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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의 기준_종교 중독 VS 사랑의 실천
마태복음 25:31-46
31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떨치며 모든 천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영광스러운 왕좌에 앉게 되면
32 모든 민족들을 앞에 불러놓고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그들을 갈라
33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자리잡게 할 것이다. (중략)
41 "그리고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라.
42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으며, 또 병들었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44 이 말을 듣고 그들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주님, 주님께서 언제 굶주리고 목마르셨으며, 언제 나그네 되시고 헐벗으셨으며, 또 언제 병드시고 감옥에 갇히셨기에 저희가 모른 체하고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45 그러면 임금은 '똑똑히 들어라.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46 이리하여 그들은 영원히 벌 받는 곳으로 쫓겨날 것이며,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갈 것이다."
지난 3월 23일에 일어났던 잔인한 살인사건이 있습니다. 이른바 스토킹 살인사건인데 기억나시죠. 온라인 게임에서 만난 여성이 자신과의 만남을 거부하고 연락도 끊었다는 이유로 스토킹을 하다가 여성의 집을 찾아가 여동생과 어머니, 그리고 당사자 여성까지 세 모녀를 죽인 끔찍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의 범인인 김태현 씨는 4월 27일 살인·특수주거침입·절도·경범죄처벌법(지속적 괴롭힘)·정보통신망법 위반(정보통신망 침해 등) 등 5가지 혐의로 구속기소 되었습니다.
검찰이 밝힌 사건의 개요는 이렇습니다.
김 씨는 온라인 게임에서 친분을 쌓은 피해자 A 씨가 오프라인 만남에서 평소 자신의 게임 관련 비용을 부담하는 등 친절을 베풀자 호감을 느꼈다.
연락을 차단당한 건 김 씨의 돌발 행동 때문이었다. 그는 A씨 등 게임을 같이 하던 지인 3명과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신경질적인 언행을 보여 이들로부터 연락을 차단당했다.
이후 김 씨는 A 씨가 연락하지 말라고 했음에도 집 앞을 찾아가거나 공중전화·타인 명의 휴대전화 등으로 계속해서 연락을 취했다.
A 씨가 전화번호를 변경하자 김 씨의 반감이 극대화됐고 결국 피해자를 살해하겠다는 결심에 이르렀다. 그는 범행에 필요하다면 가족들도 살해할 계획이었다. 김 씨는 A 씨와 주고받은 메시지 중 택배 관련 사진을 통해 집 주소를 알고 있었다.
김 씨는 철저히 범행을 계획했다. A 씨의 동선을 파악하고 범행도구를 훔치고 신변을 정리했다. 치명상을 입을 수 있는 부위 관련 내용을 검색해보기도 했다.
범행 당일 오후 5시 40분경 김 씨는 상품 배달을 가장해 피해자 문을 두드린 다음 약 5분 뒤 A 씨 동생이 문을 열자 주거에 침입해 동생을 살해했다. 이어 오후 10시 9분경 귀가한 A 씨 어머니와 오후 11시 30분경 귀가한 A 씨를 살해했다.
4월 17일에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피글렛과 벌레 그리고 김태현-살인자의 정체는 무엇인가'라는 부제로 김태현에 대해 추적했습니다.
제작진은 김태현이라는 인물에 대해 더 알아보기 위해 그의 주변인들을 만났습니다. 김태현의 초등학교 친구는 김태현에 대해 "감정 기복이 심했다. 송충이를 모아서 불에 태워 죽이는 장난을 자주 했다. 죽기 전에 송충이 눈이 커지는데 그걸 보며 좋아했다"라고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중고등학교 동창들은 그가 어느 순간부터 음침해지며 분노를 참지 못하는 행동들을 하곤 했다고 밝혔습니다. 화가 나면 손으로 벽을 꽝꽝 쳐서 손이 까질 정도로 분을 이기지 못하는 행동을 보였다고 하죠. 도벽을 목격했다는 증언도 다수 있었습니다.
19세의 김태현을 중1 때 만나 형 동생 사이로 친하게 지냈던 은호 씨는 자신이 피해자가 될 수도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어느 날부터 김태현은 그에게 스마트폰을 사주고 요금도 직접 납입하는 등 지나친 호의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집착으로 변했다죠 김태현은 자신과의 약속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분노를 감추지 못했고, 은호 씨를 향해 자해 사진, 칼 사진 등을 보내며 죽이겠다고 협박했으며, 집 앞에서 기다리다 죽이겠다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태현을 분석한 전문가들은 "스토커들은 사람을 인격체로 보지 않고 소유물로 본다. 통제가 안 될 때 극도의 흥분감이 올라오는데 이것은 상대를 향해 더욱 집요해지고 괴롭히고 협박하고 욕하고 비난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단계가 지나가면 극단적인 상황이 되어 소유물을 제거하는 것에 이른다"고 평했습니다.
