니까 청천면 지촌리를 치든지 덕평리를 내비게이션에 치라고요? 네에, 알았어요, 오빠. 그러면 거기 가서 다시 전화를 드릴게요.”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자 여자는 익숙한 솜씨로 내비게이션을 켜고 괴산군 청천면 지촌리.하고 글자를 쳐서 넣었다. 그런데 검색결과가 없음.이라는 안내문자가 나타났다. 그러자 다시 덕평리로 바꾸어 글자를 쳤다. 화면에 지도가 올라오고 지도 맨 끝부분에 덕평 보건진료소가 보였다. 일단 덕평 보건진료소까지 간 뒤에 다시 선산 위치를 확인하기로 하고 차를 몰아 숲길 안쪽으로 들어섰다. 차창을 내리자 상쾌한 바람이 밀려들어왔다. 주마는 혹시 하면서 라디오 FM음악방송을 켰다. 미세한 잡음은 섞여있었지만 다행히도 방송이 잡혔다. 방송진행자의 간단한 설명이 있더니 소프라노의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주마는 얼른 소리크기를 16까지 키웠다. 스피커에서 더 화려하고 애절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사는 단순하게 아베마리아가 반복되는 곡이었지만 노래는 사람들의 영혼을 흔들어 저 높은 곳을 향해 무언가를 간절히 갈구하게 만드는 호소력이 있었다. 호젓한 산속 숲길을 달리면서 듣는 절정의 소프라노 음색은 각별한 운치가 있었다. 그 노랫소리는 5분여의 짧은 시간 동안이었지만 좁은 차안을 무한히 팽창시켜놓고 있었다. 그랬다. 노래가 끝나고 다른 음악이 나올 때까지 침묵이 흘렀다. 그 아련한 여음 사이로 부드러운 여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저 노래가 카치니의 아베마리아이지요? 그런데 저 가수는 누구지요? 아베마리아가 여러 곡이 있지만 저 가수가 부르는 아베마리아를 들으면 몸에 막 전율이 일어나는 것 같거든요.”
“그렇지요? 저 깊은 곳에서 영혼을 끌어올려 마구 흔들어대는 것 같지요? 아베마리아는 슈베르트의 작곡도 구노의 작품도 있지만 방금 불렀던 아베마리아가 단연 압권인 것 같아요. 그런데 저 곡이 카치니의 곡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카치니의 곡이 아니라 1970년대에 활동을 했던 러시아 작곡가 블라디미르 파비로프의 곡이라는 설이 있어요. 저 소프라노 가수는 라트비아 출신의 이네사 갈란테랍니다. 저 아베마리아 한 곡으로 세계적인 소프라노가 되어버렸지요.”
“아, 이네사 갈란테요. 그렇군요. 저는 여태 저 곡이 카치니가 작곡한 줄로 알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각연사 숲길에서 듣는 아베마리아가 어쩜 이렇게 가슴이 떨릴 만큼 좋지요? 아베마리아라는 말뜻이 성모 마리아를 찬양합니다.라는 뜻인데도 말이지요.”
“그렇지요. 정말 뛰어난 음악이나 미술, 아니 예술은 종교나 국가와도 상관없이 어디든 훨훨 날아서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고 감동을 주는 모양입니다. 어쩌면 호젓한 각연사 숲길이어서 이네사 갈란테의 아베마리아가 더욱 좋았는지도 모르겠네요.”
“저어, 선생님께서는 클래식 음악을 잘 아시는 모양이에요.”
“아닙니다. 그저 좀 좋아할 뿐입니다. 우연히 아는 가수가 부르는 노래라 아는 척하며 말씀을 드렸던 거지요. 오히려 음악을 받아들이는 자세랄까 태도랄까 하는 분위기를 보면 그쪽이 더 음악에 대해서 잘 아시고 깊이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머나, 이제 겨우 딱 한 곡을 함께 들었을 뿐인데 어떻게 나에 대해서 그렇게 세밀하게 관찰을 하셨어요?”
