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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온천 글방 원문보기 글쓴이: 온천-김길수
<단편소설>
마지막 과제
김 길 수
차는 고속도로를 벗어나 국도로 접어들었다. 운전석에 앉은 아들 녀석은 묵묵히
운전에만 열중하고 있었고, 나는 뒷좌석 등받이에 파묻히듯 졸고 있다가 고개를 들며 곧추앉았다. 오랜만의 고향 길을 자세히 바라보기 위해서다. 가을해가 기울어가는 들녘에는 오랜 기억속의 작은 마을들이 간혹 지나칠 뿐 별로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이제 이 고개만 넘으면 바로 고향 마을이고, 그 다음이 H읍이다!” 들판이 끝나고 송
림(松林)재 고갯길로 접어들자, 나는 아들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마치 처음 알려주듯 불쑥 말했다. 굳이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다름 아니다. 나이 탓인지 고향마을 코앞까지 왔음에도 아무런 감흥조차 일어나지 않는 나 자신의 무뎌진 감성을 스스로 일깨워보고자 함이다.
“고개 위 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 가자.“
내 말에 아들은 고갯마루 간이휴게소에 차를 세웠다.
“고향마을에는 안 들리실 거예요?”
아들은 자동판매기에서 음료수 한 잔을 뽑아주며 내게 물었다.
“고향마을? 거기엔…, 시간 나면 들러보기로 하고, 오늘은 곧장 H읍으로 가자.”
H읍에 못 미친 십리쯤에 고향마을이 있지만, 친인척도 꼭 만나야 할 친구도 없는지라, 옛 마을모습이나 둘러보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가도 그만 안가도 그만이다.
대신 H읍에는 내일 일흔일곱 번째 생신을 맞이하는 삼촌이 계신다. 삼촌이지만 나와는 연령차가 열두 살 밖에 나지 않는다. 공교롭게도 삼촌은 아버지와의 터울도 열두 살 차이다.
요즘에야 그럴 일이 거의 없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집안에 무슨 일이 있으면 삼촌은 장조카인 내게 곧잘 의견을 물어오셨다. 형님이 안 계시니까 으레 조카에게 묻겠지 하겠지만, 의논꺼리도 아니다 싶은 것까지 물어오는 걸 보면, 단순한 조카이상으로 생각해주는 삼촌임에 틀림없다. 그런 삼촌이 며칠 전에 예상치 못한 뜻밖의 전화를 내게 주셨다.
“보고 잡기도 하고…, 또 생일이기도 한께 꼭 한번 다녀가라.” 고.
연세 탓인지 많이 쉰 것 같은 목소리였다. 나는 근래에 없었던 일인 데다, 아무 일도 없이 놀고 있는 상태라, 흔쾌히 그러마고 했다. 전화를 끊고 나니 벌써 희수(喜壽)인가? 하는 생각과 더불어 장조카이면서도 그 동안 삼촌의 생신 한 번 기억한 적이 없을 만치 무심했구나! 싶었다.
그래서 기왕이면 아들 녀석도 함께 참석하여 오랜만에 작은 할아버지와 당숙들도 만나보았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아들도 기꺼이 참석하겠다며 시간을 내어 따라나섰다.
몇 년 만에 보는 H읍의 풍경은 그야말로 상전벽해라 할 만 했다. 택지개발이 한창이던 몇 해 전의 분주하던 장면만 기억하는 나로서는, 전혀 몰라보게 달라진 모습에 그저 아연할 따름이었다. 삼촌댁은 즐비한 고층 아파트 단지 안에 있었다.
“아이고, 우리 조카가 오셨네!”
숙모는 현관문을 열어주며 큰 소리로 반기셨다. 거실에는 숙모님 혼자서 TV를 보고 계셨던 듯 조용했다. 사촌들의 식구들로 시끌벅적하리라 예상했던 나는 의외의 모습에 어리둥절해졌다.
“숙부님은 어디계세요?”
“잠시 강둑으로 산책 가셨는데…! 금방 오실거야. 우리 경식이도 오랜만이라 잘 몰라보겠네.” 숙모님은 아들의 어깨를 다독였다. 나는 소파에 걸터앉으며 거실을 둘러보았으나, 내가 생각했던 생신잔치 분위기는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의아스러운 생각에 다시 물었다.
“동생들은…? 다들 어디 갔어요?”
“아직 안 왔어. 내일 올 거라고 하네.”
“내일이라니요?”
내가 뜨악한 표정으로 다시 묻는 순간, 현관문이 열리며 삼촌이 들어오셨다.
“어이! 조카 왔네! 이기 얼마만이고. 어이? 우째 그리 무심하노?”
