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교員嶠와 신재信齋의 〈동국악부東國樂府〉⑦
번역 이 기 운
《한강문학》은 성기조 박사의 〈권두문학강좌〉(문예사조)를 분재(29호까지, 가을호, 2022)하여 문학도의 높은 호응을 받으며 대장정을 마쳤다. 이어서 30호(2023, 신년호)부터는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의 〈동국악부〉를 게재하기로 편집회의에서 결정하였다. 원교 이광사는 《서결書訣》을 남기고 〈동국진체東國晉體〉를 확립한 서법가書法家이며 강화학의 정신을 문학과 논문으로 표출한 문학가이자 사상가이다. 그러나 미술사학의 분야에서 크게 주목을 받아온 명성에 못지않은 문학, 학술사상에 관해서는 연구나 평가가 까닭 모르게 부족하여 왔다. 그리하여 강화학파 학맥을 세운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에서부터, 해방 이후 담원 정인보로 이어지는 한국 철학사상의 진정한 큰 맥脈을 이어가기에, 오늘날 숨 가쁜 지경에 이르렀다는 판단에 따라, 원교의 문학, 학술사상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동국악부〉를 분재하기로 결정하게 됐다. 〈동국악부〉에 담긴 사상은 한민족의 시원과 미래를 밝히면서, 시가詩歌에 담긴 철학은 심오할 뿐만 아니라 분량에 있어서도 방대하여, 문학도의 이해를 돕기 위한 방편으로 부득이 분재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음을 밝힌다. 아울러 〈동국악부〉에 담긴 선현의 뜻을 재해석하여 옮기는 것만 하여도 벅차올라, 낯빛을 가다듬고 심지를 한층 끌어올려 선각, 선현의 철학과 사상을 옮김에 있어서 용두사미龍頭蛇尾가 되지 않도록 정진할 것임을 밝힌다. 〈권두문학강좌〉를 통해 원교를 지상紙上에 드러내기로 결정하기까지에는 한강문학 편집고문님들의 격려와 도움 그리고 담원 정인보님의 자제분 정양완 박사의 걸작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2)》(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에 전적으로 의존하였음을 밝힌다.〈편집자〉 |
원교員嶠 초상화(국립박물관 소장)-임오壬午(영조, 1762)년 부령富寧에서 신지도薪智島로 귀양지를
옮겨 정유丁酉(1777) 8월 26일,그 섬의 금실촌金實村 우사寓舍(객사)에서 돌아가니 나이 일흔 셋이었다.
이 초상화는 바로 일흔 살 갑오甲午(1774) 겨울에 화사畫師 신한평申漢枰의 그림이다. 8월 28일은 곧
선생의 생신이다. 선생은 신지도에 있을 때 ‘수북노인壽北老人’이라 자칭하였다(원교 자신이 8월 회晦
경신庚申에 태어났다 하였는데, 8월 경신일은 바로 29일이다).
〈동국악부東國樂府〉-전체 목차 | |
1. 태백단太伯檀-30호 게재 2. 황하가黃河歌-30호 게재 3. 성모사聖母祠-30호 게재 4. 임중계林中鷄-31호 게재 5. 우식곡憂息曲-31호 게재 6. 치술령鵄述嶺-31호 게재 7. 황창무黃昌舞-32호 게재 8. 참마항斬馬衖-32호 게재 9. 왕무거王母去-32호 게재 10. 양산가陽山歌-34호 게재 11. 파경합破鏡合-34호 게재 12. 조촉사朝蜀使-34호 게재 13. 현학금玄鶴琴 - 35호 게재 14. 만파식적萬波息笛 - 35호 게재 15. 월명항月明衖 - 35호 게재 | 16. 상서장上書莊 - 36호 게재 17. 포석정鮑石亭 - 36호 게재 18. 조룡대釣龍臺 - 36호 게재 19. 낙화암落花巖 - 37호 게재 20. 조촌석朝天石 - 37호 게재 21. 살수첩薩水捷 - 37호 게재 22. 성상배城上拜 23. 영서기迎茜旗 24. 절영마絶影馬 25. 창근경昌瑾鏡 26. 성제대聖帝帶 27. 문곡성文曲星 28. 백사가百死歌 29. 여재립女戴笠 30. 두문동杜門洞 |
* 본고는 《江華學派의 文學과 思想(2)》(鄭良婉,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 초판 본) 중 〈圓嶠와 信齋의 東國樂府〉를 모본母本으로 삼아 윤문하였음을 밝힙니다) * 《한강문학》에 게재한 〈동국악부〉의 내용 중 ‘원교와 신재의 시’ 번역은 桑谷 이기운(시조시인, 문학평론가) 선생께서 맡아주셨음을 밝힙니다. |
〈동국악부東國樂府〉-해설
〈동국악부〉는 원교의 《두남집斗南集》(권4)에 30수가 실려 있다. 악부에 실린 30수의 제목에서부터 국조國祖 단군檀君을 비롯하여, 고려高麗가 망亡하였을 때 두문수절杜門守節한 역사적 사실과 그로 인한 변곡점에서 민족의 얼을 가늠할 수 있는 본보기를 가려 읊은, 역사의식歷史意識이 두드러지게 드러난 作品들이다.
