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문동
김정순
참, 가련하다. 사철 푸른 소나무를 닮으려 했을까, 대나무를 닮으려 했을까. 줄기도 둥치도 없는 몸피에 가녀린 잎으로 겨울을 버티다니 그 인내가 가상하다. 필시 무슨 업을 이루려는 뜻이 있을듯한데 알 수가 없다.
무심히 보아왔던 풀에 관심을 가진 것은 어느 겨울이었다. 눈 속에서 뾰족이 내밀고 있는 파란 잎은 보리 싹 같기도 했고 우리가 즐겨먹는 부추 잎 같기도 했다. 흰 눈과 파란 풀잎이 대비되어 더욱 파랗게 보여서 나의 눈길을 잡았는지도 모르겠다. 마음이 싸늘해지며 내 몸조차도 얼어붙듯 한기를 느꼈다. 언제나 보아왔던 사철 푸른 나무였다면 당연하다는 듯이 보아 넘겼을 것이다.
이 풀이 나를 더욱 안타깝게 했던 때는 겨울 추위가 맹위를 떨치던 때였다. 세상의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은 아침이었다. 마른 바람이 칼날처럼 헤집는 아침, 땅도 얼어 더 이상 참지 못하겠노라 부풀어 올라 성토하던 아침, 그날도 처연히 언 땅에 뿌리를 내리고 파란 얼굴로 오롯이 있었다. 혼신의 힘을 다하여 인내하고 있다 해도 언 땅에 비스듬히 기댄 잎은 지쳐있음이 분명했다. 지조 높은 선비의 절개를 닮으려 했으면 꼿꼿해야하지 않을까? 분명 선비의 지조에는 못 미치는 듯했다. 아마도, 그 자리에 쓸어져 죽을지라도 회절만은 않겠다는 수절녀의 절개를 닮았다고 해야겠다.
긴 겨울의 고행을 이겨낸 풀잎위로 봄은 따스하고 화사한 미소로 살랑살랑 다가왔다. 지쳐 쓰러진 잎은 몸을 열어 연 초록의 여린 잎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풀은 줄기도 욕심내지 않았고 제 키만큼의 분수를 넘는 일이 없었다. 잎의 숫자도 자기에게 주어진 개수 만큼에 만족했다. 정원의 나무들 사이에 낮게 엎드린 욕심 없는 풀이었다. 나무들이 넓고 푸른 잎을 키워 하늘을 덮어도, 성큼 키를 키워 하늘로 향해도, 숲에 묻혀 잊혀 져도, 원망을 모르는 풀이었다. 바람이 불어오면 바람보다 먼저 눕는 폼이, 세사에 이력난 민초들의 모습 같았다.
욕심도 내지 않는 풀, 자신을 내 세우지도 않는 풀이라고 욕망조차 없었겠는가. 때로는 나무보다 더 크게 키를 키우고 싶었을 것이다. 손 내밀어 잡으려도 잡히지 않는 별을 피멍이 들도록 가슴속에 새겼다가, 오뉴월 염천에 별꽃으로 토해냈다. 태생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민초들의 한 같은 꽃. 한 여름의 더위에 자색의 꽃대를 밀어 올려, 은하수를 옮겨놓은 듯 무리지은 작은 별꽃들이 예쁜 꽃잎을 터트렸다. 봄도 아닌 여름에 피어난 풀꽃은 봄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더구나 언 땅에서의 고행을 격은 후의 꽃이라서 내 마음이 더욱 짠했는지 모르겠다.
가을이 되면 모든 풀잎들이 한해를 마무리하고 제 색깔을 버리고 누렇게 겨울을 준비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이 풀은 통 겨울 채비에는 관심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미련한 것인지 겨울의 무서움을 모르는 것인지 내 마음이 초조했다.
“경비 아저씨, 이풀이 무슨 풀인가요?”
“예, 맥문동 아닌 기요.”
차로 끓여먹고 한약재로 쓰이는 맥문동 이었다. 몸에 좋다고 차로 자주 끓였을 뿐, 정작 맥문동이라는 약초가 어떻게 생기고 어떤 생태로 자라는 지에는 관심이 없었던 나였다.
맥문동의 땅속뿌리가 궁금했다. 아저씨를 졸라 맥문동 한포기를 뽑아 올렸다. 맥문동의 알뿌리는 가느다란 실뿌리에 땅콩이 매달리듯 보석처럼 맺혀있었다. 한쪽은 뾰족하고 한쪽은 둥근 알갱이가 오랜 고행의 흔적으로 영롱히 빛나는 노스님의 사리 같았다. 어쩜 조개가 고통을 참으며 진주를 키우듯 맥문동도 그러하지 않았나 싶었다. 여름의 소나기와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고서야 인류의 질병에 의로운 약재를 잉태할 수 있었던 맥문동 앞에 숙연해 졌다. 비록 여리고 보잘것없는 풀이었지만, 당당하고 도도하게 겨울과 맞설 수 있었던 힘은 뿌리에 품은 자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간도 맥문동과 같은 삶을 산다면 세상에는 당당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가득할 것이다.
