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장
잠시 후 들려오는 세 마디의 비명소리와 함께 싱긋 미소를 지으며 백산이 다시 나타났다.
가공할 만한 빠르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가 무상신법을 전개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일행마저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백산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놀람은 이 사람들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광사 초상을 비롯한 무욕인 네 명,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움직인 백산의 모습을 놓치고 말았다.
떠날 때는 물론이거니와 다시 나타날 때도 귀신같이 나타난 것이었다.
"볼수록 잘생기지 않았소? 석두 이동한다. 발자국 남기지 말고 소리 없이 움직여라. 목표는 저기 보이는 천태봉이다."
입을 벌리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무욕인들을 향해 이상한 말을 하며 나머지 일행에게 이동지시를 내렸다.
"누님!"
모두들 천태봉 정상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백산이 조천영을 번쩍 안아들고 구소운과 냉추렴을 쳐다보며 빙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소운아, 추렴아, 질투하지 말아라. 억울하면 너희들도 임신하든지. 그럼 이렇게 안아주마."
자신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서 히죽거린 백산이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뒤에 있던 소운이 볼멘소리를 하며 백산의 뒤를 따랐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하늘은 고사하고 터럭도 안 보여주면서 씨이…."
소운의 황당한 말에 고개를 흔들던 나머지 일행이 백산을 따라가는 광견조의 뒤를 쫓으며 어둠과 함께 조용히 사라져갔다.
잠시 후 그들이 백산을 따라서 도착한 곳은 천태봉 근처에 있는 금선동(金仙洞)이라는 동굴 속이었다.
이십 명이 넘는 인원이 들어왔는데도 상당한 공간이 남을 정도로 금선동의 내부는 널찍했다.
입구에 환상미로진을 설치하고 안쪽에 자리 잡은 일행은 긴장이 풀어졌는지 곧장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황보세가의 기습으로부터 용지에서의 혈투까지 거의 한숨도 자지 못하고 하루 종일 싸웠던 일행은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을 터였다.
비록 웃고 떠들며 아무 일 아니라는 것처럼 하고 있었지만 평소에 말이 많던 이들이 조용히 입을 닫고 있었던 것을 보면 그들의 상태를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모두 깊게 잠이 들었는지 고른 숨소리만 들려왔다.
그런 일행의 모습을 바라보던 백산은 아득한 회상 속에 잠겼다. 이곳도 어릴 적 아버지와의 추억이 어린 장소이다.
'산아, 이곳은 말이다, 참선을 하던 스님이 불타가 되지 못하고 신선이 되어버린 곳이라 해서 금선동이라 부르는 곳이다.
우습지 않느냐? 스님이 신선이 되어버린 동굴이라니.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면 샘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을 금천(金泉)이라 부른다.
먹을 것만 있으면 몇 년이고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곳이다. 우리 여기서 네 엄마의 극락왕생이나 빌자꾸나.'
아버지와 같이 와 보았던 곳이라 쉽게 찾을 수 있었고 이곳에 있으면 누구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동굴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내부에는 수십 개가 연결되어있어 숨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곳이 이곳이다.
"이곳에 얼마나 머물 거죠?"
조천영도 자지 않고 있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며 백산을 쳐다보았다. 백산이 하고자하는 일이 무엇인지 그녀도 알고 있다.
사냥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사냥을 하려하고 있다. 그래서 따르고 있는 자들을 제거하고 이곳으로 비밀리에 이동했을 것이다.
"끝날 때까지 불편하겠지만 조금만 참아요, 누님."
슬며시 미소 띤 얼굴로 조천영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긴 백산은 그녀의 몸을 자신 쪽으로 끌어안으며 어깨를 토닥거렸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아무것도 바란 것이 없었는데…."
"나쁜 놈들이에요."
소운도 자지 않고 있었는지 백산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피곤할 텐데 잠 좀 자지?"
"우리가 뭐 한 게 있나요. 그냥 자리만 지켰는걸."
다들 자지 않고 있었나 보다. 그녀들이라고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조천영이야 백산이 걱정되어서 잠을 못 이루고,
소운과 냉추렴은 자기들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에 대해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리와, 추렴이도."
백산이 냉추렴마저도 자신 앞으로 끌어당기며 그녀들의 얼굴을 차례로 쳐다보며 나직이 속삭였다.
"저번에 언니도 마차에서 이야기했지만, 천영누님, 소운, 추렴 그리고 광풍대 녀석들까지 나에게는 전부가 다 가족이야.
내가 내 가족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의무고, 그러니 너무 맘 쓰지 말라고 알았어? 그리고 자신들의 야망을 위해서 힘없는 사람을 이용하려는 놈들은 용서할 수 없어."
