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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토토 하얀병원 건립 세상 가장 낮은 히말라야 원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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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토하얀병원소식 스크랩 [2011 무작정 네팔 다녀오기:10.3-11] ⑥ 3천m 고산병 공포 넘어 남체 도착
심대감 추천 1 조회 268 12.06.13 19: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http://bit.ly/tzEHPT (원문 보기)

 

<2011. 10.7 금요일>
 
    
 해발고도 3,440m에 위치한 남체 바자르. 쿰부 히말라야 지역에선 가장 번화한 마을이다. 

 @  2,835m 몬조에서의 지난 밤은 정말이지 이번 여행의 최대 난관이었다. 이른 아침에 눈뜨자마자 일행 중

나를 포함한 셋(의사, 간호사, 기자)은 더 이상의 트레킹을 포기하고 일종의 베이스캠프였던 체풀룽

(Chheplung·2,660m) 병원으로 다시 내려갈 뜻을 단장에게 전했다. 이동 진료가 예정된 남체 바자르

(NAMCHE BAZAR·3,440m)까지 거리는 얼마 남지 않았건만 고도를 더 높인다는 게 우리 세 사람에겐

너무나 공포스럽게 다가왔던 것이다. 

 흔히 고산병은 해발 3,000m 이상에서 뇌에 산소가 원활하게 공급되지 않아 생긴다고 한다. 고도가 높을수록

기압과  산소가 부족해 호흡이 빨라지고, 구토 증세와 식욕부진이 나타나며 다리는 천근만근이라는 데 이미

우리에겐 그 전조가 나타났던 것이다. 이런 증세가 나타나면 산행을 포기하고 고도가 낮은 곳으로 빨리 이동해

야 한다고 출발 전부터 익히 들었기에 어렵사리 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그 의견도 권경업 단장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다시 번복하고 만다. 
 
 아무튼, 체풀룽 토토 하얀병원을 떠나 롯지에서 처음으로 맞이한 전날 밤 잠자리는 많이 힘들었다. 침대에

눕자 추위는 둘째치고 가슴이 답답해 오는 게 반듯하게 누워 있을 수가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바로 건넌

방에서 잠든 부민병원 검진과 김창석 과장을 깨워서 도움을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싶어 몇 번을 망설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증세는 박경미 간호사에게도 찾아왔었다. 그래도 잠든 사람을 깨우기가 미안해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하다 결국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 전화통화를 하러 1층으로 내려갔다. 목소리라도 들어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집을 떠나 여행을 하면서 이번처럼 불안한 마음이 든 것도 처음이었다. 몬조 고도에 적응하

지 못한 탓이었겠지만 부지불식 간에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것 같다. 암튼, 한국에 전화 통화를 한 잠시 동안

은 그나마 편안해졌다. 가족이라는 이름이 전해준 위안이었고나 할까. 그제서야 하늘을 올려다볼 여유도 생겼

다. 하늘엔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몬조에서 먹은 아침, 갈릭수프와 짜파티.
    짜파티(밀이나 보리 메밀 수수 등을 거친 가루

로 만들어 반죽한 후 간단히 납작하게 해서 불에 구어 먹는 ‘짜파티’. 인도의 대중음식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데 네팔 사람들도 먹는다) 

 

 @ 2011년 10월 7일 오전 6시30분 다들 일어나 다시 짐을 챙겼다. 오전 7시 롯지에서 제공한 갈릭 수프와 짜

파티로 아침식사를 마쳤다. 그런데 간밤에 다들 잠을 편히 못 잤다고 했다. 숨이 가빠오는 증상에서부터 평소

와 달리 꿈자리가 사나웠다는 등 이유는 각양각색이었다. 그중 한 사람은 혼자서 고민하다 새벽녁에 롯지 주위

를 돌아보게 되었는데 우리가 잠들었던 방이 수천미터 허공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그러

자 한 사람이 말을 받았다. 우리 모두 땅의 기운을 받지 못해 힘든 밤을 보낸 것 같다고. 그 와중에도 잊을 수

있는 장면이 내겐 있다. 칠흑 같은 어둠이 사방을 둘러싼 한밤중이었나보다. 문득, 느낌이 이상해 눈을 떴는데

창으로 쏟아붓듯 들어온 환상적인 달빛에 깜짝 놀랐다. 커튼을 젖히고 창 밖을 바라보면서 나도 모르게 탄성

을 질렀다. 수천 미터 상공 위에서 내리꽂 듯 쏟아진 달빛이 내가 잠든 롯지 방안으로 들어왔다. 순간이었지만

그 황홀함은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다.

