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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수필)
1. ‘장자산 이기대’ 식물사냥
바람이 가득하고 봄 냄새 향기로운 곳. 가슴 아픈 이야기를 잠시 내려놓고 에코행진 팀들과 ‘이기대’ 식물사냥놀이에 나섰단다.
여기 저기 보물찾기, 숨겨진 보석처럼 꼬옥꼬옥 숨어 있는 어여쁜 풀꽃들과 갓 피어나는 새순들, 느티나무와 은행잎이 어느 새 무성하니 봄은 겅중겅중 망아지 걸음으로 가고 있음이로다.
제비꽃, 패랭이꽃, 나팔꽃. 은방울꽃, 노루귀꽃, 족두리풀, 투구꽃. 생김새를 눈 여겨 보기로 하고, 며느리밥풀 꽃, 홀아비바람꽃, 도둑놈의 갈고리 꽃도 연상하며 삶의 냄새도 맡아 보고 싶었음이라.
노루오줌 꽃, 향이 백리를 간다는 백리 향, 오이 풀 향이 진해질수록 여름이 가까이 옴을 알겠음이라.
바디 나물은 뿌리 잎과 줄기 잎이 달라서 조금은 혼동이 된다. 밀사초 열매가 참으로 야물구나. 수꽃이삭은 줄기 끝에 달리고, 암꽃이삭은 줄기 옆에 달렸다. 천문동과 방울 빗자루의 동정 포인트는? 열매가 붉으면 천문동이고, 희면 방울 빗자루라 하였던가? 개사상자, 개질경이, 갯 강아지풀, 개미자리 풀, 개미들이 사는 곳이라 개미자리 풀은 '별이 잠을 자는 풀' 성숙초(星宿草)라고도 한단다.
땅 채송화와 창질경이 번행초 꽃, 화 알~짝! 피었구나, 디 카로 한방 찍어 저장을 하여두고, 가까이 들여다보니 하얀 가루가 예쁜 잎에 가득하다. ‘개 상추’로도 불리는 다육질 잎 만져보니 도톰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또한 좋구나! 꽃말이 '망부석'이라, 위장병에 효능이 있다고, 배낭에 몇 포기 집어넣어 두었다.
쇠고비가 용트림을 하는 듯 미나리아재비의 어여쁜 꽃잎에 반해서 적자색 꽃이 살포시 웃음 짓는 갯 완두며, 바위 틈틈이 자리 잡은 갯 고들빼기와 갯 기름나물, 청 미래덩굴의 열매가 애기티를 벗고 있다.
하늘 향해 두 팔 벌린 거문딸기라. 아리송한 것이 부처 꽃인가? 아래에 흰 꽃은 갯 장대나물인 듯하다. 반디지치의 보금자리, 민들레를 닮은 멱쇠채, 자리를 잡아도 참 잘 잡았구나.
찰피나무의 어린나무 꽃말이 ‘현혹’이라는 천남성도 보인다. 이름만 들으면 남녘하늘 어디쯤의 별이름인데 이 식물은 고개를 바짝 쳐든 뱀 대가리모양을 하고 있어서 '사두초'라고도 불리고. 중풍, 거담의 약제로도 쓰이지만 맹독성이 있어 사약으로 사용하는 식물이란다.
예덕나무, 머귀나무 숲 그늘에서 허기진 배를 김밥 두 줄로 채우고 또 다시 식물사냥터로 나서보세.
이름도 예쁜 백선과 다정금에 결각과 구절초도 보인다. 벼룩나물과 콩 제비꽃 짚신 나물은 뱀 무와 혼동이 되지만 가장 긴 잎의 앞을 비교해 보면 구분이 쉬울 것도 같다.
소나무에 솔 씨가 뿌리를 내렸다. 옥녀꽃대에 조개나물도 보인다. 솜방망이와 애기 꽃, 솜방망이와 제비 꽃, 솜 양지꽃, 미나리 냉이가 피었다. 누리장나무는 저 바위틈에서 평생을 살겠노라. 장대나물이 쑥 올라왔다. 갈퀴꼭두서니는 뒷면에 갈퀴가 매섭다. 이 겹 동백은 곱기도 하구나.
사흘 밤낮을 살펴도 다 못 찾을 야생식물들 이기대가 이러함을 예전에는 몰랐네! 오늘은 야생식물들 참 많이도 보고, 아리송한 것들 참 많기도 하고, 걸음도 참 많이 걸었구려. 샘들 덕분에 많은 것 배우고, 즐거웠소이다.
오메~! 싱싱한 것.