백산의 눈빛이 깊어지고 있었다.
'우리를 사냥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대가를 치러야한다. 지금까지는 너희들이 우리를 사냥했지만 지금부터는 내가 사냥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한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 살기 위한 전쟁이 아닌 죽이기 위한 전쟁이었다.
"그만하고 자세요, 이쁜 공주님들."
* * *
쿠르릉! 쾅!
구화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십왕봉(十王峰)에 걸쳐있던 검은 먹구름이 아흔 아홉 개나 된다는 각각의 봉우리로 퍼져나가며 천둥 번개를 이용하여 비를 만들어 아래로 쏟아내린다.
사리사욕을 위해 서로 죽고 죽이는 인간들의 작태에 대한 하늘의 노여움인가 가늘던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더니 이내 연약한 대지를 찢어발기고 있다.
백산 일행이 은신해있는 금선동 안.
중앙에 모닥불이 사방을 향해서 열기를 토해내며 서늘한 공기를 훈훈하게 데우고 있는 가운데 백산이 광견조 일행에게 무엇인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석두, 너는 이곳에서 남쪽을 돌고 와라. 지형지물을 완벽하게 숙지하고 살우 너는 서쪽, 모사 너는 동쪽,
그리고… 앞으로 별도의 말이 있을 때까지 지형지물만 완전하게 익히고 적들의 위치만 파악한다."
"우리는 밥만 축내란 소리인가?"
"그럼 굶으쇼?"
"헉!"
독안랑 서문천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나왔다. 자신들도 같이 끼워달라고 하는 소리였는데 육포를 그만 먹으라고 하고 있다.
"자네…."
"한 사람씩 따라나서든지 좋을 대로 하쇼."
이건 완전히 배짱이다. 상황은 분명히 도와달라고 부탁을 해야 할 입장임에 분명한데도 할 테면 하고 싫으면 관두라는 식이었다.
자신들을 좀 데리고 가달라고 부탁을 해야 그나마 육포라도 얻어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알았네, 그럼 갔다오지 뭐."
* * *
백산 일행이 있는 천태봉에서 북쪽으로 서있는 연꽃모양의 봉우리 하나, 연화봉(蓮華峰)을 일컫는 말이다.
그곳의 중턱에 주변의 암석군과 소나무 숲으로 둘러진 연화불지(蓮花佛地)라 불리는 천여 평 정도의 분지가 있다.
가끔씩 번쩍이는 새하얀 번갯불 사이로 십여 개의 검은 천막들이 별 모양을 형성한 채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묵묵히 서있다.
그 별의 중앙에 있는 다른 곳보다 조금 커 보이는 천막 속에서 커다란 외침소리가 흘러나왔다.
"전혀 흔적이 없단 말이냐?"
다비천검 정철이 부하인 금선검(金扇劒) 최대지(崔大地)와 정전도(靜戰刀) 주운기(周雲氣)로부터 보고를 받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내질렀다.
구소운 일행을 따르던 척후가 살해된 채 발견되었고, 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다.
시간상으로 볼 때 그들이 구화산을 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럼 이 산 어딘가에 은신하고 있다는 소리다. 일이 복잡하게 엉켜버렸다.
그가 보았을 때도 자신이 노리고 있는 일행의 무공은 엄청났다. 개개인이 상대해서 제압할 수 있는 그런 자들이 아니었다.
오직 그들의 이동경로를 파악하여 매복에 의한 암습밖에 방법이 없었는데 흔적을 지우고 사라졌다 함은 무슨 뜻인가.
이미 자신들이 이렇게 나오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제는 오히려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변해버렸다는 뜻이다.
더구나 이처럼 비까지 오는 상황에서 그들이 암습을 하고자 마음먹는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또한 광천뢰의 공격에 대비해서 오 장 간격으로 설치했던 천막도 함부로 옮기지 못할 상황이다.
이 비가 언제 그칠지도 모르는데 한곳으로 모아두었다가 천마맹의 혈마군처럼 한꺼번에 몰살을 당할 수도 있기에 그것 또한 바람직한 방법이 못된다.
'내가 사면초가(四面楚歌)에 직면했군.'
정철의 얼굴이 당혹스럽게 변했다. 자신의 실수였다.
그들도 머리가 있고 암습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어야 했는데 자신들의 입장만 생각하다 보니 그들의 행동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당연히 아무런 대책 없이 움직일 것이라 지레 짐작만 하고 있었다.
