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론 읽는 기쁨] <62> 제2편 제9장 당체법문 ④
만다라회 기획, 박희택 집필
당체법문의 기초 형태는 무정설법(無情說法)이라 할 수 있다. 유정물(有情物) 뿐만이 아니라 무정물(無情物)도 법을 설하므로 이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산하대지가 참빛이니 이 빛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산과 강과 대지와 바위와 물과 나무를 그저 무정물로 대한다면 우리 공부의 텍스트는 너무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사실이 경전이고 체험이 법문이 되려면(실행론 2-9-1) 저 무정물도 경전과 법문으로 인식해야 한다.
왜 그런고 하면 무정물마다에도 부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화엄경」 보현행원품에서 거듭 설해지고 있는 바와 같이, “온 법계 허공계인 시방삼세 모든 세계에 있는, 아주 작은 낱낱의 먼지 가운데 있는 모든 일체 세계의 아주 작은 먼지 수만큼 많은 부처님이 계시고(所有盡法界虛空界 十方三世 一切剎土, 所有極微一一塵中 皆有一切世界極微塵數佛, 화엄경 보현행원품 칭찬여래원)”란 말씀을 상기할 수 있는 것이다.
무정설법의 불교철학적 근거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 하겠다. 부처님이 계신 제법(모든 존재)이 실상(참모습)을 보이고 있음을 모른다면, 어떻게 제법무아(諸法無我)와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알아서 열반적정(涅槃寂靜)에 깃들 수 있겠는가! 선종에서 무정설법을 들으려는 수행정진 양상이 크다. 선종사에는 중국 송나라 때 동림상총(東林常聰, 1025~1091)과 소동파(蘇東坡, 1035~1101)의 무정설법이 회자된다.
불교 공부에 관심이 컸던 소동파가 강서성 여산(廬山) 동림사에 주석 중인 당대의 고승 동림상총을 찾아 설법을 청하자, 동림상총은 “사람의 말만 듣지 말고 산하대지 우주자연의 설법을 들어라”고 설하였다. 쉬 다가오지 않는 선사의 무정설법에 관한 법문에 답답함을 안고 돌아오는 길에, 소동파는 여산폭포의 장엄한 물소리를 듣고 아래와 같은 오도(悟道)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무정설법을 노래한 선시의 백미라 칭해진다.
“시냇물 소리가 곧 부처님의 설법인데(溪聲便是廣長舌),
산색이 어찌 본래 청정법신이 아니랴(山色豈非清淨身).
밤새껏 팔만 사천 게송이 설해졌으니(夜來八萬四千偈),
다른 날 어떻게 이 법문 전해 주리오(他日如何擧似人).”
성철스님은 「증도가」를 강설하면서 무정설법을 거론하고 있다. 제24-25구인 “기관목인을 불러 붙들고 물어보면(喚取機關木人問), 부처 구하고 공 베품을 조만간 이루리로다(求佛施功早晚成)”에서 ‘기관목인에게 물어본다’는 것은 무정설법을 듣겠다는 것이며, 이를 통해 오히려 대무심(大無心)과 무위법(無爲法)을 깨칠 수 있다고 강설하였다. 증도의 노래가 다른 특별한 것이 아니다. 부처를 구하고 공을 베풂이 무심과 무위임을 직관하는 것이다.
제4절 각해심인(覺海心印)을 자증교설한 회당대종사의 당체법문에서, 깨달음의 바다[覺海]라 하여 깨달음을 무정물인 바다에 비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 각해는 마음의 도장[心印]이라 하여 다시 무정물인 도장에 비유된다. ‘해인(海印)’은 「화엄경」에 거듭 보이는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유래한 것으로 통상 이해하지만, 그 해(海)가 심해(心海, 覺海)이기에 각해심인으로도 해인을 이해할 수 있다. 법보종찰 해인사(海印寺)와 도서출판 해인행(海印行)은 명칭에 있어서 통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회당대종사께서는 생전에 진각종단 출판사명을 ‘해인행’이라 칭하셨으니, 깨달은 마음을 무정설법 이상의 당체법문, 바다[海]와 도장[印]으로 현전한 법신불의 당체법문으로 이해한 명칭이라 하겠다. 아래 말씀을 독송해 보자.
