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도 「World Cup ‘22」로 온 세계가 들썩했었다. 우리 한국은 16강까지 오른 것으로 끝이 났지만 그만해도 대견했다는 생각들이다.
인터넷상에 보면, 「축구의 역사는 유럽(영국), 그 중에서도 특히 옛날의 중세 스페인에서 펼쳐졌던 전통적인 축구 경기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현대적 의미의 축구는 1863년에 잉글랜드에서 설립된 축구 협회(FA)의 등장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노동자 계급의 스포츠에 참여와 더불어, 기업가들은 관중들이 스타 선수를 보기 위해 모이는 것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활용하기 위해 최초의 프로 클럽이 탄생하게 되었다. 일단 프로페셔널리즘이 확립되면서부터, 경기의 인기는 무척 높아졌고, 곧 영국인의 해외 이주를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오늘날의 전세계적인 스포츠 중 하나가 되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동양에서는 고대 중국에서 시작되어 축국(蹴鞠)이란 이름으로 지금의 축구와 비슷한 경기(놀이)가 오히려 서양보다 훨씬 일찍부터 있었던 것 같다. 중국 정사(正史)인 《구당서(舊唐書)》에 고구려 사람들은 공을 잘 찬다는 대목이 나온다고 한다. FIFA(국제축구연맹)에서도 이것을 가장 오래된 형태의 축구와 유사한 놀이로 인정하고 있다고 하니 축구의 역사는 동양에서 시작된 것이 옳다는 생각이다.
우리나라도 그렇다. 역사상 신라통일의 주역은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金庾信)이다. 이들 두 사람이 맺게 된 계기도 축국이었던 것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온 유명한 얘기다. 이들이 젊었을 때, 어느 날 김유신의 집 앞에서 서로 반대편이 되어 축국시합을 했던 것이다. 김유신이 택클하는 바람에 김춘추의 옷고름이 떨어져 나갔고 반칙을 범한 김유신은 그 길로 김춘추를 집에 데리고 들어가 누이동생인 문희(文姬)로 하여금 옷고름을 꿰매게 했던 것이 결국 신라통일까지 꿰매게 된 것이다.
이 서양식 축구가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 것은 1890년대 후반 ―. 관립(官立) 외국어학교에 초빙된 외국인 교사들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전통축구가 축국인 데 비해 이 양식 축구는 척구(擲球)라 불러 구별했다고 한다. 외국어학교 출신들이 대한척구구락부(大韓擲球俱樂部)를 결성하고 있는데 그 발족 취지에서 당시 친로파(親露派)니 친일파(親日派)니 친청파(親淸派)니 하고 젊은이들 간에 갈등 반복이 심한 데 대한 화합(和合)수단임을 명시하고 있었다 한다.
어려서부터 운동이라면 젬병이었던 내게 축구가 좋았을 리 없고 한 일도 없었지만 축구 때문에 기억에 남을 만한 사건들은 있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축구는 초등학교 3~4학년인 1949~50년도 경이 아닌가 싶다. 당시 고향인 경산에 축구를 좋아하고 잘 하는 분들이 많이 있었는데 학교 운동장에서 오후에 연습하는 모습을 본 것이 처음이다. 유니폼도 멋있었지만 밑바닥에 작은 밤톨만한 징이 박힌 구두에다 특히 종아리에 신은 스타킹은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것이지만 신기하고 탐나기까지 했다. 공부를 마치고 바로 집에 가지 않고 운동장 옆에 둘러앉아 구경하다가 날아오는 축구공에 얼굴을 맞아 울기도 했지만 청년들이 와서 어루만져 주고 상처라도 나면 빨간 아까징키(포비돈요드액)를 발라주기도 했다. 축구공은 작은 쇠가죽 조각을 여러 개 기워 뒤집어 원통으로 만들고 중간에 고무츄브를 넣고 빼는 입구는 가죽끈으로 졸라매도록 되어 있었으며, 다른 한 군데는 ’배꼽‘이라 해서 고무츄브에 생고무를 붙이고 바람넣는 주사바늘을 꽂았다 빼도 공기가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게 되어 있었다. 헤딩을 하거나 얼굴에 맞아도 이런 모서리가 있는 곳이면 상처가 아프기도 하지만 상처가 나기도 했다.
내가 사는 마을 뒤에 동네와 너른 들판을 가르는 길다란 회나무 숲이 있었는데 언제 것인지는 몰라도 둥치가 우리들 팔길이로서는 너댓 명이 이어야 했으니 거목들이었다. 이 숲 끝에 왜정시대의 호열자(콜레라) 병막(病幕)이 폐허가 되어 있었고 그 옆에는 깊고 넓직한 웅덩이에 맑은 물이 거득했기에 나보다 여나문 살 윗길 되는 청년들의 놀이터로 애용되기도 했지만 크고 작은 사고도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이 자리에 경산고등학교가 개교하게 되었는데 교사(校舍)는 몇 동(棟) 안 되었지만 탁트인 논밭을 갈아 만든 운동장이 시원스러웠다.