어찌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군침 넘어가는 해삼, 멍게, 개불이 전시된 곳, 특미 식당에 발길이 빨려가듯 들어가니 깔끔한 밑반찬에 참신한 모듬회 한 접시, 캬~아~! 소주 잔 기울이며, 주거니 받거니, 얼큰한 매운탕까지 곁들이니 하루의 여독이 싹 풀리었더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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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름다운 섬 ‘영도’
부산에 살면서도 부산의 아름다움을 다 보지 못함을 못 네 아쉬워하며, 오늘은 배낭을 메고 85번 버스 종점인 청학동 봉래산 중턱에서 아름다운 섬 ‘영도’를 산책키로 하였다.
영도라 하면 가장먼저 떠오르는 것이 해안선을 따라 깎아지른 뜻한 신비로운 기암괴석이 펼쳐져 있고, 신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물들이 발견 되는 곳, 한국전쟁당시 피란민들이 잃어버린 가족을 찾기 위해 모여 들었던 실향의 상징과 오랜 세월 육지와 연결된 다리 덕분에 섬이면서도 섬 같지 않은 섬이 부산영도라 할 수가 있다.
영도는 예로부터 식량이 풍부하고 기후가 따뜻하며 말(馬)이 방목하기 좋은 입지조건으로 국마장이 있었던 명마의 고장이다.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천리마가 있어 그 빠르기가 그림자가 따르지를 못한다 하여 끊을 절(絶), 그림자 영(影)자를 붙여 절영도라고 불렀다가 광복 후에 절자(絶字)를 줄이고 영도라고 부르게 되었단다.
영도 청학동은 통신사 조엄이 일본에서 고구마를 가져와서 처음으로 제배를 하여 우리나라 전국에 식량자원을 전파한 곳이다.
봉래산 정상에 올라가면 부산항의 모습이며, 오륙도와 몰운대까지, 부산의 주산인 금정산과 장산도 한눈에 쏙 들어온다....
봉래산 조봉정상 꼭대기에 어머니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
사람들은 이 바위를 ‘할매’ 바위라고 부른다, 영도 사람들은 이 ‘할매’가 영도 사람들을 평안하게 지켜준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 지역주민들은 협동심이 강하고, 상부상조하는 풍습이 특별하며, 각자의 생활에 있어서도 국내의 어느 곳에도 비교할 수 없는 특징은 물가가 싸고, 여름이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해서 생활비가 적게 들고, 악착같은 일을 하지 않아도 풍요로운 삶을 살 수가 있는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있다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면 육지 사람들의 치밀함과 영민함을 따라가기 힘든 경우가 많아 다시 영도로 돌아오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하는데, 이러한 설이 와전되어 영도에서 돈을 벌어 객지에 나가면 ‘봉래산 할매’가 심술을 부린다는 전설이 있다.
다시 아리랑고개를 넘어가면 장사바위가 나온다.
옛날 키가 9척이요 힘이 천하장사인 거인이 영도의 깊은 산 속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 거인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마을에 내려와 집집이 찾아다니며, 동양 밥을 얻어먹고 살았는데, 그 먹는 양이 한 끼에 쌀 한 말을 거뜬히 먹어 치웠다고 한다. 하는 일도 아무것도 없이 마을사람들의 밥만 얻어먹는 것을 송구스러워 하던 거인이 하루는 해질 무렵 마을에 내려와 들리는 말에 의하면 형체는 없고 키가 커다란 그림자뿐인 괴물이 나타나서 마을 처녀들을 잡아간다는 괴 소문이 퍼지면서 주민들은 공포에 떨며, 근심하는 일이 생겼다고 한다. 이에 거인은 그 진원지를 찾고 있던 중에 앞바다에서 괴상한 그림자를 발견하고 격투를 벌인 끝에 그림자를 껴안고 바닷물 속에서 같이 빠져죽고 말았다. 이 그림자는 이무기였다. 주민들은 거인의 시체를 거둬서 봉래산 밑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었다. 그 후에 거인의 무덤이 큰 바위로 변했는데 바위 모양이 마치 장사(壯士)의 신발 같은 모양이라 이를 장사 바위라고 부른다.
영도 구민들은 현재 동삼동 패총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라고 한다. 최근 이곳을 둘러보신 임효재 서울대 명예교수는 "신석기 시대 동삼동은 오늘날 홍콩과 같은 국제도시"라고 평가했다. 이 이야기는 동삼동 사람들은 5천 년간 해상 무역의 주도권을 잡은 세계인 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오늘날 우리가 지향하고 있는 세계도시 부산의 모습이 이미 동삼동 패총이 선사시대에 구현돼 있었다는 뜻이란다.
