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강에서 시작된다.
정 성 천
엊그제 입추가 지났건만 텃밭에 김이라도 멜라치면 따가운 햇볕은 살갗을 파고들고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비지땀은 주체할 수가 없다. 입추, 즉 가을로 들어섰으니까 선선한 가을 맛이 나야만 하는데 오늘이 말복이라 아직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리니 지금 이 시기를 여름이라고 불러야 하나 가을이라고 불러야 하나.
철이 들어 음력의 24절기를 알고 난 이후부터 항시 의문스러웠다. 우리가 느끼는 계절의 변화와 실제 절기에는 다소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특히 입춘과 입추는 체감 절기와 많은 차이가 나서 마치 계절이 우리를 속이는 것 같은 야속함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하늘의 운행으로 절기가 생겨나는데 하늘의 운행에 어디 거짓이나 속임이 있겠는가? 계절은 의연히 제 갈 길을 가고 있으나 자꾸 계절이 우리를 속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인간의 육체가 너무나 간사하기 때문이 아닐까? 인간의 육체는 고통과 편안함에 너무나 간사한 나머지 미묘한 시절 변화에는 둔감한 것 같다. 그러나 자연의 변화는 섬세하지만 어긋남이 없다.
이런 예민한 변화는 하찮은 곤충들이 더 정확하게 알아차린다. 저녁나절에 메밀잠자리 떼가 잔디밭 위에서 유유히 떠다니는 모습을 목격한 것 말고는 변한 게 없는데 새벽의 서늘한 기운이 돌아오고 우리는 팽개쳐 두었던 홑이불을 끌어다 덮기 시작한다. 그 메밀잠자리가 점점 빨갛게 물이 들어 고추잠자리로 변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 이미 가을은 시작되어 온 산하가 고추잠자리 꼬랑지 색깔을 닮아 간다.
그러면 가을의 첫 시작은 어디서 시작될까? 봄은 산골짜기 얼음장 밑 물소리로 시작된다면 가을은 새벽 강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움직이는 것이 가장 변하기 쉬운 법 가장 빨리 변하는 것이 바람이다. 그래서 미묘한 변화는 강에서부터 시작된다. 서늘하게 먼저 변한 바람과 따뜻한 물이 만나 안개를 만드는 장소가 바로 강이기 때문이다. 강에서 바람과 물이 만나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안개가 적의 침입을 알리는 봉화처럼 피어오른다.
안개가 피기 시작하면 강가의 풀색이 화려하고 찬란한 녹색에서 사십 대 아낙의 얼굴처럼 수수하고 차분한 녹색으로 바뀌고 오래지 않아 억새꽃과 갈대꽃이 강둑 따라 다투듯이 피어난다. 물 마른 강바닥에서 여뀌꽃이 붉게 피어나면 강변 둔치 밭에서는 같은 여뀌 과인 메밀꽃이 하얗게 피어난다. 이렇게 가을은 강변의 미묘한 변화로 시작된다.
입추가 되어도 더위 때문에 아직은 한여름이라고 그래서 더 성장하고 더 몸집을 불릴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고 간사한 인간의 육체는 오판한다. 하지만 자연은 벌써 열매의 열 음 즉 여름을 마무리 짓는 작업에 들어간다. ‘백로전미발(白露前未發)’이라는 말이 전해 오듯이 입추와 백로 사이 한 달간이 열매 맺음을 마무리 짓는 시간일 것이다.
입추는 모든 한해살이풀 생명이 펼치는 생명 레이스의 반환점이다. 새싹이 눈 틈으로써 시작되어 하늘만 보고 몸집을 불려 왔던 생명 레이스에 반환점을 돌고 이제 돌아가는 여정이 시작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길은 아주 멀고도 험한 모양이다. “길 떠날 땐 눈썹도 빼고 가라.”라는 말이 있듯이 모든 생명이 무게를 줄이느라 야위고 또 야위어간다.
이 거룩한 시기를 그냥 보낼 수야 있나? 푸닥거리 굿이라도 한판 벌여야 하지 않겠는가? 마치 먼 길을 떠나거나 중요한 일을 시작 할 때 향불을 피워 축원하듯이 강물은 안개를 피워 이 거룩한 날들을 하늘에 고하고 돌아가는 그 길이 부디 무탈하도록 비는 축원 의식을 치른다.