"암습에 대비해서 경계를 더욱더 강화해라. 그리고 날이 밝는 대로 수색조를 편성해서 구화산을 이 잡듯 뒤진다. 놈들의 흔적을 찾아야 한다."
초조한 듯 자신의 손바닥을 비비며 천막 안에서 연신 왔다갔다하고 있는 정철을 비릿한 미소와 함께 노려보는 인물들이 있었다.
연화불지에서 오십 장 정도 떨어진 소나무 숲, 백산과 독안랑이 소나무 가지 위에 앉아서 천무맹의 천막을 주시하고 있었다.
"여기 이 가지에는 되도록 물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앉으라고요. 그리 어정쩡하게 있지 말고."
백산이 독안랑의 앉은 자세를 교정해주며 계속해서 궁시렁거렸다.
일부러 흔적을 남기려 함인지 소나무에 물기가 젖지 않도록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저놈이 대장이겠구먼?"
"다비천검 정철이란 인물이네."
고개를 끄덕이며 백산과 독안랑이 조용히 사라졌다.
그 다음날도 백산과 독안랑은 계속 같은 자리에서 천막을 관찰하고 있었고, 백산이 아닌 다른 조원들이 와도 같은 자리에 앉아서 그곳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우기도 아닌데 웬 비가 저리도 쏟아지냐."
닷새가 지났건만 백산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고,
이틀 전과 어제 일단의 무리들이 이곳을 수색하고 간 후에는 더 이상 그 누구도 찾아오지 않자 소살우가 좀이 쑤신 듯 백산을 쳐다보았다.
어서 시작하지 않고 뭐하냐는 눈빛이었다.
비단 소살우 뿐만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두가 백산의 다음 행동에 대해서 궁금해하고 있었다.
바로 칠 것처럼 각 세력들의 위치 및 지형지물을 완벽하게 익히더니 천마맹의 추가 병력이 도착하고
천사맹까지 모두 자리를 잡은 것을 확인하고도 동굴 속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백산의 의도를 짐작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살우야, 사냥 할 때는 말이다 철칙이 있다. 털을 곤두세우고 있는 맹수에겐 함부로 덤비는 것이 아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려서 놈의 경계가 느슨해졌을 때 시작하는 거다. 그때가 바로 오늘밤이고… 이쪽으로 모여라."
백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모든 일행의 눈빛이 빛났다. 드디어 오늘밤부터 일을 시작하려는 것이 아닌가. 결코 남을 죽이는 것이 즐거워서나 좋아서가 아니었다.
자신들을 죽이려고 노리는 자들이기에 막으려는 것뿐이다. 단지 자신들을 뒤쫓지 못하게 하려는 것.
"일단 우리는 두 곳만 친다. 천마맹과 천무맹 두 곳을 치고 이쪽 용주석주경(龍柱石柱鏡) 쪽으로 흔적을 남긴다. 아주 미세하게 거리는 십장에 한 번씩이다. 알았냐?"
'이 친구 봐라? 삼천의 세 세력을 공사(共死) 시키겠다는 말인가?'
독안랑 서문천이 백산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렸다.
천무맹이나 천마맹 두 세력은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지만 천사맹 무리가 용주석주경 쪽에 은신하고 있는 것은 알지 못한다.
따라서 두 세력에게 천사맹의 세력을 자신들인 것처럼 꾸며서 세 곳을 동시에 없애버리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의도는 그럴싸하지만 과연 두 맹에서 그대로 따라주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자들이 아니던가 결코 그리 녹녹한 자들이 아니다.
"일단은 한 천막 안에서 절반 정도만 가장 잔인하게 잠에서 깨어난 옆 사람이 기절할 만큼 잔인하게 처리해라. 자, 출발하자."
백산이 광견조 일행에게 무엇인가를 나누어주며 새하얀 미소를 지었다. 만상투인루 지하에서 보여주었던 미소.
이제는 저 미소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모든 것을 박멸할 때만 나타나는 살소, 천살설의 살기가 실체화 되어 나타나는 살소였다.
일행이 두 패로 나뉘어 조용히 동굴을 빠져나갔다.
* * *
십왕봉.
구화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의 이름이다.
그곳의 중턱에 죽해(竹海)라 불리는 대나무 숲이 푸른 융단을 깔아놓은 것처럼 펼쳐져있는 곳, 천마맹의 천막 십여 개가 세워져있는 지역이다.
"사월아, 내 말 이해하느냐."
"사부님, 냉추렴은 우리 천마맹의 사람입니다. 우리 사람을 죽여서 까지 강호를 가지고 싶습니까?"
