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비
博川 최정순
아무 데도 쓰잘 데 없는 너
아무도 반기지 않는 너
외롭고 고독의 눈물 뿌리며
온다, 오누나
떨어진 낙엽 짓뭉개며
마른 가슴속으로 파고들며
온다, 오누나
네 마음 닮은 나
주방 부리나케 달려가
달콤 쌉싸름 청춘차
곰삭은 애통차
갇혀 버린 두메차
독한 망각차 끓여 내놓으니
섬돌 내려앉아
차 한잔씩 하고 가시오.
낙엽(1)
博川 최정순
개밥풀꽃 핀 듯
적단풍 버릇처럼 취하여
앵도라진 붉은 입술
중심 잃은 몸뚱이 꿈틀대고
낙하하며
세상을 씹어대며
넘어지고 자빠져
시체처럼 포개지고
치기 어린 항거도
거두지 못할 흑빛 무덤도
부질없는 인사만 겹겹이 쌓여져
죽음의 그림자에 쫓겨
절망 아래 널브러진다.
낙엽(2)
博川 최정순
여명 고개 드는 새벽
안개 덮인 계단 내려서니
소복소복 낙엽 진영
모두 날개 잃고 누웠네
밤새 먹빛 여의도록
달도 별도 울고
황금기 찬란한 전설
서릿발 아래 차갑기만 한데
사납게 흘러가는 세월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어디론가 흩어진다.
간월암에서
博川 최정순
넓게 팔 벌려 얼싸안은 모감주나무
섬 속 섬에서 달 보다 도 얻은 무학대사 도량처
물때 따라 열고 닫는 속세 이음길
갈매기 우웽우웽 소리치며 나그네 인도하니
소원 한 자락 소원 탑에 올리고
채움 비움 답 찾아 해탈문 올랐는데
몇백 년 풍상 견디며 살아온 사철나무
홀로 파란색 옷 입고 외로운 나그네 반기니
마음의 채움과 비움 바로 거기 있었네
경내 들어서 좁쌀만큼 비우고 좁쌀만큼 채우니
중생들 수복修福 기원하는 스님의 독경 소리
중생들 번뇌 씻어 줄 스님의 독경 소리
갈매기 날개 실어 멀리멀리 날아가고
간월암 황금빛 낙조 길게 누우면
나그네 하많은 응어리 풀어헤치고
얼굴 붉게 물들이며 활활 타고 있다.
망부의 한
博川 최정순
천지 피로 물들이며
포성 목 터지게 울던 날
평북 박천 봉하리 막혀
말고개 숨 가쁘게 넘으며
가슴 터져라 통곡했지
남으로, 남으로 향하는
고독한 발걸음 눈물 흘리고
비마저 추적추적 내리는데
떠나는 사람 붙잡지 못하여
기적 소리도 목이 쉬도록 울었지
휴전선 허리 동강 나
아득한 망연자실
평생 속울음 안고 살았을 아버지의 한
철없이 산 내 가슴 적신다.
모녀
博川 최정순
가족 활동 시간 제각각
오늘도 늦은 밥 혼자 먹고
마당 가로질러 터벌터벌 걷다
구름 한 점 없는 창공 올려다보는데
바람 손님 머리카락 마구 헝클고
봄 잃어 가는 마음 허허로운데
잠시 쉬어 가는 길섶엔
뒤섞인 잡초만 파랗고 파랗다
아리게 스며드는 외로움
가슴 이리저리 서성일 때
나도 모르게 뒤돌아보니
덕지덕지 파스 붙은 손으로
빨랫줄 옷가지 탈탈 털어대는
홀로 된 울 엄니 두 눈
내가 콕 박혀 있다
어머니
博川 최정순
허물 벗어던지고
떠난 자식
머리 하얀 눈 앉고야
어머니 마음 헤아리는가
검붉게 녹슨 기억 저 너머
닳고 닳은 고무신 신고
인생의 비탈길
허위허위 달려가던
팔순 근처 어머니
정리되지 못한
병든 생명줄 하나 달랑
모지락스레 붙잡는데
어머니 이마 위 떨어지는
어버이날 석양
카네이션꽃인 양 붉다.
자유로에서
博川 최정순
자유로 달려
임진각 가는 길
평양 개성 77 표지판
언제부터 있었나
배꼽 걸려 숨통 끊긴
저 철책 꼬리 감추면
북으로 북으로 단숨에 달려
아버지 고향 박천 당도하여
혼이나마 해후하련만
말로만 자유로 가장자리엔
봄꽃 아우성치며 부서지는 임진강
속으로 울며 여울지는 피눈물은
고향 떠나 서럽게 살다간 아버지 통곡.