 

   

    사가르마타 국립공원 입구에서 기념사진.

    
    사가르마타 국립공원에서 발급받은 에베레스트 트레킹 퍼밋(증명사진을 뺀 채 촬영).    

 @ 오전  7시 45분 일행은 몬조를 출발했다. 목적지 남체 바자르까지 현지인들은 3시간 남짓이면 도착한다

고 하지만 우리처럼 `세상에서 가장 느린 원정대’로선 무려 8시간을 예상하는 거리였다. 여기서부터는 또 다

른 절차가 필요했다. 사가르마타 국립공원(Sagarmatha National Park)의 관문인 조르살레(Jorsale, 2,740m)

에서 입산 신고를 해야 하는 것. 네팔에선 전문 등반이 아닌 트레킹을 해도 네팔 정부에서 발행하는 트레킹 퍼

밋(Treeking Permit)을 받아야 한다. 카트만두에서부터 받아오는 경우도 있지만 현지에서 즉석 발급도 된다.

각자의 사진이 필요하고 별도의 입장료를 물어야 한다. 사가르마타 국립공원의 경우 입장료는 1인당 미화 10

~20불(체재 기간에 따라 다른데 우리는 1,000Rs짜리로 받았다).

 

 그런데, 우리 일행은 운 좋게도 퍼밋 비용을 물지 않아도 되었다. 자기네 나라에 자선병원을 지어주러 온 데다

 이번 트레킹도 순회 진료를 겸한 것이라고 현지 가이드가 설명했더니 흔쾌히 무료 통과를 허락한다. 대접을 받

으려고 한 건 아니지만 뭔가 좋은 일을 하려는 것을 알아준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그래도 기념으로 트레킹

퍼밋 카드는 각자 만들어주었다. 평생 잊지 못할 선물을 받은 셈이다. 트레킹 퍼밋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네

팔 트레킹 협회 http://www.taan.org.np/ 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참, 국립공원 이름인 '사가르마타'는 산스크

리트어로 `우주의 어머니’라는 뜻으로, 네팔에서 에베레스트산을 부르는 명칭이다. 에베레스트라는 이름은 1865

년 영국인들이 조지 에베레스트(George Everest) 측량국장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며, 티베트인들은 이 산을

 오래 전부터 '초모룽마'라고 부르고 있다. 해발고도는 2,845 ~ 8,848m에 걸쳐 있으며, 7,000m가 넘는 봉우리

만도 7개나 있다.우리는 겨우 남체 바자르까지 이르는 짧은 여정이지만 에베레스트 등정을 하는 이들에겐 진정

한 출발지인 셈이다. 

 사실 몬조에서 남체까지도 거리 상의 문제가 아니라 3천m터를 상회하는 고도가 관건이었다. 그래서 고도가

높아지는 가운데, 숨이 가빠오는 가운데도 주문을 외듯 늘 입으로 한 단어를 되내었다. "비스탈리~ 비스탈리

~(천천히, 천천히)". ’비스탈리’는 이번 네팔 여행에서 ’나마스테’와 함께 내가 기억하는 두 단어 중 하나가

되었다. 그만큼 많이 되내었고, 간절하게 염원했다. 그리고 또 하나. 길을 걸을 때마다 각양각색의 모양과

크기로 군데군데 만들어진 돌나무 의자야말로 나의 진정한 쉼터였다. 돌나무 의자는 나뿐 아니라 수많은

트레커들, 그리고 현지 포터들에게도 진정한 위안이었다.  

