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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란 스크랩 강한민국 强韓民國 노무현
홍범구주(洪範九疇) 추천 0 조회 35 09.06.02 00:3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사람|강한민국 强韓民國 노무현

Roh Moo-hyun

 

이글은 노무현 대통령 서거 하루전에 포스팅 한 글입니다.

 

노무현과 과거 열린우리당 소속의 386 정치인들을

천박하고 경박한 또는 잡초 같은 정치인들일 뿐이라는

고명하신 대학교수 황상민<연세대 심리학과 교수  글을 읽었다.

뭘 몰라도 너무 모르고 하는 소리다.

물론 나도 386은 싫다.

 

 

간땡이 큰 사고뭉치 노무현,

그가 대통령이 되어서 청와대에서 가장 먼저 한 실수는

고작 '쌍꺼풀 수술'을 한것이다. 그것은 아쉬웠다.

그가 대통령이 되기 전의 얼굴에는 햇살에 그을린 '칠천만 민족'의 우리들의 모습이 있다, 재래시장과 서울역, 그리고 논두렁 옆에서 있는 '우리의 얼굴'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바보 노무현, 승부사 노무현에서 남모르게 우리들의 얼굴을 찾았는지 모른다. 그가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이땅의 누구라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꿈을 깨워주는 얼굴이 노무현이에게 있었다.

 

나는 이상하게도 노무현에게서 '못 배우고 쌍스럽고 거친 대한민국'의 용솟음치는 민족 네이션 에너지, '조선혼朝鮮魂'을 본다.

작금 그는 지금은 불행하게도 참을 수 없는 모욕인 '야바위꾼 취급'을 받고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파란만장한 노무현에게서,

이리 치이고 저리 밟히면서도 굿굿히 세계사의 중심 속을 걸어왔던, 정말 간땡이 큰 사고뭉치 대한민국의 칠천만 민족_

오천년 우리 역사 강한민국_ 强韓民國의 '굳세고 지칠줄 모르는, 세계사 속에서 '거친 힘''을 보는 것이다.

 

 

바보 노무현_ 승부사 노무현, 그는 밟혀야 힘이 솟는 활화산이다.

동방의 콩알만한 작은 나라, 파란만장한 기복속에서 이룬 강한민국_ 대한민국, 

우리는 그렇게 세계 열강과 강대국의 틈 사이에서 '누구도 꿈꾸어 보지 못한 ' 진정한 간땡이 큰 사고뭉치의 기적, 대한민국'은,

이리 밟히고 저리 채이면서도 대~한민국!의 함성을 세계사의 복판에 토해 놓았듯이, 그는 그렇게 '우뚝'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었다.

 

 

 
Kwon Yang-sook and Roh Moo-hyun at the 2006 APEC gala dinner with President Vladimir Putin of Russia (centre)
and George W. Bush and Laura Bush (right)
 
2006년 부산에서 열린 에이펙APEC 갈라 만찬회장에서 똘똘이 노무현과 권양숙 여사 모습이다.
세계의 사고뭉치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과 미국의 죠지 부시 내외와 함께 '그에게는 썩 어울리지 않는
별로 맛없는 식사에 할일 없는 파티'에 앉아 있다. 

 

 

 

사람|강한민국 强韓民國 노무현

Roh Moo-hyun

 

위키피디아 자료를 편집했습니다.

'밟혀야 힘을 내는 노무현'(盧武鉉, 1946년 음력 8월 6일/1946년 9월 1일 ~ , 경상남도 김해시 출생)은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이며 정치인, 국회의원, 법조인이다. 본관은 광주(光州). 사법고시 합격후 판사생활을 하다가 인권변호사로 활동하였다. 정치에 입문해 부산과 서울에서 국회의원으로 활동했고 전임 김대중 대통령 임기 동안 해양수산부 장관을 역임한 후, 200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4년 3월 국회로부터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탄핵 소추를 당해 대통령 권한이 정지되었으나 같은 해 5월, 탄핵안이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돼 대통령직무에 복귀하였다. 2008년 2월 25일, 5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고향인 경상남도 김해시의 봉하마을로 돌아갔다. 2009년 노건평 등 일가친족이 연루된 뇌물수수 사건이 발생하여 검찰이 수사중에 있다. 2009년 4월 30일 검찰소환 통보에 따라 김해 봉하마을을 떠나 서울 대검찰청으로 청와대에서 제공한 버스를 타고 상경하였다가 검찰조사를 마친 후 같은 편으로 봉하마을로 돌아갔는데 이로써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에 이어 역대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3번째로 검찰에 소환조사를 받게 된 인물로 기록되기도 했다.

 

 

 

 
나는 노무현이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논리적이라는 자신감만 조금 덜했었다면
그는 더욱 성공적인 대통령을 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대통령이 다 알아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뭐든지 웃통을 벗어던지고 아무나와 토론'하려고 했다.
 
그러니 더러 말이 많았고 가끔 실언이 많았다.
그는 '대통령을 때려 치우고 싶다'고해서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하고 알았어야했다.
 
 

 

어린 시절


1946년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에서 태어나 아버지 노판석과 어머니 이순례의 3남 2녀 중 막내아들이다. 1953년 대창초등학교에 입학, 학업 성적은 우수했으나 가난으로 결석이 잦았다고 한다. 5학년에는 담임 선생님의 권유로 전교 학생회장을 했다. 그뒤 경남 김해의 진영중학교에 진학했다. 입학금이 없어 중학교 1학년을 외상으로 입학하였다. 1학년 말에,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집권자인 이승만의 생일을 기념하는 교내글짓기대회가 열리자 노무현은 백지동맹을 선동하다가 정학(停學)을 당하기도 했다.

 

 

청소년기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중학교를 1년 휴학한 뒤 장학금을 얻어 가까스로 중학교를 다니다가 1963년에 진영중학교를 졸업했고, 1966년에는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이후 농업협동조합의 입사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한 어망 제조업체에 취직하였으나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과 발등을 다쳐도 치료비조차 주지 않는 고용주의 비정함에 실망하여 그만두었다. 그뒤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사법고시 공부에 매달리게 된다. 1968년 육군에 입대하여 육군 제12사단(을지부대)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1971년 육군 상병으로 만기 제대했다.

 

제대 후 1971년 5월부터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동향에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권오석의 둘째 딸 권양숙과 1973년 결혼해 1973년에 아들 노건호, 1975년에 딸 노정연을 낳았다. 그러나 신세한탄을 하며 허송세월을 보내던 중 권양숙의 내조로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는 증언이 있다. 사법시험에 도전해 세 번 실패한 후, 네 번째 도전에 유신시절인 1975년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됐다.

