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일어나 모두들 아침 식사를 하고, 6시경에 차에 올라탔다. 백두산 숙소의 음식도 잘 맞고 온돌방이라 좋았는데,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가려니 좀 아쉬웠다. 하지만 일정이 빠듯했다.
백두산에서 용정까지 무려 4시간을 달려야 한단다. 집안에서 백두산까지, 그리고 백두산에서 다시 심양까지 오는 시간이 너무 많이 소모되지만, 그래도 눈 덮인 백두산을 본 것은 여전히 기분 좋은 일이다. 너무 일찍 버스가 출발했기 때문에 모두들 차 안에서 잠을 잤다. 밤 1시 넘어 술 마시고 자고서도 아침 5시 반에 식사하고 출발하는 일행들이 한편으로는 대단해 보였다.
2시간쯤 달린 후, 백두산을 거의 다 빠져나와 고동하 라는 작은 강이 흐르는 만보군이란 곳에서 잠시 화장실에 들렀다. 화장실에서 나온 후, 상점이 있어서 들어가 보았더니, 19세기말, 20세초에 만들어진 문서들이 여러 점 있었다. 내가 관심 가는 책으로는 [기문둔갑]이 있었는데, 문제는 지나치게 높은 가격을 부르는 바람에 나의 흥미를 잃게 했다. 처음 8백 원을 부르더니, 나중에는 3백 원까지 가격이 내려갔다. 하지만 책은 사지 않았다. 기분이 좀 더 상한 것은 이도백하에서 만난 연변가이드가 굳이 나에게 책을 사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다시 차에 올랐다. 지금까지 모든 사람들이 다 건강하게 여행을 했는데, 처음으로 박수경님이 속이 울렁인다고 했다. 그래서 맨 앞자리 내 옆 자리에 앉았는데, 앞에 앉으니 덜 아프다고 했다. 한 시간쯤 달리다가 또 한번 차가 서서 화장실에 들렀고, 정원철님이 안마를 해주고, 박천숙 선생님이 약을 주는 등 여러 사람들의 조치로 다행히 용정시에 올 무렵에는 건강해졌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다행인 것은 아픈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다는 점이다.
차 안에서 올 때 연변가이드는 조선족과 한족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구별하는 것을 이야기 해주었다. 먼저 조선족은 우진각지붕을 한 집에 사는데, 한족은 맛배지붕 집에 산다. 조선 사람들은 철바퀴를 한 수레를 타는데, 한족은 타이어를 단 수레를 탄다. 조선족은 논을 많이 갖고 있으나, 한족은 밭에서 과수 농사 등을 주로 한다. 조선족은 소, 닭을 주로 키우는데, 한족은 오리, 노새, 말 등을 키운다.
연변 가이드의 이야기가 끝나고, 나는 연변지역의 과거사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우리가 간도개척 이후로 연변과 관련을 맺은 것이 아니라, 고조선, 고구려, 고려, 조선 초기 모두 이 지역을 관리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특히 윤관의 9성과 조선 초기 윤관의 9성이 연변지역에 있었다는 인식이 있었음을 강조했고, 그것이 고구려의 영토를 계승하려는 의식과 관련 있음도 말해주었다. 간도문제가 단순히 근현대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강조해주었다.
용정시에 와서 유명한 일송정이 보이는 먼 곳에서 내려 사진을 찍었고, 다시 혜란강가의 용문교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겨우 사진을 찍은 용문교는 본래의 용문교가 아닌, 근래에 다시 만들어진 것이고, 원래 용문교는 옆에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가이드로부터 들었다. 용정시에서 유명한 용정 우물은 이번에는 보지 않고, 대성중학교로 향했다. 대성중학은 연변의 동포들의 교육의 중심이다. 윤동주와 문익환 등이 나온 이곳이 여러 사람들에게는 관심의 대상이겠지만, 나에게는 대성중학 역사전시관이 아니라, 그 아래의 상점이 항상 관심의 대상이었다. 98년에 그 곳에서 북한에서 나온 조선유적유물도감 백제편을 구입했던 적이 있다. 그때 고구려 벽화편을 이곳에서 다른 사람이 불과 20분 전쯤에 구입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크게 땅을 쳤던 적었다. 그런 기억 때문에 이번에도 전시장 아래 상점을 들렀지만, 겨울철이라 그런지 너무 썰렁했다. 대성중학 전시관 옆에 지금 조선족 학생들이 공부하는 대성중학이 있다. 그곳 학생들이 점심시간에 맞추어 대거 교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학생들이 점심을 집에 가서 먹고 온다는 것이다. 저들도 윤동주처럼 우리 겨레에 이름을 남기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관람을 마치고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연변자치주의 수도인 연길시로 향했다. 연길시에서 돼지고기, 소고기를 구워서 먹는 식사를 했는데, 정원철의 이야기에 의하면 중국에서는 돼지고기가 더 비싸다고 한다. 연길시에서는 예전에 진달래 냉면을 먹은 기억이 있다. 그 냉면 맛이 기억이 났는데, 이번에는 먹지 못하고 그냥 돌아서야 했다. 연길에서 머물 시간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있던 것은 식당 옆의 조그만 가게에 개고기 라면이 있었다. 라면의 성분을 보니 新鮮狗肉이라고 적혀 있었다. 사람들은 재미있다는 듯이 하나 둘 구입을 했다.
점심을 먹은 후, 곧장 도문시로 향했다. 도문시에는 북한과의 교역을 위한 해관(세관)이 있고, 양국 사이에 다리가 있다. 우리 일행은 이곳을 관람하기 위해 도착했다.