벌써 많은 토론을 벌였는지 암사월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맹주의 명령도 아니고 사부가 직접 와서 냉추렴이 있는 일행의 전원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다지 내키지 않음이다. 차라리 천무맹과 싸우라면 얼마든지 하겠는데 부맹주의 제자가 있는 일행의 제거가 새로운 임무라니.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진세개를 시켜서 그들을 공격했을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었다. 그런데 사부가 직접 와서 하는 말을 들어보니 맹의 수뇌부들은 진정으로 냉추렴을 제거하려 하고 있었다.
비록 석숭과 남궁세가가 연결되는 것을 핑계로 삼고 있지만 부맹주를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서라는 것은 자신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뻔한 수였다.
하지만 맹의 수뇌부들은 자신들이 노리는 일행을 너무 무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천마맹이란 단체의 힘을 너무 과신하고 있다는 것이 더 옳은 말이리라.
그들이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보고를 했음에도, 남궁세가와 만금돈노 석숭이 연결될 것만 걱정하고 있다.
모든 일행이 도강을 펼칠 수 있고 어검술까지 구사하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진세개를 단 일초에 죽였던 그자. 비록 진세개가 자신보다 무공이 조금 약하기는 하지만 마치 파라 잡듯 간단하게 처리하는 그자의 모습은 충격이었다.
"사부님, 그자들은…."
"내말 듣거라. 어차피 전쟁은 시작되었다.
이제는 인륜(人倫)이니 도의(道義)니 하는 것은 마음속 깊이 묻어야한다. 살아 남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천마맹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두고 한 말이다.
전쟁에 진다면 어차피 목숨을 잃게 될 것이고 이긴다 하더라도 협조하지 않으면 배신자로 낙인찍혀 제거 당할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고 무조건 살아남아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지시를 수행해야한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알겠습니다. 사부님."
더 이상 사부를 설득할 수 없다고 느꼈는지 암사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맹의 최고수인 사부에게 당신이 질 수도 있다는 말을 할 수가 없는 일이다. 오십 년간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던 구마들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들은 너무 강합니다. 전쟁에 상관없이 우리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그들이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서 몸을 숨겼습니다.'
검강 도강의 고수들이 암습하고자 한다면 자신들의 병력으로 막을 수 있을는지가 의문이었다.
부하들에게 암습에 대비해서 최대한의 경계근무를 세웠지만 그들의 나타나지를 않았다.
'그냥 구화산을 빠져나갔기를….'
그의 바람이었다. 냉추렴을 제거하는 임무도 마음에 내키지 않았음이고 또한 그들을 제거할 자신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우려하고 있는 일은 이미 벌어지고 있었다.
"이봐! 장쾌, 나 소피 좀 보고 올게."
천마맹의 진지 가장 외각, 경계를 서고 있던 인물 중 한 명이 바지춤을 부여잡고 한쪽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거 오줌이나 나오겠어? 이 빗속에 물건도 다 쪼그려 들었겠구먼. 빨리 다녀와."
'암습 같은 것도 없구먼 사람을 이렇게 쥐잡듯 몰고 있으니… 이제는 좀 편해지려나.'
암습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거의 모든 대원들이 벌써 닷새동안 잠을 자질 못하고 연일 죽해 부분을 순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 이상 암습의 징후가 없었는지 그나마 오늘밤부터는 경계인원을 반으로 줄이고 근무시간도 한 시진으로 줄었다.
"니미럴! 왜 이리 춥냐. 저네들은 비 한방울 안 맞고 천막에 처박혀 있으면서 우리만 조진다니까."
어느 조직이던지 지시만 내리는 수뇌라는 인간들이 있고,
그들이 아무리 신경을 써 준다 하더라도 부림을 당하는 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불만이 생기기 마련인지 볼일을 보기 위해 움직이는 인물의 입에서 불평불만이 쏟아져나왔다.
"그러니까 출세를 해야하는 거다."
"우리가 어느 세월에 출세…? 헉!"
자신의 동료가 하는 말이라 생각하고 무심결에 대답을 하던 황의 장한이 나지막한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쏟아지는 빗속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싱긋 웃는 얼굴하나.
"누, 누구…."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목이 반대편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이 자식은 왜 안 오는 거야, 오줌 싸러가서 죽었나?"
아무리 기다려도 동료가 돌아오지 않자 장쾌라 불리던 인물이 어슬렁거리며 동료가 갔던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루릉! 번쩍!
새하얀 번갯불이 사방을 비추자 저쪽 구석에 등을 돌리고 서있는 동료의 모습이 언뜻 시야에 들어왔다.
그런데 움직임이 약간 이상한 듯했고 지금껏 걸치고 있던 도롱이도 보이지 않은 것 같았다.