 


학력


대창초등학교
김해 진영중학교
부산상업고등학교 졸업
1998년 고려대학교 노동대학원 수료
1999년 고려대학교 정치대학원 최고위지도자과정
2004년 러시아 모스크바 대학교 명예 정치학 박사
2006년 알제리 알제대학교 명예 정치학 박사
2007년 6월 원광대학교 명예 정치학 박사

 

 

 

변호사 시절


1978년 5월, 판사를 그만두고 부산에서 변호사로 개업하였고, 세무·회계 전문 변호사로 명성을 쌓았다. 이후 주로 조세 및 회계 사건 등을 통해 높은 수임료를 받았다. 당시 평범한 동료 변호사들처럼 지역의 경제인들과 어울리며 요트(딩기)를 즐기는 등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그러나 민청학련 사건 변론으로 이름이 높았던 김광일 변호사가 1981년 부림사건의 변호에 참여하라고 권유했고, 이를 수락함으로써 본격적인 인권변호사 활동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2년에는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의 변론에 참여하였고 1984년부산공해문제연구소 이사를 거쳐 1985년에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장을 맡게 되면서 시민운동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그해 자신의 사무실에 노동법률상담소를 열기도 했다. 또 1987년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아 6월 민주항쟁에 앞장섰다. 그 해 8월 22일의 거제도 대우조선 사건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가 사망하자 이상수 등과 함께 사인 규명 작업을 하다가 9월에 제3자 개입, 장식(葬式)방해 혐의로 경찰에 구속되었다. 이어 1987년 11월에는 변호사 업무정지 처분을 받았다.

 


정치 입문


재야 활동을 하던 그는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이던 김영삼에게 발탁되어 1988년 4월 그는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의 부탁을 받고 제13대 총선에 출마하여 정치에 입문하였고, 1988년 부산 동구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국회 노동위원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여 이해찬, 이상수 의원과 함께 ‘노동위원회의 3총사’로 불렸으며, 제5공화국이 끝난 직후, 그해 11월 제5공화국 비리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전 국가안전기획부장 장세동, 전 청와대 경호실장 안현태, 전 법무부장관 이종원,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 등을 상대로 한 증인신문에서 차분하고 논리적인 질의와 치밀한 추궁으로 청문회 스타가 되었다. 이어 최초로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5공 청문회에서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명패를 던지는 등의 난폭한 언동으로 국민의 관심을 받았다.

 

1987년 12월 현대중공업 파업 현장에서 강연 중 '사람을 위해 법이 있는 것이지 법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는 구절이 문제되어 언론의 공세를 받기도 했고 1989년초 국회 5공비리·광주사태 특별위원회의 증인 출석 여부를 둘러싼 정부·여당의 집요한 방해 책동에 항의해 의원직 사퇴서를 냈다가 번복, 이를 다시 거둬들이기도 했다. 한편 이무렵 김영삼은 그를 상도동 자택으로 수시로 불러서 면담도 하고 용돈도 넉넉히 지원해 주었다.

 

 

 

CNN 사진

 

역사에는 if(만약에) 가 없다.

그러나 노무현이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우리 민족사에 정말 놀라운 돌출변수이다.

사실은 정작 그 스스로도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대한민국 오천만 국민이 세계사의 복판에 설수있다는 것이다.

노무현은 우리에게 그것을 일깨워 주는 사람이다.

 

노무현이 청와대를 들어가고는 영 달라져 버렸다.

그는 부두 노동자와 지하철 근로자, 그리고 재래시장의 목소리와 너무나 먼 곳으로 가서,

다른 정치가들이 하고 있는 짓거리처럼

아쉽게도 '월급이 팡팡 나오는 국가공무원 대통령 직책'을 조금 즐기기 시작했다.

노무현은 '돈 없고 빽없는 사람들의 아이콘'이었다는 사실을, 그가 그냥 깜빡 잊었던 것일까?

 

그는 퇴임하자마자 상도동도 동교동도 연희동도 아닌 그가 태어난 고향땅 봉하마을로 돌아가서 경운기를 타고있다.

 

 


정치 활동


1990년 1월 12일,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 민주정의당 총재인 대통령 노태우,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이 민자당을 창당하기로 하는 삼당합당 선언을 하였다. 그러나 노무현은 이를 부도덕한 야합이라는 이유로 강력히 반대하며 민자당에 합류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김영삼의 3당합당 참여를 민주화운동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해 자신의 후원자였던 김영삼과 결별하였다. 그리고 1992년 민주당 후보로 부산 동구에 출마하여 낙선한 뒤 1993년 민주당 최연소 최고위원이 되었다. 1995년에는 부산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36.7%의 득표율을 얻었으나 결국 낙선했다.

 

14대 대선에서 패한 후 정계 은퇴를 선언한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이 1995년에 전격적으로 복귀하면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고, 노무현은 이를 '전근대적 정치행태'라고 비난하면서 참여하지 않았다. 이듬해 1996년 4월 11일 실시된 대한민국 15대 총선에서는 서울 종로구에 통합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신한국당의 이명박 후보, 새정치국민회의의 이종찬 후보에 밀려 3위로 낙선했다.

 

이후 그는 이부영, 박계동, 김원기, 이철 등과 함께 국민통합추진회의, 일명 '통추'를 결성하여 활동하게 되는데, 15대 대선을 앞두고 당시 통합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순 전 서울특별시장이 신한국당의 이회창과 연대 및 합당을 결정하였고, 이로 인해 통추 내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이부영과 이철 등은 "3김 정치를 청산해야 한다."며 신한국당을 선택하자고 주장하였고, 노무현과 김원기, 김정길 등은 "군사정권과 그 후예들을 심판하여 50년만의 정권교체를 이룩해야 한다."며 국민회의 입당을 주장하였다.

 

결국 1997년 11월 노무현은 김정길, 김원기 등의 집행위원들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여 김대중을 지지하였다. 입당 후 김대중은 노무현을 비롯한 통추 집행위원들을 독대한 자리에서 1995년 야권 분열에 대해 "오늘은 매우 기쁜 날이다. 여러분과 다시 일하게 된데 대한 기쁨뿐만이 아니라, 그 동안 여러분에게 지고 있었던 마음의 짐을 풀었다는 것이 가장 기쁘다."는 말로 사과를 대신하였다. 그리고 1997년 12월 18일, 김대중이 15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노무현은 사상 처음으로 여당에 몸담게 되었다.

