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어서 본 ‘상윳따니까야(Saṃyutta Nikāya)’ 24강
오늘은 상윳따 니까야 제 3장 칼 품을 공부하기 전에 여러 분들이 궁금하게 여기시는 존재의 세계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제 2부 존재의 세계
존재의 세계란 마음을 가진 생명이 사는 세계를 말합니다. 마음을 가진 생명을 존재, 또는 유정(有情)이라고 하거나 중생이라고 합니다. 알 수 없는 무한한 공간을 가진 우주에서 인간이 사는 지구는 인간이 사는 유일한 세계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 우주에는 인간만이 유일하게 살아있는 생명도 아닙니다. 우리는 보이는 세계만 보아서 그렇지 사실 보이지 않는 세계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더 거대한 세계입니다. 우주는 아무리 가도 그 끝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우주는 무한하며 아울러 살아있는 생명도 무한정으로 많습니다.
이러한 존재의 세계에서 사는 생명은 죽은 뒤에 다른 존재의 세계에서도 태어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은 깨달음을 얻어 윤회가 끝나는 존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윤회하는 이런 생명들은 자신의 도덕적이거나 비도덕적인 업과 과보에 따라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윤회합니다. 윤회는 연기의 회전이며 업의 상속이 원인과 결과로 흘러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생명이 윤회하는 존재의 세계는 전부 31개가 있습니다. 이를 크게 나누면 사악도와 인간과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로 분류합니다. 그 중에 낮은 단계의 정신세계를 악업의 보계라고 해서 사악도입니다. 사악도는 4개가 있는데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세계입니다.
가장 낮은 단계의 지옥의 형성조건은 잔인하고 살생을 한 과보를 받아서 태어납니다. 생성방식은 화생이며 수명이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자기 과보만큼 이곳에서 짧거나 길게 삽니다. 다음에 축생의 형성조건은 어리석고 못나다는 뜻의 우치(愚痴) 때문에 생긴 한 과보를 받아서 태어납니다. 생성방식은 태생, 난생, 습생입니다. 축생도 수명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다음에 아귀의 형성조건은 인색하고 집착을 한 과보를 받아서 태어납니다. 생성방식은 역시 화생입니다. 수명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다음은 아수라의 형성조건은 성냄의 과보를 받아서 태어납니다. 생성조건은 화생입니다. 수명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가장 낮은 단계에 있는 세계를 지옥이라고 하는데 빨리어로 ‘니라야(niraya)’라고 합니다. 니라야(Niraya)는 나(Na)와 아야(aya)의 합성어로 된 단어입니다. ‘니라야(niraya)’는 행복이 없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지옥은 불행만 있고 행복 자체를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세계입니다. 이처럼 지옥은 자기가 지은 악업의 과보를 속죄하는 비참한 상태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태어난 존재들이 영원히 이곳에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악업의 과보에 따라 수명이 다하면 다시 자신의 선업과 불선업의 과보에 따라 다시 다른 지옥에 태어날 수도 있고 새로 행복한 세계에 태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지옥은 여덟 가지로 나누는데 등활지옥, 흑승지옥, 중합지옥, 규환지옥, 대규환지옥, 초열지옥, 대초열지옥, 무간지옥입니다.
띠랏차나(tiracchāna)는 축생을 말합니다. 축생계는 니라야(niraya)에는 들어가는데 지옥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행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축생을 뜻하는 띠랏차나(tiracchāna)는 건넌다는 뜻의 띠로(tiro)와 간다는 뜻의 앗차나(acchāna)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건너감을 말하는데 과거의 악업을 건너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축생에서 잘하면 인간으로 갈 수 있고 잘 못하면 지옥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축생은 제한된 행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축생으로 태어난 존재들을 악업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축생도 악업의 과보가 끝나면 다시 인간으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특히 개나 고양이로 태어나서 인간의 보호를 받으면 이 생명은 축생으로 태어났지만 과거에 선업을 쌓아서 어떤 사람보다 더 편안한 생활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동물이 될 수도 있고 동물이 인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부처님도 본생경에 보면 동물로도 태어나고 인간으로도 태어나셨는데 지옥에 태어난 것은 나오지 않습니다. 누구나 수다원이 되면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로는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이나 욕계나 범천에 태어납니다.