〈동국악부〉에 실린 각각의 수首는 모두 자주自註가 달려 있으며, 원교圓嶠 한 사람만 읊고 만 것이 아니라, 아들 신재信齋에게도 같은 주제主題로 역시 30首의 〈東國樂府〉를 새로이 짓게 하였다. 따라서 《신재집信齋集》 첫머리에 간략한 자주自註와 함께 실려 있음에서도, 원교가 민족의 얼을 아들에게 심어주려 하였고, 그 뜻을 아들이 품고 그에 대한감동을 녹여 읊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원교員嶠의 〈동국악부〉에 아들 신재信齋가 함께 한 〈동국악부東國樂府〉에는 우리 민족의 역사의 질곡을 장엄하고, 숭고하게 그려내며, 때로는 처절悽絶하게 겨레의 발자취를 가려 적어 놓았기에 원교의철학과 사상을 새삼 확인確認하게 된다.
《信齋集》 첫머리의 〈東國樂府〉에 대한 자서自序는 다음과 같다.
“우리 아버지께서 〈東國樂府〉 30편을 지어, 영익令翊으로 하여금 이어 화답和答하도록 하셨다. 그러나 영익令翊은 시詩에 능能치 못하고, 억지로 본 딸 수도 없어서, 지을 수는 없건 만도,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어서, 여기 질박質朴하고 촌스러운 말로 엮게 된 터이다. 사적事蹟이 황당괴이荒唐怪異 한데서 나와, 정도正道에서 어긋나 의심疑心스럽고 기롱譏弄 당할 만한 것은 반드시 편제篇題에 기록記錄하고 詩에 드러내어 굴원屈原의 천문天問의 뜻을 스스로 붙이는 터이다” 하였다.
〈해동악부海東樂府〉
조선 후기에 오광운(吳光運)이 지었다. 연작의 영사악부(詠史樂府)이며 28편으로 되어 있다. 그의 문집인 목판본 《약산만고藥山漫稿》(권5)에 수록되어 전한다.
각 편은 〈태백단太伯檀〉, 〈황하가黃河歌〉, 〈성모사聖母祠〉, 〈임중계林中鷄〉, 〈우식곡(憂息曲〉, 〈치술령鵄述嶺〉, 〈황창무黃昌舞〉, 〈참마항斬馬巷〉, 〈왕무거王毋去〉, 〈양산가陽山歌〉, 〈파경합破鏡合〉, 〈조촉사朝蜀使〉, 〈현학금玄鶴琴〉, 〈만파식적萬波息笛〉, 〈월명항月明巷〉, 〈상서장上書莊〉, 〈포석정鮑石亭〉, 〈조룡대釣龍臺〉, 〈낙화암落花巖〉, 〈조천석朝天石〉, 〈살수첩薩水捷〉, 〈절영마絶影馬〉, 〈창근경昌瑾鏡〉, 〈성제대聖帝帶〉, 〈문곡성文曲星〉, 〈백사가百死歌〉, 〈여대립女戴笠〉, 〈두문동杜門洞〉 등 28편이다.
원교 이광사가 〈동국악부〉를 지을 때 모본으로 삼았을 것으로 보인다. 〈동국악부東國樂府〉에는 〈성상배城上拜〉, 〈영천기迎茜旗〉 2편을 더하여 30편으로 되어있다.
19. 낙화암落花巖
조룡대釣龍臺의 西에 있으니, 의자왕義慈王이 唐兵에게 敗한 바 되자, 宮女들이 흩어져 달아나다가 이 바위에 올라 스스로 江에 몸을 던졌기로 이렇게 부른다.
在釣臺西 義慈王爲唐兵所敗 宮女奔进 登是巖 自墮于江 故名.
鸞鳳萃下 | 美人이 어울어져 뛰어내리니(란봉췌하) |
釵笄墮地 | 비녀를 꽂은 채 땅에 떨어지고(채계타지) |
雲煙爛堆 | 구름인가 물안개인가 부서져 쌓이고(운연란퇴) |
鬌鬟委也 | 떨어진 쪽진 머리도 버려졌다네(추환위야) |
紅蕖亂飄 | 붉은 연꽃은 어지러이 나부끼고(홍거난표) |
履寫廢也 | 신발도 옮겨져서 버려졌구나! (리석폐야) |
鏗鏘遠聞 | 금옥의 쟁그랑 소리 멀리까지 들리니(갱장원문) |
觼珮撇也 | 珮物고리 부딛침이라(결패별야) |
霣星如雨 | 떨어지는 별인가? 비처럼 쏟아지니(운성여우) |
璫珥捐也 | 귀걸이도 버려졌네(당이연야) |
縠紋纈江 | 주름잡힌 명주무늬 강에 무늬지고(곡문힐강) |
纖褵聯也 | 너울너울 날개옷은 연이었어라(섬리연야) |
彤雲冪流 | 붉은 구름인 양 뒤덮어 흐르니(동운멱류) |
臙脂褪也 | 臙脂도 빛바랬네.(연지퇴야) |
銀華漲漚 | 은빛으로 화려하게 불어난 물거품(은화창구) |
鉛粉潠也 | 화장품에서 뿜어 진 것이라네(연분손야) |
一笑傾城 | 한번 웃음에 온 장안이 기울어지고(일소경성) |
再笑傾國 | 두번 웃음에 온 나라가 기울어지네(재소경국) |
龍漦夏殄 | 龍의 거품에서 태어난 褒姒로 인해 夏는 亡했고(용시하진) |
銅柱殷剝 | 여기저기 銅柱 세우다 殷은 쇠했다네(동주은박) |
箕服滅周 | 뽕나무로 만든 화살통 때문에 周는 망했고(기복멸주) |
梃尾啄漢 | 臣下 세력이 커서 漢나랄 쪼아 먹었다네*(정미탁한) |
蠱淫釀禍 | 蠱惑스런 淫亂이 禍를 빚으니(요음양화) |
終底自爛 | 마침내 스스로 문들어지는 것(종저자란) |
千花迸閷 | 온갖 꽃 흩어져 없어지니(천화진쇄) |