 

1998년 2월, 한나라당 의원 이명박이 서울시장 경선 출마를 선언하며 의원직을 사퇴하였고, 이에 따라 치러진 7월 21일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서울 종로구에 출마하여 한나라당의 정인봉 후보를 물리치고 6년만에 국회에 복귀하게 되었다. 그 후 2000년 4월, 대한민국 16대 총선에서 상대적으로 당선 가능성이 높았던 종로구 공천을 거절하고, “지역주의 벽을 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면서 부산 북·강서을 지역구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결국 낙선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네티즌들이 인터넷을 통해 노사모를 조직하였고, 이후 노사모는 노무현의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국회의원에 낙선이 된 후, 그는 2000년 8월부터 2001년 3월까지 김대중 정부의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대통령 선거


노무현이 당적을 두고 있었던 새천년 민주당은 대선 1년 여를 앞두고 극심한 내홍에 휩싸여 있었다. 당내 소장파들이 부패 추문에 시달리는 낡은 동교동계 구파를 물갈이하는 등 당의 정체성을 선명히하자는 '정풍 운동'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정풍 운동'은 당이 정체성의 깃발을 다시 세우자는 뜻도 있었지만 대선을 앞두고 수세에 몰려있던 새천년민주당의 부활을 꾀하는 노림수이기도 했다. 이에 '정풍 운동' 과정 속에서 차기 대통령 후보를 어떻게 선출하면 좋겠느냐는 논의가 자연스레 수면 위로 올라왔고, 미국의 예비선거제를 원용한 국민경선제로 흩어진 민심을 끌어모아 대통령 후보 경선을 진행하는 안으로 당의 의견이 모아졌다. 후보는 국민경선제를 거쳐 선출하는 방식으로 결론이 났지만, 문제는 국민경선제를 언제 실시하느냐였다. 당내 경선 후보간 의견은 '지방선거(6·13) 이후'와 '이전'으로 양분됐다. 노무현은 "지방선거 전에 대선 후보를 선출하지 않으면 선거를 치를 구심점이 없어지도 책임 소재를 두고 논란만 분분할 것"이라면서 지방선거 이전에 대선 후보를 선출하는 게 좋다는 의견을 냈다. 노무현은 또 그것이 "선거 득표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당내에서 의견을 수합한 끝에 새천년 민주당의 국민경선제는 지방선거 전에 치르기로 했고, 구체적인 시기는 3월과 4월로 결정이 났다.

 

16부작 정치드라마로 불렸던 국민경선제는 제주를 필두로 전국 16개 시도를 돌면서 당원(50%)들과 국민(50%)들이 직접 투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국민경선제에는 노무현을 비롯해 김근태, 김중권, 유종근, 이인제, 정동영, 한화갑(이상 가나다순) 등이 후보로 출마하여 누가 더 새천년 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적합한지를 놓고 승부를 겨뤘다. 대회 1회전이라고 할 수 있는 제주에서 한화갑 후보가 의외의 1위를 차지하면서 국민경선제는 그 막을 올렸다. 제주에서 노무현은 득표 3위를 기록했다. 두 번째 울산에서는 부산 출신인 노무현이 가볍게 1위를 했다. 다음은 광주에서 경선을 치를 차례였는데, 이변은 바로 그 광주 땅에서 시작된다. 부산의 노무현이 광주에서 당당히 득표 1위를 거머쥔 것이다. '이인제 대세론'이라는 말을 지어내며 당내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었던 이인제와 호남 지역에 정치적 기반을 두고 있는 한화갑을 모두 밀어낸 대이변의 승리였다. 노무현은 당시 광주 1위를 기록한 다음 연단에 서서 자신의 승리가 "광주의 승리, 민주당의 승리, 한국 민주주의 승리로 이어질 수 있게 하겠다"면서 감격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후 노무현은 '노무현 대안론'을 퍼뜨리며 단숨에 지지율이 급상승했고(노풍: 盧風), 이인제의 텃밭인 대전·충청권을 제외한 거의 전 지역을 석권해나갔다.(경선 끝자락이었던 경기 경선에서는 정동영이 1위 차지.) 그리고 2002년 4월 26일, 서울 경선을 마지막으로 노무현은 새천년 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공식 선출됐다.

 

노무현은 대선 후보로 선출된 다음에, 대선 승리를 위한 계획으로 '민주세력대통합론'을 내놓았다. 87년 대선에서 양김이 분열되면서 쪼개졌던 민주화세력을 하나로 묶어내 한국의 미래를 함께 열어제치겠다는 포부였다. 이를 위해 노무현은 김영삼 전 대통령을 만나 민주세력 통합을 이야기했고 지방선거 때의 연합을 위해 후보 추천을 받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노무현은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통일민주당 시절 김영삼으로부터 손수 받은 손목시계를 내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노무현의 '민주세력대통합론'은 국민들에게 대선 승리를 위한 정략으로 읽혀지면서 그 진정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결국 이 일은 노무현 지지율 하락의 한 빌미가 되고 말았다. 악재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노무현이 당적을 두고 있던 새천년 민주당은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아들은 홍업씨와 홍걸씨의 비리로 국민의 지지에서 계속 멀어지고 있는 터였다. 이 일은 새롭고 신선한 이미지였던 노무현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줬고, 지지율은 본격적인 내림세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노무현은 당의 지지율 하락과 본인의 지지율 급락 속에서도 지방선거 승리를 위한 전략과 행동에 부심해야 했다. 이는 대선 후보로서 선거에서 책임있는 위치에 서야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노무현 자신이 국민경선제 실시 시기로 지방선거 전을 거론하며 "후보가 지방선거 결과에 책임져야 한다"고 한 말 때문이기도 했다. 특히 노무현은 부산시장을 반드시 당선시키겠다고 강조했다.(한이헌 전 감사원장을 후보로 내세움.) 또한 자신의 '후보 재신임'을 내세우며 선거 결과를 책임지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보였다. 하지만 새천년 민주당에서 돌아선 민심은 노무현의 외침을 외면했고,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은 광역단체장에서 호남과 제주 등 4석만 건쳐 대참패했다. 대선을 6개월 남짓 남겨둔 시점에서 당내는 "이러다 대선에서 패하는 것 아니냐"며 불안감에 술렁거렸고, 노무현의 개혁성 등 그의 색깔이 탐탁치 않았던 일부 민주당 의원들은 집단적으로 '노무현 흔들기'에 나섰다. 노무현은 선거 전 약속한대로 "후보 재신임을 묻겠다"고 했고 당 회의에서 후보 재신임을 받아냈지만, 이는 의원 전체의 총의는 아니었다. 여기에 월드컵 바람을 타고 정몽준이 정풍(鄭風)이라는 거센 돌풍을 일으키자, 노무현은 지지율도 토막이 나고 당내 의원들로부터도 배척받기 시작했다. '노무현 흔들기'는 더욱 노골화되었고, '후보 단일화론'은 물론이거니와 '후보 교체론'까지 나왔다. 노무현은 경쟁력이 없는 만큼 정몽준을 수혈해 대선 새 판 짜기에 나서야하지 않느냐는 정치공학적 판단이었다.