오늘도 맥문동 차를 끓인다. 심장이 약한 나와 기침을 자주하는 손자의 진해 거담을 위해서다. 맥문동의 한 살이를 알고는 허투루 대하기가 민망스러워, 감사함과 경건한 마음을 담아 정성껏 끓인다. 끓어오르는 물위로 겨울의 폭풍이 지나가고, 언 땅 속에 버텼던 맥문동이 꽁꽁 여며두었던 가슴을 물속에 풀어 놓는다. 우러난 차속에는 봄의 발 돋음, 여름의 소나기, 태풍, 찜통더위도 함께 어린다. 자신의 고행이 인류에게 의로움을 줄 수 있는 삶이었다고 당당하게 소리치는 듯하다. 맥문동 특유의 향을 품고 너울너울 피어오르는 증기 속으로 맥문동 같았던 한 여인의 얼굴이 겹쳐오고 있다.
그녀는 곤궁한 가계와 동생들 바라지에 자신의 행복은 외면했다. 마흔이 다될 무렵에야 소임을 다한 그녀는 멍에 같은 삶에서 풀려나, 도망치듯 서둘러 결혼했다. 그녀의 남편은 상처한 홀아비이긴 했으나 건강하고 유능한 사람이었다. 흠이라면 전처소생으로 정박아 아들이 하나 있다는 게 흠이었다. 행복도 한 순간이었다. 결혼 후 일 년도 되지 않는 날, 교통사고로 그녀를 남겨두고 그녀남편은 떠났다. 그녀에게 남겨진 건 평생을 짊어져야할 또 다른 멍에인 전처소생의 아들과 혹독한 삶의 무게였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한 점 혈육도 생산하지 않은 그녀에게 새 출발 할 것을 권했다. 자기의 소생도 아닌 남의 자식을 위해 멍에를 지고 사는 것에 박수칠 이가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자신의 가야할 길을 굳히는 듯 했다. 기박한 팔자를 타고 났으니 팔자대로 살아야 한다며 주위의 입을 막았다.
그녀는 시장의 귀퉁이에 좌판을 펴고 생선을 자르기 시작했다. 사시사철 비가 오나 눈이오나 천막하나 없는 노상에서 생선을 토막 내었다. 스스로의 한과 서러움을 토막 내듯이 신들린 듯 칼질을 했다. 매서운 겨울 날씨에 손이 얼어 터졌고, 한여름 찌는 더위에 생선이 썩어내려 애간장을 태웠다. 하루도 쉬지 않은 고행의 삶을 살면서도 그녀는 누구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았다. 그녀의 심성과 근면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장사는 잘된다고 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꾀 많은 재산도 모았고 살기가 괜찮다는 소리도 들렸다.
어느 겨울의 혹독히도 추웠던 날, 시장에서 그녀를 만났다. 기침소리를 내며 칼질 하는 그녀가 애처로웠다.
“이제 살만하다던데, 고생그만하고 편히 살면 안 되겠니?”
“내가 편하면 동티가 난다. 팔자대로 살지 뭐.”
“그럼 쉬어가며 하든가.”
“그래도 나는 밤에라도 쉰다. 물고기는 죽어서도 눈을 부릅뜨고 있잖니.”
농담처럼 진담처럼 던지는 그녀의 말에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그녀는 언제나 당당했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당당한 여인으로 만들었는가는 그녀의 회갑연에서 알 수 있었다.
그녀의 회갑에 초대되었다. 자기의 소생도 없고 살아가는 삶이 고달프게만 보였던 그녀가 회갑을 거창하게 한다니 의아했다. 정작 놀란 것은 연회장 입구에서였다. 양편으로 늘어선 것은 축하 화환이 아니라 말쑥하게 차려입은 젊은이들이었다. 저들은 누구일까 잘못 온 게 아닌가하고 나는 눈을 비비고 이름을 확인했다. 허리 굽혀 인사하며 안내하는 젊은이들이 궁금했다. 옆자리의 하객에게 살짝 물었더니 도움을 받고 자란 젊은이들이란다..
힘든 삶을 살면서도 어려운 학생들에게 남모르게 학비를 보태주며 살아온 그녀였다. 맥문동이 알뿌리를 만들기 위하여 차가운 땅에 뿌리를 내리고 파란 잎으로 떨고 있었듯이, 그녀 역시 찬바람과 더위와 소나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의로운 삶을 살았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힘들면 포기하고 이것저것 손대어보았으나, 무엇하나 반듯하게 이룬 것이 없고 남을 위해 나누지 못한 내 삶이 부끄러웠다.
잘 살았다는 척도는 누군가를 위하여 얼마나 공헌 했나 일 것이다.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 의롭게 살았다면 그게 바로 위대한 삶이 아닐까. 맥문동 같은 그녀의 삶이 진정 위대한 삶이었다.
첫댓글 입장하신 손님이 세분밖에 없는데 조회수는 일곱번이라니 한사람이 몇번을 읽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읽으셨으면 꼬리글이라도 달아주세요.
넵, 샘 신고합니다. 샘 글은 몇번 읽습니다. 배운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