“아닙니다. 관찰을 일부러 한 게 아니구요. 조금 전에 아베마리아를 함께 들었던 차 안의 분위기속에는 나를 음악 안쪽으로 끌어주는 어떤 힘이 있는 것 같아서요. 드물기는 하지만 그 분야에 정통하거나 식견이 높은 분들과 이야기를 할 때 느꼈던 그런 분위기를 살짝 맛보았단 말이지요.”
“호호호,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은 좋지만 아니에요. 저도 클래식을 조금 좋아할 뿐이랍니다. 그런데 연풍에 친구 분이 살고 계시면 괴산 지리를 좀 아세요?”
“괴산 지리는 거의 몰라요. 지난 해 봄에 연풍을 들렸을 때가 괴산에 아마 두 번째 왔을 겁니다. 괴산 읍내도 그때 낮으로는 처음 가보았으니까요. 예전에 처음 읍내를 들렸을 때는 한밤중이라 어디가 어딘 줄도 잘 모르고 저녁식사만 하고 바로 떠났거든요. 괴산이 올갱이국으로 유명하다고 해서 친구가 버스 터미널 부근의 원조 올갱이 식당에서 점심으로 올갱이국을 사주었거든요. 올갱이가 무언지 궁금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다슬기를 올갱이라고 부르더군요. 우리 고향에서는 그것을 대사리라고 부르지요.”
“저는 다슬기를 물고동이라고 부르는 걸 들어본 적이 있는데요. 지방마다 독특한 이름들이 다양한 게 참 정감이 있어요. 그렇잖아요? 올갱이, 대사리, 물고동은 다 그 고장에서 오랫동안 불려온 이름들일 테니 모두 같이 사용했으면 좋겠어요.”
“그렇지요. 같은 것을 다른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는 사투리가 정감 있는 말들이 참 많이 있지요. 부추도 지역에 따라서는 정구지, 졸, 솔, 새오리라고 말하고, 또 명태의 이름은 잡은 지역이나 말리는 방법에 따라 부르는 흥미로운 명칭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네, 맞아요. 그렇기는 한데 저 혹시 국어선생님이세요?”
“아니요, 아닙니다. 그렇지만 뭘 따져보거나 세세히 알아보기를 좋아는 편이지요.”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것을 설명하는 방식이나 말투가 꼭 선생님들의 그것과 흡사해서요.”
“내 말투가 그렇게 들리는 모양이군요. 그렇지만 이야기를 좀 더 나누어보시면 더 정확하게 아실 겁니다. 나는 말하는 법이나 말 듣는 법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기는 하지만 농담도 잘하고 실없는 소리도 잘 하는 이를 테면 막말을 더 즐겨하는 사람이거든요.”
“막말이요? 막말이란 앞뒤 분간하지 않고서 상대방에게 큰 상처를 주는 말이잖아요. 선생님께서 그러실 것 같지는 않는데요?”
“흐응, 날카로운 지적이시네요. 방금 내가 한 막말이란 막춤에 비유해서 사용해본 말입니다. 상대에게 무작정 상처를 주는 무례한 말이 아니라 격식을 갖추지 않았거나 표현이 다소 거친 말이라는 뜻으로 사용한 거지요.”
“그런데요,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말하는 법이나 말 듣는 법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고 하셨는데요. 말 하는 법이란 말은 알겠는데 말 듣는 법이라는 말은 생소한 말이거든요. 말 듣는 법도 말을 잘하는 것처럼 사람에 따라서 어떤 기술이랄까 재능 같은 것이 있나요?”