천막 쪽에서 자신을 끌어당기는 듯한 느낌이 자꾸 들었으나 동료와 함께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서 등을 툭 쳤다.
"어이, 빨리 가자고. 교대시간 다 되었어."
우두둑!
장쾌가 본 마지막 모습은 검은 암흑 속에 유난히 하얗게 보이는 이빨이었다.
잠시 후 도롱이를 걸친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며 자신의 위치로 돌아왔고
미약한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듯했으나 쏟아지는 빗소리에 묻혀서 거의 구분할 수가 없었다.
얼추 반 시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 천막으로부터 두 사람씩 조용히 사라지는 인물들이 있었다.
다시 한번 번쩍이는 번갯불 사이로 천막주위에 경계인원이 모두 사라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으나,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고 천막 아래로 흘러나온 피만 빗물을 따라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 * *
"으-악! 으웩! 우욱!"
천막 안의 상황이 발견된 것은 다음날 아침이었다.
온몸이 피에 절어있는 나머지 대원들이 비명을 지르고 토악질을 해대며 밖으로 뛰어나온 것이다.
"뭐라고 팔 호 천막에 있던 이십 명이 당했다고?"
혈마 소지악과 암사월이 있던 천막에서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팔 호 천막에 도착한 소지악과 암사월은 천막 안에 벌어진 참상에 경악하고 말았다.
죽어있는 자들 전부가 목이 잘려있었다.
이미 몸에서 피가 다 빠져나가버린 퍼런 몸뚱이들과 부릅뜬 눈을 하고있는 머리가 따로 분리된 채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런 죽일 놈들."
부하들의 죽음에 대해서 분노한 것이 아니었다. 죽이는 수법에 치가 떨렸던 것이다.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었다. 먼저 수면향을 천막 안에 뿌리고 거의 잠들어있는 상태에서 부하들을 한 명씩 깨웠다.
그리고 비몽사몽간에 있는 그들의 목을 잘라서 잠을 자고 있는 나머지 동료들의 품에 안겨주었던 것이다.
아무리 악인이라 할 지라도 이렇게 하지는 않는다. 소 돼지를 잡을 때도 이런 방법을 쓰지 않는다.
하물며 인간에게, 그것도 죽어있는 시체에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천무맹과 천마맹의 사이에서 살아남으려 했던 그들에 대해 약간의 동점심도 있었는데 그것마저 완전하게 사라져버렸다.
"주변을 샅샅이 뒤져라! 흔적을 찾으란 말이다."
분노한 암사월의 고함소리가 터져나오고 비마군들이 주변을 수색하기 위해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군주님."
무려 두 시진 이상이나 주변을 샅샅이 수색했으나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다. 쏟아지는 비가 모든 것을 말끔히 지워버린 것이다.
"특급 경계령을 내려라."
천마맹의 진지에서 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동료들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한 대원들이 분노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 다시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곳, 천마맹의 진영과 봉우리를 사이에 두고 있는 천무맹 진영에서도 분노의 목소리가 구화산에 울려퍼졌다.
"도대체 어디로 숨었단 말인가, 반드시 찾고 만다 반드시."
천무맹의 진지, 다비천검 정철이 분노한 표정으로 구화산을 노려보고 있었다.
부하 이십 명의 잔인한 살해. 목과 팔다리를 잘라내는 만행을 저지르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지난 이틀간 재차 구화산을 수색하다가 또다시 이십 명의 부하가 실종되어버렸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하고 날이 밝아왔다.
"으악!"
"무슨 일이냐?"
정철이 그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부하 한 명이 해쓱하게 변한 채 손을 들어 가리키고 있는 곳,
실종되었던 부하들이 갈가리 찢겨진 채 바위 위에 마치 빨래를 널어놓은 것처럼 널려있었던 것이다.
"으읍! 우욱!"
비명소리를 듣고 뛰어나온 부하들이 토하는 소리였다.
팔 다리 할 것 없이 조각조각 분리되어 이곳 저곳에 널려있는 시체들에서 빗물과 함께 피가 빠져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놈들!"
미칠 것 같은 분노가 온몸을 지배해 왔다. 싸워보지도 못하고 부하들만 도륙 당하고 말았다.
예상한대로 놈들은 너무 강했다. 그들이 암습하고자 마음을 먹으니 자신들은 흔적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당해버린 것이다.
"경계를 강화해라. 쥐새끼 한 마리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라."
밤새도록 정철은 한숨도 자지 못하고 밖의 상황을 예리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몇 번의 순찰을 돌았으나 적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답답했다. 쏟아지는 빗줄기 때문에 흔적이 전혀 남지 않는다. 자신으로서도 방법이 없었다.
