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송 숲을 바라보다
최성옥
이 좋은 가을날.
하필이면 여행하는 날에 무심히 비가 내린다. 큰아들 가족과 떠나온 여행길인데. 그나마 깔깔대는 손녀의 웃음소리마저 없다면 더 음산하게 느껴질 날씨다.
안면도 해변도로를 구불구불 이어 달린다. 잔잔하게 내리던 빗줄기가 물 폭탄 터지듯 긁은 빗줄기로 변해 차창을 때리기 시작한다. 와이퍼가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저만치 회색빛 하늘과 회색빛 바다 가운데 빨간 등대가 시선을 끈다. 등대라면 흰색을 떠올렸는데 빨간 등대라니. 저 빨간 등대의 의미는 뭐지? 살다보면 의외라는 단어에 고개를 까우뚱 하게도 된다. 예약 해둔 콘도에 도착해 보니 빗줄기는 더 거칠어져 있다. 객실에 트렁크를 놓아두고 나는 다시 프론트로 내려왔다.
넓은 창밖으론 바다의 전경이 펼쳐지고 있다. 한껏 성난 파도는 바람을 업고 창 쪽으로 돌진을 하다가 더 큰 파도에 밀려 사라지곤 했다. 저렇게 성난 파도를 지척에서 본적이 있던가. 아마 나는 처음 일 것이다. 무언가 집어 삼킬 듯 그 거센 위용에 무섭기도 두렵기도 했다. 한참을 바라보던 바다 앞쪽에서 푸른 무리들을 본 것은 내 고개의 시선을 살짝 틀고 나서다. 그곳은 죽 뻗어 키가 큰 해송 숲이었다. 그 밑을 카페로 활용하는지 의자와 탁자가 놓여 있었다. 바다를 바라보며 마시는 차 한 잔의 분위기를 느껴보기엔 상황이 좋지 않았다.
파도를 싣고 온 바닷바람은 해송 숲도 무수히 때리고 있었다. 키다리 나무들은 바닷바람에 중심을 잃고 흔들거린다. 저러다 허리가 툭 부러지면 어쩌지. 쳐다보는 내가 안쓰럽고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소나무들은 촘촘히 서서 서로서로 손을 꼭 잡고 스크럼이라도 짜듯이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였다가 다시 다른 방향으로 바람을 타고 있었다. 이런 역경은 처음이 아니라는 듯이. 우리에겐 바람을 막아야 하는 사명이감도 있고 또, 어쩔 수 없는 운명에 순응할 뿐 이라며 견디어 내고 있는 듯했다.
그때, 언젠가 TV에서 보았던 남극 펭귄의 생존 방법이 떠올랐다. 혹독한 추위를 이기려고 똘똘 뭉쳐 체온을 유지하며 추위에 대응 한단다. 한 무리의 펭귄이 바깥쪽에서 추의를 막다가 적당한 시간에 안에 있던 펭귄과 자리 교체를 한다는 것이다. 현존의 시간에 집중하며 살아내는 것이리라.
이제껏 내가 보아왔던 해송 숲들은 시원한 그늘이었고 바다와 드넓은 모래사장과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연출하던 풍경이었다. 평화로운 그들의 모습에서 고뇌를 느껴보기엔 너무 좁은 안목이었다. 여러 바닷가의 해송 숲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곳이 있다. 오래전 강원도 옥계해수욕장를 갔을 때이다. 아름다운 해안도로는 길게 이어졌고 시야를 푸르게 물들여 주었다. 주변에 탄광촌이 있는지 석탄더미들이 작은 산처럼 쌓인 모습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한참을 돌아 도착한 우리 일행은 작은 어선을 가지고 고기잡이를 하는 선주에 집에 방을 빌려 짐을 풀었다. 넓은 안마당에는 어항처럼 사용한다는 시멘트로 만든 큰 사각 틀이 있었다. 뒤꼍에는 바구니와 망으로 만든 기구에 생선들이 꾸덕꾸덕 말라가고 있었다. 비릿한 냄새를 풍기며.
첫날밤, 해송 숲에 돗자리를 깔았다. 넓게 펼쳐진 푸른 바다와 아담한 소나무들이 빽빽하고 촘촘히 초록빛 지붕 을 만들었다. 그 밑에 텐트를 치거나 돗자리를 깐 캠핑 족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달빛과 가로등 불빛을 조명삼아 멋진 그림을 연출하던 밤바다의 해송 숲은 낭만에 취하기 안성맞춤이었다. 밤바다를 들락거리며 더위도 식히고 떠온 회에 소주도 한 잔씩 나누었다. 그런데 일행 중 A여사가 배탈이 났다. 남자들은 밤으로 약을 구하러 다니고 한바탕 난리를 겪었다. 그날이후, 나는 여행갈 때는 상비약부터 챙기는 버릇이 생겼다.
새날이 밝았다. 어제의 비바람은 언제 적 이야기인지 쾌청한 하늘과 내리쬐는 태양빛이 온 대지를 밝혔다. 아들과 손녀는 벌써 바닷가로 나갔는지 보이질 않는다. 나도 바닷가로 향했다. 썰물시간인지 바닷물은 저 멀리 밀려갔다. 잔잔한 바람, 맨발에 느껴지는 고운 모래의 감촉, 눈을 찡그리게 하는 태양빛의 황홀함, 지평선 저 멀리 이어진 푸른빛의 향연,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풍경이다. 코로나로 썼던 답답한 마스크도 벗고 신선한 바다의 기운을 맘껏 들여 마셨다.
파도가 쓸려간 자리 안쪽에서 아들과 손녀는 장난감 삽으로 모래를 퍼 울려 모래성을 쌓고 있다. 두꺼비 집도 만드는지 손놀림도 부지런하다. 나는 저 안쪽까지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물이 차츰 밀려온다. 빠른 속도의 밀물은 여태껏 정성으로 쌓은 손녀의 모래성을 흔적도 없이 지울 것이다. 한순간 사라지는 것들의 대한 아쉬움이 인다. 나는 얼른 거기서 나오라고 손녀를 향해 소리치며 손짓을 해댄다.
모래사장을 벗어나서 해송 숲에 이르렀다. 어제의 험난한 고난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나무들은 큰 키를 하늘로 뻗어 묵묵히 서있다. 나는 묻고 싶었다. 얼마나 무섭고, 얼마큼 외로웠냐고. 거친 바닷바람과 세찬파도를 견디어 내느라고.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젖은 몸을 햇볕에 맞기고 있었다. 위급한 상황에 자기도 모르게 난 상처와 굳게 박힌 옹이를 쓰다듬고 있는 듯 했다. 서로를 끌어안고 위로하며 사랑을 확인하는 것만 같았다. 이 세상에는 직접 겪어봐야만 비로소 알 수 있는 고통의 크기들이 얼마나 많이 존재할까?
나는, 그들의 치유시간을 방해하면 안 될 것만 같았다. 말없이 소나무의 등걸을 잡고 손바닥으로 쓰다듬어 줄 뿐이다. 그들의 심정이 어떤지 나만의 어림짐작으로 가늠해 보면서. 내가 발걸음을 돌려 우리의 숙소인 콘도 입구에 다다랐을 때 나는, 멈춰 서서 해송 숲을 한 번 더 바라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