 

10월 들어서는 상황이 더욱 어렵게 돌아갔다. 수도권 의원을 중심으로 새천년 민주당에서 대규모 탈당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이들 선도 탈당에 뒤이어 수십명의 의원들이 탈당길에 따라 나섰고, 이들은 '후보단일화협의회'(후단협)을 결성하여 노무현에게 단일화에 나설 것을 압박했다. 그러나 노무현은 "원칙없는 단일화를 반대"한다면서, "국민들이 대선 후보로 노무현을 뽑았으니 만큼, 그 민심을 저버려서는 안 될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무렵 탈당은 후단협 한 갈래로만 진행되지 않았다. 전용학(새천년 민주당 대변인 등 당직 역임) 등을 필두로 한나라당으로 당을 옮기는 탈당 행렬도 이어졌다. 상대적으로 노무현에 우호적이었던 소장파에서 탈당 의원이 나왔다. 김민석은 정몽준의 신당 세력과 연대하러 당을 떠난 것이다. 11월 들어 노무현 진영의 입장이 조금 뒤바뀌기 시작했다. "원칙없는 단일화에 반대한다는 뜻에는 변함이 없지만, 국민들이 원한다면 단일화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라면서 '국민경선 방식'의 단일화 방안을 제시했다. 국민통합21과 후단협 측은 노무현 진영 측의 제안을 반대하며 '대의원경선 방식'의 단일화 방안을 역제안했다. 겉으로는 "국민 경선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속내는 대의원 경선 방식이 정몽준 측에 더 유리해서였다. 국민경선이냐, 대의원경선이냐를 놓고 양측은 팽팽하게 대립을 했다. 새로운 제안은 노무현 쪽에서 먼저 나왔다. 노무현 진영은 국민경선 실시가 물리적으로 어렵다는 점을 수용하여 '여론조사 방식'의 경선을 새롭게 제안했다. 마침 판세는 1강(이회창) 2중(노무현-정몽준)의 구도로 바뀌고 있던 차였다. 국민통합21도 더는 단일화 방안을 놓고 입씨름을 벌일 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노무현과 정몽준은 밤늦게 직접 만나 단일화 협상에 나섰고, 러브샷으로 소주잔을 들며 '여론조사 방식'의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협상 타결을 알렸다.

 

단일화 협상 파기와 재협상, 텔레비전 토론과 여론조사를 거쳐 2002년 11월 24일 노무현-정몽준 단일후보는 '노무현'으로 최종 판가름이 났다.(여론조사1: 노무현 승리, 여론조사2: 무효-이회창 지지율 낮음, 역선택 의심)

 

그리고 마침내 2002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근소한 차로 이기고 당선됐다. 이어 노무현은 참여 정부를 표방하며 2003년 2월 25일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대통령직 수행

 

Roh with U.S. President Bush during a White House visit in May 2003

 

노무현, 그는 대통령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했다.
평생 비행기 한번 타본일이 없던 노무현이 부시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미국여행을 시작함으로서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보았다.
 
사실 미국이란 노무현에게 그의 정치적인 첫 분깃점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과 연루되어 있어
마음에 큰 부담이 ?은 여행이어서 온세상이 주목하던 회담이기도 했다.
 
당시 대한민국 국민들은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 불평등 SOFA협정 등 때문에 미국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다. 노무현은 '미국에 할 말은 한다'며 대미관계에 있어 독자노선을 갈 것처럼 보였다. 

 

 

 


취임 1년차 (2003년 2월 25일~2004년 2월 24일)
 
2003년 5월 14일에 노무현 전(前) 대통령과 부시 미 대통령이 함께한 모습2003년 2월 25일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함으로서 참여정부가 출범하였다.[9] 2003년 2월 26일 고건 총리 임명 동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고, 2003년 2월 27일 참여정부 조각 발표로 새 내각을 출범시켰다.

2003년 3월 9일에 검찰 개혁의 향배와 검찰 인사를 놓고 검찰이 일선 검사들과 마찰을 빚자, 대통령은 강금실 법무부 장관과 일선 검사들이 함께하는 토론. '대통령과 전국 검사와의 대화'(토론회 명칭)가 방송 3사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 이 자리에서 검사들은 검찰 개혁을 외치면서 대통령이 인사위원회도 거치지 않고 인사 개입을 하는 것은 검찰 개혁이 아니라며 대통령 검찰 인사의 부당성을 지적했으나, 노무현 대통령은 “지금 인사위원회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모두 인사 대상”이라며 “여기서 인사하지 않으면 낡은 검찰로 몇 달 더 가자는 것”이라며 검찰 인사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검사들의 부적절한 발언에 대해 대통령이 “이쯤되면 막가자는 거죠”라고 지적해 한때 유행어가 됐다.

2003년 3월 20일에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고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에 파병을 요청하자, 그는“국익을 위해 파병”해야 한다며 이라크 파병이 ‘전략적 선택’이라고 표현한 대국민담화문을 발표했다.

 

2003년 5월 21일에는 각종 사회적 갈등이 봇물터지듯 쏟아져나오자, 그는“이러다가 대통령직 못해먹겠다는 위기감이 든다”며 국정 운영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FTA를 반대하는 농민단체의 시위와 굴욕외교라는 한총련의 저지로 5·18 기념식에 참석하지 못한 사건이 이 발언의 결정적 도화선이 됐다.

2003년 10월 청와대 총무비서관 최도술이 SK비자금을 수수했다는 의혹이 터지고 10월 10일에는 대통령 측근비리 의혹에다가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 해임건의안 가결, 윤성식 감사원장 임명동의안 부결 등의 문제들이 계속해서 발생하자, 그는 청와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국민에게 재신임을 묻겠다”고 선언했다.

그 밖에도, 취임 1년차에는 2003년 2월 25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 5월 15일 조지 W. 부시와 정상회담을 하였다.


 

취임 2년차 (2004년 2월 25일~2005년 2월 24일)
 

 

Roh with Bush during APEC 2005 in Korea.

죠지 부시가 한국의 에이펙APEC 2005에 왔다.

 

 


룰라 현 브라질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2004년 1월 연두 기자회견을 가졌다. 기자회견에서 "지난 수십년간 끊어내지 못했던 정치와 권력, 언론, 재계 간 특권적 유착구조는 완전히 해체될 것이며 투명하고 공정한 사회로 성큼 다가설 것"이라고 말했다.

 

2004년 3월 형 노건평이 대우건설 사장 남상국으로부터 청탁성 명목으로 뇌물을 수수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노무현은 언론 브리핑에서 남상국 사장을 질타했고, 3월 11일 남상국은 한강에서 투신했다.

2004년 3월 12일에 대한민국 국회가 찬성 193표, 반대 2표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가결시켰다. 탄핵안 가결로 노무현 대통령의 직무 수행이 정지되고, 고건 국무총리가 직무권한대행의 역할을 맡았다.