孰如是熸 | 그 무엇이 이렇듯 꺼져가던가?(숙여시잠) |
爲作詩謠 | 이래서 詩와 노래를 지으니 (위작시요) |
萬世斯鑑 | 萬世토록 이를 본보기 삼기를(만세사감) |
_______________
进:나아갈 진進의 간체자(簡體字), 萃:모을 췌, 버금 쵀, 釵: 비녀 채, 비녀 차 笄:비녀 계, 釵笄墮地: ‘비녀와 비녀가 땅에 떨어지다’로 해석할 수도 있으나, 笄는 비녀를 꽂은 채라는 동사로도 사용할 수 있기에 ‘(여인들은) 비녀를 꽂은 채 땅으로 떨어지다’라 해석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의상을 갖춘 백제 여인들을 생각하게 한다(이렇게 품위를 지킨 백제 궁녀들을 생각할 때 더욱 처연한 생각이 든다), 爛: 빛날 란(난)/문드러질 란(난), 鬌:머리털 빠질 추, 덜 밀고 남긴 머리털 타, 鬟:쪽 환, 蕖:연꽃 거, 履:밟을 리(이)/신 리(이),
鏗:금옥 소리 갱, 鏘:금옥 소리 장, 觼:고리 결, 珮:찰 패, 撇:칠 별, 霣:떨어질 운, 우레 곤, 璫:귀고리 옥 당, 珥:귀고리 이, 捐:버릴 연, 縠:주름 비단 곡, 紋:무늬 문, 纈:홀치기 염색 힐, 纖:가늘 섬, 褵:향낭 리(이), 彤:붉을 동, 冪:덮을 멱, 臙:연지 연, 목구멍 인, 褪:바랠 퇴, 漚:담글 구/갈매기 구, 담글 우/갈매기 우, 潠:뿜을 손, 鉛粉: 얼굴빛을 곱게 하기 위하여 얼굴에 바르는 화장품의 하나, 漦:줄줄 흐를 시, 땅 이름 태, 殄:다할 진, 剝:벗길 박, 箕服(檿弧箕服:고사 뽕나무로 만든 활과 화살을 파는 사람이 주나라를 멸망시킨 사람이란 뜻), 檿:산뽕나무 염, 弧:활 호, 箕:키 기, 梃:막대기 정. 蠱:뱃속벌레 고, 요염할 야, 淫:음란할 음, 요수 요, 閷:깎을 살, 감할 쇄, 孰:누구 숙/익을 숙, 熸:꺼질 잠, 詩謠:시요 시(詩)와 노래를 아울러 이르는 말, 斯:이 사/천할 사, 鑑:거울 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첫 句부터 16句(鉛粉濮也)까지는 바위에서 投水하는 宮女의 모습을 내리 그렸다. 그러기에 韻字도 둘째 句의 地(眞韻)를 제외한 일곱 字는 다 馬韻의 也로 내리닫고 있어 意와 韻이 한결같음을 드러내고 있다.
다음의 네 句는 國, 剝으로 같은 入聲이다. 韻은 職, 覺으로 다르지만 역시 終聲이 入聲임은 같고, 다음 네 句 中 燔과 鑑역시 塩韻과 咸韻으로 다르지만 終聲의 ‘ㅁ’ 또한 같다.
‘一笑傾城 再笑傾國’에서 비롯되는, 女色이 나라를 망침을 말하느라라 褒姒때문에 亡한 夏, 銅柱 세우다 亡한 殷, 화살통(武力)때문에 滅亡한 周나라며, 臣下의 勢力이 하도 커서 漢이 망하게 될 때 임금이 制御키 어려움을 읊었다.
그리고 끝 두 句 ‘爲作詩謠 萬世斯鑑’에서 自己가 이 詩를 쓰게 된 動機를 이렇게 읊고 있다. ‘蠱淫釀禍 終底自爛’이라 하여 썩어 문들어지게 된 原因은 蠱淫임을 간과해선 안 된다. 더구나 詩經과 같은 四言體(112字)를 써서 古朴한 맛을 주고 있는 점에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에 比해 信齋는, 序도 員嶠(원교)와 같고 四言體도 같지만 8句 32字로 짤막하고 冷情하게 읊고 말았다. 詩는 다음과 같다
或與匡助 | 더러는 임금을 바르게 돕는다 하고(혹여광조) |
或謂知命 | 더러는 天命을 앎이라고도 일컫는다.(혹위지명) |
所遇從頌 | 운명 따라 다소곳함을(소우종성) |
或謂義秉 | 더러는 義를 지킴이라고도 한다(혹위의병) |
薄窘靡夷 | 야박하고 군색하다거니 편안치 못하다커니(박군미이) |
或謂如何 | 더러는 어떻게 그럴 수가라고도 한다 |
或謂優於息之嬀邪 | 더러는 말하기를 息侯의 夫人**보다 낫다고도 |
_______________________
匡:바를 광, 앉은뱅이 왕, 謂:이를 위, 窘:군색할 군, 靡:쓰러질 미, 갈 마, 嬀:물 이름 규, 拙:옹졸할 졸, 俱:함께 구/갖출
__________________________
四言이라는 詩型이, 詩經의 古拙 素朴한 雰圍氣를 지닌데다가 겨우 여덟句 中에 或謂∼ 或云 ∼ 或謂 ∼ 하여, 세 번이나 같은 句의 되풀이를 보이는 點 또한 詩經의 경우와 같다. 그리고 맨 끝에서는 4句 두개로 끝내지 않고 의미상 8字 1句로 바꾸어서 平板的인 句型의 리듬을 바꾼 데 妙味가 있다 하겠다.