삼촌은 들었던 지팡이를 팽개치며 반갑게 내 손을 잡았다. 말투에서 반가움과 섭섭함이 동시에 묻어났다. 나는 삼촌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홀쭉한 얼굴이며, 휑한 눈빛이 완연한 병색으로, 마치 낯선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너무 오랫동안 찾아뵙지도 못하고… !”
나는 송구한 마음에 한껏 머리를 숙였다.
“아냐. 기냥 해본 소리야. 자주 연락 못한 건 나도 마찬가지지 뭐!”
“그런데 숙부님! 어디 많이 편찮으시네요? 몸이 영…!” 내가 선 채로 다급히 물었다.
“조카는 모르지, 삼촌 요즘 맨날 병원 신세야!” 곁으로 다가온 숙모님께서 거들었다.
“허, 차차 얘기하지. 멀리서 힘들게 왔는데…, 우리 경식이도 직장 잘 다니고? 시간이 되던가? 뭐 마실 거라도 좀 내오지 않고?” 삼촌은 아들의 손을 잡으셨다.
“그래요. 내 정신 좀 봐. 반가운 마음에…!” 숙모는 얼른 주방으로 가셨다. 삼촌과 동갑내기인 숙모도 많이 늙어보였다.
“성님하고 똑 같은 병이라카네…!. 아마 얼마 남지 않았는가 봐”
삼촌은 마치 남의 말처럼 덤덤하게 이야기하셨지만, 순간 나는 멈칫했다. 아버지와 같은 병이라면…? 간경화증? 의술이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치 발달했지만, 쉽지 않은 중병이 아닌가.
‘삼촌이 이 지경인데 사촌들은 내게 연락 한 번 없었다니…!’ 갑자기 느껴진 소외감에 스스로가 어려운 손님이 된 것 같다.
“치료는? 어떻게 하고 계셔요?”
“계속 통원치료를 받고 있다 아이가. 일주일에 한 번씩 대구 K대학병원에 댕긴다. 좀 심하긴 심한가 봐. 의사들도 자신 있는 소릴 안하네. 수술할 형편도 아이라 카고.”
나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아버지의 경우를 너무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때 ‘수술이라도 해 보자!’ 며 매달리는 내게 너무 늦었다며 손사래를 치던 의사의 표정이 지금도 선하다. 간엽(肝葉)이 반 이상 굳어버려 회복불가능하다고 했다.
나는 삼촌의 눈빛에서, 음식물을 거의 섭취하지 못해 바짝 마른 몸피에 휑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40여 년 전 아버지의 눈빛을 보았다.
“동생들은 내일 올 거라면서요?”
내가 화제를 돌리려는 생각에서 아직 도착하지 않은 동생들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 사실은…!, 내가 조카한테 하루 먼저 오라켔지. 뭘 좀 의논해 볼라꼬! 생일 밥은 내일 낮에 묵을기라카네. 그런께네 내일 일찍 모두들 올 끼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니? 시장할 낀데, 식사부터 하고…, 자식들은 굳이 기다리지도 않네. 오든 말든,”
삼촌은 갑자기 화가 나는 듯 퉁명스럽게 혼잣말처럼 툴툴하셨다.
나는 삼촌의 갑작스런 태도변화가 무슨 일인가? 했지만, 다짜고짜 묻기도 뭣해 가만히 있었다. 어릴 땐 나를 많이도 업어주신 삼촌이다. 마치 큰 형님처럼 따랐고, 막내아우처럼 허물없이 지낸 사인지라, 호칭마저 아직까지 삼촌이 입에 붙어있다.
숙모님은 저녁상에다 반주까지 차려왔다. 삼촌에게 술은 독약이나 다름없는지라 놀라 바라보았는데, 삼촌은 말릴 새도 없이 술병을 따시더니 술잔을 내게 권하셨다.
“멀리서 오니라고 고생 했데이. 한 잔 해라. 손주도 한 잔 할래?”
“얘는 술을 못해요. 그런데 삼촌, 아니 숙부님은…?”
내가 술병을 넘겨받으며 술을 드시면 안 된다는 표정으로 머뭇거리자, 아무 거리낌 없이 먼저 술잔을 챙겨 드셨다.
“괜찮아. 모처럼 아니 몇 년 만에 조카가 왔는데 술 한 잔 쯤이야 해도 개안타…!”
“그렇게 술을 금해도…? 그래, 딱 한 잔만 하세요. 그토록 찾아대던 조카가 왔으니까.”
숙모님은 차마 박절하게 제지는 못하고,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문득 아버지의 병실에서 어머니께서 내게 들으라는 듯이 아버지를 타박하던 모습과 너무 흡사했다.