“그럼요, 그렇다고 나는 생각을 하거든요. 사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말을 잘 듣는다는 전제가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을 하는 거지요. 말을 잘하려면 상대방이나 듣는 사람들이 공감을 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대화의 중심으로 끌고 와야 가능한 일인데, 그러려면 상대의 말을 잘 들어야만 서로의 공감대를 파악할 수 있을 것 아니겠어요? 물론 말을 듣는데도 적극적인 방법과 소극적인 방법이 있겠지요. 상대의 말을 동의하듯이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듣는 방법이 있겠고, 상대의 말 사이사이에 상대방의 숨은 의중을 파악할 수 있는 적절한 질문을 해가면서 적극적으로 듣는 방법이 또한 있겠지요. 그런데 이런 것들이 어떤 의도를 풍기지 않고 대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 일이겠네요. 이런 것들을 가리켜 말 듣는 법이라고 표현을 한 것이랍니다.”
“어머나, 선생님께서는 재미없는 말도 재미있게 하는 재능을 분명하게 가지고 계시는 것 같아요. 사실 지금의 이런 대화 내용이 그다지 재미있거나 귀가 솔깃해지는 흥미로운 내용들은 아니거든요. 어쩌면 토론회나 강의용 설명 같은데도 듣는 저에게 흥미롭게 들려지는 것은 순전히 설명하시는 방법이나 말씀하시는 분위기 때문인 것 같아요.”
“하하~ 칭찬입니까? 항상 그렇지만은 않은 듯한데 오늘은 유독이도 말이 잘 되고 있는 것 같군요. 말씀하신대로 10월 어느 오후의 흐린 하늘, 각연사의 울창하고 고적한 숲길, 뜬금없이 동행하게 된 미모의 여성분, 그리고 가을이라는 계절이 전해주는 이런 분위기 덕분인 모양이네요. 평소보다 두세 배는 말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하하, 나이가 들어가도 언제나 철이 들는지요.”
“그렇지만 철이 든다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세상에서 말하는 철이 든다는 것은 매사를 계산하고 실속을 따져가며 산다는 말이잖아요. 그렇게 사는 동안은 어른으로 살지는 몰라도 이미 꿈이나 소망이나 낭만 같은 것은 다 사라져버리고 현실만 지켜보고 살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그건 그렇게 생각하면 또 그렇게 느껴지는군요. 그렇다고 나이가 들어가도록 철이 전혀 안들 수 없는 노릇이니 상황에 따라 철이 들었다 안 들었다를 반복하면서 사는 게 무난하겠네요. 역시 살아갈수록 인생이라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호호, 철이 들었다 안 들었다는 어떻게 해야 할 수 있는 거지요? 그건 더 어려울 것 같아요.”
“하하, 그러게요. 그러니까 그냥 평소에 하던 대로 그렇게 살아가야 하겠지요?”
“글쎄 말이에요.”
내비게이션에 떠오른 지도는 일단 괴산 읍내를 향하고 있었다. 그들을 태운 차는 가을날의 총명한 햇살 대신에 회색의 그리움을 간직한 바람이 허공중을 헤적이며 돌아다니는 한가하고 여유 있는 도로를 달려갔다. 스피커에서는 음악이 계속 흘러나왔다. 음색이 가을을 닮아 있었다. 일요일의 괴산 읍내는 지나왔던 도로만큼이나 한적했다. 어쩌면 일요일이 아닌 평일일지라도 그리 큰 차이는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큰 사거리를 막 지나는데 여자가 말했다. “저어, 잠깐만 차를 세워주세요.” 주마는 차를 길 가장자리에 멈춰 세웠다. 여자는 차에서 내려 오른쪽 길로 걸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에 여자가 차로 돌아왔다. 주마가 무슨 일이냐는 듯 쳐다보자 여자가 싱긋 웃고는 말했다. “저기에 큰 마트가 보여서요. 아버지 산소에 올릴 술을 사려고 가봤는데 문이 닫혀 있어서 그냥 돌아왔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도로를 따라 지나가다 마트나 슈퍼마켓이 보이면 차를 세워주겠노라고 말했다.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다는 눈짓을 했다. 그때 주마가 핸드폰을 집어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오늘이 일요일이라 친구인 우드가 혹시 연풍연가에 내려와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번뜩 난 것이다. 두 번, 세 번째 신호음이 들리자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우드의 목소리가 핸드폰을 통해 들려왔다.