다음 아귀는 불교에서 축생이나 동물보다 위의 세계에 있습니다. 동물은 공덕을 바로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축생은 우리가 전하는 공덕을 바로 받지 못합니다. 우리가 공덕을 회향하면 축생에게는 가지 않지만 유일하게 아귀는 받을 수 있습니다.
사리뿟따 존자의 후원자인 아란제리라고 하는 부자 신도가 있었습니다. 병에 걸려 돌아가시는 상황에서 사리뿟따 존자께서 법문을 하셨는데 그때 지옥이 좋은지 축생이 좋은지 물었습니다. 축생이 좋다고 했습니다. 사리뿟따 존자는 축생보다 아귀가 좋은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물론 인간으로 태어나서 깨달음을 얻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지옥은 완전 어둠이고 행복이 없고 축생은 계속 업을 만들어 갑니다. 호랑이는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동물을 잡아먹으면서 살아야만 합니다. 그 업을 지었기 때문에 그 업이 나타날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축생이 좋다고 하는 것은 그나마 선한 행위를 할 수가 있다고 합니다. 선업인지는 몰라도 선한 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 요즘 강아지 문제가 많습니다. 특히 유기 견들이 독해졌습니다. 보호를 받다가 버려지면서 원래의 야생본성이 들어난다는 연구가 나왔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사람들을 공격하고 다른 동물을 공격해서 죽이는 행위를 합니다. 단체로 와서 공격하고 도망가기도 합니다. 강아지 잡는 사람들이 와서 잡으려고 해도 잘 잡지 못합니다. 눈치가 빨라서 단체 행동을 하고 며칠씩 나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들을 사랑해주고 보호해주면 유기 견들의 감정도 변화한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아귀 같은 경우는 필요하면 바로 공덕을 받을 수 있습니다. 돌아가신 누군가가 아귀로 태어나 그분이 필요로 하고 내가 돌아가신 분을 위해 공덕회향을 하면 선처로 갈 수 있습니다.
아귀를 뻬따(Peta)라고 하는데 원래 죽은 존재를 말합니다. 누가 죽으면 그 사람을 뻬따(Peta)라고 말합니다. 경전에서는 영가(靈駕)를 뻬따(Peta)따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귀신으로 오해합니다. 우리가 영가(靈駕)라고 하는 순간에 귀신 생각을 합니다. 한국에 납골당하면 사람들이 귀신을 떠올립니다. 마하위하라가 아산에 들어설 때 마을 사람들이 마을로 귀신들이 모인다고 주장했습니다. 절에서 제사를 지내면 마을에 귀신들이 몰려온다, 그러면 마을의 기운이 나빠진다고 절 건립을 반대했던 것입니다. 뻬따(Peta)는 부처님이 만든 단어가 아니고 그 당시 인도에서 있었던 단어들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처럼 뻬따(Peta)는 세상을 떠나서 죽은 존재인데 그들은 실체가 없는 영혼이나 귀신은 아닙니다. 이런 존재를 귀신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우리가 아는 귀신이라는 존재는 없습니다. 다만 이런 존재를 귀신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귀는 매우 기형적인 몸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세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숲이나 더러운 환경에서 삽니다.