2004년 4월 15일에 있던 총선에서는 대통령이 당적을 두고 있는 여당 열린우리당이 원내 과반수를 차지해 제1당이 되었다.

2004년 5월 14일에 헌법재판소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심판 사건을 기각했다. 헌법재판관들의 개별 의견은 공개되지 않았다.

2004년 10월 21일 : 헌법재판소가 “신행정수도특별법은 서울을 수도로 보아온 관습헌법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수도 이전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수도는 서울이라는 것이 관습헌법에 해당하므로, 수도이전을 위해서는 헌법개정을 통해 수도의 위치를 삽입하거나, 수도가 서울이라는 법적 확신이 소멸해야 한다는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8:1로 위헌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그가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던 행정수도 이전이 차질을 빚게 된다.

 

 

 

 


취임 3년차 (2005년 2월 25일~2006년 2월 24일)

 

브리테니커 사진

 

노무현의 정치 인생이 '질풍노도'였다면 그의 대통령 시절도 순탄치 않았다.

국회는 다수당인 한나라 당에서 이른바 대통령 탄핵을 통해 노무현을 거세함으로 '대통령이 없는 청와대'를 월세 한푼 내지 않고 몇달간 공짜로 쓰기도 했고, 그의 통치 작품인 한반도 개조론의 골자이던 행정수도 이전 구상은 헌법 재판소에서 이른바 '신행정수도 특별법'이 위헌이라고 판정을 내렸다.

좋은 뜻으로는 국가가 참 다이내믹했고, 나쁜 뜻으로는 도무지 역사의 청룡열차를 타고 있듯이 가파르고 힘든 시절이었다.

 

퇴임을 하고서도 노무현은 그 사법부의 면전 앞에, 오라가라 수모를 당하고 있다. 대통령이 되자마자 방송에 나와 평검사들에게 웃통을 벗어들고 맞짱을 뛰자고 덤벼들던 그 검사들 앞에 서서 진술을 한다. 그가 뽑아 세운 검찰총장이 그를 집어 넣을 것인지 말것인지를 신중히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아무리 보아도 '간땡이 큰 사고뭉치'의 사고로 보기에는 좀 뭐한, 쪼잔한 겨우 '쌍꺼풀 수술' 정도의 가십 액수의 이야기가 오고간다. 며칠전에는 그가 받았다는 환갑기념 시계는 고향 논두렁에 버렸다,고 했다. 누구는 수조원을 먹었다는데, 간땡이 큰 노무현이 고작 몇 '쌍꺼풀 수술'비인 십만불 옆에 있었다는게 검찰의 요지다. 물론 쌍꺼풀 수술도 내가 맘에 들지 않긴 하다.

 

바보 노무현,

승부사 노무현_ 밟혀야 힘이 솟는 노무현이 그래서 이제 장래가 궁금하다.

 

 


2005년 3월 2일 : 행정도시특별법이 국회에서 가결되었다. 행정도시특별법은 신행정수도특별법이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이 나자, 몇몇 부분을 수정한 뒤 입안한 법이다.

2005년 2월 14일 그가 직접 고안한 청와대 업무관리시스템 'e지원'이 노 대통령과 강태영 업무혁신비서관 등 시스템 구축에 관여한 5명 명의로 특허를 출원해 특허를 취득했다. 2005년 7월 행정자치부에 시범 도입됐다.

2005년 8월 3일 국가보훈처는 광복 60주년을 맞아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47명을 포함한 214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에게 서훈이 추서되었다. 지난 3.1절 여운형 선생 등 54명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투사 서훈에 이어 주요한 사회주의 활동가들에 대해 재조명해 뒤늦게 서훈이 추서되었다. 하지만 보수파들의 반대와 훈격논란이 일기도 했다.

2005년 3월 7일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과 영유권 주장 등 일본과 중국의 역사왜곡에 체계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동북아역사재단을 지시,설립하였다.


 

취임 4년차 (2006년 2월 25일~2007년 2월 24일)
 

 

Roh Moo-hyun with then-Prime Minister of Japan Shinzo Abe and U.S. President George W. Bush at APEC 2006 in Hanoi.

 

제법 대통령 틀이 잡히고 노무현도 본격적으로 '대통령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하노이 에이펙은 2006년에 열렸다. 별로 밥맛없는 일본 수상 아베 신조와 부시 대통령과 앉아있다. 말많고 탈이 많은 노무현이 가장 얌전한 때는 해외순방 때다. 노무현은 누구처럼 '잘 하지도 못한 영어'를 해외순방 때는 씨부렁이지는 않는다.

 

후세에 사람들은 노무현 정권 아래에서 한 가장 위대한 일이 국민들의 힘이 커질대로 커지도록 한,

'간땡인 큰 국민주권'으로 키운 일일 것이다.

 

 


2006년 11월 18일에 권양숙과 노무현이 APEC에서 푸틴 전 러시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를 만났다. 2007년 1월 9일 : 노무현 대통령이 그간 5년 단임제에서 4년 연임제로 헌법개정을 제안했다.

 

2007년 2월 22일 : 그는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 탈당을 선언, 이와 함께 한명숙 국무총리가 3월 초순께 총리직에서 물러나 당으로 복귀하기로 했다. 한편 노무현 대통령은 이날 당을 떠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면서 '탈당' 대신 '당적 정리'라는 색다른 표현을 썼다. 종래 대통령의 임기말 탈당이 대선을 앞둔 당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등떠밀리듯 이뤄진 것에 비해, 자신의 탈당은 개헌 등의 상황에 따른 자발적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풀이할 수 있다.


 

 

취임 5년차 (2007년 2월 25일~2008년 2월 24일)


2007년 1월 신년연설을 발표하였다. 신년연설에서 그는 "권력형 비리는 없고 밀실, 측근 가신 이런 말도 사라졌다"고 말했다.

2007년 6월 3일 참여정부평가포럼(참평포럼) 특강이 열린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강연하였다. 참여정부와 역대 정부의 성장률, 수출증가, 주가 추이 등에 대한 지표를 조목조목 들면서 “어느 정부와 비교해서 실패라는 얘기냐?”고 반박했다. 이어 “아무런 전략도 없이 참여정부의 성과를 파탄이니, 실패니 공격하는 것만으로 우리 경제를 일류로 만들 수 없다”며 한나라당과 이명박, 박근혜 대선주자를 비판하였다.

 

2007년 6월 8일 : 6월 3일 참여정부평가포럼에서 한나라당 후보들을 비하하는 내용을 발언한 일로 이에 한나라당은 노무현 대통령을 선거법위반으로 선거관리위원회에 고발하였다. 이에 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 중립 위반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은 선거중립의무라는 모호한 구성요건은 위헌이며 세계에 유례없는 제도라고 주장했다.

