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목사로서 밥을 벌어 먹었던 시간은 매우 짧았으나 직업분류상으로는 종교인이다. 그러므로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신부, 수녀, 스님들을 만날 기회가 종종 있었다.
나에게 종교인에 대한 환상을 심어준 최초의 존재는 수녀였다. 고등학생 때 교회에 다니다가 수도사가 되기로 작정을 하고 천주교로 전향을 해서 명동성당 학생교리반에서 교리공부를 할 때 이 마리아 수녀를 만났다. 마리아 수녀는 수도사가 되겠다는 나를 가상히 여겨서 애정을 다해서 가르쳤고 성당 뒷마당의 한 쪽 구석 축대에 기대어 허술한 판자로 된 방 한 칸을 들여서 살고 있었던 배 옹을 소개해 주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뇌성마비 장애인이었던 배 옹은 교육도 받지 못하고 걸인으로서 살아오면서도 거리에서 담배꽁초를 주워 모아서 팔아서 한 달에 쌀 두 말씩을 고아원에 기증했다. 그가 하는 말은 알아 듣기가 어려워서 대화가 안됐지만 나는 그를 자주 만났다. 지금도 성당 뒷마당에서 바보 같은(?) 웃음을 띤 얼굴로 달을 쳐다보면서 앉아 있던 그 분의 얼굴이 생생하다. 배 옹이 혀가 잘 돌아가지 않아 알아듣기 어려운 발음으로 “사람에게 가장 좋은 친구가 누구냐?” 하고 묻고는 “자기 자신”이라고 하고 “가장 나쁜 원수가 누구냐?”고 묻고 흔들리는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르치며 “역시 나”라고 하던 이야기가 잊혀지지 않는다.
그는 개인적으로 성인이기도 했지만 성스러움을 나타내는 천주교의 장식품이기도 했었다. 즉 배 옹은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의 본보기로서 보여주는 살아있는 시청각 교재였던 것이다. 하여간에 그런 인연 때문이었는지 나는 살아오면서 신부나 수도사를 하다가 그만 둔 사람을 여러 명 만나게 되었고 심지어는 대책 없이 신부를 그만 둔 사람을 목사가 되게 하고 결혼 주례를 서기도 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나는 천주교 신부들에 대하여 별로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내 경험 안에서는 외국 신부들은 그렇지 않았는데 한국 신부들은 대부분이 시건방졌다. 내가 만난 신부들은 모두 진보적 의식을 가진 신부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타인과 더불어 일을 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어서 함께 일을 하면서 기분이 상할 때가 여러 번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개인들 탓이 아니라 한국 천주교의 유교적 가부장 제도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천주교 안에서는 신부가 보통 사회인의 감각 정도만 가져도 존경 받는 신부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좋은 신부도 만났다. 구욥 신부는 1986년도 광명시 하안동에서 빈민활동을 할 때 철산 4동 천막이 있던 안양천 뚝방 건너에 있는 구로 1동 본당 신부였다. 구 신부는 특별히 우리들이 하는 활동을 도와주는 일은 없었지만 천막에 가끔 찾아와서 뒤에서 지켜보다 갔다. 그러나 자기 본당 신자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일부러 철거민의 천막을 찾아온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어서 평생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었다.
그런 그를 다시 만난 것은 30년 후였다. 그러나 사실 내가 주교가 된 그를 찾은 것은 옛날 기억을 되살리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시드니의 한 성당에 이상한 신부가 와서 멀쩡하게 잘 운영되던 한글 학교를 어느 날 갑자기 폐쇄해 버려서 내가 아는 교우들 여럿이 상처를 받고 있는 것을 고자질 하기 위함이었다. 시드니의 골치 아픈 신부는 인천 교구 소속이라서 소속은 다르지만 그래도 같은 집안이니 어떻게 좀 해 볼 수 없겠느냐는 것이었다.
다시 만나서 내가 그 때 어떻게 천막을 찾아오게 되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구 주교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철거민들이 본당에 찾아와서 도움을 요청했었기 때문에 가지 않았겠느냐고 했다. 구 주교는 그 때나 지금이나 겸손하고 온화했다.