영도태종대는 1969년까지 군사시설로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었던 곳이지만, 지금은 4.3㎞의 순환도로를 따라 유원지로 개발되었다. 신라 태종 무열왕이 활쏘기를 즐겼던 곳이라 해서 태종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한다.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신하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던 장소였으며 신라 이후 조선시대까지는 동래 지역에 가뭄이 들면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를 지내는 제단으로 이용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한때는 ‘자살바위’로 유명했던 신선암은 태종대의 대표적 명소로 깎아지른 절벽 위에 우뚝 솟은 바위의 형상이 인상적이다. 승용차의 진입이 금지된 산책로를 따라 걷는 것도 좋고, 관람열차인 ‘다누비열차’를 이용해서 정류장마다 자유롭게 타고 내리며 태종대의 명소를 둘러보기가 지금은 아주 편하게 되어있다.
태종대자살바위 위 모자상(母子像)이 서 있는 전망대에서 왼편으로 오륙도(五六島)가 하나 둘씩 차례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우삭도· 수리섬· 송곳섬· 굴섬· 등대섬의 다섯 형제들 중에 육지 쪽에 가장 가까운 우삭도는 밀물 때 솔 섬과 방패 섬이라는 두 개의 섬으로 분리되고, 썰물 때는 하나로 합쳐지기 때문에 이들을 통칭하여 오륙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영도는 아치섬〔朝島〕과 함께 주전자섬〔生島〕이라고 불리는 두개의 새끼 섬을 거느리고 있다. 주전자를 닮았다는 생도섬은 몇 가지 금기사항이 있다고 한다. 그 것은 낚시 중에 불을 피우거나 대변을 보아서는 안 되며, 특히 남녀 간에 은밀한 행위를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인데, 실제로 이런 금기사항을 어겨 크게 낭패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주전자 섬을 깨끗한 사람의 점잖은 행동만 허용하는 순결의 섬이라고 하고 있다.
태종대 자갈마당은 조개구이 집들이 줄지어 서 있는 곳이다. 포장마차들이 쫙~ 널려 있어서 이곳저곳 가릴 틈도 없이 빈자리에 앉자마자 밑반찬들이랑 홍합탕은 서비스로 주고, 조개구이는 작은 것(小字)을 시켜 2명이 소주 한 병마시면 성인들에게 아주 정량인 것 같았다.
태종 무열왕의 팔준마가 물을 마셨다는 연못의 전설을 지닌 해변의 절경인 감지 자갈마당을 둘러보고, 지하 600m에서 끌어올린 식염온천수인 태종대온천에서 하루의 여독을 마무리하고 귀가 길에 올랐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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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낙엽 같은 인생.
내가 김무연(가명) 형님을 처음 만난 것은 20여 년 전이다.
그때 나는 저 아랫동네에 살다가 어머님께서 기관지 질환이 심하시어 공기 맑은 산기슭에 이사를 해온 이유로 평소에 매일아침마다 다니던 등산코스가 바뀌면서 엄광산 등산로 중턱 쉼터에서 6~7명 씩 모여 있는 분들께 눈인사로 얼굴을 익히면서 마을의 토박이 어르신들과 형님뻘 되는 분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나이를 떠나 오다가다 차 한 잔, 소주 한 잔씩을 나눌 만한 이웃들이 생겨나고, 누군가의 제안으로 10여명이 조기등산 친목회를 제안하여 일요일마다 한 차례씩 시래기 국밥으로 아침을 때우는 그러한 친목회원으로 만난 사람 중에 한분이 김무연 형님이시다.
형은 나보다 띠 동갑이니까 열두 살이나 더 먹었고 동네에서는 알아주는 재력가였다. 그는 동네 중심가에 있는 5층짜리 건물 소유주이며 당시에 그 건물 1층은 큼지막한 할인 마트 점이 있고, 2층은 치과병원 그 위로는 당구장이며, 헬스클럽도 운영하고 있었다.
예순이 넘으신 형은 항상 웃는 얼굴에 유모도 풍부하시고 웬만한 자리의 술값은 거의 혼자서 내다시피 하시는 기분파 형님으로 신망이 아주 높으신 분이었지만 그렇지만 그 형님에게도 말 못하는 아픈 상처가 있었으니 부인을 몇 년 전에 하직하고. 슬하에는 서른 남짓한 외아들과 같이 살아가고 있었다. 주위에서 새 장가를 들라고 몇몇 사람들이 다리를 놓아보기도 하였지만, 의외로 형님은 강경했다. 외아들이 장가라도 들면 어찌할지 몰라도 지금은 당신 혼자가 오히려 편하다고 하시며 한사코 거절을 하시었다. 그런 연유로 해서 형님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저녁이면 거나하게 취하여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가시는 모습을 자주 볼 수가 있었다.
그러던 형이 어느 날 갑자기 폭탄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이다. 동네를 떠나 대전으로 이사를 가겠노라고, 그런 말을 한지가 지금부터 약 10년 전인 것으로 기억된다.