 

2007년 9월 12일 : 노무현 대통령은 오전 제주 서귀포에서 열린 ‘제주혁신도시 기공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통해 “균형발전정책은 참여정부의 상징적인 국가발전전략”이라고 소개하고 “균형발전정책이 국가의 정의로운 목표로 뿌리 내려 어떤 정부도 이를 흔들 수 없도록 해야 한다”면서 “여전히 많은 기업과 사람이 수도권을 선호하고 있고 수도권 규제완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거세지는 등 언제든지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강한 압력이 존재하고 있다”라고 경고하면서 “그래서 내놓은 것이 2단계 균형발전정책으로 지방투자기업에 세제혜택과 같은 강력한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지방의 생활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함으로써 기업과 사람이 지방으로 모여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얼마나 성공하느냐는 그 지방의 역량에 달려 있다”면서 “중앙에 더 많은 지원을 요구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성공할 수 없으며 지역 스스로 사업을 발굴하고 서로 협력해 좋은 성과를 이뤄낼 때 혁신역량도 커지고 더 큰 발전의 기회도 가지게 될 것”이라고 국토균형발전정책의 지속적이고 자발적인 추진을 강조했다.

 

 

 

2007년 10월 4일 이날은 서로 얌전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정상회담 마지막날 '하루 더있다 가세요' 했다.

 게다가 더욱 가관인 것은 대한민국 대통령이 하루 더 평양에 있는 것 '혼자' 결정 할 수 없습니까? 하고 깔보고 으시대었다.

2007년 남북 정상 회담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함께 남북관계발전 및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을 발표하였다.

 


남상국 자살 사건

2002년 9월 5일 대우건설 사장 남상국은 그의 둘째형 노건평에게 "사장직을 연임할 수 있도록 힘써달라"는 청탁과 함께 3천만원을 수수한 혐의를 받았고 수사하는 과정에서, 3월 11일 방송에서 대통령 노무현은 공식 기자회견에서 남상국 사장의 이름을 실명으로 언급하며 비판하였다. 기자회견을 본 직후, 이를 비관하여 한강에 투신, 자살했다.

 

2008년 12월 20일 남상국의 유족들은 "노 전 대통령은 피해자와 노건평의 인사 청탁에 관한 검찰 수사결과를 보고받는 지위에 있었는데도 허위라는 사실을 인식하거나 그 진위여부에 대한 확인도 없이 방송에서 피해자를 무참히 매도하는 내용의 경솔한 발언을 했다"며 노무현을 상대로 남상국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정책

 

주요 정책

노무현 정부, 즉 참여정부의 주요 정책은 크게 12개의 국정 과제로 제시됐다.

 

외교안보분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정치행정분야
부패없는 사회 봉사하는 행정
지방분권과 국가균형발전
참여와 통합의 정치개혁


경제분야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경제 확립
동북아 경제 중심국가 건설
과학기술 중심사회 구축
미래를 열어가는 농어촌


사회문화여성분야
참여복지와 삶의 질 향상
교육개혁과 지식문화강국 실현
국민통합과 양성평등의 구현
사회통합적 노사관계 구축

 

 

 

외교 활동
 
2006년 APEC 정상회담외교방식은 동북아균형자론을 표방하였다.

그는 대표적으로 그리스, 루마니아, 핀란드, 영국, 스페인 국빈방문과 동남아시아, 남미, 러시아, 프랑스, 폴란드, 이탈리아 ,바티칸 순방을 위한 23차례에 걸쳐 총 49개국을 방문했다. 한국 대통령 가운데 처음으로 공식 방문한 국가는 이집트, 나이지리아, 알제리, 아제르바이잔, 아랍에미리트, 스페인 등 6개국이다.

 

 

노무현이 유엔 총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할일없이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 세계 평화를 토론하는 UN 총회는 되는 것은 하나 없는 연합회다.

 

그러나 노무현은 그 유엔총회 수장에 국가 외교력을 모두 동원하여 치밀하게 반기문을 선임하게 하는 쾌거를 올렸다.

노무현에게는 경제와 외교와 국방에 쓸만한 인재들이 진취적이고 열정적으로 일해준 것이 큰 힘이 되었다.

자고로 큰 사람 밑에는 큰 인물이 큰다. 그러나 큰 나무 밑에는 작은 나무가 자라지 못한다.

노무현의 사람들은 점점 날이 갈수록 큰 인물들이 되었다.

 

 


대미 관계


그는 대선 전부터 반미주의자로 생각되어졌는데 2002년 대선 당시 이는 약점보다는 강점으로 작용했다. 당시 대한민국 국민들은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 불평등 SOFA협정 등 때문에 미국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다. 노무현은 '미국에 할 말은 한다'며 대미관계에 있어 독자노선을 갈 것처럼 보였다.

 

참여정부는 미국네오콘보수파의 장기집권으로 이어지자 정책적 충돌이 자주 일어났다. 취임 후 부시행정부와 대북정책의 입장차이가 발생하자 한국의 한나라당과 미국의 공화당 보수파는 그를 의심스럽게 쳐다보았고,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은 이에 가세하여 그를 좌익이라고 강력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실제로 노무현 정부가 미국에 대해 대북정책이외엔 독자노선을 걸은 흔적은 드러나지 않고, 반대로 부시행정부의 요청에 따른 이라크 전쟁 파병, 주한미군 용산 기지 이전문제, 한미 FTA의 추진 등에서 오히려 부시행정부와의 친화적인 모습이 많았다.

 

 

사람|강한민국 强韓民國 노무현

Roh Moo-hyun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글

독도와 한일관련 특별 성명 명연설문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독도는 우리 땅입니다. 그냥 우리 땅이 아니라 특별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 우리 땅입니다. 독도는 일본의 한반도 침탈 과정에서 가장 먼저 병탄된 역사의 땅입니다. 일본이 러일전쟁 중에 전쟁 수행을 목적으로 편입하고 점령했던 땅입니다. 
 

러 일전쟁은 제국주의 일본이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일으킨 한반도 침략전쟁입니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빌미로 우리 땅에 군대를 상륙시켜 한반도를 점령했습니다. 군대를 동원하여 궁을 포위하고 황실과 정부를 협박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고, 토지와 한국민을 마음대로 징발하고 군사시설을 설치했습니다. 우리 국토에서 일방적으로 군정을 실시하고, 나중에는 재정권과 외교권마저 박탈하여 우리의 주권을 유린했습니다.

 

일본은 이런 와중에 독도를 자국 영토로 편입하고, 망루와 전선을 가설하여 전쟁에 이용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한반도에 대한 군사적 점령상태를 계속하면서 국권을 박탈하고 식민지 지배권을 확보하였습니다.