삼촌이 그렇듯, 아버지도 못지않은 애주가였다. 고된 농사일을 해낼 수 있는 원동력이라면서, 과음은 하지 않았지만, 밥은 굶더라도 술은 거르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내가 제대를 3개월 정도 남긴 즈음에 전보를 받았다. 면장의 확인까지 받아서 보낸 관보에는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것이었다. 몇 달 전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다닌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었지만, 이 정도까지 심할 줄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특별휴가를 받아 급히 아버지가 입원해 계신다는 부산의 M종합병원으로 갔다. 급한 마음에 헐레벌떡 출입문을 통과하던 나의 귀에 마치 환청처럼 ‘영식아!’ 하는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놀라며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았더니, 아! 거기에 놀랍게도 웬 허수아비가 서 있었다. 너무 말라버린 몸피라, 아버지는 영락없는 허수아비였고, 나는 놀란 나머지 잠시 멍하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오느라고 고생 했제?”
도무지 힘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나는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진작 큰 병원에 좀 가보자며 그렇게 독촉을 해대도, 소화제만 찾으며 왕고집을 부리더니…, 거기다가 천 날 만 날 술 안 먹고는 안 되더니…!” 어머니는 눈물을 훔치며 아버지의 고집을 탓하셨다. ‘너에게 전보를 보내고는 하루 종일 출입구에 붙어 서서 아들을 기다리더라.’ 고도 하셨다.
아버지는 과수원 일에 함몰되다시피 열중하며 자주 속이 더부룩하다고 하셨다. 약국에서 구입한 소화제로 속을 달래시다가, 점점 정도가 심해지자 마지못해 읍내병원에 갔었고, 거기서는 아예 더 큰 병원을 추천했다. 그때서야 대도시 큰 병원으로 부랴부랴 갔었지만, 이미 병은 깊을 대로 깊었다는 어머니의 넋두리였다.
‘단순한 소화불량 정도로 생각했던 일이 이렇게 되다니…?’ 달리 손 쓸 기회도 없이 제대 직전에, 아버지는 마흔 아홉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이후 어머니는 아버지의 쓸 데 없었던 왕고집과 지긋지긋한 농사일이 아버지의 명을 단축시켰다는 이야기를, 돌아가시기 전까지 평생 두고두고 되 내이곤 하셨다.
“조카! 내가 하루 먼저 조카를 부른 건 뭘 좀 의논해 보까 싶어서야. 내가 딴 사람도 아인 조카한테 이런 이바구 할라카이 좀 미안타만, 달리 의논할 데도 없어서… ”
식사를 마치고, 숙모가 밥상을 챙겨 주방으로 나가자, 잠시 지난 생각에 잠겨있던 내게, 삼촌은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꺼내셨다.
“무슨 말씀이신데 그리 어렵게 하십니까? 저한테 어려울 게 뭐가 있으시다고요?”
몇 잔 마신 술기운 탓인지, 어느새 삼촌을 대하던 어릴 적 습관이 배어나온 듯,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옛날 말투가 터져 나왔다.
“자넨 이런 일 잘 알제? 내가 죽기 전에 재산을 어디 좋은데 기부했으마 싶은데…?”
“예? 무슨…?”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농담은 아닐 테고…? 삼촌이 재산을 기부하신다고? 나는 대답보다 먼저 삼촌의 표정을 진지하게 살펴보았다.
“왜 놀래노? 나도 기부할 수 있다 아이가?”
삼촌은 의아하게 바라보는 내게 히죽 웃음까지 보이셨다.
“아니에요. 기부할 수야 있죠. 뭐.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이해가 잘 안되네요.”
나는 삼촌의 진심이 뭔가? 싶어 일부러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내심으로는 ‘저승길이 가까워오니까 사람의 생각도 바뀌는가보다!’ 하는 생각이 왈칵 들었다.
“믿어지지 않는 것도 당연하겠지. 내가 그렇게 살아 왔으이까네…!”
“아니 무슨 말씀을? 그리고 어디에다 얼마나?”
“얼마라니? 기부를 하려면 가진 거 몽땅 다 해 버려야지”
“네?”
나는 하마터면 크게 소리까지 지를 뻔 했다. 세상에는 좋은 일 하는 사례도 많고, 신문지상에도 그런 미담이 자주 소개되곤 하니까, 삼촌도 재산의 일부를 어디 좋은 일 하는데 기부하고 이름이나 좀 내고 싶으신가? 싶었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아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겐 삼촌이 그런 생각을 가졌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이었다. 절대 그럴 리가 없을 사람으로 생각해왔으니까 더욱 그랬다.
내가 듣기로 삼촌은 연세가 높아가면서 고향마을이나 읍내에서 구두쇠영감으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내가 지켜본 삼촌은 돈 관리에 철저하긴 해도 결코 구두쇠란 소릴 정도는 아니었다.