뭇 생명이 돌아가는 계절인 가을이 강에서 시작되는 것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강은 돌아가는 자들을 위한 의식을 치르기 좋은 장소이다. 우리가 건너야 할 강에는 항시 차안과 피안이 있기 때문이다. 차안과 피안을 나누고 있는 강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돌아가는 길목을 상징하기에 좋은 장소이다.
인도 바라나시의 갠지스강가에는 수많은 화장장이 있다. 인도 전역에서 모여든 하루에도 수천의 주검들이 태워져 갠지스강물에 흘려보낸다. 그들은 강에서부터 저승의 피안을 향해 돌아가는 여정을 시작한다. 이는 인도인들의 평생소원이기도 하다. 강 근처 호스피스 병동에는 마치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듯이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넘쳐난다고 한다.
돌아가신 우리 부모님들도 강을 건너 저승의 피안으로 갈 생각을 하셨던 걸까? 두 분 다 유언하신 대로 화장한 유골을 땅에 묻지 않고 낙동강에서 떠나보냈다. 부모님이 생각날 때나 삶이 팍팍하여 부모님에게 마음의 위로를 받고 싶을 때 나는 찾아갈 곳이 없었다. 그리고 추석 명절에는 남들은 “벌초한다.” “성묘한다.” 하며 살아생전에 못내 다한 효도를 잘도 하는 것 같은데 나는 차례를 지내고 갈 곳이 없었다. 젊었을 적에는 그것이 야속했다. 불효를 만회할 기회마저 박탈한 부모님이 너무 매몰차고 박정한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부모님 생각이 옳았다고 생각을 하게 된다. 돌아가는 길에는 미련이나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 돌아가는 일에 더 전념할 수 있을 것 같고 산 자에게도 보낼 때 깨끗하게 보내드리고 죽은 자와 꺼들리지 않는 삶이 더 잘 사는 삶이 아닐까? 기제사가 없어지고 주인 없는 묘소가 너무 많아 건설공사의 골칫거리가 되는 요즈음의 세태로 미루어 볼 때 우리 부모님들은 선견지명을 갖고 계셨던 것 같다.
강은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가야 할 피안도 우리가 사는 이곳 차안도 모두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속도가 느려 마치 정지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자기만의 속도로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강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마치 서늘한 바람과 더운 강물이 만나 안개를 피우듯 세상사 모든 것이 만남의 인연을 따라 생겨나고 또 그렇게 흘러가는 것인데 무언가 남기고 떠나는 일이 부질없고 부적절한 일이라는 것을 강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맑아진 햇볕과 서늘한 바람, 짙은 새벽안개, 풀잎을 흥건히 적시는 이슬, 칙칙하게 물들이며 시나브로 여위어 가는 강변 풀 섶, 산들거리는 억새꽃 하얀 손짓, 텁수룩하게 핀 갈대꽃, 차츰 붉어져 가는 메밀대... 초가을 강의 모습은 한바탕 흥겨운 소풍을 끝내고 이제 막 집으로 돌아가는 어린아이의 마음처럼 소슬하게 물들어 간다. 돌아가는 일을 그처럼 아름답게 묘사한 어느 시인이 생각나게 하는 계절이다.
오늘 이처럼 가을 산색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이고 내가 강물이 되어 그리움의 한복판으로 흐르고 싶은 것은 아직 나의 소풍이 끝나지 않아서인가?
오늘은 강물이고 싶구나.
향연 같은 안개 피워 푸른 새벽을 열어도
오늘은
가을빛 담아 흐르는
강물이고 싶구나.
텅 빈 백사장의 싸늘함이 그대 같아도
맑은 물 풀어 하늘빛 담는
강물이고 싶구나.
깊이 박힌 돌이 못내 저려 와도
부드러운 물살로 여울지는
강물이고 싶구나.
억새꽃 하얀 손짓이 달빛을 불러와도
오늘은
그리움 따라 흐르는
강물이고 싶구나.
첫댓글 색즉시공 공즉시색. 공사상이 구조에 탄력을 더 하고 있군요. 토봉 수필가의 최근작인 것 같습니다. 갈수록 세련미를 더해가는, 전원수필의 미학을 맛봅니다.
졸필에 공감해 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글 쓴 게 달아났다.
우리의 지식 창고에 뭘로 한 구석을 메꿀까?
아직 빈 곳이 허전한데
밀잠자리와 고추잠자리는 별개 종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