이 운동장에서 개교 기념으로 제법 큰 축구경기가 열렸다.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월드컵에 출전한 것이 1954년이라 했는데 이때 골키퍼로 참가하여 헝가리와의 경기에서 9:0, 터기에 7:0으로 패하고 말았다는 함흥철씨가 하도 공을 많이 받아 가슴에 멍이 들었다고 가슴을 열어 보이며 하는 얘기를 직접들은 기억은 이 때의 일이다. 그리고는 축구는 늘 망각 저쪽에 있었다.
1972~3년도로 기억된다. 처음으로 상선(商船)의 2등항해사로 승선, 일본과 동남아를 왕래하는 정기선(定期船)에 승선했다. 일본에서 주로 자동차를 싣고 태국으로, 다시 시멘트를 인도네시아로 운반하고 보르네오에서 원목(합판이나 고급 가구의 원자재)을 적재하고 일본으로 돌아오는 마름모꼴 항해였다.
태국의 방콕에서 시멘트를 적재할 경우는 시간의 여유가 있은 데다 마침 한국팀이 출전하는 아시안컵 축구시합이 있다고 했다.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라 선장의 허가를 얻고 이등항해사와 이등기관사를 책임자로 하는 응원단을 만들고 수제(手製) 태극기는 물론 긴 종이에 페인트로 큼지막한 글자로 응원문구를 쓰는 등 응원 준비를 하고 찾아갔다. 이는 내가 교직 출신이었기에 “항해사님, 전에 간판쟁이 했습니까?” 하는 소릴 들을 만큼 멋지게 해냈다.
그날은 말레이시아와 한국의 시합이었다. 이회택, 박이천 같은 선수가 주축이 되어 아시아축구에서 최강자리를 놓고 버마, 태국 등과 겨루던 시절이다. 정박 중인 어떤 선박에서는 이력이 있는 듯 꽹과리에 징까지 가지고 나왔다.
우리가 들고 간 태극기와 프랭카드를 보고 현지 교민들이 주위로 몰려왔다. 그런데 태극기를 든 사람이 거의 없었다. 교민들에게 물었다. “오늘 말레이시아와의 시합이라 그렇지 만약 태국과의 시합이라면 박수도 제대로 못 친다”는 대답이었다. 당시 축구에서 태국은 한국팀과 붙기만 하면 깨졌기에 운동장의 분위기는 한국이라면 눈뜨고 못 본다는 상황이었다고 했다. 실제로 관람 중에 큰소리로 응원을 하면 뒤에서 작은 물병 같은 것이 날아오곤 했고 지나가는 척 하며 플랭카드를 찟기도 한다. 앗차!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럴 때마다 일어나서 뒤돌아 보며 정중히 두 손을 모아 잡고 부처님께 하는 식의 절을 하고 던져온 병을 주어 모우기도 했다. 그러자 태국사람들도 느낀 바가 있었는지 어떤 이는 던지는 사람을 나무라는 식으로 자기네들끼리 고성(高聲)이 오가기도 했다.
꽹과리를 가지고 온 팀은 꽹! 소리 한 번 내보지도 못하고 갔다. 소름이 끼치며 살벌하기까지 한 광경이었다. 같은 나라 안에서도 객지에 산다는 것에 다름을 느끼는데 외국에서의 교민 생활의 애환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경기 후 뒷자리를 깨끗이 치우고 경기장 밖으로 나오자 귀빈석에서 같이 경기를 관람하고 나오던 태국주재 한국대사(大使)가 일부러 찾아와 고맙다며 인사를 하고 간다. 귀선 후 등에 땀이 후줄근한 것은 그곳의 더위 탓만이 아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1983년이던가 신조선 전문냉장냉동선 선장으로 호주 남쪽의 아델라이드항에 입항했을 때이다. 역시 선진국답게 웬만한 항구마다 종교단체나 국가에서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Seaman’s Club을 열고 정박 중에 오갈 데 없는 외국 선원들에게 국제전화를 연결해 주는 등 어려움을 보살펴 주며, 각 선박끼리 축구나 배구 시합도 갖게 주선해주기도 했다. 역시 그들은 인간생활의 기본 철학이 깊이 자리 잡고 있다는 얘기다.
젊은 축들이 여기서 마침 정박중인 브라질 선박과 축구시합 한 번 하라는 클럽의 권고를 받고는 심심풀이로 좋다고 한 모양이다. 한데 클럽측에서는 그게 아니었다. 정식으로 담당자가 본선을 방문하고 선장에게 함께 시합에 대한 서류를 만들자고 했다.