삼촌에게 이런 소문이 노골적으로 나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H읍이 인근 대도시인 대구의 베드타운 격인 신도시로 개발되면서부터였다. 삼촌 소유의 토지들이 신도시 개발지역에 포함되면서 엄청난 지가상승을 가져왔고, 덕분에 삼촌은 읍내에서 땅 부자로 꽤나 소문이 나게 된 탓이다.
‘갑자기 불어난 재산 때문에 사촌들이 문제라도 일으켰나…?’
나는 삼촌이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를 생각해보았으나 언뜻 떠오르는 게 없었다. 사촌들과는 나이차이도 많은데다, 근황도 잘 모르고 살아온 게 사실이니까.
그러자 오랫동안 잊고 지낸 옛일들이 하나둘 점화되기 시작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지 못한 점이 안타깝고 송구했다. 덩달아 몇 해 전,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 혼자말로 푸념하던 일도 생각났다.
“그걸 그냥 지키고 살았더라면 훨씬 나았을 낀데…?”
나는 그 말을 충분히 이해했다. H읍이 새로운 신도시로 변모된다는 얘기를 듣고 하신 말씀이었으니 경제적으로 쪼들리는 나를 두고 한 말이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이십년도 지난 까마득한 옛 일이 되고난 후의 일이었다. 내가, 아니 어머니와 내가, 오랜 망설임 끝에 그 과수원을 삼촌에게 팔아넘긴 한참 후의 일이었으니까.
내가 중학 2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아버지는 내게 H읍에 있는 농업고등학교로의 진학을 권했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차츰 산업화가 이뤄지면, 덩달아 농촌도 잘 살게 될 것이다. 그러니 농촌을 지키는 게 먼 장래에는 훨씬 좋을 것이라는 주장이셨다.
하지만, 내겐 반 귀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여느 다른 아이들처럼 인근 대도시로의 진학을 꿈꾸던 내게 시골 농업학교 진학이라니…? 생활형편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른 아이들보다 특별히 어려운 것도 아니고, 성적 또한 최고일류학교는 몰라도 웬만한 학교라면 갈만한 상위수준이었기에 아버지의 제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해 겨울 아버지는, 어머니의 반대에도 아랑곳없이, 얼마 안 되는 논과 밭을 되는대로 모두 정리하여 읍내 인근 교외의 야산을 구입하셨다. 그런데 새로 구입한 야산은 놀랍게도 돌과 자갈이 가득하여 버려진 땅이나 다름없는 벌거숭이였다.
남들은 소위 문전옥답을 팔아치우고, 물론 평수야 상당히 늘어났지만, 토지로서의 가치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는 땅을, 그것도 집에서 더 먼 곳에 가서 대토한, 아버지의 처사를 두고 참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들 쑥덕거렸다.
하지만 아버지는 의연하셨다. 읍내로 이사할 예정이라 했고, 수백 년 전래해 온 논밭농사보다는 야산을 개간하여 과수원을 만들겠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내게는 나중에 이 농장을 물려받아야 할 테니 다른 도시로의 진학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하게 하셨다.
처음엔 그저 해보는 이야기로 들렀던 나의 진학문제가 정말로 그렇게 고착화되는 것 같아 조바심이 일기 시작했다. 나는 아버지에게는 아예 말도 붙여보지 못하고, 어머니께 매달렸다. 어머니는 내 생각을 백번 이해해주셨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모두가 도시로 나가는 시대추세에 역행하는 아버지의 처사를 비난도 해보고 사정도 해봤지만 아버지는 도무지 막무가내였다.
그렇게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중3학년이 지나갔다. 나의 성적은 변명 같지만 불확실한 미래로 인해 형편없이 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별로 개의치 않으셨다. H읍내에 있는 하나뿐인 농업학교에야 성적이 비록 형편없어도 충분히 갈 수 있다는 점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나도 고집을 부렸다. 학교 성적이야 많이 떨어졌지만 다른 친구들이 대도시학교에 원서를 쓰는데 자극받아 나도 떼를 썼다. 어머니도, 심지어 동네사람들도, 아버지에게 조언을 보탰지만 아버지는 꿈쩍도 하지 않으셨다. 결국 나는 비상수단까지 써 보았다. 그럴 바엔 차라리 고등학교에 안 가겠다고 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가타부타 별로 반응이 없었다.
생각 끝에 나는 아버지에게 상의조차 하지 않고, 진학학교를 바꿔치기했다. H읍의 농업학교 대신 부산 P고등학교에 입학원서를 냈다. 만일 합격만 한다면 아버지도 결국 보내 주시겠지!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결과는 낙방이었다. 그렇다고 진학을 안 할 수도 없는 일이라 고민 끝에 담임선생님께 의논까지 했다. 담임이야 어디서든 열심히 하면 된다는 일반적이고 면피성 짙은 조언으로 얼버무리며 아버지 뜻에 따르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농업학교에 진학은 했지만, 공부와는 담을 쌓고 말았다. 머릿속으로는 언제나 도회지로의 진출을 꿈꾸었기에, 그까짓 농업학교에서의 생활은 아무래도 좋았다.