息侯의 夫人은 屈辱的이며 內外가 떨어져 사는 삶 보다는 죽어서의 同穴을 차라리 바랐기에 自殺을 擇했던 것이고, 아내의 自決을 뒤따라 간 息侯였기에 夫婦는 마침내 同日俱死하였던 것이다.
夫婦間의 義였으나, 義慈王의 被捕에 辱된 삶보다 죽음을 擇한 宮女는 息嬀보다 낫다고도 하더라는 것인데, 令翊(령익) 역시 낫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백제왕조의 멸망시 낙화암과 관련하여서는 三千宮女의 투신한 장소라 구전되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三千宮女란 단어로 백제의 멸망을 의자왕의 사치와 방탕으로 돌리고 있으나, 이는 역사의 왜곡일 뿐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尾大: 喩臣下之勢極大也 《後漢書》〈王符云〉 疎禁厚下, 以尾大陵弱
**春秋. 楚의 息侯의 부인인데 姓이 嬀라 息嬀라고도 한다. 楚文王이 息을 치고 息嬀를 데리고 가니 國亡 夫死의 슬픔으로 문왕과는 말도 않았다고 전해짐.
*** 한시를 쓸 때, “三千宮女“라고 사용할 경우 시운의 성조가 ”평평평측”의 성조를 가지게 되어 한시의 작법의 규칙을 맞추기 위해 찾아 낸 글귀일 뿐, 정확한 궁녀의 숫자와는 관련이 없다. 그런데, 대중가요 작사가들이 낙화암과 관련된 가요를 작사할 때 중국의 한시에서 본 삼천궁녀란 단어를 무분별하게 채용했기에, 낙화암에서 투신한 궁녀의 수가 삼천궁녀라는 오해를 하게 되었다.
20. 조천석朝天石
麒麟窟 南쪽에 있다. 세상에서 傳하기를, 高麗 東明王이 窟안에 기린마를 길러, 말을 타고 땅속을 가다가 나와, 朝天石에서 하늘에 오르니, 돌위에 말발굽 자취가 있다고 한다.
在麒麟窟南. 世傳 高麗 東明王養犭其燐馬於窟中 乘馬行 地中出朝天石 昇天 石上有馬跡.
朝天石乃古東明之遺蹟 | 朝天石이란 옛날 東明의 遺蹟인데 |
至今 石上馬蹄如新鑿 | 이제까지도 돌 위에 말발굽이 마치 갓 뚫은 듯하다 |
乙密峯下 有深窟 | 乙密峯아래, 깊은 굴이 있어 |
乘麟馬 潛行地中 | 麟馬를 타고 남몰래 땅속을 가다가 |
出于石 振轡 上天 | 조천석에서 나와 고삐를 떨치고 하늘에 올라 |
朝玉帝 一去千年不返國 | 玉皇上帝에게 謁見하였는데, 한번 가고는 千年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
古史傳疑 誰得詳? | 옛 역사의 傳하는 것의 의문점을 누가 자세히 알 는지? |
中華文物 數萬年 | 中華文物은 數萬年이나 되나 |
然後 東方乃開荒 | 그 뒤에야 우리 조선(東方)이 깨어서 |
瑞日中天 土堦上 | 祥瑞로운 태양이 하늘 한복판에 솟고 土堦(토계, 흙 섬돌)위에 |
檀君始作太古之三皇 | 檀君이 비로서 太古적 三皇이 되었던 것이다 |
東明雖當漢中葉 | 東明이 비록 漢나라 中間期에 해당되지만 |
純樸不殘如羲黃 | 純樸(순박)하고 사납지 않기 마치 伏羲나 黃帝 같 았다 |
黃帝崆峒順風下 | 黃帝가 崆峒山에서 바람 따라 내려 왔다가 |
歸來鼎湖 七十二人 登飛龍 | 돌아가심에 일흔 두 명이 飛龍처럼 올라갔다 |
古者 神聖 靈異事 | 옛날 神聖하고 靈異한 일은 |
有非後世人 所得窮 | 後世人이 끝까지 추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東明之事 無或是眞傳? | 東明王의 일이 혹 참된 傳說인지? |
余昔 西遊 見遺窟 石上 馬蹄 盖宛然 내가 예전에 平安道에 갔다가 遺蹟의 窟을 보았는데 돌위에 말발굽 자국이 대개 분명하였다 |
하여 전설을 그냥 받아드린 데 비해 信齋는 員嶠와 같은 序를 쓰고 끝에
그러나 理致로 헤아릴 때 대개 허탄한 것이다.