시합일자와 시간은 물론 유니품의 색상, 선수 명단 및 선내 지위, 승자와 패자간의 상품내용까지 꼼꼼하게 정하는 것이었다. 평소 축구를 좋아하는 우리측 젊은 선수 선원 두어 명을 불러 의논하게 했더니 “뭐 이렇게까지…” 하며 그들도 놀라는 기색이었다. 아무튼 시합예약은 됐다.
한 선박의 승무원은 큰 선박이라야 많아도 30명, 보통 20명 안팎인데 시합인원만 해도 11명이니 당나귀 귀 빼고 뭣 빼면 남는 것이 없듯이 당직과 필수요원들을 제하고 나면 나머지 전원이 참가해야 할 판이었다. 가장 할 일 없는 사람이 선장과 기관장 통신장 등 나이 지긋한 고급사관들이지만 부득이 너나 없이 명단을 적어넣었다. 우리측 주장인 선원이 명단을 보고 이래저래 포지션을 배정했다. 선장도 기관장도 그 지시에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것저것 고려해서 골기퍼가 되었고 나보다 나이가 위인 기관장과 갑판장은 내 앞을 막아주는 ‘백’이라는 자리였다. 상품은 맥주 2박스와 양담배 한 볼을 걸었다.
유니폼이 따로 있을 리 없었다. 그냥 평소 입던 각자의 츄리닝이면 훌륭했고 외출할 때 신던 운동화, 아니면 작업 중에 신게 되어 있는 안전화(安全靴)가 그래도 제격이었다.
그래도 기분좋게들 정한 날, 정한 시간에 상품을 짊어지고 갔다. 클럽 뒤쪽에 널찍하게 잘 가꾸어진 잔디구장이 있었다. 보통 때 이런 잔디밭을 만나면 우선 들어눕고 보는 곳이다. 가지각색의 차림으로 정한 제자리를 눈짐작으로 확인하고 있는데 상대편 팀 선수들이 입장한다. ‘어!’ 우선 눈부터 둥그레진다. 어디 이런 멋진 선수들이 있던가? 11명이 똑같은 유니폼에 같은 색의 축구화를 신고 나온다. 클럽측에서 수배한 심판이 빙그레 웃는다.
암튼 호르라기는 불었고 시작은 했다. 시합내용은 얘기 하지 말자. 가뜩이나 평소 땅을 딛지 못하는 선원들인데 처음 뛰어보는 잔디구장! 뛰지도 못하고 뛰어지지도 않는다. 넘어지는 선수가 더 많다는 생각도 들었다. 공이 한참 멀리 있어 보이는데도 휙 하더니 머리 위로 지나간다. 슬슬 굴러오는 공을 ‘이때다’ 하고 죽을 힘을 내어 냅다 찼는데 공은 골대 안으로 유유히 굴러 들어가고 안전화 한 짝이 공중높이 솟아오른다. 구경꾼들이 골인했을 때보다 더 큰 박수를 쳐댄다. 몇 대 몇인지 헤아릴 것도 없었다. 겨우 전반전을 마치자 우리편 젊은 선원들이 “선장님, 그만 합시다” 한다. 남사스럽기도 하지만 그보다 기진맥진한 탓이다. 가져온 맥주와 담배는 고스란히 넘겨주고 물통의 맹물로 마른 목을 달래면서도 모두들 왠지 기분은 그리 서운하지가 않은 듯 했다. 어떤 선원은 그 멋진 선수들하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세계최고의 축구명문 브라질팀’과 한판 붙었다는 자부심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출항 후 2~3일간은 선교에서 젊은 선원들이 절뚝거리는 것을 내려다보면 저절로 웃음이 났다.
문제는 축구에 대한 인식이 확연하게 달랐다. 세계축구의 최고인 브라질 사람들의 축구에 대해 신성시 하는 개념과 그냥 한판 놀이로 여기는 우리들의 생각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었다. 후에 브라질을 비롯한 남미 여러 나라들에서 동네마다 손바닥만한 터만 있으면 맨발의 소년들이 공을 차며 노는 것을 보고 새삼 축구에 대한 인식을 달리했었다.(계속)
첫댓글 실눈 뜨고 읽느라 눈두덩이가 아픕니다.ㅋ 이 곳은 경주 보문단지.^^
여행중인데 님의 축구이야기에 빠져 어둠이 밀려 나는 것도 몰랐군요.
^에구 노트북을 가져올 걸^
서툰 손자국 남기고 갑니다.
귀가 해서 젊은 날의 늑점이님을 봐야겠습니다. 멋진 항해사의 모습을....^^
그래서 글자를 좀 크게 했음다. 지송함다. 좋은 여행되소서. 부산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