    
    두드코시 브릿지를 건너며.

   
    높디 높은 곳에 위치한 두드코시 브릿지와 두드코시 강.

 

 @ 오늘 코스 중에선 ’세상에서 제일 높은 다리’인 라르자 도반의 두드코시 브릿지(Dudh Kosi Bridge)가 압

이었다. 두드코시 브릿지는 한마디로 환상적이었다. 루크라에서 남체를 오르기 위해선 몇 개의 현수교 출렁

다리를 건너게 되는데 라르자 도반의 다리야말로 앞선 다리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높고 웅장했으며

아찔했다. 다리 위에 서서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는 순간, 아찔함에 온 세상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이안과 피

안의 경계가 있다면 혹시 이렇진 않을까, 잠시 상념에 젖기도 했다. 특히 다리 난간에 각종 기원을 담아 묶어

놓은 오색 룽다와 카닥이 히말라야의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대자연의 품 속에서, 히말라야의

바람을 온몸으로 느낀다는 건 상상 이상의 즐거움이었다. 이런 재미 때문에라도 사람들이 그렇게도 힘든 고

소 등반 과정을 거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높은 산에 오르고 싶고, 정복하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을 조

금이라도 알 것 같았다.   

   
   남체 바자르 풍경 중에서.

 

 @ 마침내 낮 12시 30분께 ’세상 가장 낮은 히말라야 원정대’의 최종 목적지인 남체 바자르에 도착했다. 예상

했던 8시간에선 한참 당겨진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10월 3일 한국 부산을 출발한 걸로 치면 무려 닷새나 걸린

셈이다. 정말 죽을 듯 살 듯, 엉금엉금 기다시피 올라온 곳이었다. 두드코시 브릿지의 환호도 잠시, 다리를 통

과한 직후부터는 급경사가 이어지는 내리막과 오르막이 반복적으로 이어져 힘든 걸음을 내딛어야 했다. 다리

를 건너자마자 또 다시 두통이 찾아와 타이레놀 한 알을 먹었다. 하지만 손발이 계속 부어왔다. 사람들은 왜

높은 곳으로 오르려할까,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러다 문득 듣게 되는 좁키오의 워낭소리는 불안감

을 씻어준다. 100보 걷고 쉬고 50보 걷고 다시 쉬고.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그래도 땀이 식을 정도로는 쉬지

말래서 또 다시 걸음을 재촉하기를 반복했다. 저체온증으로 인한 고산병이 오면 큰일이니까. 그래도 홀로였다

면 엄두도 못 냈겠지만 `트레킹 진료’라는 이름 아래 의사, 간호사, 셰르파 가이드, 신문 방송 취재팀이 함께한

`작은 원정대’였기에 가능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사실, 몬조에서 눈을 떴을 때만 해도 너무 힘들어 체풀룽

병원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게 아니었던가. 그때 권 단장이 포기하지 말고 올라갈 것을 종용하지않았더라면…

남체까지도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하긴, 하루 온종일 걸어 올라온 길을 다시 포기하고 내려간다는 결정도 쉽

지 않았다. 정말이지 오도가도 못할 상황이었기에 세 사람은 남체행을 택했었다. 이날 남체에 도착한 뒤에도

 머리는 계속 아파와서 타이레놀 복용을 결국 더 추가하게 된다. 

 

   
    남체 바자르 가는 길. 눈 아래 펼쳐지는 산들을 걸어걸어 올라왔다는 게 실감나지 않았다.


 @ 남체 바자르라는 도시는 앞서 본 다른 마을과는 비교가 안되게 컸다. 색색깔의 타르초가 바람에 휘날리

고, 저 멀리는 설산을 마주하고 있었으며, 다락논처럼 산비탈을 따라 지어올라간 집들도 형형색색 고운 빛깔

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체엔 정기적으로 시장도 열리고 있어 네팔 각지에서 상인들이 모여

드는 곳이었다. 우리가 도착한 날도 때마침 장이 서서 사람들로 북적댔다. 또 마을에는 빵집도 있었고, 인터

넷 카페도 보였다. 쿰부 히말라야 지역에서는 드물게 보는 번화한 마을이라는 게 실감났다.