然 以理 考之 盖誕也
하고 덧붙이고 있다.
泬遙馮旭 | 툭 트인 하늘 높고 빛나니(혈요빙욱) |
人力不可極 | 人力으론 끝까지 알 수 없네(인력불가극) |
磐矸榮硌 | 반석은 깨끗하고 넓게 드러나는 데(반안형락) |
馬足不可縮 | 말 발이 분명타 할 순 없네(마족불가축) |
何麤蟲重石爲跡 | 어찌 거칠고 포개진 돌이 발자취가 되며(하축충중석위적) |
又浟揚上蹠 | 또 흐르고 드날리는데 오르고 밟으랴?(우유양상척) |
朝天石 | 朝天石이란 게(조천석) |
何傳自古昔? | 어째서 옛날부터 傳해 오는 건지?(하전자고석) |
四.五, 四·五, 六.五, 三.五言으로 나뉠 수 있는 28字의 이 짧은 詩에는 ㄱ 入聲으로 句句押韻했거니와 낙락犖硌은 疊韻인데다가 石~蹟은 句中押韻된 것이고 끝의 石~昔 또한 같은 例라 하겠다.
員嶠는 傳說을 받아들이는 한편 信齋는 理致로 보아 믿을 수 없다는 투다. 傳說대로 自己는 읊고 아들에게는 아들 나름의 主觀에 따라 自己의 詩를 읊게 한 아버지의 配慮를 생각하게 된다.
______________________
鑿:뚫을 착, 구멍 조, 새길 촉, 轡:고삐 비, 堦:섬돌 계, 樸:통나무 박/순박할 박, 빽빽할 복, 羲:복희씨 희, 崆:산 높은 모양 공, 산 높은 모양 강, 峒:산 이름 동,
鼎湖:(명사) 지리 딩후호 허난[河南] 성의 징산 산[荊山] 기슭에 있는 호수, 盖:덮을 개, 宛:완연할 완, 고을 이름 원, 쌓일 온, 맺힐 울, 泬:내뿜을 혈, 馮;업신여길 빙, 성씨 풍, 旭:아침 해 욱, 磐:너럭바위 반, 矸:깨끗할 안, 깨끗할 간, 硌:옥돌 락(낙), 자갈 력(역), 縮:줄일 축, 麤:거칠 추/매조미쌀 추, 浟:흐를 유, 바랄 적, 蹠:밟을 척, 뛸 적
______________________
여러 전설 또는 제왕운기에 의하면 동명왕이 즉위한지 19년 9개월만에 승천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하고, 옥 채찍으로 무덤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전설은 기린마를 타고 승천하며 말채찍을 휘둘러 떨어뜨렸다는 전설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런데, 왕망의 신나라를 추모왕이 자꾸 공격을 해서, 왕망의 명으로 엄우란 자가 고구려왕 추를 만나서 목을 벴다는 기록이 있다. 동명성왕 제위는 BC37 ~ BC19년, 신나라는 AD8 ~ 23년, 왕망은 생몰기간은 BC45 ~ AD23이 된다. 즉 동명성왕의 사망 시점과 신나라의 건국 시점이 25년 정도의 시차가 발생한다. 추모왕이 계속 한나라와 전쟁을 했고, 왕망이 아닌 한의 실력자와의 관계에서 동명성왕이 살해 되었다면 어느 정도 맞을 것 같다.
당시 창업을 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계속 세력을 넓혀가기 위해서 기존의 기득권 세력, 또는 선주민과 지속적인 경쟁을 하면서 나라의 기초를 세워야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신라의 박혁거세도 오릉이 된 이유가 하늘에서 몸이 5조각으로 난 상태로 죽음을 당했는데, 시신을 모아 놓으니 용이 나타나서 시신을 다시 흩어 놓아서 조각난 시신을 따로 매장하면서 5릉을 조성했다는 전설이 있다.
즉 신라 초대왕도 지속적으로 선주민, 토착 세력과 전투를 하면서 그들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이 흩어진 시신도 한곳에 모아서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흩어서 매장할 정도로 상당히 어려운 환경에 처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이런 어려운 과정에서 1대, 2대, 3대를 거치면서 나라의 체제를 정비하고 주변을 아우르면서 나라를 창업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훗날 나라를 제대로 나라의 기초를 세운 후에, 창업자가 적의 꼬임에 빠져서 잡혀서 참수 당했다거나, 토착세력에 의해 반역자로 능지처참형을 당했다고 기록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하늘을 끌어들여서, 하늘의 기운으로 세상에 태어난 천손의 자식이었고 말년에 자주 하늘을 올라갔다 내려왔지만, 어느 날,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았다거나, 올라가서 어느 날 몸이 5조각 난 채로 떨어졌다는 식으로 전설을 만들어 창업주의 말년을 각색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21. 살수첩薩水捷
隋軍 百萬五千名을 高麗 乙支文德이 막아 平壤에서 來護兒를 敗北시켰고,
于文述을 薩水에서 敗北시키니, 隋兵으로 살아 돌아간 자는 二千名이었다.
隋師百萬五千 高麗 乙支文德御之 敗來護兒於平壤, 敗于文述於薩水 隋兵 還者二千.