 

지 금 일본이 독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의한 점령지 권리, 나아가서는 과거 식민지 영토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의 완전한 해방과 독립을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또한 과거 일본이 저지른 침략전쟁과 학살, 40년간에 걸친 수탈과 고문·투옥, 강제징용, 심지어 위안부까지 동원했던 그 범죄의 역사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결코 이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우리 국민에게 독도는 완전한 주권회복의 상징입니다. 야스쿠니신사 참배, 역사교과서 문제와 더불어 과거 역사에 대한 일본의 인식, 그리고 미래의 한일 관계와 동아시아의 평화에 대한 일본의 의지를 가늠하는 시금석입니다. 일본이 잘못된 역사를 미화하고 그에 근거한 권리를 주장하는 한, 한일 간의 우호관계는 결코 바로 설 수가 없습니다. 일본이 이들 문제에 집착하는 한, 우리는 한일 간의 미래와 동아시아의 평화에 관한 일본의 어떤 수사도 믿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어떤 경제적인 이해관계도, 문화적인 교류도 이 벽을 녹이지는 못할 것입니다.

 

한일 간에는 아직 배타적 경제수역의 경계가 획정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일본이 독도를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고, 그 위에서 독도기점까지 고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해해저 지명문제는 배타적 경제수역 문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배타적 수역의 경계가 합의되지 않고 있는 가운데, 일본이 우리 해역의 해저지명을 부당하게 선점하고 있으니 이를 바로잡으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따라서 일본이 동해해저 지명문제에 대한 부당한 주장을 포기하지 않는 한 배타적 경제수역에 관한 문제도 더 미룰 수 없는 문제가 되었고, 결국 독도문제도 더 이상 조용한 대응으로 관리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독도를 분쟁지역화 하려는 일본의 의도를 우려하는 견해가 없지는 않으나, 우리에게 독도는 단순히 조그만 섬에 대한 영유권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과의 관계에서 잘못된 역사의 청산과 완전한 주권확립을 상징하는 문제입니다.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대처해 나가야 할 일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이제 정부는 독도문제에 대한 대응방침을 전면 재검토하겠습니다. 독도문제를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와 더불어 한일 양국의 과거사 청산과 역사인식, 자주독립의 역사와 주권 수호 차원에서 정면으로 다루어 나가겠습니다.

 

물리적인 도발에 대해서는 강력하고 단호하게 대응할 것입니다. 세계 여론과 일본 국민에게 일본 정부의 부당한 처사를 끊임없이 고발해 나갈 것입니다. 일본 정부가 잘못을 바로잡을 때까지 국가적 역량과 외교적 자원을 모두 동원하여 지속적으로 노력할 것입니다.

 

 

그밖에도 필요한 모든 일을 다 할 것입니다.

어떤 비용과 희생이 따르더라도 결코 포기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의 역사를 모독하고 한국민의 자존을 저해하는 일본 정부의 일련의 행위가 일본 국민의 보편적인 인식에 기초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일 간의 우호관계, 나아가서는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태롭게 하는 행위가 결코 옳은 일도, 일본에게 이로운 일도 아니라는 사실을 일본 국민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감정적 대응을 자제하고 냉정하게 대응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일본 국민과 지도자들에게 당부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새로운 사과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미 누차 행한 사과에 부합하는 행동을 요구할 뿐입니다. 잘못된 역사를 미화하거나 정당화하는 행위로 한국의 주권과 국민적 자존심을 모욕하는 행위를 중지하라는 것입니다. 한국에 대한 특별한 대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사회의 보편적인 가치와 기준에 맞는 행동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역사의 진실과 인류사회의 양심 앞에 솔직하고 겸허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일본이 이웃나라에 대해, 나아가서는 국제사회에서 이 기준으로 행동할 때, 비로소 일본은 경제의 크기에 걸맞은 성숙한 나라, 나아가 국제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국가로 서게 될 것입니다.

 

 

 

국 민 여러분, 우리는 식민지배의 아픈 역사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선린우호의 역사를 새로 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습니다. 양국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공통의 지향 속에 호혜와 평등, 평화와 번영이라는 목표를 향해 전진해 왔고 큰 관계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이 제 양국은 공통의 지향과 목표를 항구적으로 지속하기 위해 더욱 더 노력해야 합니다. 양국 관계를 뛰어넘어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 나아가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함께 힘을 모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사의 올바른 인식과 청산, 주권의 상호 존중이라는 신뢰가 중요합니다.

 

일본은 제국주의 침략사의 어두운 향수로부터 과감히 털고 일어서야 합니다. 21세기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 나아가 세계 평화를 향한 일본의 결단을 기대합니다.

 

대통령 노무현

 

 

노대통령 한일관계 특별담화 발표
노무현 대통령이 재임중 25일 오전 `최근 한일관계에 대한 특별담화'를 발표하기 위해 옷깃을 여미며

보좌진들과 함께 청와대 발표장으로 입장하고 있다./박창기/정치/ 2006.4.25 (서울=연합뉴스)changki@yna.co.kr

 

 
노무현은 정권 말기에 새로 선임 된 이명박 당선자와 인수위원회가
대한민국을 세계 7대 강국에 올리고 국민소득 4만불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747 공약을 들먹이자,
만약에 그것이 실현 된다면 내손에 장을 지저라, 라고 거침없이 말했다.
 
공교롭게 세상이 참 험하게 돌아가고 있다.
어쩌면 장을 지지지 않아도 될런지 모른다.
 
 
다시 대한민국은 세계사의 중심으로 나갈 것인가?
부산상고를 졸업한 시골 촌놈 노무현이 못배우고 천박했다 치더라도
파란만장한 인생의 질곡을 넘어 청와대에 입성하던 그 기적의 스토리처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대한민국은 다시 세계사의 중심에 강한민국 强韓民國으로 우뚝 설것이다.
  
'바보 노무현, 승부사 노무현'이라는 아이콘은
나에게 그런 사람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유서 전문
“여러 사람들 고통…여생도 남에게 짐
누구도 원망 마라…오래된 생각이다”

 

 

22일 오후 2시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서 전문이 공개됐다. 유서는 모두 13문장(3문단)의 간략한 내용으로, 노 전 대통령이 사용하던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사저의 컴퓨터에 한글 파일로 저장돼 있었다. 유서 전문이 공개되면서, 노 전 대통령은 검찰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큰 고통을 느꼈으며 이때문에 건강까지 해친 것으로 확인됐다. 또한 유서 마지막에 “오래된 생각이다”라고 밝혀,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뜻을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음도 확인됐다.

한편, 노 전 대통령 유서의 컴퓨터 파일 제목은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의 고통이 너무 크다”였다고 유족 쪽은 전했다. 유서 문서는 컴퓨터가 켜진 상태에서 화면 위에 떠있었다고 경찰 쪽은 전했다.