 

 @  트레킹 이야기를 잠시 하자면, 흔히 네팔 히말라야 코스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고 한다. 세계에서

 일출이 가장 아름답다는 포카라 호수의 안나푸르나 지역. 멋진 빙하 계곡을 가진 랑탕 리움 지역, 마지막으

로 에베레스트가 있는 솔로 쿰부 지역. 한국 여행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지역은 비교적 등반이 쉽고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안나푸르나 지역이지만 셰르파족 마을과 드넓게 펼쳐진 고산들을 경험하고 싶은 트레커들은

코스가 다소 어렵지만 점점 쿰부 지역으로 모여든단다. 나야 아주 얼떨결에 가게 되었지만. 

 @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남체 바자르 시장. 뭐하나 부족할 게 없는 살림살이를 살고 있는 우리

 눈엔 어쩌면 남루해 보이는 그들의 삶이 한눈에 보이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곳에 두 발 딛고 사는 사람들에

겐 꿈과 희망이 영글어가는 곳이었다. 무려 열흘 이상을 걸어서 물건을 팔기 위해 왔다는 사람이 있는가하

면 멍이들대로 든 바나나를 펼쳐놓고 파는 아이…. 각종 야채와 공산품, 밀주와 고기 등 물자가 모이고 사람

이 모이니까 그나마 활기찬 모습이었다. 하지만 듣기로는 저 산 아래 루크라에서 이곳 남체에 이르는 동안

단번에 올라올 수 있는-지금은 숱한 마을을 거쳐서 올라오지 않으면 안된다-보다 저렴한 교통편을 네팔 정

부가 고민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정부가 국민을 이해하지 않아도 한참 않는구나 싶어 안타까웠

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빈국 네팔이, 네팔국민이 그나마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관광이자 트레킹인데 그

 과정을 없애버린다고? 물론, 정부는 그렇게 해서 항공료를 받는다던지 하면 되겠지만 루크라에서 남체에

 이르는 길 위에 있는 마을들과 주민들의 생활은 어떻게 해야 할까 싶어 내가 더 걱정이 되었다. 하긴, 부정

부패가 만연한 후진국 일수록 행정, 즉 정부가 문제라더니 네팔이 딱 그런 식이 아닐까 싶었다.

 

   
    남체 바자르 주말 시장 풍경.
   
    시장에서 만난 이 아저씨, 행복하게 돈 세다가 내 카메라에 딱 걸렸다^^   
   
    다소 퉁명스러운 표정의 이 아주머니가 입은 복장이 셰르파 전통 의상이다.
  
   남체 주말 시장에서 만난 이 청년들은 남체 바자르까지 열흘 이상 걸어서 왔단다. 
   판매용 물건은 남체의 창고에 돈을 주고 맡겨놓고 걸어서 오간단다.

   이 청년들 사는 곳은 ’지리’라는 곳인데 루클라공항이 생기기 전 에베레스트 트레킹은

   모두 지리에서 시작했다. 지금도 루클라 소형비행기를 이용하기 

   어려운 돈 없는 사람들은 지리에서부터 걷는다. 
    


 
 부민병원 검진과 김창석 과장과 박경미 수간호사 등이 남체 바자르에서 무료 진료활동을 펼치고 있다.