隋師東臨 | 隋나라 군대가 東으로 오니(수사동림) |
百萬五千 | 그 數가 百萬하고도 五千(백만오천) |
攢鋒奪目 | 전열을 가다듬고 눈이 부시고 (찬봉탈목) |
擧麾包天 | 든 깃발 하늘을 뒤덮었네(거휘포천) |
揮鞭山平 | 채찍 휘두르니 산도 평평해지고(휘편산평) |
拔毛江縮 | 苦痛을 느끼지 않게 하는 拔毛藥水 바르느라 강물도 줄 었네(발모강축?) |
藐爾小邦 | 작은 나라라고 무시하고(묘이소방) |
矢陳地局 | 땅이 좁다 깔보았다네(시진지국) |
聲威所震 | 名聲 威勢 떨치는 바(성위소진) |
自當靡斃 | 쓰러짐 없다 장담했네(자당미폐) |
陳爲南皇 | 陳은 南皇이 되고(진위남황) |
周是北帝 | 周는 北帝라(주시북제) |
山海兵糧 | 山海같은 軍糧에다(산해병량) |
熊羆將士 | 곰처럼 勇猛한 將士들이라(웅비장사) |
或自投井 | 더러는 스스로 우물에 빠져 죽고(혹자투정) |
或先獻璽 | 더러는 玉璽를 미리 바치기까지(혹선헌새) |
會不經時 | 일찍이 한 철을 지날 것도 없이(회불경시) |
混爲一家 | 混然히 ㅡ家를 이루었느니라(혼위일가) |
矧玆彈丸 | 게다가 이 좁아터진 땅은?(신자탄환) |
凍蠅泥鰕 | 언 파리나, 진흙의 새우 잡기니(동승니하) |
劒何脫鞘 | 칼은 칼집에서 뺄 게 무엇이며(검하탈초) |
弓豈褫弢 | 활은 어찌 활집에서 뺄 것인가?(궁이치도) |
群虎攫羊 | 뭇호랑이가 양을 움켜잡아(군호확양) |
洪爐焫毛 | 큰 화로에 그 털을 불사름이라(홍로설모) |
蜂蠆能螫 | 벌이나 전갈이 能히 쏘을 것인가?(봉채능석) |
事有難料 | 일은 짐작키 어려움 있어(사유난료) |
反爲所戮 | 도리어 죽임을 당하였으니(방위소륙) |
一戰如鏖 | 단번 싸움에 깡그리 무찔러(일전여오) |
殘甲無還 | 돌아간 敗殘兵이 없었으며(잔갑무원) |
倚輪無返 | 돌아간 수레 한대 없었다네(기륜무반) |
浿港滻㵝[예氵裔] | 浿水는 눈물지며 넘실대고(패항산예) |
鬼哭雷[은石殷] | 鬼神의 통곡소리 우뢰같이 요란했네(귀곡뢰은) |
國不可狃 | 남의 나랄 貪내서도 안되고(굴불가뉴) |
小不可侮 | 작다고 우습게 여기셔도 안되느니(소불가모) |
不知爲戒 | 경계할 줄 모르고선(부지위계) |
後踵前武 | 발자취만 뒤따라 밟는구나(후종전무) |
顚覆之轍 | 나라가 뒤엎히는 前轍이(전복지철) |
如貉一丘 | 한 무덤에 제사함과 같거늘(여마일구) |
騖遠侈功 | 멀리 달려 공만을 과장하여(무원사공) |
不念徵尤 | 오히려 나쁜 징조를 생각지 않았구나(불념징우) |
________________________
捷 빠를 첩/이길 첩, 꽂을 삽, 攢 모일 찬, 鋒 칼날 봉, 奪 빼앗을 탈, 좁은 길 태 奪目夺目, 夺眼目, 耀眼 눈부시다. 麾 기 휘, 拔 뽑을 발, 무성할 패, 거지덩굴 벌, 藐 멀 묘, 아득할 막, 爾 너 이/꽃 많고 성한 모양 이, 靡 쓰러질 미, 갈 마, 斃 넘어질 폐, 熊 곰 웅, 세 발 자라 내, 羆 큰곰 비, 璽 옥새 새, 矧 하물며 신, 玆 무성할 자/이 자, 검을 현, 蠅 파리 승, 鰕 새우 하, 鞘 칼집 초, 褫 빼앗을 치, 弢 활집 도, 攫 움킬 확, 焫 불사를 설, 蠆 전갈 채, 螫 쏠 석, 戮 죽일 륙(육), 鏖 오살할 오, 浿 강 이름 패, 滻 울 산, 㵝 넘실거릴 예, 磤 우렛소리 은, 狃 친압할 뉴(유), 踵 발꿈치 종/이을 종, 貉 오랑캐 맥, 담비 락(낙), 담비 학, 제사 이름 마, 騖 달릴 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내가 일찍이 생각하기로는, 韓愈의 元和聖德詩는 八風舞*요, 子厚의 晉問語 또한 雅하지도 예롭지도 않다.
이 작품이 둘인데 文語 訓故이기에 改作하여 이것은 버린다.
아래 쓴 것이 果然 이것과 비겨 나은 점이 있을는지?