그리움(1)
博川 최정순
당신이 어느 날
뜬금없이 잊으라기에
먹구름 되어
찌푸린 하늘 떠다니다
시뻘건 바다에 풍덩 빠져
망각의 벌판
차가운 별무리 가득하고
인정 없는 기억들만 가혹한데
날마다 눈 뜨는 그리움 어쩌지 못해
당신의 굳게 닫힌 문
다가서다 무서움에 오그라들고
잊기 위해 골백번 악무는 어금니
조금도 그립지 않다 속다짐
당신을 하루에 한 줌씩 버리고
그도 안 되면 반 줌씩 버리다
그것도 안 되면 그냥 쌓아 두지요
쌓고 쌓다 보면
썩는 날도 올 겁니다.
그리움(2)
博川 최정순
문득 먼 아득한 하늘 쳐다보니
당신은 회색빛으로 거기 누워 있네
그날,
고개 떨구고 이별의 모습으로
묻어 두어야 할 사연 감추며
가슴으로만 감싸 안던 수많은 이야기들
내 가슴에 들어와 괴롭히던 속앓이
동그랗게, 동그랗게 무심히 그려 놓고
당신은,
그리움이라는 올가미 하나
튼실하게 걸어 두고 저 멀리 떠났네.
이름 없는 들꽃에게
博川 최정순
천둥 비바람과 싸우며
날밤 새워 낙화 위해 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름 없는 너
독기 어린 향기 품고
찬 이슬에 고개 숙이다
서리 맞아 떨어진다고
가슴 뜯으며 울지 마라
누군가의 발길질
어느 누가 던진 돌
머리통 산산이 깨어져도
너 사랑하는 나 있고
너의 씨 산화하여
새 봄 맞으면
사지 넓게 펴고 활짝 웃으며
이 산 저 산 향기 가득하리라.
구름과 나
博川 최정순
하늘이 제 집이라서
바람결 주춤주춤 흘러와
계곡 어느 외딴집
지붕 위 잠시 머물다
장독대 항아리 속
간장에 헤엄치며 놀다
물수제비 뜨는 개구쟁이
눈 속에 머문다
내 마음도 구름 같아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정처 없이 흘러 다니다가
어느 날 무심히 돌아선
당신의 그림자에 내려앉는다.
佛心
박천 최정순
부처님 오신 날
마을 산속 절 가보니
구름처럼 모여든 많은 인파
수행정진 관음보살 불심佛心 아니어도
빈자貧者의 소박한 축원 한 자락
사해四海 처처處處 부처님 자비 얻고자
기와불사起臥佛事 시주 소원 성취 기원하네
부처님 찾아 지붕 올라가려다
복 짓지 못하고 모질게 산산조각
처참히 부서져 나뒹구는 무더기
공양물 용처用處 죽어 버린 기와들
이리저리 구석구석 처박혀
발에 밟히고 밟혀도 불심佛心 아니던가.
민들레
博川 최정순
임진강변 철조망 날아가
싹 틔운 눈부시게 아름답고
매력적인 꽃 아니더라도
다소곳이 고개 숙이고
북녘 향해 북바라기하며
피어나는 외줄기 그리움
매일 새로이 꽃을 피우며
개화開花의 아픔에
눈물 흘리며
잔잔히 미소 짓는
철조망의 민들레
6월의 노래
博川 최정순
고열로 뒤척이던 길고 긴 밤 갈 때
밤하늘 수놓던 별 부풀어 터지고
아침 햇살 병실 가득 툭툭 던져
창문 활짝 열고 밖을 보니
찔레꽃 아카시 꽃 물푸레나무 꽃
하얗게 하얗게 웃고 있는 길
그래, 저 길 어느 즈음이던가
저렇게 웃고 살던 내가 있었지
청옥빛으로 활개 치며 붓질하던
덜 익어 풋풋한 내가 있었지
알 수 없는 아릿한 그리움에
발목 하얗게 적시고
어머니 젖무덤 같은 동산 서면
농부 희망 심어 놓은 연초록 진영
빈 논물 채우듯 나는
죽어 가는 육신 영혼 채워야지
몸은 6월 향기 잃어 갔어도
하얗게 하얗게 웃으며 살아야만 하지.
이별
博川 최정순
구름 벗고
살그머니 다가와
향기로운 입맞춤 남긴 당신
먹구름 쌓여
얼굴 감추더니
뇌우雷雨 깊은 상처 주고
구멍 난
내 가슴 깊이
대못 하나 쾅, 박고 떠나가네.
님의 뒷모습
博川 최정순
까닭 없이 그리운 사람이여
세월 앞에 등 떠밀려도
까닭 없이 보고프네
칡넝쿨인가 어울더울
내 몸과 마음으로 파고들어
찬란한 보석 빛깔 만들었던
눈부신 그리운 사람아,
흔적 없이 내밀히 물들어 가는
아픈 사랑이었더구나!
사랑
博川 최정순
꽃 시들었다고 함부로 말하지 마라
몸은 죽어 가도 향기는 남는 것
눈 감을 때까지 온전한 생명체인 것을.
첫댓글 사랑
이별
님의 뒷모습
민들레
佛心
구름과 나
낙엽(1)
낙엽(2)
그리움(1)
그리움(2)
겨울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