부하들이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또다시 삼일 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평소라면 삼일정도 밤샘이야 아무것도 아니지만 지금처럼 팽팽한 긴장 속에서는 아무리 무인이라 하더라도 견디기가 힘들다.
"으악! 또 죽었다. 또 죽었어."
이십여 명의 부하들이 고함을 지르며 자신들의 천막에서 튀어나오고 있었다. 또 절반의 부하들이 잔인하게 살해되어있었던 것이다.
"뭐야, 새끼야 너! 왜 사람을 치는 거야?"
튀어나오던 인물들이 서로 부딪쳤는지 사소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거친 말이 오갔다.
"뭐라고? 네놈이 하극상을 벌이는 거냐, 지금?"
"하극상 좋아하네. 어차피 다 죽을 텐데 상관은 무슨 상관이야, 새끼야!"
"이놈이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두 사람이 언쟁이 붙었는지 급기야는 서로의 검을 뽑아들고 달려들었다.
"멈춰라! 무슨 짓이냐?"
정철의 내공이 실린 외침에 두 사람이 자신의 검을 집어넣고는 있으나 서로를 바라보며 눈길에 적의가 가득했다.
정철의 얼굴에 우려의 표정이 서렸다. 좀 쉴만하면 분타원들이 잔인하게 살해되고 아무리 경계를 강화해도 놈들을 잡을 수가 없다.
"분타주님 수하들이 더 이상 견디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 상태로 더 방치하면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최대지의 보고가 아니더라도 정철 자신이 부하들의 상태는 더 잘 알고 있다.
현 상황에서 도피하고 싶을 것이다. 눈을 뜨고 있어도 죽고, 잠을 자고 있어도 죽는 상황이 속출하고 있다.
공포에 견디다 못한 부하들이 도망가기 시작했으나 그들마저도 천막 근처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안휘분타 분타원들의 얼굴이 점점 공포로 질려가기 시작했다.
죽음이 주는 공포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사소한 것을 가지고도 서로 칼부림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무림인이라 한두 번의 살인은 경험을 해 보았을 터이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죽음이라는 생각 없이 비무를 하다가 실수로 사람이 죽는 경우와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말이다. 이곳은 전쟁터이다.
단 한 번도 전쟁이란 것을 겪어보지 못하고 집단으로 이렇게 죽어가는 것도 보지 못한 이들이 아닌가.
거의 모든 부하들이 공포에 절어있었고, 잠을 자지 못한 눈은 붉게 핏발이 서있었다.
식사를 준비할 필요도 없었다. 먹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은 언제나 정철만 쫓고 있었다.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상관이 가만히 있고 도망을 치자고 해도 그럴 수가 없다. 나가면 바로 죽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분타주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비가 어느 정도 그쳤는지 금선검 최대지의 보고가 생각에 잠겨있던 정철을 깨웠다.
"어디냐?"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드디어 꼬리를 잡은 것이다. 조금만 더 있었으면 부하들 때문이라도 이곳을 떠나야 했었는데 흔적이 발견되었다 하고 있다.
"천태봉 쪽입니다."
다비천검 정철이 도착한 곳,
평평한 평지에 십여 개의 발자국들이 희미하게 찍혀 있었다. 비가 많이 왔을 때는 물에 잠겨있다 비가 멈추며 물기가 빠지자 드러난 모양이었다.
그러나 발자국들을 본 정철이 얼굴을 찌푸렸다. 너무나 인위적인 냄새가 풍기는 것이었다.
그곳을 제외한 어느 곳에서도 다른 발자국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검강 도강을 사용하는 고수들이 아닌가. 아무리 비가 오는 상황이라지만 이 정도 발자국을 남긴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상해… 뭔가 있다.'
이번에는 혼자서 사방을 살피기 시작했다. 조금씩 범위를 넓혀 가기를 한 시진 정도.
'엇! 저것은….'
정철의 쳐다보는 곳, 소나무 숲의 중간쯤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가 있는 곳이었다.
그동안 비에 의해서 완전하게 젖어있어야 할 가지 하나가 다른 가지보다 물기가 적었다.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찾을 수 없는 미세한 차이였지만 정철은 발견해 냈다.
'이쪽은 천문봉(天門峰) 방향?'
정철이 천천히 천문봉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의 눈에 미세한 흔적이 보이기 시작했다. 거의 십 여장 간격으로, 정철 정도의 고수가 아니라면 발견하기 힘든 희미한 흔적이었다.
"대지는 오늘 밤 천문봉 쪽으로 가서 감시하고, 운기 너는 천태봉 쪽이다."