사실, 아버지는 이웃집 아저씨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전형적인 농사꾼이셨다. 다만, 다른 농사꾼들과 다른 한 가지 특기를 가졌었는데, 바로 일본말을 잘 하셨다. 시골에서 일본말 쓸 일이 거의 없었음에도 틈만 나면 일본말을 배우고 익히셨다.
아버지께서 이렇게 일본말을 잘 하게 된 동기는 내가 철이 들면서 알게 된 일이다. 해방되던 해 초봄, 징용으로 끌려간 아버지는 두 달도 채 안 되는 일본에서의 단기훈련을 받고 동남아전선으로의 투입을 대기하던 중 일본이 망하는 바람에 군대자체가 해산되어버렸다고 하셨다.
아버지와 동료들은 일본의 패망덕분에 살아났지만, 쉽게 돌아올 수 없었다. 돈도 없는 데다 귀국하는 배편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굶어죽지 않기 위해 구걸이라도 해야 할 지경이었다. 아버지와 동료들은 2~3명씩 짝을 지어, 노가다 일을 구하거나 행상을 하거나 농촌으로 가서 가을추수를 도와주는 등등의 일을 하며 그해의 가을과 겨울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때 가장 큰 무기가 바로 일본말이었다. 아버지는 다른 동료들에 비해 일본말에 재능이 있었던지, 아니면 기억력이 좋았던지, 소학교에서 배웠던 일본어실력이 힘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일본사람들과 만나면 으레 아버지가 앞장서 말을 붙이셨다. 사정이 이렇게 되다보니 자연히 아버지는 일본말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갖게 되셨고, 그것이 습관이 되어갔다. 이듬해 봄에 간신히 배편을 구해 고향으로 돌아오셨지만, 그 후에도 일본말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지 않았다.
모르는 말은 마을이나 읍내에서 나이든 어른들에게서 쉽게 배울 수 있었다. 해방된 지 그리 오래지 않았던 당시만 해도, 전문적인 용어는 모르지만, 웬만한 상식적인 일본말쯤은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이런 노력의 결과 시골에서는 보기 드문 일본전문가셨다. 특히 일본 농촌과 영농에 대해서는 관심과 흥미가 더욱 남다르셨다. 어떻게 구하셨는지 나중에는 일본책이나 잡지까지 구해 읽으시며, 틈만 나시면 동네 사람들에게 일본의 농촌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한·일 간 외교관계도 수립되기 전이라 모두가 일본을 싫어하고 반일감정이 고조되었던 당시에도 아버지의 생각은 한결같으셨다.
“일본이 아무리 밉고 상종할 수 없는 나라라도, 어차피 우리나라는 일본의 발전모델을 따라갈 수밖에 없을 거야. 모든 요건이 비슷하니까. 욕할 것은 욕하되 배울 건 배워야지. 그러니 너도 유능한 영농(營農)인이 되겠다는 포부를 갖고 차근차근 공부해. 멀리 내다보면서.”
아버지는, 마음에도 없는 농업학교에 진학해 하루하루를 너무도 재미없이 지내고 있는 내게 틈만 나면 이런 이야기를 반복하셨다. 그러면서 땅 만큼 정당한 대가를 되돌려주는 게 세상에 없다는 얘기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해주셨다.
아버지는 날만 새면 과수원 개간 일을 하셨다. 나도 방학이나 휴일 등, 틈만 생기면 아버지를 돕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내게 틈틈이 일을 찾아 시키셨다. 동시에 농사일은 몸에 배어 체질화 되는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빼놓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때가 되면 자신을 이해해 줄 거라며 때로는 꾸중을, 때로는 격려를 해주셨지만, 나는 학교만 마치면 어떻게든 도회지로 나갈 궁리만 했다. 도무지 성미에 맞지 않는 농촌생활이 지긋지긋했고, 방학이면 대도시에서 귀향해오는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럭저럭 학교를 마치자 곧장 군대에 지원했다. 농촌을 탈출하기 위한 유일한 방편이자, 아버지의 감시권역에서 벗어날 수 있은 길이라 생각했었으니까. 그때, 아버지께 상의도 없이 지원했던 일이 당시는 통쾌한 기분이었으나, 지금에 와서는 하나의 부끄러움으로 남아있다.
제대를 하고나니 아무런 할 일이 없었다. 농사일도 아버지가 계실 때는 시키는 대로 하면 됐었는데, 혼자 하려니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머니도 이점에서는 나와 마찬가지였다. 주도적으로 농사일을 해본 일이 없으니까 당연히 일머리도 모르고 힘도 부치셨다.