“해인(海印)은 각해심인(覺海心印)을 이르니 경(經)을 해인이라 한다. 각해는 깨달은 사람의 지혜이며 내 마음 가운데 있다. 불교는 각해로서 깨닫는 바다이다. 흐트러진 실 끝을 찾아서 실을 푸는 것과 같다. 각해는 공덕이 넓고 깊고 불어나지 않고 줄지 않는다. 속병이나 진심(瞋心) 등이 각해에 오면 낫는다. 마음이 좁을수록 불어나거나 줄어드는 것이 잘 드러난다(실행론 2-9-4-가).”
해인은 각해심인에서 왔다는 점, 해인은 경(사실의 경전)이라는 점, 각해는 깨달은 사람의 지혜로서 내 마음(체험의 법문) 가운데 있다는 점, 각해는 불교의 깨닫는 바다라는 점을 설하셨다. 또한 깨달은 각해에서는 흐트러진 실도 풀 수 있고, 공덕이 항상하며, 속병이나 진심을 치유할 수 있다고 실제적으로 공덕을 밝히고 계신다. 동시에 공덕이 항상하지 못한 것은 각해에 들지 못해서라 하셨다. 이어서 체험의 법문을 내 마음 가운데서 깨치는 것과 관련하여 나항에서 법설하신다.
“원망심을 여의는 순간 삼계유정(三界有情)이 다 내 몸이고, 간탐심을 여의면 이 세상 티끌 하나 내 것 아닌 것이 없다. 마음이 한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한이 없다. 마음이 비뚤어져 있으면 다가올 모든 앞일이 꼬여서 복잡하게 되고, 마음이 바르게 펴 있으면 다가올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어 간다. 자기 마음 가운데 팔만사천경을 배우는 길이 있다(실행론 2-9-4-나).”
내 마음이 원망심과 간탐심을 여의면 삼계의 유정 무정과 일체가 된다는 점, 마음을 비뚤게 하지 않고 바르게 펴면 꼬여서 복잡한 일도 순조롭게 된다는 점, 결국 당체법문을 읽고 그 체험의 법문을 내 마음 가운데서 깨치면 팔만사천경을 다 배우게 된다는 점을 교설하신 것이다. 마음을 어떻게 움직이느냐가 관건인데, 당체법문을 읽어서 넓고 크고 둥글고 차게[廣大圓滿] 운용할 줄 알아서 자신의 삶을 광대원만하게 지어가라고, 당체법문 중의 각해심인으로 인도해 주신다.
당체(當體)는 육대이고, 당상(當相)은 사만이며, 당행(當行, 當用)은 삼밀이라고 했거니와(제59회 참조), 당상으로서의 사만다라(四曼茶羅)에는 무정물도 포함된다. 대만다라(大曼茶羅)는 생명 있는 일체 유정, 삼매야만다라(三昧耶曼茶羅)는 생명 없는 일체 비정, 법만다라(法曼茶羅)는 일체 유정 비정들의 말 소리 명칭 성명 그림 문자, 갈마만다라(羯磨曼茶羅)는 십계 중의 유정 비정들과 일체 유형 무형물의 변천 동작을 지칭한다.
대만다라 뿐만이 아닌 삼매야만다라도 법만다라와 갈마만다라가 되어 당상이 됨을 말씀하고 있다. 바다와 도장과 같은 삼매야만다라도 늘상 우리들에게 당체법문을 설하고 있으니, 이 법문을 읽어 각해와 심인이 행자의 각해심인이 되도록 밀행(密行)해 나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