또 김태현 같은 스토커는 하나에 전념하며 미행을 한다든지 SNS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낀다고 합니다. 또한 자신의 기대를 상대방이 받아주지 않을 때 상당한 배신감을 느끼는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에 "이 사건이 아니었어도 누군가는 피해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전문가들은 "김태현이 반사회적 행위를 통해 본인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자존감은 낮고 자존심은 강한데 이 사건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됐다. 또 오히려 무릎을 꿇거나 마스크를 벗으니 기자들이 당황하는데 그런 상황에서 '역시 난 멋있는 사람이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검찰은 “김 씨는 낮은 자존감과 거절에 대한 높은 취약성, 과도한 집착, 피해의식적 사고, 보복심리 등을 가졌다”며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극단적 방법으로 자신의 분노를 해소하려는 반사회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상대방이 자신을 거절할 경우 일순간 강렬한 분노가 쉽게 발현돼, 집착→통제→폭발 행동의 양극단적 대인관계 패턴을 보였다는 것이죠.
김태현씨와 같이 반사회적인 태도로 사회를 어지럽히고 망가뜨리는 일단의 종교적인 집단이 있습니다. 소위 근본주의로 지칭되는 종교 집단들입니다.
근본주의는 모든 종교에서 나타날 수 있는 경향성입니다. 근본주의는 자신의 전통과 질서,종교사상을 어떤 비판적인 것으로부터 철저히 지키려고 합니다. 때문에 근본주의는 자신을 비판하는 현대성을 부정하고, 정통과 반대편에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적으로 간주하여 과격성을 드러내는 것이 보통입니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과학과 이성이 주류가 되는 과정에서 성경을 비평적으로 해석하는데 반발하여 생겨났습니다. 기독교 근본 교리를 사수하겠다는 것이었죠.
이러한 근본주의는 급변하는 세상에서 다양한 위험과 불안에 노출돼있는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어필하며 도피처를 제공합니다. 근본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과학과 이성을 죄악시하여 배격하므로 자신들의 교리 안에 갇히게 됩니다.
또한 근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권력과 매우 친밀한 성격을 지닙니다. 권력이 체제와 기득권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듯, 근본주의도 같은 목표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차별을 무기로 하여 자신들과 다른 모든 것을 적으로 삼게 만듭니다. 이러한 배타성은 자신의 적들을 향해 파괴적 행동을 부추기게 되는 것이죠.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 근본주의는 돈과 권력을 숭배하는 모습으로 정착되었습니다. 하느님 자리에는 돈이, 성직자는 권력에 물들어 버렸습니다. 해방 이후 초기에는 군사정권에 협력하여 승승장구하며 정교분리를 외쳤지만, 지금은 아예 정치에 뛰어들어 혹세무민하며 기득권을 지키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 기독교 근본주의는 교회지도자 숭배, 교회의 사유화, 추종자에 대한 학대, 반대자에 대한 공격성, 편집증적인 반공주의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또 그로부터 발생하는 차별과 혐오, 폭력과 파시즘의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종교 중독과 기독교 파시즘(새물결플러스)>이란 책이 나왔습니다. 현대 기독교와 교회의 문제를 사회적이고 정치학적인 관점에서 풀어낸 연구서입니다. 우리 사회 교인들에게 있는 근본주의적 신앙의 문제를 사회병리학적으로 접근하며 풀어낸 책입니다.
이 책에서 박성철 교수는 ‘인간은 얼마든지 종교 중독을 경험할 수 있다. 중독이 일어나게 되는 원인은 복합적이다. 개인적으로 겪은 심리적 절망 혹은 사회적 혼란 등으로 발생하는 외상에 의한 경우가 적지 않다. 외상의 영향을 받아, 자신보다 뛰어난 것처럼 보이는 존재와 집단을 의지할 때 종교 중독이 발생할 수 있다. 권위주의적 모습을 보이는 이 존재와 집단이 부패해도, 여전히 이 존재와 집단을 통해 정체성과 의미를 얻는다. 특정 존재와 집단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밝힙니다.
박 교수는 ‘오늘날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그분의 지배와 통치를 받는 곳이 아니다. 특정한 사람이 사유화하는 공간이 돼 버렸고, 공교회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교회 세습'의 문제는 교회가 개인의 재산이 됐다는 데 있다. 복음과 신앙은 우리에게 자유를 줘야 하는데, 교회가 그 자유를 빼앗고 침범하는 곳이 됐다’고 진단합니다.
또 현대 교회가 하느님의 말씀과 하나님 나라를 버리고, 교회 성장에 몰두하는 것으로 존재와 가치를 증명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세상 가치와 힘의 논리에 따라 성장하고 확장하는 것으로 존재 목표를 삼고 있다는 것이죠. 그렇게 권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권위주의가 발생하고 차별 기제가 작동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이런 교회에서 권력형 리더쉽의 목회자가 만들어집니다. 이런 목회자는 진리성보다는 체제유지에 급급하게 되어 형식과 거짓된 안정을 추구합니다. 신자들에게는 교회가 정한 법과 규칙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가르칩니다.