형님께서 사시는 아파트며, 5층 건물도 팔려고 내 놓았다고 하신다. 이 지역 중심가에 자리한 건물 자체만으로도 보통사람의 재산으로는 쉽게 사고 팔릴 물건도 아니고 그만한 재산을 한꺼번에 처분한다는 것은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생각해도 뭔가 이상하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날 이후 우리들 회원 몇몇은 형님 집을 찾아가서 대포 잔을 나누면서 물어보았다. 도대체 이사를 가는 이유가 뭐냐고. 이의 대답은 간단했다. 아들이 대전에서 금년부터 국책 사업으로 정부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 사업을 벌였는데 따라가서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첨단산업계통의 사업체를 벌인 아들에게 국가 보조금도 받는 마당에 벤처기업으로 성장시키려면 계속적인 투자가 필요 할 것이고 은행 빚을 쓰느니 보다는 건물을 팔아서 뒤를 봐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들과는 헤어져 살기가 어렵겠다는 말씀이었다. 아들 또한 작년부터 대전에 왔다 갔다 하며 참한 규수와 결혼을 약속하여 놓은 상태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형님의 그러한 생각을 그 자리에 참석한 모두는 형을 만류했다. 참으로 아들을 도우고 싶으면 매월 얼마씩 생활비를 보내주던지 그것도 안 되면 차라리 대출을 받아서 지원하는 방법을 권했지만. 그래도 그 형은 이미 우리의 말은 쇠기에 경 읽기보다 귀찮은 말로 들릴 뿐이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삿대질까지 하며 말리고, 노년에 아들놈한테 있는 재산 싹쓸이로 다주었다가 쪽박 찬 사람이 한둘이냐며, 아무리 말려도 막무가내로 결국 그해 형은 모든 재산을 정리해서 아들이 있는 대전으로 떠나가셨다.
떠난 지 몇 달 후 우리들은 아들 결혼식에 초청되어 당시 회원 몇몇은 당일 결혼식만 마치고 내려오고 나와 서너 명은 형님 집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시내 변두리에 위치한 아파트는 아들과 함께 살기 위해 꽤나 넓은 집을 장만하여 놓고 신접살림도 많이 장만해서 가족이 함께 살기에는 아무른 불편이 없어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형은 건강한 육신이었고 그 특유의 유쾌한 웃음소리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우리들은 그날 어쩌면 형님의 판단이 잘 된 것일 수도 있겠다며 다소 마음을 놓기까지 했다.
그로부터 5~6년이 지나 김무연 형님이 다시 우리들 앞에 나타났다. 형님은 그냥 한 번 다니러 온 것이 아니라 아예 터를 잡고 살겠다며 왔다는 것이다. 동네 작은 빌라 한 채를 사서 혼자서 살고 있다고 한다. 행색도 전에 비하면 말이 아니고, 의복이며, 용모가 전과는 완전 딴판이다. 아무리 몇 해가 지났다고는 하지만 행색이 그렇게 변 할 수는 없었다. 몇몇이 옛 정을 생각해서 먹 거리를 사들고 형이 사는 집을 찾았지만 방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두문불출을 하며 사람 만나는 걸 기피하며 살겠다는 심산으로 끝끝내 우리를 만나주질 않았다. 그 후에도 몇 번 형을 만나자는 시도가 빗나갔고 얼마 못 가 그 형의 존재는 우리들 머릿속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내가 우연히 형님을 만난 것은 엇 그제 10월 하순 낙엽이 뚝뚝 떨어지는 토요일 오후였다. 그날 나는 동네 뒷산의 둘레길이라도 걸어볼 요량으로 아침에 다니는 산책로의 반대편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불과 열흘 전만 해도 푸른 하늘 푸른 숲속에 매미소리 그침이 없었던 것 같았는데 오늘 낮에 엄광산 정상에서 김해 뜰을 바라다보니 이미 추수는 끝나서 갈무리를 하는 단계이고, 낙동강 변 갈대숲도 은빛 물결만이 일렁거린다. 산중턱을 내려오니 도토리나무는 이미 낙엽이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것도 뛰엄 뛰엄 눈에 들어온다. 등산로 오솔길은 어느새 단풍이 들고 낙엽이 되어 사람들의 발길에 여지없이 짓밟히고 있었다. 마치 부대끼는 인생의 말로를 보는 것만 같아서 인생무상을 되 뇌이며 발걸음을 옮기던 내 눈에 어깨가 축 처진 걸음걸이로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한사람, 김무연 형님의 초라한 행색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내가 먼저 소리쳐 형님을 불렀다. 잠시 주춤하던 그도 엷은 미소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둘이는 누가먼저랄 것도 없이 둘레 길의 한 공간에 있는 작은 나무의자에 앉았다. 이제 형님의 나이 칠순하고도 후반기라. 얼굴에는 굵은 주름살 속에 눈동자의 초점부터가 흐릿하니 영락없는 팔순노인같이 보인다. 그래 형님 요즈음 건강은 어떠하십니까? 부터 시작해서 주거니 받거니 말을 시작하자 치아는 틀니를 하셨는지 말소리가 옆으로 세어나간다. 그러나 지난 십 년 간 닫았던 말씀을 쉴 새 없이 쏟아 놓으신다.