“여보세요, 주마! 어쩐 일이냐? 전화를 먼저 다해주고.”
“응, 우드. 나야. 그래 지금 어디에 있지?”
“으응, 지금 괴산에 내려와 있어. 어제 토요일이라 조카애들 데리고 연풍연가에 함께 와서 하룻밤 지내고 지금 점심으로 삼겹살 굽고 있단다.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는데?”
“응, 나도 지금 괴산 읍내에 와있구나. 그래서 혹시 네가 연풍연가에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전화를 해보았다.”
“그래? 언제 괴산에 왔는데, 지금 점심식사를 준비하고 있으니 이리로 와서 함께 점심을 먹고 쉬었다가 올라가라.”
“으응, 그러면 좋기는 하지만 지금 읍내에서 어디를 가는 중이다. 그럼 너는 언제 서울로 올라가려는데?”
“그래? 어디를 가는 길인데? 그러면 일보고 나서 연풍연가에 들려라. 나는 점심을 먹고 조카애들하고 놀다가 오후 서너 시경에 서울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너는 일이 언제나 끝나겠니?”
“글쎄다. 나도 아마 그쯤이나 될 것 같구나.”
“그러면 일을 보고나서 바로 연풍연가로 오도록 해라. 혹시 먼저 출발을 해서 내가 없더라도 현관 비밀번호를 문자로 보내줄 테니 알아서 챙겨먹고 쉬었다 올라가도록 해라. 아참, 그리고 말이지 네가 저번에 부탁했던 사진 있잖아, 네가 말한 크기로 인화해서 액자에 넣어 여기에 보관하고 있으니 와서 가져가도록해라. 그렇지 않아도 택배로 보낼까 생각 중이었는데 마침 잘되었구나.”
“오, 그 사진. 그렇지 않아도 그 사진이 궁금했었는데. 그래, 알았구나. 지금으로서는 시간이 어떨지는 잘 모르겠다만 일단 알았다. 그래 또 연락을 하마,”
“그래, 네가 괴산 읍내까지 왔는데 조카애들 하고 함께 있어서 못 나가봐 미안하다. 또 연락하자.”
“별 말을 다 하는구나. 내가 연락도 없이 괴산에 갑자기 내려왔는데 말이지. 아무튼 그 사진 고맙구나.”
주마는 전화를 끊고 차 시동을 걸었다. 옆 좌석에 앉아 있던 여자가 주마에게 물었다. “우드라는 친구 분이 사진을 하나보죠?” 주마는 피사체에 카메라를 들이대며 신중한 자세로 셔터를 누르고 있는 우드의 얼굴을 생각하며 말했다. “직업 사진작가는 아니지만 사진을 무척 좋아하고 사랑하는 친구라서 평소에도 시간 되는대로 출사를 많이 다니는 친구거든요. 언젠가 우드가 찍어놓은 사진 몇 점이 아주 마음에 들어서 크게 인화를 해서 액자에 담아 선물 좀 하라고 했더니 정말 그렇게 준비를 해놓은 모양이네요.”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또 물었다. “선생님께서도 사진을 좋아하세요?” 주마가 다시 음악방송을 켜면서 말했다. “아니요, 사진작품은 그림을 보듯이 감상하는 것은 좋아하지만 사진을 찍거나 찍히거나 하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진에 대해서는 관심도 취미도 없는 셈이지요.” 여자가 말했다. “아, 그러시군요.” 여자가 하얀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리며 하품을 했다. 주마가 차창 앞을 주시하며 사거리에서 깜박이를 켜고 좌회전을 하면서 말했다. “좌석 등받이를 뒤로 재끼고 잠깐 한숨 붙이도록 하세요. 덕평 보건진료소에 도착하면 깨워드릴 테니까요.” 잠시 후에 옆 좌석에서 여자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따금 차창 앞으로 고추잠자리가 날아왔다가 회색 하늘로 높이 치솟아 올라갔다.
(- MR. Monday 미스터 먼데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