余嘗謂 韓公元和聖德詩 是八風舞 子厚** 晉問語亦不雅不古 此作有二
文語訓故改作而棄此 下所作 果比此 有勝耶?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 글의 서문을 읽어보면 을지문덕이 내호아와 우중문 군을 패퇴시킨 것으로 이해되나, 실상은 내호아는 고건무, 우중문은 을지문덕이 패퇴시킨 것으로 수정해야 한다. 아마 당시 필자가 시를 쓸 때는 역사가 정확히 정립되지 않았거나, 그 때까지 고건무의 공은 의도적으로 축소된 것으로 생각된다. 고건무는 영류왕으로 등극하였으나, 훗날 당과의 친선정책으로 연개소문의 구데타로 실각하면서, 상당부분 고건무의 공적이 역사상으로 지워진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는 전통적으로 왕가는 왕가끼리 왕위 계승전으로 싸우고, 신하들은 신하들끼지 막리지나 대대로 직을 가지고 싸웠던 것으로 보인다.
태왕은 신하 싸움에 관여하지 않고, 신하들도 왕가의 싸움에 관여하지 않았던 것이 전통이였던 것 같다. 그런데, 이따금 신하들의 싸움의 불똥이 튀어 왕까지 폐위시키는 경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명립답부가 차대왕을 시해하고 신대왕을 옹립하거나,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옹립한 경우 등...
이글은 아래처럼 수정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隋師百萬五千 高麗 高建武御之 敗來護兒於平壤, 乙支文德御之 敗于文述於薩水 隋兵 還者二千.
隋軍 百萬五千名을 高麗 고건무가 막아 平壤에서 來護兒를 敗北시켰고, 乙支文德이 막아 于文述을 薩水에서 敗北시키니, 隋兵으로 살아 돌아간 자는 二千名이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八風舞 : 唐 祝歡明所作의 舞名
** 晉問 : 柳宗元이 枚乘의 〈七發〉을 본따서 지은 글로, 당시 임금의 事役을 우습게 보고 道實함을 높인 글
隋師逐東 | 隨軍이 東으로 進擊해오자(수사축동) |
悉起持弓 | 모조리 일어나 활을 잡았네(실기지궁) |
威動高穹 | 威勢는 높은 하늘을 뒤흔들고(위동고궁) |
卒乘之膲 | 兵卒과 車馬는 날렵하고(졸승치초, 훈련으로 살이 빠졌음을 뜻함) |
糧械之輸 | 군량과 병기는 보내는 것 (량계치수) |
有師戎無之前 | 병사와 병장기는 예전에는 없던 정도(유사융무치전) |
是宇內彊國 | 이는 天下의 强國이라(시우내강국) |
相對負衆而慠懟 | 相對는 많음에 의지해 거만하고 원한을 품어(상대부중이격대) |
聲勢所加 | 名聲과 威勢가 더하여져서(성세소가) |
畢就禽拏 | 마침내는 사로잡아(필취금나) |
混爲一家 | 一家로 뒤섞을 셈(혼위일가) |
矧爾小方 | 게다가 너같은 작은 나라가(신이소방) |
猶存稗節 | 오히려 작은 節介가 있다니(유존패절) |
何足鉏狀 | 어찌 삐죽 내미는 형상이 드러난다고(하족차상) |
國不可狃 | 남의 나랄 貪내서도 안되고(국물가뉴) |
小不可侮 | 작다고 우습게 여겨서도 안되느니(소불가모) |
衆不足有 | 많다고 지나칠 정도는 있지 않으니(중불주유) |
小方有將 | 작은 나라에도 대장은 있다네(소방유장) |
智武之壯 | 智略과 勇猛의 장함이(지무치장) |
比古人不讓 | 옛사람과 비겨 못할 것 없어(비고인불양) |
運謀制機 | 策略을 運用, 기선을 制壓(운모제기) |
安定指揮 | 安定시키고 指揮하여(안정지휘) |
如有神威 | 마치 神妙한 威力이 있어(여유신위) |
百有餘萬 | 百萬하고도 남는 군사가(백유여만) |
盡爲鏖躙 | 모조리 깡그리 짓밟혀 沒殺되어(진위오린) |
尟能有遁 | 能히 도망친 잔 드물었다네(선능유둔) |
長平之覆 | 長平* 땅에서 白起에게 趙軍이 大破됨도(장평지복) |
淝水之衄 | 苻堅이 淝**에서 謝玄 등에게 大破됨도(비수지뉵) |
不如是毒 | 이렇듯 至毒하지는 않았느니(불여시독) |
騖遠喜功之主 | 멀리 달려 武功을 좋아하는 임금이여(무원희공지주) |
宜是之覩 | 마땅히 이를 볼지니(선시지도) |
毋蹠其武 | 그 발자취를 밟지 말기를(무척기무) |
___________________________
悉 다 실, 膲 삼초 초, 慠 오만할 오, 懟 원망할 대, 원망할 추, 畢 마칠 필/그물 필, 禽 새 금/사로잡을 금, 拏 붙잡을 나, 矧 하물며 신, 爾 너 이/꽃 많고 성한 모양 이, 稗 피 패, 鉏 호미 서, 삐죽삐죽 내밀 차, 鏖 오살할 오, 躙 짓밟을 린(인), 尟 적을 선, 遁 달아날 둔, 달아날 돈, 뒷걸음칠 준, 돌아다닐 순, 淝 강 이름 비, 衄 코피 뉵(육), 淝水 안후이(安徽) 성의 중부를 흐르는 두 강, 覩 볼 도, 蹠 밟을 척, 뛸 적
_______________________
四言이 主를 이루는 이 詩에는 가다가 五言, 六言, 七言 등이 끼워져 있어 古拙 素朴한 가운데 自由로운 情感을 그 形式으로도 드러내고 있다.