"네!"
거의 열 닷새 이상을 내리던 봄비가 대지를 식혔는지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나뭇가지들을 흔들고 밤하늘의 별들이 더욱 선명하게 그 자태를 자랑하는 밤이다.
천문봉을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하는 용주석주경(龍柱石柱鏡)이란 바위가 있는 곳에 금선검 최대지가 이십 여명의 부하들과 같이 은신하고 있었다.
그가 받은 명령은 놈들의 존재 여부였다. 즉 이곳에서 출발하여 다시 돌아오는 것까지 확인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디서 들려오는지 고즈넉한 부엉이 울음소리만이 울려퍼지는 고요한 숲 속, 절이 많기로 유명한 구화산에 그 흔한 목탁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벌써 두시진 째 매복을 하고 있었으나 놈들의 움직임은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분타주가 무엇인가 잘못 판단했다는 생각에 철수하려는 순간 그의 시야에 은밀하게 움직이는 검은 인물들이 잡혔다.
비가 오는 상황이었다면 눈에 띄지 않았을 터였지만 지금은 별빛이 가득한 밤이었기에 시야가 어느 정도 확보된 그의 눈에는 확연하게 드러나 보였다.
십여 명의 인물들이 무엇인가 상의하는 것 같더니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이었다. 흔적이 발견된다 하더라도 추적자들에게 혼란을 주기 위함이 목적인 것 같았다.
거의 십여 장 정도에서 한 번씩 발을 딛고 날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저것이었다. 십여 장마다 한번씩 흔적이 남았던 이유였다. 자신들을 공격했던 놈들이 분명했다.
이제는 저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지금 떠난 자들의 본거지가 이곳이라면 다시 돌아올 것이고 돌아오지 않으면 천태봉 어딘가에 숨어있을 것이다.
적들이 가고 있다는 것을 분타주에게 알릴 수도 없는 상황이다. 혹시라도 자신들이 발각되기라도 하면 만사 도로 아미타불이 될 것이 아니겠는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는지 주변이 서서히 밝아 오고 있었다.
'역시 이곳은 속임수였나? 천태봉이 그들의 근거지였구먼.'
고도의 속임수였다. 일부러 많은 흔적을 남기고 그쪽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게 하고는 다시 그쪽으로 가는, 인간의 허를 찌르는 절묘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실수를 했다. 자신들이 두 곳을 전부 감시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헉!'
막 자리를 이탈해서 움직이려던 금선검 최대지가 재빨리 몸을 숙이며 기척을 숨겼다.
털옷을 입은 인물 한 명이 은밀하게 그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쪽 길로 오지 말라고 했는데 너무 늦었으니 어쩔 수 없지… 아무도 없구먼 뭐."
바로 뒤쪽에 있는 최대지 쪽으로 등을 돌린 채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이 곳은 위험해서 다니지 말라고 했던 모양이었다.
잠시 심호흡을 하던 털옷의 인물이 다시 은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삼십여 장 간격을 두고 최대지가 따르고 있는데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윽고 목적지에 다다랐는지 다시 한번 사방을 살피더니 거대한 바위가 서있는 곳으로 몸을 숨긴 것처럼 사라졌다.
'잠시만, 잠시만 더 기다려라, 대지야. 저놈의 속임수일 수도 있음이야.'
흥분되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놈이 사라진 통로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일 다경이 지나고 이 다경이 지나도 기척이 없자 최대지가 서서히 바위 쪽으로 움직여갔다.
'아!'
놈이 순식간에 사라진 이유를 알았다는 듯, 최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하나의 바위처럼 보이던 그곳에 조그마한 통로가 있었던 것이다. 바로 앞에서 확인하지 않으면 전혀 발견할 수 없는 은밀한 곳에 만들어진 통로였다.
자신이 은신해있던 곳이 놈들의 근거지 바로 앞이었다.
조심스럽게 통로를 따라서 전진하던 최대지의 눈에 절벽으로 막힌 분지가 보이고 그 사이로 움직이고 있는 인형들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이곳에 있었구나 이놈들….'
드디어 자신들을 우롱하고 부하들을 해친 놈들을 찾았다. 이런 곳에 숨어있었기에 온 구화산을 뒤지고도 찾지를 못했던 것이다.
분지를 뒤로하고 몸을 날리는 최대지의 몸에서 질식할 듯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적의 위치를 찾았다는 흥분도 잠시 진지로 돌아온 최대지의 앞에는 또 다른 사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하 십 명의 독살이 그것이었다. 무슨 독에 당했는지도 모른 채 식수를 마신 인물들이 거의 한 시진 정도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 숨졌다 한다.