동생, 내 말 좀 들어보게. 지난 십 년간 내가 너희들 말 듣지 않고, 잘 되도 내 자식이요, 못 되도 내 자식인데, 내가 자식 놈 하나 잘되면 그만이라 생각하고 대책 없이 저질 놓은 일을 생각하면 내보다 먼저 간 집사람 만나 볼 면목조차 없어졌다네, 그려, 그 런 내가 이 모양이 되어서 어찌 동내 사람들과 다시 어울리겠나! 그래서 아침에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을 피해 다니고 매일 낮에는 혼자서 이 길을 다니고 있다네! 내가 마누라를 보내고부터 십 수 년 동안에 하는 일마다 안 풀리고 해서 지금은 고향에 집사람 산소도 파서 하늘에 뿌리고 이재 내 가슴도 시커멓게 타버린 검은 재만 남아 있다네! 내 자신이 자초한일 자업자득이라 하지만, 요즈음은 더욱 마누라생각이 나고 비오고 바람 부는 날이면, 홀로 잠자기가 참말로 어렵더라고, 그래서 매일저녁 소주로 세월을 보내다가 주량도 줄었는지 술이 잘 넘어가질 않아 참기름이나 배지 밀 한통과 날 개란 하나를 타서 소주한잔으로 저녁을 때울 때가 많다네.
자네들이 그토록 아들에게 재산을 넘겨주면 안 된다고 난리를 부릴 때, 그때 내 귀엔 아무소리도 안 들렸어! 지어미를 일찍 여의고 애비 손에 키운 외동아들이라 내가 아들 말이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 해도 다 들어 주고 싶었으니까. 말일세. 그래서 모든 걸 아들에게 다 넘겨줄 수밖에 없었던 게야.
대전에 갈 때까지만 해도 아들과의 사이는 좋았고. 물론 며늘애도 잘 해주었고. 손자 녀석 두 놈인데 처음에는 지 애비보다 할 애비를 더 좋아하는 것도 같았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홀 시애비신세로 자식들과 삼대가 같이 살아 보겠다는 내 욕심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 갔으이, 손자 놈이 유치원에 들어가면서부터 내게 짜증을 내는 거야. 할 애비는 컴퓨터오락도 할 줄을 모르고. 담배 냄새도 나고 하는 이 꼴을 보는 며늘애의 눈꼴이 예사롭지가 않았고. 이렇듯 작은 앙금에서 시작된 감정의 골은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아들도 자주 지네들 부부끼리 다투는 소리가 들려오고 손자들 울음소리도 들리고, 심지어 사업이 지지부진한 것도 다 모두 내 탓 같기도 하고, 어찌하는 수 없이 모든 것을 자식에게 넘겨주고 나는 고향에 있는 선산이며 전답쪼가리를 모두를 처분해서 이 동네로 다시 돌아온 게야. 그런 내 꼴을 알리면서까지 어떻게 자네들을 만나고 싶었겠나. 동생, 이제 내 나이 팔십 줄에 접어들 텐데. 그 얼마를 더 살겠으며 또 너무 오래 살아야 할 가치도 희망도 없으니, 그저 남 몰래 혼자 이 길을 산책하다가 마누라가 부르기만 하면 어서 따라가고 싶은 심정이라네.
그래, 형님. 아들사업은 그래도 잘 되고 있겠지요.
몰라. 아들놈하고 소식 끊은 지도 벌써 대전에서 인연 끊고 왔기 때문에 잘 몰라, 나는. 제사도 그놈들에게 넘겨줬고, 지금은 명절이 오고가도 내겐 기별조차 없어. 그렇다고 다시 내 발로 아들놈을 찾아갈 수도 없고. 그 나마 아들에게 그렇게라도 있는 재산 다주었는데 다시 나를 원망이야 하겠나. 잘살고 못사는 것, 다 지복에 메였겠지. 하지만 때때로 손자 놈들은 보고 싶기는 하지만 그래도 저들이 연락을 끊으니 내가 전화 해볼 용기는 더더욱 나지를 않는 게야.
동생, 저길 보게나.
