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종교 사상은 피히테의 철학적 작업에 있어서 하나의 저류(低流)를 이루는데, 이것은 최초의 단초로부터 시작하여 지식학의 여러 발전 단계를 관통하여, 수많은 점에서 표면에 등장하여, 결정적으로 더불어 문제가 되지만, 그러나 결국은 전체 체계에 스며들어 그 체계를 두루 조명하고 있다.
(그의 종교 이해의 특수한 방식은 윤리적인 것과의 밀접한 결합 속에 있다.)
2-1. 《신의 세계 통치에 대한 우리들의 신앙의 근거에 관하여》(1798)
피히테에 의하면 신의 세계 통치에 관한 신앙 역시 종교에 속한다. 그에게 있어서 이 세계 통치는 이제 정말로 철저하게 도덕적 세계 질서를 의미한다. 그러나 도덕법칙은 그 자체로 볼 때는 도덕적 세계 질서의 당위 존재를 정초할 뿐이고, 세계 속에서 이 도덕적 세계 질서의 현실적 조립을 정초하는 것은 아니다.
2-2. 도덕적 세계 질서와 신은 하나이고 동일자이다. 도덕적 세계 질서에 대한 믿음은 신에 대한 믿음이다. 도덕적 세계 질서 속으로 자신이-포함된-생동적인 관점, 우리들의 도덕적인 심정 속에 스며드는 것이 참된 종교인 것이다.
피히테의 사상은 범신론이다.
2-3. 신은 세계의 피안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피아에 존재한다면, 세계는 신의 한계일 것이다.―, 감각의 세계 속에 갇혀 있는 것도 아니다 ― 이 세계 속에 갇혀 있다면 신의 본질은 유한한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세계에 대한 관계를 통해서 신을 사유할 수는 없다. 이 관계는 결코 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의 사유는 세계를 잘 이해하고 있고, 또 세계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으나, 그러나 세계와 일치하지도 않고 또 세계를 초월해 있지도 않은 어떤 존재를 맞이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를 사유할 수는 있으나, 신을 사유할 수는 없다.
3-1. 《축복받은 생활을 위한 지침》(1806)
피히테에게는 이제 의식(지식학의 언어로는 “지식”)이 신의 영원한 계시로서 간주되는 것이고, 대상의 세계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대상의 세계는 의식의 최초의 귀결 현상이기 떄문이다. 의식의 영원성은 신의 영원성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 때문에 세계를, “창세기”가 그러는 것처럼, 창조 작용으로 시작되게 하는 것은 근본 오류이고, 신의 영원성을 실없이 부인(否認)하는 것이다.
3-2. 요한(요한복음)의 이론은 그렇지 않다. 요한복음의 첫 부분에는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고, 신은 로고스였으며, 만물은 로고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로고스 이론 속에서 피히테는 자기 자신의 “지식”이론의 근본 원리를 영원히, 그리고 모든 현상의 피안에서 재인식한다. 그러나 이 신의 초상은 인간의 의식 속에서 현상 속으로 등장하고, 영원한 인간성으로서 신과 인간의 통일을 의미한다. 이것은 복음의 형이상학적 내용을 이루고 있고, 또 그 자체로서는 복음의 역사적 내용으로부터 독립해 있는 신의 저 동일한 화신(化身)이다.
4-1. 자유를 위한 자유는 여기서는 충동을 위한 충동과 마찬가지로 더 이상 최고의 것이 아니다. 자유는 의지와 노력이 문제가 되는 곳에서만 가치와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쉬지 않는 노력이 평온과 평화 속으로 합일하고, 보다 높은 그 어떤 것으로 이행한다면, 이 노력과 함께 자유가 동시에 그속에서 지양되지 않을 수 없다. 불완전한 의지, 즉 선과 악의 차안(此岸)에 서 있고, 따라서 선과 악이라는 두 가능성이 열려 있는 의지만이 일반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완전한 의지는 자기를 초월할 어떠한 도덕적 의무도, 따라서 그 자체 더 이상으로 어떠한 자유도 갖고 있지 않다. 이 의지는 그 근거를 신에 두고 있는 것이다.
4-2. 이러한 특유의 윤리적 작용, 유일한 참된 자유의 작용을 피히테는 “보다 높은 도덕”에로의 이행이라고 표기한다.
4-3. 축복은 무덤의 피안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나라는 가까이 도래해 있을 뿐 아니라, 지상의 우리 마음 한가운데에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신에 대한 올바른 관계 이외에 어떤 다른 것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5-1. 생은 욕구, 충동이다. 충동의 만족이 축복이고, 이 축복 속에서 생은 실현된다. 참된 생과 축복은 동일한 것이다. “축복된 생”은 근본적으로는 동의 반복적인 표현이다. 욕구와 충동이 하나의 대상에 관계하는 한에서, 그 목표는 대상과의 합일에 있는 것이다. 합일을 향한 노력이 사랑이다. 이리하여 생과 축복은 결국 사랑과 일치한다. 사랑 속에서만 진정한 생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랑은 인간의 생의 “뿌리이고, 핵심”이다.
5-2-1. 사랑은 마음속에 있는 신의 생명이다. 신의 생명은 자신을 계시하기 위해서 의식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가장 깊은 본질 속에서 우리 자신을 의식해야 한다. 우리는 깊은 곳에서만 신과 우리의 통일을 간취(看取)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통일이 놓여 있는 자아의 깊은 곳은 자기의식의 피안에 있다. 모든 의식, 그리고 자기의식도 역시 주관과 객관으로서의 존재의 분열을 의미한다. 이 양자의 통일이 비로소 절대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의식은 자기의 한계를, 바로 의식이 완성되는 그러한 인식, 즉 자기 인식 안에서 발견하게 된다.
5-2-2. 의식은 자신을 꿰뚫어 보면서 자기를 지양한다. 의식은 자신을 존재자로서 정립하는 한, 자기를 꿰뚫어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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