이같은 일련의 과정에서 종교 중독이 발생합니다. 종교 중독자들은 자신의 집단과 지도자에게 자신의 가치를 투영합니다. 자신들만 옳다고 생각하기에 반대편에 있는 이들을 적으로 여깁니다. 자신들만 최고의 진리를 따른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고통과 피해를 당하는 것에 무관심합니다. 아니 자신들이 남에게 피해 주는 것조차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종교 중독은 극단적 폐쇄성으로 자신들을 고립시키고, 반대하는 이들을 향해 폭력성을 드러낼 뿐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지막 심판 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심판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재림주께서 천사를 거느리고 이 땅으로 내려오셔서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습니다. 주님은 모든 민족들을 보좌 앞에 불러놓고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그들을 갈라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자리 잡게 합니다.
이제 드디어 심판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 심판의 기준은 양과 염소의 무리 모두에게 공통으로 적용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심판의 기준은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의인들인 양의 무리는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또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으며, 언제 주님께서 병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저희가 찾아가 뵈었습니까' 하고 반문합니다.
이들의 물음에 대해 주님은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며 그들을 칭찬합니다.
결국 양의 무리들은 세상 창조 때부터 준비된 영생의 나라를 차지하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똑같은 기준을 가지고도 왼편 염소의 무리들은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라는 책망과 함께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에서 나오는 양과 염소는 무얼 상징할까요. 크게는 이 세상의 의인과 악인들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기독교라는 틀 안으로 좁혀 본다면 교회 안에도 의인과 악인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며 최후의 심판 날에는 자신들의 처신에 대해 분명한 보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 있어서 양과 염소 이야기는 친숙하고 흥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업이 목축이었고 염소 없이 양만 키우는 것은 불가능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목축은 양 세 마리당 염소 한 마리를 섞어서 키우는 게 일반적이었숩니다. 사무엘상 25:2절에 보면 나발이라는 사람이 나오는 데 그는 양 3천 마리와 염소 1천 마리를 키우는 부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들이 양과 염소를 섞어서 키우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이유에서였습니다.
첫 번째는 양만 키우면 땅이 황폐하게 되어 더이상 그곳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양들은 풀을 먹을 때 줄기뿐 아니라 뿌리까지 캐 먹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에 비해 염소는 잎과 줄기를 먹습니다. 양과 염소를 함께 키우면 양이 염소를 따라 풀의 잎과 줄기만 먹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곳에 옮겼다가 돌아오면 다시 풀이 자라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양의 게으름 때문입니다. 양은 풀을 배부르게 뜯어 먹으면 움직이지 않고 자리에 눕는 습성이 있습니다. 이렇게 먹고 눕기를 반복하면 양은 지나치게 살이 쪄 건강에 이상을 가져오게 됩니다. 어떤 양들은 뛸 수가 없게 되어 포식자들의 밥이 되기도 합니다. 염소랑 섞어 키우면 활동이 왕성한 염소들에게 쫓겨 어쩔 수 없이 움직이게 되어 건강을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양때를 거친 길 위험한 길로 몰고 가게 될 경우 겁 없는 염소를 앞장세우면 양들이 잘 따라가게 됩니다. 물을 먹일 때도 물에 흔들리는 자신의 모습에 겁먹는 양들에게 염소가 태연히 물 먹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안정을 찾게 해준다고 합니다.
목자들은 낮에는 함께 방목하다가 밤이 되면 두 그룹으로 나누어 재웁니다. 염소는 추위를 타는 동물이라 굴 안쪽에 양들은 더위를 타기 때문에 굴 입구에 배치한다고 합니다. 낮에는 양들이 더위를 피해 염소의 배 밑을 파고들기도 합니다.
우리는 흔히 양은 좋은 성도, 염소는 못된 성도를 의미한다고 착각하는데 이스라엘의 기준으로는 두 짐승 모두 제사에 쓰는 거룩한 동물로 간주 되었습니다. 1년에 한 번 드리는 대속죄 제사의 제물은 염소 두 마리였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양과 염소 무리의 공통점은 모두 교회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피의 희생을 통해 회심을 경험한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며 오랫동안 교회 생활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두부류의 차이점은 정말 명확합니다. 오른편 양의 무리는 주님이 잘했다고 칭찬하는 그들의 행동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왼편의 염소 무리는 자신들이 하지 않은 일에 대해 정당함을 주장합니다. 이 차이가 영생과 영벌을 기릅니다.
이 심판의 기준은 나의 삶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타인을 향해 있는지 자신을 향해 있는지가 관건입니다. 자신을 중심으로 자기만 위해 사는 사람은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니고 예수님을 주라 시인한다 하더라도 심판날에 버림을 받습니다. 반대로 지극히 작은 사람 한 사람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함께 하려고 하는 사람은 설사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영생을 상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양과 염소는 함께 존재합니다. 하지만 어떤 시선으로 어떤 방향으로 우리의 삶을 살아가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집니다.
재림하신 예수님이 양과 염소의 무리를 나누었다는데 사실은 심판의 기준에 따라 사람을 선택해서 나누었다는 것이 더욱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 모두는 종교 중독자가 아닌 사랑의 실천자로 주님과 함께 영생의 삶을 향해 가는 신실한 일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인도하심이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2021. 5.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