바람에 이리저리 날려가며 길바닥에 수북이 쌓여있는 낙엽 말일세. 내 삶이 저 낙엽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네. 내 한때는 불타오르는 열정으로 삶에 자신감이 넘쳐흐르기도 하였는데, 지금 와서 되돌아보니 세월은 총알보다 빨랐고, 스치고 지나가는 그 모든 것이 길바닥에 떨어져 이리저기 밟히고, 비오고 바람 불면 흔적조차 없어질 낙엽의 신세가 바로 내 신세와 꼭 닮았다는 말일세. 나는 형님말씀에 아무 말도 못하고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만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더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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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랑합니다. 어머니!
아버님 날 낳시고 어머님 날 길러 시니. 은혜가 높음이 하늘도 다함이 없건마는 살아생전에 더 늦기 전에 효도하란 말, 그 말도 알았었는데 알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 어찌 합니까?
지금에야 내 한세상도 가을바람 스산하니 아침저녁 침습하는 찬바람에 어께마저 시려오니, 이재야 철이 들어 고생하신 어머니 생각에 눈물이 나옵니다.
아버님 허리춤에서 한세상, 어머님 배속에서 한세상, 태어나서 한세상 이것이, 인간이 사는 세상이라 했건마는, 뼈는 아버님으로부터, 살은 어머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 했거늘, 이순(耳順)을 훌쩍 넘겨 살면서, 저도 자식 낳아 길렀어도 부모님 은공 몰랐으니, 통곡을 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
머리를 뽑아 신을 삼아 드린들 그 은공 다 하오리까, 아~ 애닲고도 슬프도다! 부모님의 깊고 높은 사랑이! 먹구름 저 넘어에 사신다며, 경험으로 말하시던 어머님, 아버지 가신후론 혼자 화장 한 번도 못 하셨지요. 남자라도 버거운 농사일 묘판 만들고, 보리타작에 벼 베고, 볍씨뿌리고, 일꾼들 배불러야 일하신다며 중참, 상참, 마련하여 이고지고 다니시며 고생하신 어머니, 모질게 견뎌온 한 세월 외로운 서러움 가슴에 묻으시고 당신은 아프단 말 한마디 못하시고. 밤에는 끙끙 앓으시며, 흘리시는 눈물을 봤었는데도, 내 자식이 아프면 밤을 새워, 그 곁을 지켜 주셨지요. 불러 봐도 불러도 가슴만 메여오는 애달픈 우리 어머니! 바른길로 가라시며 가르치시고, 추울 때는 이불로도 모잘라서 몸으로 품어주시고, 좋은 것 맛난 것 내입에 젤 먼저 주시던 어머니, 너 하나 잘 살면 다른 건 바랄게 없다던 어머니, 행여 배고플 세라 한술의 밥이라도 더 먹이시려고 애쓰시던 어머니, 어릴 적 산길 가다가 목마를 때 반석에서 물을 먹여 주시던 어머니, 이렇게 한평생을 나에게 나침반이 되어주시며, 어렵고 힘들어도 미소로 대하시던 어머니, 이 못난 자식을 최고라 하시며, 세상에 하나뿐인 내 어머니, 그 인자 하시던 미소를 다시보고 싶습니다, 세상에 날 있게 해준 사람, 세상에서 날 제일 사랑한 사람, 평생을 두고 나를 사랑한 사람 내 어머니. 지금은 불러 봐도 대답 없는 우리 어머니 진실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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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바닥의 진리>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갈 정도가 되던지
삶에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는 밑바닥에 빠진
그 곳을 아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정말로 몇이나 될까?
그곳이 진실로 인생의 삶에 반전이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 즉,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는 곳을 경험 하는 자
반드시 후회 없는 삶을 살게 되리라 의심치 않으리.
내말을 늙은이의 망년된 헛소리로 넘긴다 해도 어쩔 수야 없겠지만.
그것은 삶에 반전을 위해서는 한 번쯤은 경험 해 볼일이다.
새로운 경험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닥치면
더욱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 것을 알리고자 함이다.
굳이 극한이 아니더라도 사람이 살다보면 한 번쯤은
남에게 사기도 당해보고, 무심코 걸어가는 도로가에서
돌 맹이가 튀어 내 머리를 치고 가는 때도 있고.
꺼질 염려가 없는 땅이 지진이 나면 흔들리고
그곳에 아무도 상처를 입지 않았는데,
나만이 당할 수도 있다.
유명한 배우 실베스터 스탤론이 무명 시절에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참 가난하게 살았더란다.
그는 어느 날 길을 가다가 ‘권투 참피 온과 무명의 선수가
시합을 하는 포스터’가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인생반전의 실마리를 찾았단다.
집에 와서부터 그는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든 시나리오를 들고 영화사를 찾아갔다.