나의 경험으로는 교제를 나누기에는 목사나 신부 보다는 스님이 훨씬 편하고 좋았다. 그것은 최소한 스님들에게는 대부분의 목사나 신부들처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모습이 많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스님들 가운데 나와 가장 인연이 깊은 스님은 단연코 쌍계사 주지 영담이다. 70년대 후반 농촌에서 목회를 하면서 주중에는 신학대학을 다닐 때 양귀자의 소설 ‘원미동 사람들’로 유명한 원미동의 주공 아파트에 방을 하나 세를 내어 자취를 하면서 다녔다. 5층 창문에서 내려다 보면 아파트 바로 뒤에 조그만 암자가 있고 젊은 스님 두 명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였다. 그 중에 한 스님은 제법 미모가 엿보여서 나는 처음에 “비구니절인가?”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 스님이 바로 영담이었는데 내가 직접 그를 만난 것은 1987년 민주수호 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부천 본부가 결성되면서 원미동 성당 서 신부와 함께 공동대표를 맞게 되면서부터이었다. 그 후 영담의 석왕사는항상 우리들 춥고 배고픈 민주세력이 피할 수 있는 따듯한 은신처가 되어주었다..
1989년 언론 자유화가 되어 부천에서도 국민들이 성금을 모아 시작한 한겨레신문처럼 시민들이 돈을 모아 만든 부천시민신문을 발간하기로 하고 영담이 사장을 내가 실무 책임을 맡았었다. 영담이 사장을 맡게 된 이유는 단순히 석왕사가 돈을 제일 많이 냈기 때문이었다.
신문 창간을 앞두고 우리는 아침 시간에 자주 모여서 회의를 하고 식사를 해야 했다. 한 번은 회의를 마치고 메뉴를 설렁탕으로 통일해서 시켰는데 영담이 종업원에게 자기 것은 고기를 빼고 달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농담으로 “아니? 스님! 설렁탕에 고기를 빼면 무슨 맛으로 먹습니까?”라고 했더니 영담이 천연덕스럽게 “국물에 고기 맛이 다 울어 납니다.”라고 응수를 해서 일동이 포복절도를 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했던 초기, 불상 훼손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의 발단은 1992년에 부천에 있는 17사단의 꼴보수 개신교인이었던 전차대대장이 창고를 넓힌다는 명목으로 천주교 공소와 불교 법당 등 타종교 시설을 멋대로 폐쇄시킨 것이었다. 심지어 성모상과 불상을 창고에 갖다 버리거나 장병들을 시켜 마대자루에 담아 야산에다 폐기하게 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장로 대통령의 등장으로 가뜩이나 청와대에서 찬송 소리가 나는 것에 신경이 쓰이던 불교계에서 이 사건을 '불상훼손'사건으로 몰아가고 급기야 국방부 앞에 가서 스님들이 집단으로 목탁을 두드리고 불교 신자들이 17사단 안에 까지 난입(?)하여 풍물을 치고 항의를 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사건이 나의 위수지역(?)인 부천에서 벌어졌고 불교계 저항의 진원지도 역시 전투적인 영담이 주지로 있는 부천에 있는 석왕사였다. 청와대로부터 국방부를 통하여 문제를 빨리 해결하라는 명령을 받은 사단장은 골치가 아프게 생겼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17사단은 참모장이 고교동기 동창이었고 사단장도 고교 선배이었다는 것이다. 급해진 사단장이 나에게 중재를 부탁했다. 나는 우선 월남전에 중대장으로 참전했던 사단장에게 겁을 좀 주기 위해서 "형님! 불교가 성질 나면 무서운 거 알죠?"하고 으름장을 놓았다. 월남이 망하기 전에 응오딘지엠이라는 미국의 꼭두각시 대통령이 앉아서 국민들을 배반하고 부정부패를 심하게 저지를 때 스님들 여러 명이 분신자살을 해서 세계를 놀라게 했었다.
"월남에서 그랬었지."
"그러니까 형님이 찾아가서 백배 사과를 해요."하니까 "왜 내가 안 했겠냐? 벌써 몇 번을 가겠다고 그랬지. 그런데 안 만나겠다는 거야." 했다.
