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여행사진 9-1편... 서태후는 누구인가?
이화원을 돌아보면서 참 아름답다는 생각도 했지만 한편으론 황제가 백성을 위하지 않은 폭군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작은 연못도 아니고 거의 바다라는 느낌이 들 정도의 커다란 호수를 수작업으로 파 내어 만들었다니 황제에게 돌을 던지고 싶은 마음이었다.
서태후는 열일곱 나이에 후궁으로 들어와 황후가 되어 영광을 누리다가 28세 때에 남편 함풍제가 죽자 과부가 되고 그때부터 권력을 장악하여 일흔 넷 나이로 죽을 때까지 왕권을 쥐락펴락한 여인이란다.
남편 함풍제의 뒤를 이어 아들 동치제가 즉위했지만 겨우 5살이라 모후로서 수렴청정을 하기 시작한다. 이때 동치제의 황후인 동태후와 온갖 갈등을 빚으며 권력을 놓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들 동치제가 죽자, 불과 세 살인 조카를 억지로 즉위시켰다. 어릴수록 부리기 좋고 수렴청정하기 수월했기 때문이다. 세 살에 즉위한 이 조카가 광서제다.
서태후는 만주족 출신으로 청나라 말 정권을 농락한 여인으로 정권욕과 사치가 국운을 더욱 쇠락하게 만들었다는 혹평을 받고 있다. 목단꽃을 수놓은 황금 비단옷에 만주 보석으로 장식하고 어깨에는 3,500개의 진주를 꿰어 만든 목걸이를 걸치고, 지척의 거리도 어가 행렬을 장엄하게 펼쳤다. 해군 경비정을 건조할 비용으로 이화원을 화려하게 꾸미는 등 서태후의 사치는 극에 달했다고 한다.
서태후는 늙어서도 젊은이를 침실로 끌어드렸다는 정열의 화신이었다. 그야말로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겸비한 묘한 '동통 음란증' 환자였다고 한다.
중국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그녀가 성병의 하나인 매독에 감염되어 죽었다고 한다.
그녀를 진찰하고 매독으로 판정했던 어의들은 모두 처형되었고 이후 처형이 무서워 감기라고 거짓 판정한 어의들은 살아 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평생 모유를 먹었고 모유로 목욕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전국 각지에서 분만한 산모를 데려와 모유 수유를 받았다는데 그래서인지 피부가 유난히 부드럽고 고왔다고 한다.
그녀의 남편이자 황제인 함풍제는 수많은 궁녀를 거느렸지만 자식복이 없었는지 유일하게 서태후만 황제의 아들을 낳았으나 성격이 포악함을 알게 된 황제는 서태후를 총애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아무튼 서태후가 누구인지 좀 더 자세히 알아보려고 브리태니커를 찾아 보았다.
서태후는 1835년 11월 29일에 태어나 1908년 11월 15일 사망한 중국 淸나라 함풍제(咸豊帝:1850~1861 재위)의 황후로 효흠(孝欽), 서황후(西皇后), 자희황태후(慈禧皇太后)라고도 한다.
동치제(同治帝:1861~1875 재위)의 어머니이자 광서제(光緖帝:1875~1908 재위)의 양어머니로서 청 제국을 거의 반세기 동안 지배했다. 보수파 부패관료 일당을 기반으로 청을 철권통치함으로써 중국 역사상 강력한 여성 지배자로 꼽히고 있다. 그녀는 함풍제의 서열이 낮은 후궁이었는데 1856년 황제의 유일한 아들 재순(載淳)을 낳았다. 황제가 죽자 당시 6세이던 재순은 동치제로 즉위했고, 국사(國事)는 8명의 원로로 구성된 섭정위원회가 주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와 함풍제의 정실 자안황태후(慈安皇太后:東太后)가 교묘한 계략을 세워 결국 섭정을 넘겨받게 되었고, 전 황제의 동생으로서 의정왕(議政王)이 된 공친왕(恭親王)이 두 태후를 보좌했다.
이같은 3인집정(三人執政) 아래 정부는 일시적으로 활기찬 정책을 폈다. 중국 남부를 황폐화시켰던 태평천국운동(1850~64)과 북부 지방에서 발생한 염군(捻軍)의 난을 차례로 평정했다. 외국어 교육을 위한 학교를 설립했으며 근대적인 세관을 설치했다. 서양식의 군수공장을 세웠고 외교 담당부서를 최초로 만들었다. 대내적으로도 정부의 부패를 종식시키고 자질이 뛰어난 사람을 채용하기 위해 노력했다.
동치제가 성년이 된 이후인 1873년 섭정은 끝났지만 서태후는 계속해서 국사를 장악했다. 심지어는 그녀가 젊은 황제에게 무절제한 생활을 하도록 유도하여 황제의 서거를 앞당기게 했다는 소문마저 돌았다. 동치제가 죽자 서태후는 군대의 힘을 빌려 제위계승의 원칙을 무시하고 3세밖에 되지 않은 조카를 양자로 삼아 제위를 넘겨주었다. 결국 두 태후는 계속해서 섭정을 했지만 1881년 자안황태후가 갑자기 사망하자 서태후는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3년 후 그녀는 공친왕을 제거하고 그가 추진하던 개혁정책의 대부분을 폐기시켰다. 1889년 서태후는 명목상 자신의 권력을 정부에 넘겨주고 은퇴하여, 베이징[北京] 북서쪽에 재건한 호화로운 이허위안[頤和園]에서 기거했다. 그러나 중국이 청일전쟁(1894~95)에서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 지 3년이 지난 1898년 젊은 광서제가 개혁주의자들의 영향으로 중국 정부를 쇄신·근대화하고 부패를 제거하기 위한 급진적인 계획을 추진하자, 수구파 관료들이 서태후 주위에 집결하여 군사력을 동원한 일격을 가했다.
새로운 개혁정책은 원점으로 돌아갔으며, 황제는 자신의 궁전에 연금되었고 서태후가 다시 섭정을 시작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서 중국이 평화롭게 변화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무산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이듬해 서태후는 반외세적(反外勢的) 성격의 의화단운동(義和團運動)을 조장한 관료들을 지원했다. 1900년 의화단운동은 최고조에 달하여 수백 명의 외국인이 살해되었고, 베이징에 주재하던 외국공사관들이 포위되었다.
그러나 외국 연합군이 곧 베이징을 장악함에 따라 서태후는 베이징을 떠나 치욕스러운 강화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광서제는 아직 정부에 참여할 수 없었지만 1902년 베이징으로 돌아온 서태후는 1898년에 자신이 무산시켰던 개혁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죽기 전날 광서제의 죽음이 공표되었는데, 그녀의 명에 따라 독살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서태후의 모습
17세때 실제 모습
서태후의 노년 모습인데 그녀는 손톱을 길렀다고 한다.
이화원을 둘러본 뒤 중국식 점심식사를 하고 중국명차(다도원이라고나 할까)라는 곳을 방문했다.
보이차,자스민차 등등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보이차는 생산년도가 오래 될수록 값이 엄청 비쌌다. 실제로 홍콩의 경매장에서 보이차가 1억원이상에 낙찰된 경우도 있다고 홍보를 한다.그렇지만 믿거나 말거나 내 귀엔 들어오지 않았다. 여러 종류의 차를 시음해 보기만 했다.
그깥 차 구입에 비싼 외화를 낭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기관지에 좋다는 단돈 1만원짜리 이름모를 차 한통만을 구입했다.
같은 상가내에 있는 가게 구경을 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