제작자들이 “우리한테 파세요.”라고 얘기를 했다.
그때 실베스터 스탤론은 싫다고 거절을 했다.
당시 그의 상황을 보면 거절할 수 있는 여유로움이 없었는 데도.
당장 먹을 것을 구해야 상황임에도.
그런 상황에서 거절 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는 거!
그 힘이 오늘의 실베스터 스탤론을 만들었다.
원고를 파는 것을 거절한 실베스터 스탤론은
영화 제작자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영화 시나리오 비용은 한 푼도 안주셔도 좋습니다.’
‘대신 주인공으로 나를 써 주십시오.‘
‘내가 이 역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실베스터 스탤론은 그 영화의 주인공이 되었고
촬영해서 개봉된 영화인 ‘록키’는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인생의 밑바닥, 삶의 밑바닥에서 지금 발등에 떨어진
생계걱정 대신에 보다 큰 미래에 도전할 수 있는 힘!을
우리는 록키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합니다.
내 또한 50대 초반에 늦 깎기 인터넷 편집기자 초년생이 되었다.
평생 동안 직장생활을 하다가 IMF 이후 젊은 나이에
직장을 찾는 것도, 새로운 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꼽고,
구직하고자 문 두드리면, 다단계요,
가는 곳마다 퇴직금 녹여 먹는 마귀들만 우굴 그리는 세상뿐.
그렇게 벼랑에 선 나는 퇴직자 은퇴자 모임을 결성하게 되었다.
NGO가 무엇인지 조차 모르다가
신문 기사 원고를 밤새도록 손질하고 다듬어 올리고
그래도 부족하여 한국방송통신대학 대학원 석사과정을
이수하면서 글 써는 법에 대해 조금은 자신감을 느끼게 되었었다.
2014년 3월에는 신춘문예지에 시인으로 등단하는 영광도 있었다.
이것이 나의 인생위기 였고 제 2의 전환기였다.
위기(危機)=위험(危險)+기회(機會)다
위기관리를 위해서는 또 하나 중요한 점은
평소에 스페어타이어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항상 손에서 책을 놓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다.
암만 어려운 상황에도 배우는 것을 중단하지 않는 것.
그런 노력이 결국 스페어타이어를 준비 하는 것이다.
요사이도 매일 기획서를 작성하고 글을 올릴 수 있는 것도
지나온 십 여 년 동안 축적한 자료이고 공부한 결과물인 셈이다.
또 하나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서 결심한 것은
직장이 아닌 나의 직업을 가져야겠다는 것이다
그래야 평생 일할 수 있고 훨씬 보람이 클 거라고 생각 한 거다.
난관 속에서도 자기만의 가치를 지키면서 희망을 품고 미래를
준비하면서 꿋꿋이 살 수 있는 힘! 그런 인내가 필요하다.
그리고 삶에 반전을 이루기 위해서, 인생의 밑바닥에서
배워야 할 요소는 분노와 절망과 체념은 빨리 버려야 한다는 것.
희망과 신념을 가지고 항상 미래를 구상하라.
이글을 가장먼저 내 식구들,
내 아이들이 읽고 깨달았으면
정말로 나는 이제 산에 가서 영원히 잠잔들
아무런 후회도 없는 한 잎의 단풍잎이 되어
비바람에 흔적 없이 사라질 수 있는 인생의 서막 길을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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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만 물러서면 보이는 행복
한 걸음만 물러서면 보이는 행복며칠 전에 주택을 15채나 가진 다세대 주택에 사는 40대 중반의 여인과 그녀의 10대 중반의 딸 그리고 폐기물 처리업체 직원인 50대 초반의 남편이 연탄가스로 동반 자실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동반 자살의 발단은 15체의 집을 갖기 까지 경매로 산 집을 전세로 놓고 전세금과 대출금으로 또 경매로 집을 사고 이렇게 집을 늘리다 보니 빚더미 위에 15체 집을 보유하게 되었다. 거기 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이것이 비극이 시작일 줄 누가 알았겠나. 이를 두고 사람들은 부동산 부자라고 할까요, 부동산 거지라고 할 가요. 원래 경매란 기부나 자선을 위한 물건이 아니라면 경매로 내 논 사람들의 뼈아픈 쓰린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욕심에는 끝과 한계가 없다. 보통사람이 욕심이 한 뼘 자랄 때 그들의 욕심은 자 벌레처럼 쭉쭉 자랐습니다. 결국 욕심의 끝은 죽음이다. 욕심이 과하여 사망을 낳았다. 안빈낙도(安貧樂道)란 고사성어(故事成語)에만 있단 말인가. 세상은 이와 같이 말초적인 비극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확천금이 아닌 부단한 노력으로 세상에 우뚝 선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다. 지금은 오지 탐험가이자, 오토캠핑 강사, 레저문화칼럼니스트인 박상설(86세)는 59세 때에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 찾아 간 모든 병원에서 병명을 모르겠다고 했다. 결국은 뇌간동맥경색(뇌졸증)이라고 판명 되었으나 수술 방법도 없다고 했다. 한 의사는 1년을 넘기기 어려운 시한부 인생이라고 말 했다. 