정철의 표정이 완전히 굳어있었다. 부하들이 쓰러진 순간부터 핏물로 녹아내릴 때까지의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던 것이다.
부하들이 눈앞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자신의 무능력에 더욱 화가 났고 부하들을 이렇게 만든 자들에게 대한 분노가 쏟아져나왔다.
온몸을 잠식하고 있는 것은 분노와 살기였다.
그곳에 있던 안휘분타의 모든 대원들의 눈에서도 살기 흘러나오고 있었다. 눈앞에 있다면 바로 찢어 죽일 기세였다.
동료를 잔인하게 살해한 것에 대한 원한과 자신도 그렇게 죽을 수 있다는 공포가 온 몸을 지배하여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
정철이 최대지를 쳐다보았고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천문봉 방향을 노려보고 이를 갈아댔다.
"준비 시켜라. 오늘밤 친다. 그동안의 빚을 한꺼번에 갚는다."
'피를 마시고 말리라. 목을 따서 피로 목욕을 하리라.'
정철의 몸에서 무서운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모든 것을 태울 듯한 전율스런 기운이었다.
다비천검 정철의 몸에서 나온 살기보다 더 무섭게 분노하는 곳이 있었으니 천마맹 진지의 무면마룡 암사월이었다.
아무런 표정이 나타나지 않는다 해서 무면마룡이라 불리던 그가 분노로 인해 붉게 달아 오른 얼굴로 노려보는 곳은 천문봉 쪽이었다.
오십 명, 독살을 당한 부하들의 숫자였다. 아침의 시작과 함께 오십 명의 부하들이 독에 중독 되어 핏물로 녹아 사라졌던 것이다.
* * *
"그렇게 잔인하게 할 필요가 있었나?"
천태봉의 금선동 내부. 독안랑 서문천이 그동안 백산이 행했던 잔인한 행동에 질렸는지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거의 웃음으로 일관하던 일상생활과는 달리 한번 살심을 먹자 그가 보여주는 행위는 독하다고 욕을 먹고 있는 자신이 보기에도 섬뜩했다.
사람을 죽인다는 것에 대한 개념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가장 무서운 점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살기였다.
약간의 미소마저 감돌고 있는 것 같은 얼굴로
적의 목을 자르는데도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그의 행동은 과연 인간의 뜨거운 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인가 하는 의심마저 생기게 하였다.
"사람이 분노하게 되면 아무생각 없어지게 되죠, 저들이 걸어온 싸움이고."
극도의 분노는 이성을 마비시킨다. 그들의 분노를 유발시켜 상대에 대한 판단 같은 것은 접어두고 무조건 싸우게 만들려하고 있었다.
'그들은 건들지 말아야 할 친구를 건들이고 말았어….'
석숭의 중얼거림이었다. 만상투인루에서 백산이 보여주었던 것은 광기였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완전한 박멸(撲滅).
하지만 그때만 해도 백산의 행동은 자신이 죽인 자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 같은 것이 보였었다.
즉 자신의 잔인한 행동에 자책의 표정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살인의 횟수가 거듭될수록 백산의 행동에서 그러한 면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파멸안의 기운이 조금씩 커져가고 있는 것이었다.
침묵 속의 분노 그리고 내재된 살기, 외적으로는 어떠한 감정상태도 나타나지 않는, 웃는 모습마저도 공포가 느껴지는 그런 상태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들 중 구화산을 걸어서 내려갈 사람은 없을 것이다.
천사맹이 있는 천문봉은 그들 무림삼천의 무덤자리로 정해졌고 그렇게 될 것이다.
과거에 학살자라 불리던 파멸안의 실체를 보고 있는 것 같아 두려움이 앞섰다. 과연 어디까지 갈 것인가.
다음단계로 진행하게 되면 또 어떻게 변할 것인가. 모든 것이 어둠에 가려있고 아는 것이라고는 그가 학살자였다는 것과 신들을 파멸시켰다는 것 뿐….
그러나 석숭이나 독안랑은 백산의 잔인함만 탓하고 있지 자신들이 더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이 없었던들 백산이 무슨 수로 적의 존재를 알 수 있었으며 이곳에서 자신들을 공격하리라는 것을 알았겠는가.
뛰어난 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상황을 예측하고 백산은 그 상황을 이용할 뿐이었다.
"한숨들 자둬. 이따 밤에는 바쁠 테니까."
|
첫댓글 잘 보고갑니다
수고많습니다. 감사
고맙게 잘보고 있어요~~~
즐감
즐감인데 62가 중복댄네..........!
감사합니다.
감사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