乙支文德에게 大敗한 隋軍을 ‘國不可狂 小不可侮’를 지키지 않아 큰 코 다친 예로 들면서 ‘衆不足有 小方有將 智武之壯 比古人不讓 運謀制機 安定指揮 如有神威 百有餘萬 盡爲鏖躙 尟是有遁’한 結果를 낳게 됨을 그들의 傲慢, 남에 대한 깔봄 등에 우리 將帥의 智武를 내세워 對比시켰다.
四言의 形式을 바꿔 五言, 六言, 七言 등 散文的인 rythm으로 바꾼 대목마다 특히 강조하고 싶은 대목임이 또한 눈길을 끈다.
______________________
Bai Qi (-258 BC), famous general of Qin 秦國|秦国, the victor at 長平|长平 in 260 BC
信齋의 서문은 員嶠의 그것과 같다.
大婆聲嗚嗚 | 늙은 할멈은 흐느껴 울고(대파성명명) |
中姨涕漉漉 | 중 늙은 인 눈물이 줄줄(중이체록록) |
小婦不成悽 | 젊은 아낙은 슬퍼도 않고(소부불성처) |
無言解羅綺 | 말없이 비단옷 벗어 던지네(무언해라기) |
儂家老丈人 | 우리집 늙은 어르신네는(농가노장인) |
有杖始能起 | 지팡일 짚고서야 비로소 일어서고(유장시능기) |
阿兒年十二 | 대답하는 어린 놈은 나이 열둘에(아아년십이) |
尙恃母懷裏 | 아직도 어미품을 그리던 것인데(상시모회리) |
借問何處去 | 묻노니 어디로 가는거요?(차문하처거) |
行人青海陲 | 靑海라 변방으로 가는 사람들(행인청해수) |
幾時當還歸 | 어느 때나 돌아들 오려는가(기시당환기) |
居然死薩水 | 薩水에서 쉽사리 죽으려니(거연사살수) |
一家且云憯 | 비통한 게 우선 한집이라면 또 몰라(일가차운참) |
萬方舉相似 | 온 나라가 다 이 모양이니 원!(만방거상사) |
問誰爲此者 | 묻노니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문수위차자) |
高麗乙支氏 | 高麗의 乙支氏 때문이라고(고려을지씨) |
不怨乙支氏 | 그런데도 乙支氏를 원망킨 커녕(불원을지씨) |
但怨隋天子 | 원망하느니 오직 수나라 임금 뿐(단원수천자) |
_________________________
姨 이모 이, 涕 눈물 체, 悽 슬퍼할 처, 바쁠 서, 綺 비단 기, 羅綺 나기: 1. 곱고 아름다운 비단(緋緞). 2.엷은 비단(緋緞)과 무늬가 있는 비단(緋緞). 곧 화려(華麗)한 의복(衣服). 儂 나 농, 恃 믿을 시. 陲 변방 수, 居然 거연: 슬그머니, 쉽사리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 글은 大敗한 隋軍의 處地에서 逆說的으로 쓴 글이다. 이 싸움의 總指揮者가 高麗에서는 乙支文德임을 알고 있건만, 怨望하기는 隋天子라고 말하여, 天子에 대한 隋人의 激怒가 서리어 있다. 그러기에 大婆, 中姨의 눈물짐을 현실적으로 숨김없이 그렸고 ‘小婦不成棲’라는 대목에 하도 기가 찬 모습이, ‘無言解羅綺’란 대목에 男便을 出征시킨 아낙네가 華麗한 服色을 벗어 던지고 隋軍의 隊列에 끼게 되는 슬픔이 드러난다. 그 뿐인가? 누워만 있고 步行을 못하던, 지팡이를 짚고서야 일어서던 노인까지도 대열에 낀다니, 징병의 참혹상을 읽을 수 있다.
漸層法으로 써나가는 이 글에서 열두 살 초등학교 육학년 셈직한, 아직도 어미 품을 그리는 애까지도 靑海로 나서는 것이, 아버지 員嶠가 그러했듯이, 아들 信齋는 그 겨레사랑 나라사랑의 精神的인 熱血이 물려 치솟아, 그 아버지와 같이 이 겨레 이 나라가 겪은 아픔과, 사랑과, 기쁨과 슬픔의 絶項들 마다를 自己表現으로 읊어 가고 있다.
특히 이 노래에는 戰勝者 乙支文德을 빛내기 위해 處地를 바꾸어 敗北한 隋軍의 處地를 읊음으로써 領土擴張慾에만 불타, 수없는 無辜한 隋人의 죽음만을 불러 일으켜 마침내 隋의 滅亡의 原因을 짓게 한 煬帝를 오히려 원망하고 隋人의 心情을 읊어 逆說的으로 乙支文德을 빛낸 構成이 奇拔하다 하겠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阿兒(아아): 아우, 차자어로 4언 한시에 향가 형태의 글자를 쓸 리가 없다. 그래서 관에서 불러서 대답하는 어린아이가 나가는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노인네도 지팡이 집고 전선으로 나서고, 어린아이도 관에서 징집해서 대답하고 전선으로 나가는 장면이 연상된다.〈38호에 계속〉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長平之事 : 起가 趙의 을 長平땅에서 大破한 일
** 淝 : 苻堅이 백만대군으로 淝水에서 謝 등에게 크게 패한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