어짜피 죽을 목숨이라면 가족을 괴롭히기보다 차라리 나를 산에 버리고 산에서 죽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지팡이에 의지 해 한 발씩 걸었다. 그리고 환자로 죽기 보다는 여행자로 죽기로 결심했다.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배낭여행을 떠났다. 1년 6개월 동안 미국, 캐나다, 맥시코, 유럽 12개국, 인도, 네팔, 일본, 중국을 떠돌아 다녔다. 주로 오지를 다니며 휴대용 탠트나 랜터카에서 숙식을 해결 했다.이렇게 몸을 혹사하면 병이 악화되리라 생각 했으나 오히려 그 반대였다. 죽기 위하여 떠돌아 다녔으나 오히려 살아 난 것이다. 1년을 살기 힘들다고 했던 그가 벌써 27년이나 정정하게 살고 있다. 기적이라고 할 까요. 그래요. 그렇게 불러도 좋다. 기적이라고 하더라도 노력 없는 기적은 일어 날 수 없다. 그래서 단 한 번 밖에 없는 인생 오늘을 충실히 살아야 한다. 그런가 하면 요리사인 김훈이(42세 미국이름 후니 김)의 성공적인 이야기가 있다. 그는 미국 의학전문대학원에 다니다 졸업 1년을 앞두고 학교를 포기하고 요리사의 길로 들어섰다. 어머니는 외아들이 요리사가 되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 왜 안 그러겠습니까?. 보통 상식으로는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는 모든 사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했습니다. 요리사 김훈이씨가 시작한 뉴욕의 한식당 '단지'는2011년 10월 미식계의 성서로 불리는 레스토랑 평가서 미슐랭 가이드의 별 하나를 받았다. 한식당으로는 최초의 별이다. 그는 한국식 그대로의 된장찌개와 은 대구조림으로 뉴요커를 사로잡았다. 김씨는 2012년 단지의 형제격인 주막 '한잔'을 열었다. 영화매우 나탈리 포트먼은 '단지'에서, 크린턴의 전 미국대통령의 딸인 첼시 클린턴은 '한잔'에서 한식을 즐겼다. 그가 한 때 병원에서 일해 보니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상황이 많지 않음을 깨닫고 남을 돕는 것보다 남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라도 생각하고 요리사의 길로 들어섰다. 남이야 뭐라 하던 자기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것을 골라 인생을 바칠 때 기쁨이 오고 기쁨은 곧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남보다 우뚝 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이렇게 말 한다. 50가지 메뉴 중 40가지만 맛있으면 성공이라고 하는데 맛없는 메뉴를 시켜서 실망한 손님은 새 메뉴를 절대 주문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식당을 좋아하고 계속 찾아 줄 동네 미식가가 제일 중요한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정말 좋아서 찾아 온 손님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사로잡아야 오래 갈 수 있다. 이것은 가격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다. 한식의 경쟁력은 강하고 깊은 맛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 그것이 된장이다. 한잔에서 가장 잘 팔리는 것도 쌈장이다. 최고의 요리는 기쁨 위에 감동을 얹어야 한다고 그는 늘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삶에는 여러 가지가 있고 삶의 열기도 뜨겁다. 어느 삶이 옳다고 딱 잡아 이야기는 할 수 없다. 모두들 의미 있게 살려고 몸부림치거늘 욕심으로 동반 자살을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자살만이 만사를 해결하는 잣대가 아니다. 이유야 어째 던 간에 생을 스스로 끊는 다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조물주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가진 것이 있던, 없던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박상설씨나 김훈이씨가 말하듯이 한 걸음만 뒤로 물러나서 노력만 하면 행복이 보이듯이 욕심 없이 한 걸음만 뒤로 물러납시다. 내일 보다는 오늘이 젊기 때문에 내일에 기대지 않고 오늘을 충실히 살아야 한다. 삶은 언제나 활기차고 기쁨이 넘쳐나야 한다. 그래야만 살맛이 나는 것이다. 행, 불행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고 주관적인 것이다. 그것은 마음먹기 하나에 달려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가정의 시발점인 마누라의 ㅁ자에 안과 밖 점하나를 찍어 멋과 맛이 공존하는 화목한 가정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지 아니한가. 2014년 11월 25일모란 동백 / 조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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