"하긴 그렇겠죠. 그쪽에서는 대통령의 사과를 받겠다는 건데. 사단장 사과 가지고 되겠어요?"
"야! 너 석왕사 주지와 친하잖아? 네가 나서서 그 사람들 어떻게 진정 좀 시켜봐!"
부탁을 받고 내가 영담을 찾아가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니까 영담은 오히려 싱글싱글 웃으면서 "사건이 별 것 아니라는 것 우리도 다 압니다. 이 판에 장로 대통령 군기 좀 잡는 거죠. 사단장님께 괴롭더라도 조금만 참으라고 해주십쇼."라고 했다.
이 글을 쓰기 위하여 최근에 경남 하동 쌍계사를 방문 했을 때 영담은 또 한 번 나를 웃겼다. 내가 조계종의 25개 본사 주에 하나인 쌍계사의 주지로 교구를 운영 관리하는 일이 부처님의 대자대비한 마음만 가지고는 안될 것 같은데 어떠냐는 질문에 역시 영담답게 “부모 말도 안 듣고 출가를 한 놈들(승려)이라서 말을 잘 안 들어요”라는 대꾸를 했다. 생각해 보니 맞는 말 같았다. 웬만한 고집 없이 어떻게 중이 되었겠는가?
한국의 독보적인 구도소설가 박상륭의 소설의 주인공은 대부분이 승려들이다. 그런데 그 소설 속에 등장하는 중들이 대부분 기행을 일삼아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이번에 영담과 이야기 하면서 왜 각가지 기행을 일삼는 승려들이 많은가 하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즉 승려는 기본적으로 ‘부모 말도 안 듣고 가출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수도사들에게는 ‘순명’이 첫째 계율이어서 개인적 이탈의 기회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다. 그러나 홀로 깨쳐야 할 승려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는 셈이다.
호주에 와서도 스님들과 가깝게 지냈다. 대화 모임을 하면서 나 보다는 많이 젊은 보안 스님에게 참여를 권했었다. 그런데 보안은 한 번 온 다음에는 이런 이유, 저런 이유로 계속 참석을 하지 못했다. 어떤 때는 온다고 약속을 하고서는 오지 않기도 했다. 나는 나름대로 포교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권유했고 젊은 스님이라서 기대도 걸고 있었는데 계속 기대에 어그러져서 마지막에는 전화를 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성질을 부렸다. 그랬더니 보안 스님은 "제가 사람 관계에 서툴어서 그렇습니다."라고 답을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처음에는 "아니? 스님이 대인관계에 서투르다니?" 하는 의아심이 들었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보니 스님도 인간인데 생긴데로 살아야지 별 수 있겠나 싶었다..
그런데 그 후 경험해 보니 스님도 비구 보다는 비구니 스님들이 훨씬 부드럽고 재미도 있었다. 첫 비구니 스님은 행사장에서 아무도 상대를 하지 않아 혼자 않자 있는 것을 내가 가서 먼저 인사를 한 것이 인연이 되어서 사귀게 된 혜진 스님이었다. 그런 일로 그 후 혜진은 “목사님이 먼저 건드렸다.”고 농을 하고는 했었다. 혜진은 절 운영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면서 나에게 “목사님이 드나들어서 절이 잘 안되면 책임 져야 되요.”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절 이 문 닫게 되면 다음에는 절과 교회를 같이 해보자고 농담을 했다. 나는 ‘생활신앙’운동을 하지만 불교에서도 ‘생활불교’운동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생활 불교란 염불기도나 참선을 몇 시간씩 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생활불교란 생활 즉, “삶 그 자체가 그대로 불교가 되는 것이다.” 일상생활이 따로 있고, 또 종교생활이 따로 있어서 일상과 불교의 가르침이 이원화 되고 괴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불교로 사유하고 불교로 말하고 불교로 행동하여 삶 자체가 그대로 진리(Dharma)와 하나가 되고자 하는 것이 생활불교이다.
혜진 스님은 20대 때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취직을 하고 결혼해서 자녀 3을 낳고 살다가 50이 넘어 출가를 했던 개성이 강한 사람이었다.