 

 @ 오후 6시 11분께 묵고 있는 롯지 인근에 사는 두 살짜리 여자아이가 뜨거운 찻물에 화상을 입고 찾아왔

. 우리 의료진이 급하게 아이의 상태를 살폈고 응급 처치를 했다. 하지만 화상에 대한 의약품이 별도로  준

비된 게 아니었던 만큼 막 생성된 수포를 터뜨리고 멸균 가제를 붙여주는 정도로만 처치하고 날이 밝는 대로

병원을 찾아가 보라는 말 밖에 할 수가 없었다. 임시방편의 처치는 마쳤기에 이삼 일은 괜찮겠지만 잘못 해

서 세균 감염이나 흉터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싶었다. 의료진의 필요성이 새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낮에 남

체에 도착하자마자 롯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진료 활동을 하면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죽을 만큼 아프

지 않으면 병원 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어쩌면 작은 병을 키워서 더 어렵게 할지도 모른

다는…. 몬조에서 묵은 롯지 아주머니만 해도 주부습진 비슷한 피부병을 얼마나 방치했던지 손가락이 엉망진

창이었다. 때마침 우리 의료진이 그 손을 살펴본 뒤 간단한 의약품을 전달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더더욱 의료시설이 거의 전무하다시피한 히말라야 오지에 자선병원(토토 하얀병원) 짓기를 시도한

부산 사람들의 열정이 놀라웠고, 다시 한 번 그 열정과 노력에 경의를 치하할 수밖에 없었다.

 

   
    네팔 음식 모모를 만들고 있는 롯지 아가씨들.
   
    모모국.

 @ 저녁 시간이 되자 롯지 아주머니께서 식당에 난로를 피워주었다. 사람들 온기에 난로까지 더해져 그나마

몸이 조금은 녹녹해진다. 저녁은 네팔식 달밧과  짜빠티 외에 해발 3, 400미터 고도에서 먹는 피자맛은 어떨까

싶어  토마토 치즈 피자와 튜나 피자 작은 사이즈도 주문했다. 약간의 향신료가 가미된 탓일까, 아니면 치즈향

 때문일까, 한국에서 먹던 피자맛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래도 오랜만에 먹는 별미였던 탓에 나는 맛있게 먹었

다. 여전히 일행 중 몇몇은 음식을 입에 대지도 못했다. 그래서 급하게 마지막 남은 한국 라면을 끓였지만 며칠

째 먹는 라면맛에 이젠 질린 것 같았다.  아참, 점심 땐 네팔 전통음식 가운데 하나인 모모국을 먹었다. 우리로

치면 모모는 만두, 그러니까 모모국은 만둣국인 셈이었다. 하지만 모모 안에 들어간 물소고기가 얼마나 질겼던

지 씹어도 씹어도 삼켜지지 않아 결국 뱉고 말았다. 또 옆 테이블엔 한국서 트레킹을 나온 한국팀이 흥겹게 식

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현지 셰르파를 가이드 겸  쿡(요리사)으로 대동하고 있었는데 저녁 식사로 먹고 있는 

닭도리탕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내참, 없어 보이게 남의 음식 보고 부러워하면 안되는데….

 

 @ 오늘도 목욕은 삼갔다. Hot shower를 하려면 추가 비용을 내야 하는 탓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고소 등반엔

 왕초보자인 우리로선 고산병을 앓을 우려가 커 다들 삼갔다. 고양이세수와 양치질, 그리고 찬물에 발 헹구기가

 고작이었다. 그러고 보니 머리를 못 감은 지 벌써 사흘째다. 그나마 사정이 낫다는 남체도 전력 사정은 여전히

좋지 않아 한 층에 하나 있는 화장실을 갈 때마다 손전등을 사용해야 하고, 방 안에는 희미한 등 하나만 걸려있었다. 

 @ 밤 9시가 되자 다들 잠자리에 들어갔다. 어제보다는 조금 늦어진 시간. 나는 휴대전화 충전 시간을 기다릴

겸 아직  잠들지 못하고 거실 겸 식당  같은 공간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 아, 여기선 휴대전화 충전에도 별도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가난한  나라 네팔이어서 물가도 저렴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만도 않다. 물론 평지에

가까운 카트만두와는 다를 것이다. 이 높은 산까지 물건이랑 연료를 실어나르는 비용만 해도 어마어마할 테니까.

끊임 없이 "돈, 돈" 하고 있었다. 네팔, 히말라야에서의 밤은 또 그렇게 저물어갔다.

   
    남체 바자르의 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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