모든 걸 삼촌의 가르침에 따르며 겨우겨우 한 해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머릿속은 어떻게든 다시 공부해 대학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어머니도 나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으셨고, 삼촌께서도 아무리 봐도 농사지을 녀석은 아니라며 혀를 차셨다.
어머니나 삼촌은 어릴 적부터 나의 적성을 잘 아시는 데다, 그 당시는 젊은이들이 모두 대도시나 공단으로 빠져나가던 시절인지라, 농사일에 붙잡아 둘 수도 없고, 둘 생각도 없으셨다.
이듬 해, 집과 입시학원을 왔다 갔다 한 결과 겨우 지방대학 야간부에 진학할 수 있었다. 낮에는 무슨 일이든 하며 밤에는 공부를 해볼 계산이었다.
다른 수입원이 전무했던 내가 학비를 대기위해서는 아버지가 물려준 토지를 처분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산업화가 한창 시작되던 시기라 모두들 도시로 집중하는 바람에 논밭을 처분하려는 사람은 많고, 사려는 사람은 드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믿을 사람은 바로 삼촌이었다. 학문적인 지식이야 별로 없지만, 세상물정이 훤했던 삼촌이었다. 거기다 붙임성이 좋아 인근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삼촌에게 과수원매각을 일임했지만 도무지 원매자가 없다며 난감해 하셨다. 급기야는 삼촌에게 과수원을 맡으라고 했다. 삼촌은 과수원은 구입할 여력이 안 된다며 내키지 않는 표정이셨다.
“너거 삼촌이 맘만 묵으마 맡지 못할 것도 아일낀데…?”
어머니는 삼촌이 아무래도 과수원이 마음에 안 드는가보다고 하셨다. 과수원이 마음에 든다면 삼촌이 맡을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내가 보기에도 그랬다. 부지런하고 야무진 삼촌인지라 물려받은 재산이 별로 없었음에도 해마다 착실하게 농토를 늘려왔었다. 거기다 부창부수라고! 숙모도 제대 후에야 안 일이지만, 당시 유행하던 계(契)모임을 주선하거나, 소규모 사채놀이로 꽤나 쏠쏠한 재미를 보신다고 했다. 숙모도 고향 인근마을에서 자랐기에 많은 사람들을 잘 아는 데다, 워낙 싹싹하고 똑똑한 기질까지 더해져 주위사람들에게 받은 신임이 바탕이 되었다고 했다.
결국 대학등록금을 숙모에게서 빌려 해결했다. 그리고는 과수원 일을 모두 삼촌에게 위탁하고 어머니와 함께 부산으로 이사를 했다. 어머니는 농사일하기엔 약한 체질인데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충격으로 농촌생활을 아예 벗어나고자 했으므로 나의 계획에 적극 찬동해주셨다. 이듬해도 마찬가지였다. 학교 다니며 여러 가지 일을 해 보았지만 등록금 해결이 쉽지 않았다.
결국 이태 뒤에, 삼촌이 자신의 농토를 정리하여 과수원을 매입하셨다. 그 동안 빌린 학자금 원금이며 이자도 정산을 했다. 농촌실상을 잘 모르는 데다, 농사일에 진저리를 치던, 나와 어머니는 삼촌께서 제시한 가격에 과수원을 넘겼다.
그런데 십여 년 전부터 읍내가 신도시로 개발이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삼촌은 나를 대할 때마다 미안해하시는 기색이 역력했다. 남의 말 좋아하는 사람들 말마따나, 세상물정 모르는 조카와 형수를 꾀어 토지 값을 헐값으로 3년에 걸쳐 나눠준 것이 미안하셨을까? 이런 이야기는 생전에 어머니께서 ‘고향사람들에게서 들은 소문’이라 했었다.
형님 덕에 팔자가 늘어진 녀석이라며 조카에게 갈 복(福)을 가로챘다는 비난을 하거나, 심지어 제 형이 지하에서 얼마나 애통해 할까? 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나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이야기가 왜 이리 나오는가 싶었다. 견강부회(牽强附會)가 따로 없구나! 싶었고, 모든 걸 결과로만 평가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나로서는 남의 일에 왜들 이리도 관심이 많을까? 웃어넘기긴 했지만, 일말의 아쉬움도 전혀 없진 않았다. 그나마 삼촌에게 매도한 게 잘 된 일이라 여겼고, 어머니와 내가 오히려 사정한 부분도 있다는 생각을 잊지 않았다.