그런데 문제는 중국측 전망대에 올라가고, 북한으로 가는 다리도 건너고, 북한 남양시에 가서 그곳 전망대에 올라가서 사진도 찍을 수가 있는데, 그 비용으로 30원을 내라는 것이었다. 일부 일행들은 돈을 내고 들어갔지만,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남북이 분단된 것도 안타까운데, 그것을 이용해서 돈을 버는 중국놈들에게 나 마저 돈을 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30원 내고 저 다리를 건너고 싶지도 않고 건널 생각도 없다. 언젠가 통일이 되면 당당하게 건너갈 것이라고 말하고, 그 기분 나쁜 현장에서 비껴서서 북한을 바라보며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그리고 그곳 상점에서 여러 물건들을 보았다. 북한의 책을 구입할까 둘러보았지만, 김정일 찬양하는 몇몇 책들 외에 내가 찾는 역사책들은 전혀 없었다. 겨우 옥으로 된 얼굴 맛사지 용품을 하나샀다. 장모님께 드려야겠다. 그런데 같은 것임에도 가게마다 가격차이가 10원씩이나 차이가 났다. 한국인을 여전히 봉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곳에 구걸하는 아이들을 볼 수 있었는데, 조선족임에도 탈북한 것이라고 속이고 있었다. 나는 이들에게는 돈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들 뒤에 어떤 나쁜 녀석이 그들을 추운 거리로 동냥하러 내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들을 보고 있자니 씁쓸했다.
조중국경을 떠나 도문역으로 향했다. 본래 연길시에서 심양가는 열차를 타야 하는데, 연길역이 한참 공사중이고, 단체 여행객이 타기에는 시간도 짧기 때문에, 분실 등의 위험이 있다. 그래서 도문역에서 타는 것이 더 좋다. 그래서 도문에서 연길까지 차표를 차고, 다시 연길에서 심양가는 차표를 구입하는 것이 더 안전하게 여행하는 방법이다. 서길수 교수님이 한 말이 생각난다. “연변탈출 작전”
도문역에 도착하니 열차 출발시간까지는 2시간이나 남았다. 대합실을 한번 둘러보았다. 그곳에 작은 서점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한국의 음란서적도 판매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곳에서 의외로 좋은 책을 찾을 수도 있는 법. 나는 연변에서 나온 민간 의료처방책 두권과 소강절의 [황극경세] 책, 그리고 중국인들을 위한 [應急口語 話韓語]책을 구입했다. 소강절. 그 위대한 易學의 대가의 대표작인 황극경세. 그 책을 보는 순간 나는 무조건 구입했다. 중국에서는 한번 본 책을 다시 살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보는 순간 구입하지 않으면 다시는 못 산다. 연변에서 나온 민간 의료처방책은 나중에 고구려 역사소설 등을 고증해 줄 때 혹시 필요할 듯해서 구입을 해보았다.
재미있는 것은 중국인들이 한국말을 배우기 위한 책이었는데, 한국말을 중국글자로 발음하게끔 쓴 책이었는데, 그 발음을 보니 우리 발음과 너무 차이가 났다. 이 책이 도리어 내가 중국말을 배우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중국어는 기본적으로 받침이 ㅇ, ㄴ, 그리고 북경사투리에 ㄹ 정도뿐이라 우리발음을 똑같이 하기라 거의 불가능하다. 그 대신 중국어로 된 것을 따라 우리말을 발음해보니 재미가 있었다.
책들을 보다보니 어느 덧 4시가 조금 넘었다. 아직 출발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가이드가 손을 써서 우리 일행만 열차에 30분 전부터 탈 수 있었다. 열차는 역시 6인실이었다. 심양에는 대략 내일 오전 6시에 도착이다. 13시간 이상을 열차에서 보내야 한다. 통화에서 이도백하까지 겨우 6시간 남짓 탄 것에 비할 수가 없다. 통화에서 기차를 탔을 때는 열차에 탄 지 불과 10분 후에 불을 꺼서 다들 자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열차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음에 따라, 이번에는 열차 안에서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가 있었다.
기차 안에서는 연길 식당에서 준비한 김밥 도시락으로 저녁을 먹었다.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했는데, 진성규 교수님과 박천숙 선생님과는 나의 과거 답사이야기를 했고, 윤석정님과는 시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윤석정님은 최고의 시인으로 백석을 꼽았는데, 나는 백석이 누구인지 몰랐다. 윤동주와 동시대를 살았던 백석이 월북되었기 때문에 한국 문학사에 잊혀지고 있다가, 80년대부터 차츰 알려진 시인으로 시가 정말 독특하여 시인들 사이에서는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받는다고 한다. 나는 귀국한 후, 집에 백석시집이 한권 있음을 발견했다. 역시 관심과 사전 지식이 사물을 보는 눈을 좌우함을 다시금 느꼈다. 일행 가운데 내가 탤런트 이상학과 닮았다고 말한 박현석님은 유독 [고구려건국사]를 열심히 읽고 있어서 기억에 남는다. 김민찬, 정명화, 김인경님과는 동북공정과 관련된 언론보도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장덕현, 조상현, 윤석정님과는 결혼문제를 비롯한 여러 인생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이번 답사에 오기 전에 유독 내 연구실에 찾아온 바 있는 차성욱님은 논문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는데, 나와 여러 이야기를 나누어 기억에 오래 남는다.
열차는 9시 반이 되자, 불을 껐다. 그래서 더 이상 사람들과 이야기하지 못하고 잠을 청해야했다.
내일 아침 6시까지 잘 잘 수 있으려나. 어쨌든 오늘 연변탈출작전은 성공이었다.
첫댓글 백석시인은 월북 전에 서울 요정집에 애인이 있었다는군요. 작년인가 그 할머니가 자신이 그 애인임을 고백을 했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