유서 문서 파일의 최종 저장시간은 오늘 새벽 5시21분으로, 노 전 대통령은 5시45분 사저를 나섰고, 6시40분 봉하산 부엉이바위에서 떨어졌다.


다음은 유서 전문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 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한겨레 신문 이경미 권오성 기자 sage5th@hani.co.kr

 

 

 

 

노무현 대통령 서거

 

 

[AFP=서울] 한국의 노무현(盧武鉉) 전 대통령이 23일, 등산 중 추락해 병원으로 이송했으나

두부 외상으로 오전 9시 30분 사망이 공식 확인됐다.

 

경상남도 양산시 양산 부산대 병원에서 있은 공식 발표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은 이날 새벽 5시 45분 경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은 채 경호원 1명과 사저를 나서 집근처 봉하산에 올랐으며, 6시 40분 경 산에서 투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다가 8시 13분 경 양산 부산대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이미 의식불명 상태였다. 병원측은 심폐소생술 등을 시도했지만, 결국 9시 30분 사망을 공식 확인했다. 사망 원인은 두개 골절에 의한 두부 외상이며, 다발성골절 등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문재인 전 비서실장은 노 전 대통령이 가족 앞으로 짧은 유서를 남겼다고 전했다.

노 전 대통령은 아내와 조카 사위 등이 자신의 후견인인 태광실업 박연차 회장에게 600만 달러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4월 30일 한국의 대통령으로는 3번째로 검찰에 소환되어 수사 받은 바 있다. 노 전대통령은 가족과 측근의 잇단 수사에 심리적 부담이 컷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날린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2003 취임해 2008년까지 대통령직에 재임했다. (c)AFP

2009/05/23 11:56 발신지:Seoul/한국

 

 


이 AFP 보도는 세계 최초의 공식적인 보도의 외신 기사가 되었다.

 

 

 

 

 

 

 

 

 

1. 미국 CNN (http://www.cnn.com/2009/WORLD/asiapcf/05/22/roh.dead/)

 

 

(CNN) -- Former South Korean President Roh Moo-Hyun died apparently after falling while hiking, police said Saturday.


The information came from the Geyong Nam Police Department, a provincial police agency, which said circumstances of the death -- which occurred near where Roh was living -- were not immediately clear.

A hospital spokesman declined to comment.

Roh served as president from 2003-2008.


경찰에 의하면, 한국의 전 대통령 노무현이 토요일날 등산 중 추락사하였다고 한다.

경남 경찰국에서 정보가 왔으며, 경찰은 노무현 대통령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에서 일어난 이번 죽음에 대한 자세한 정황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병원 관계자는 입장을 발표하지 않았다.

노 대통령은 2003년에서 2008년까지 대통령직을 맡았다.

 

 

 

2. AP통신


 

SEOUL, South Korea (AP) ? Former South Korean President Roh Moo-hyun has died, a police official said Saturday.

The official at the National Police Agency said that the cause of death was presumed to be because of a fall while mountain climbing Saturday. The official, who spoke on condition of anonymity as he was not authorized to speak to media, said an autopsy was pending.

Roh suffered severe head injuries and died after being transported from his hometown of Gimhae to a hospital in the southern city of Busan, Yonhap news agency reported earlier.

Police were trying to confirm‎! whether the fall was an accident or if he possibly committed suicide, Yonhap said.

Roh has been under investigation in a bribery scandal over allegations that he took more than $6 million from a businessman while in office. He served as South Korea's president from 2003 to 2008.


경찰은 토요일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경찰 관계자에 의하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토요일날 등산을 하던 중 추락한 것이 죽음의 원인이라고 밝혔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기를 꺼려하는 한 관계자에 의하면 현재 부검이 실시될 예정이라고 하였다.

노 전 대통령은 심각한 뇌 손상을 입은 뒤, 자신이 살고 있던 김해 마을에서 부산 남부의 병원으로 이송되었다고, 연합뉴스가 보도했다.

연합뉴스에 의하면 경찰은 현재 추락이 사고였는지 아니면 노무현 대통령이 자살하려는 의도가 있었는지 확인 중에 있다고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업가로부터 돈을 받은 뇌물 수수 혐의로 조사받고 있던 중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부터 2008년까지 대한민국 대통령직을 맡았다.

 

 

 

 

3. 영국 BBC (http://news.bbc.co.uk/2/hi/asia-pacific/8064799.stm)

 

 

Former South Korean President Roh Moo-hyun has died of head injuries after falling into a ravine while climbing a mountain, police say.

Mr Roh, 62, was pronounced dead on arrival at a nearby hospital, according to Yonhap news agency.

Police said they were trying to determine whether the death was an accident or suicide.

The former president left office in February 2008 and had been under investigation for alleged bribery.

"President Roh fell down a mountain. He was transported to a hospital where doctors said he had been dead upon arrival. But his death has not yet been officially confirm‎!ed," a spokesman of the National Police Agency told the AFP news agency.

"We're investigating whether he fell by accident or committed suicide," he said.

Yonhap said Mr Roh died after being transported from his hometown of Gimhae to a hospital in the southern city of Busan.

 

대한민국의 노무현 전 대통령이 등산을 하다 추락하여 머리 부상을 당한 뒤 사망했다고 경찰이 밝혔다.

연합뉴스에 의하면 62세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인근의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곧 사망했다고 한다.

경찰은 현재 죽음이 사고였는지 자살이였는지 확인 중에 있다고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8년 2월 대통령 직에서 물려났으며, 최근에 뇌물 수수 혐의로 경찰의 조사를 받아 왔다.

"노무현 대통령은 등산 중 추락하였습니다. 그는 병원으로 이송되어졌지만, 의사들에 의하면 그는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사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지는 않았습니다"라고 한 경찰 관계자가 AFP 뉴스에 전했다.

"우리는 현재 그가 산에서 사고로 추락했는지 아니면 자살을 시도한 것인지 조사중에 있습니다"라고 그는 이어 말했다.

연합뉴스는 노무현 전 대톨령이 자신이 살고 있던 김해 마을에서 부산의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사람|강한민국 强韓民國 노무현

Roh Moo-hyun

 

근조_謹弔

이글을 올리고 하루 뒤,

강한민국 노무현대통령은 봉하마을의 뒷산 부엉이 바위에서 (2009년 5월 23일 새벽 다섯시)

몸을 던져 투신하고 말았다.

이글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남긴 마지막 글이 되고 말았다.

애석하고도 비통함이 이루 말을 이을 수 없다.

슬픔을 가눌수 없고 삼가 명복을 빈다.

 

 

 
<출처;tong.nate 네이트 우수 블로그 왕관이예요justin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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