삼촌의 집안 형편이 갑자기 좋아진 건 당연한 일이다. 서울과 대구에 흩어져 어렵게 살고 있던 아들 셋, 딸 하나에게도 경제적 지원을 많이 해 주셨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동시에 읍내에서 삼촌은 지역의 유지가 되셨다. 군청을 비롯한 관공서에서도 삼촌을 알아보았고, 무슨 일이 있을 때면 마을의 어른으로 모신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정작 삼촌은 어려운 시기의 생활패턴 그대로였다. 구두쇠란 평판도 지역유지로서의 품위유지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었다. 한마디로 격에 어울리지 않게 자린고비 습성을 버리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숙부님은 왜 그런 생각을 하세요? 아이들에게 그냥 물려주시면 될 걸”
나는 잠간동안의 침묵 끝에 조용히 물었다. 삼촌은 내 표정을 찬찬히 바라보셨다.
“……! 사람은 모두 타고난 분복(分福)대로 살아야 해. 안 그라마 망조가 들지”
“숙부님 그게 숙부님 복이 아닙니까. 타고난 복을 어긴 게 아니잖아요?”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우리 집 아이들은 어림없는 탐욕(貪慾)이야. 아버지한테 돈이 좀 생겼다 싶으니 하나같이 하던 일도 집어치우고 더 큰 사업을 할 거라며 야단들이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서울 있는 막내는 아직 말이 없지만, 위의 두 녀석은 사업을 하겠다며 벌써부터 생떼야. 나이 들어 월급쟁이는 못하겠다나? 요즘엔 사위 놈까지 뭐가 있지 않을까? 은근히 눈치를 보인다니까.”
“어, 숙부님 그럴 리가 있습니까?”
“아니야. 내일 모이거든 자네가 한 번 살펴보게. 자네 말은 좀 들을랑가 몰라. 대구 사는 큰 놈은 몇 년 전에 이혼하며 한 살림 날렸지…. 올해 나이 오십인데…, 인자 와서는, 나이 들어 고용살이 못하겠다며 때려치우고, 무슨 조명기기공장인가 인수받는다고 야단이야. 지금?”
“그래요. 그 나이에…?”
“거기다 서울 사는 둘째 놈은 서울 근교에다가 무슨 가든이라나 음식점인가를 지을 거라며 어차피 물려줄 유산이니 아예 미리 나눠주란다.”
“……?”
“내가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고 했더니만 이 녀석들 지금 뭐라 카는 줄 아나? 그라마 지 놈들은 모두 망한데, 그기 내 책임이가? 우짠 일인지 손자 녀석들도 모두 공부도, 일도 지대로 안하고 하나같이 빈둥거리며 놀고 자빠졌다 안카나?”
“……그래요?
“지 애비는 지금 오늘 내일하고 있는데, 이놈들은 오히려 어서 죽기를 기다리고 있다니까. 지금 나놔 줄라케도 골치 아파. 서로 몫이 많다 적다 시비할 놈들이거든…!”
“그럴 리가요?”
“그라고, 내가 죽기 전에 조카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다른 사람들 말마따나, 자네의 어려운 형편을 이용한 것 같아 늘 짠했네. 그때 이 삼촌이 많이 미웠제? 형수님도 그랬을 기고.”
“숙부님은 무슨…? 이왕 이렇게 된 것, 법대로 그만 상속받게 해주세요.”
“조카! 그기 아이라나까. 지금 도와줘봤자 결국 그게 정말 망하는 지름길이야. 녀석들은 뭐라카더라? 그래, 어릴 때 어렵게 살아온 걸 보상받아야 한다나? 나 참 기가 막혀서. 지 놈들이 무슨 고생을 했노? 또 뭘 했다고?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농땡이 짓만 해 놓고선. 하는 짓이 너무도 괘씸해. 그러니 빠른 시일 안에 어데다가 기부하마 좋을지? 알아봐주게. 자네만 알고…!”
“동생들이 가만있겠어요? 숙부님. 전 동의할 수가 없는데요.”
“허 이 사람. 동의 안 해도 상관없네. 그란다고 내가 기부 못할 건 아인께네.”
나는 삼촌의 고집을 잘 아는지라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려보았다. 쉽지 않은 일을 굳이 내게 이 문제를 의논하는 이유가 뭘까? 싶었다.
‘그래. 내일 동생들 만나 좀 설득시켜달라는 뜻이 아닐까? 당신의 이야기를 잘 안 들으니 그간의 사정을 잘 아는 내가 전후사정을 설명하면서…?’
나는 지친 기색의 삼촌을 바라보며 ‘참 정신력이 대단하구나!’ 싶었다. 몸 상태가 저런 데도 자신의 사후까지 챙기신다 생각하니, 철저하게 살아온 삼촌의 삶에 숙연함마저 느껴졌다.