스님이 가끔 실수로 집사람을 ‘보살님’이라고 불러서 집사람을 짜증나게 만들기는 하지만 하여간에 우리는 같이 식사도 하고 놀러 다니기도 하고 재미있게 지냈다. 만나면 나는 교회를 해 먹지 못하고 사는 이야기, 스님은 절이 잘 안 되는 이야기 등을 했다. 그런데 혜진 스님과 만나서 이야기하면 세상에 어느 누구와 이야기하는 것보다도 편했다. 왜냐하면 스님이나 나나 버릴 대로 버린 몸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아무 것도 두려운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허물 없이 지내는 또 다른 스님은 소녀 출가한 정오 스님이다. 정오는 절을 짓는 문제에 대하여 나와 항상 의논을 하고 노무현, 노회찬. 김근태, 박원순,. 백기완 추도식 때마다 와서 염불을 해주는 전속 승려였다. 노회찬 추도식 때는 추도식에 참여 했던 불교 신자가 정오에게 100불을 시주했더니 그 돈을 몰래 주최측에 주고 가기도 했다.
아내가 집을 비웠을 때에 정오를 집으로 초대해서 평소에 아내와 함께 만날 때는 나눌 수 없었던 선수끼리 할 수 있는 전문적인(?)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굳이 집에서 만난 것은 절에서 만나면 찾아오는 사람, 걸려오는 전화 때문에 번거롭고 밖에서 만나면 남의 눈에 들어나고 해서 방해를 받지 않고 대화를 하기 위해서였다.
한 번은 정오 스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떻게 지내세요? 하도 소식이 없어서 전화 했어요. 한국 이야기 자주 하시더니 말도 없이 가버렸나 하고.”
나는 “아무 일도 없이 지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 일도 없으면 편안해야 하는데 편안치를 못하게 보내고 있어요.”라고 답을 했다. 그랬더니 “왜 편안치를 못하세요?”라고 물었다. 그래서 ‘이 스님이 부처님은 알아도 노자는 모르는 모양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설명해 주었다.
내 설명을 듣고 정오는 “불교에서 쓰는 무애행’(無礙行)이라는 말로 이해하면 될 것 같네요.”라고 했다. 무애행은 지금까지의 모든 생각으로부터 벗어난 행동이며 어떤 사고에 의해서도 중매되지 않는 행동이다. 그러니까 '아무 생각 없는' 행동인 셈이다. 쉽게 말해서 ‘그저 하는 것’이라고 표현 할 수 있는 무애행은 모든 생각으로부터 벗어난 삶을 말하는 바로 禪의 이상이다.
한 번은 정오가 세수가 70이 넘은 혜진이 건강이 안 좋아져서 손이 떨려서 머리를 깍지 못한다 해서 깎아 주겠다고 했더니 혜진이 번번이 어떻게 남의 손을 빌리겠느냐고 그냥 머리를 길러서 묶고 지내련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다른 스님과 함께 만났는데 승복에 모자를 눌러쓰고 나왔는데 모자 밑으로 머리카락이 비쭉 비쭉 나온 것이 보기에 어색하고 안 좋더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라도 스님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좋지 않으냐?”고 했더니 정오는 ”그럴 바에야 아예 가사를 입지 않고 그냥 평복을 입으면 더 자유롭지 않겠느냐? “고 했다. 그래서 평복을 입고 머리와 수염도 기르고 심지어는 여자까지 취했던 원효나 경허 스님도 있지 않았느냐고 하니까 정오는 ‘그 분들 정도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이 그 분들의 행적만 따라 하면서 자신을 합리화 하는 것은 문제‘라고 했다.
그런데 금년에 시드니에 다시 돌아와서 정오를 만나서 혜진이 세수 82세로 세상을 떠나 장례를 지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정오에 의하면 장례에 나타난 혜진 주변의 모습은 생전에 듣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는 것이다. 원래 결혼식은 많은 것을 가릴 수 있지만 장례식은 더 이상 가리려고 해야 가릴 수가 없어서 모든 것이 들어나게 되어 있다.
아마도 정오는 생전의 혜진을 잘 알고 있는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죽을 때까지 이야기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화를 끝내고 우리는 “죽을 때 깔끔하게 죽자”고 농담을 하고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