이튿날 읍내에서 가장 소문났다는 한정식 집에서 삼촌의 희수(喜壽)연이 조촐하게 열렸다. 사촌동생들을 비롯한 가족들만 모였다. 삼촌은 기력이 쇠잔해보였지만, 어제 처음 볼 때보다는 그래도 좀 나아보였다. 모두가 삼촌에게 생신축하 인사와 더불어 만수무강을 기원했다. 문득 마지막 순간까지 의식이 초롱초롱했던 아버지가 생각났다. 그러자 삼촌의 저 초췌한 얼굴은 얼마나 더 생명이 지탱될까? 하는 의구심이 일었다.
식사를 하면서 나는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촌동생들의 동태를 유심히 관찰했다. 녀석들은 오랜만의 만남임에도 별 반가운 기색이 없어보였다. 마치 모르는 사람들끼리 만난 것 같았다. 녀석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일까?
“큰 동생은 이제 오십이라며? 회사 정년이 얼마나 남았지?”
마지못해 내가 먼저 곁에 앉은 제일 큰 동생에게 물었다. 동생은 나의 물음에 상석(上席)쪽에 앉은 삼촌과 숙모의 얼굴을 한 번 훑어보았다.
“정년은 몇 년 남았지만, 올 초에 그만뒀어요. 월급쟁이 너무 오래하니 지겨워서…. 아이들 시집 장가보낼 준비도 해야 하고…! 그래서 내 사업을 좀 해 볼 작정입니다.”
“사업? 무슨 사업?”
“내 특기가 조명분야 아입니까. 내게 딱 맞는 조그만 조명기기공장이 하나 나와 있는데…, 저 꼰대가 도무지 답을 안주네요. 형님께서 좀 도와주세요.”
동생은 다시 한 번 삼촌얼굴을 힐끗 쳐다보고는 내게 답답하다는 눈길을 보냈다.
“형님! 그거. 요즘 쉽지 않아요. LED니 LCD니 하는 첨단제품시대에 형님기술은 이미 낡아 안 된다니까요.” 듣고 있던 중간동생이 끼어들었다.
“야! 너 지금 뭐라고 했나? 니가 뭘 안다고 야단이야. 야단이?”
“형님! 왜 몰라요 참 괜한 짓 하시지 마시고 생각 잘 해 보세요”
“뭣이라? 그럼 가든은 되고?” 두 동생의 이야기가 거침없이 나왔다.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제법 큰 소리로 제지했다.
“그만들 해라! 숙부님께도 들리시겠다!”
내 말에 큰 동생은 억지로 화를 삭이는 듯 씩씩거리며 눈을 부라렸다. 그동안 저희들끼리는 이미 된다. 안 된다. 많은 이야기가 오갔던 모양이었다.
삼촌 얘기가 새삼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 상황이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도시개발 전까지는 참 우애 있는 사촌들이라고 어머니께서도 칭찬을 하시곤 했었는데…!
“너희들 앞으로 숙부님께 무슨 일 생기면 내게도 즉시 연락 좀 해라.” 나는 결국 이 말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내 말에 큰 동생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삼촌께 아무런 답을 드리지 못하는 게 마음에 걸리기도 했지만, 이럴 때는 어떤 대답도 드리지 않는 게 정답이 아닐까? 싶었다. 어쩌면 이 문제는 아버지께서 삼촌을 통해 내게 던져주신 마지막 과제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송림재 고개를 오르며 아들 녀석이 키득 소리를 내 웃으며 말했다.
“할아버지께서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가지셨던 건 확실하네요.” 그간 어느 정도의 전말을 알고 있었던 데다 어제 오늘의 일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그렇지. 하지만 아주 멀리 보시지는 옷 하신 것 같지 않아?”
“그거야 아버지와 할머니께서 관리를 잘 하셨으면 별문제가 없었을 일인데요?”
나는 녀석의 어딘가 아쉬운 듯 맹랑한 해석이 마음에 걸렸다.
‘이 녀석도 말은 안하지만 내가 한 옛 일을 아쉬워하고 있구나!’ 나는 머쓱한 기분에 제대로 된 변명거리를 찾다가, 불쑥 우리와는 무관한 일이라는 점을 강조하듯, 에둘러 한마디 했다.
“만일 내가 할아버지 생각대로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았더라면, 부자는 됐을지 몰라도, 이 세상에서 너를 만나지는 못했을 거야.” 내가 고향을 떠나 현재 살고 있는 부산에서 아내를 만났기에 네가 태어났다는 점을 강조한 셈이다.
산모롱이를 돌아 올라 송림재를 다 넘도록 아무 말 없이 차를 몰던 아들 녀석은 차가 들판 가운데로 들어서자, 그때서야 생각난 듯 웃으며 대답했다.
“아버지 그 말씀은 맞는 것 같아요! 만약 그랬다면? 전 아예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까요.” 끝.
<작가약력>
한국 부산문인협회(소설분과), 연제문학회, 공무원문학협회 회원
행자부주관 공무원운예대전 소설부문 최우수. 산문집 <가보지 않은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