아귀는 살생, 도둑질 등 5계 중에서 뭔가를 특징적으로 하는 사람이 아귀가 될 확률이 많다고 합니다. 우리가 인색한 사람을 아귀와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살아서도 먹지 못하고 죽어서는 아귀가 된다고 말합니다. 꿋다까 니까야의 뻬따왓투(Petavatthu)에 아귀 이야기가 있습니다. 경전에 그들은 항상 숲이나 캄캄한 곳, 어두운 곳, 더럽고, 환경이 좋지 않은 곳에서 삽니다. 불자는 집에서 의식할 때나 기도할 때 깨끗하게 목욕하고 제일 깨끗한 모습으로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돌아가신 분들께 공덕을 회향할 수 있습니다. 아귀는 깨끗한 것을 좋아해서 본인들이 깨끗해지고 싶지만 자기가 지은 업의 과보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괴롭습니다. 파리와 같은 벌레들은 더러운 것을 좋아합니다. 파리가 그런 냄새를 좋아해서 더러운 곳에 들어갑니다. 사실 그런 더러운 냄새를 아귀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벗어나고 싶은데 안 되니 괴롭다고 합니다. 모든 생명은 업의 과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행동하며 어쩔 수 없이 삽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존재는 불쌍한 존재입니다. 이것이 윤회의 괴로움입니다.
뻬따왓뚜(Petavatthu)는 소를 잡는 도살 꾼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죽어서 아귀가 됐는데 강아지 떼들, 새들이 와서 머리를 계속 공격합니다. 도살의 과보로 괴로움을 못 벗어납니다. 스님들이 선정에 들면 원래 별별 생명들이 다 보인다고 합니다. 스님들은 우리가 볼 수 없는 존재들을 보니 사람들이 궁금해서 물어봅니다. 전생을 보는 스님께 물어보니 그 아귀는 과거 생에 도살 꾼이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밀린다 왕문경인 밀린다 빵하(Milinda-paṅha)에 배고프고 목마른 아귀들이 나옵니다. 아귀는 네 가지 부류의 아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먹는 대로 토하는 반타시카스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항상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른 쿠삐빠시노가 있습니다. 세 번째는 갈증에 의해 소멸되는 니자마탄히카입니다. 네 번째는 사람들의 보시에 의해서 먹고사는 빠라다뚜빠지비노입니다. 네 부류의 아귀 중에 오직 유일하게 빠라다뚜빠지비노만 인간의 보시공덕을 받아 괴로움의 세계에서 벗어나 행복한 세계로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자손이 올리는 공덕이 전해질 수 없습니다. 이처럼 아귀는 토하고 먹고, 토하고 먹고를 반복해서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먹습니다. 그래서 아귀들은 괴롭습니다.
다음에 아수라(Asura)가 있는데 아수라(Asura)의 뜻은 빛이 없는 자. 즐거움이 없는 자를 뜻합니다. 아수라라는 말은 항상 제석천의 천신들과 싸우는 것으로 경에 나옵니다. 아수라들은 거처가 없습니다. 쫓겨난 천신들로 그들만의 공간이 정해지지 않은 천신들입니다. 아수라(Asura)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아귀 아수라가 있고 선한 아수라가 있습니다. 선한 아수라들은 천신에 가깝습니다. 아수라는 제석천 천신들과 전쟁하는 존재입니다. 다른 천신들은 전쟁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수라는 깡패처럼 싸우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래 천상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천상이 내 것이라고 싸웁니다.
다음이 인간계입니다. 인간의 형성조건은 오계를 지킨 과보를 받아서 태어납니다. 생성방식은 태생입니다. 수명은 정해지지 않고 자기 업의 과보로 결정됩니다. 사악도나 인간이나 욕계천상이나 모두 욕망을 가지고 사는 세계라서 인간은 욕계에 속합니다. 하지만 오직 인간만 행복과 불행을 함께 경험할 수 있어서 유일하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특히 붓다가 되기를 서원을 세운 보살은 인간계를 좋아합니다. 중생을 구제하고 깨달음의 조건을 완성하는데 인간계가 가장 좋은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역대의 모든 부처님께서는 인간으로 태어나셔서 붓다가 되셨습니다.
인간계는 고통과 기쁨이 모두 혼합한 세계입니다. 인간을 우리가 생각하는 지금의 모습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를 들면 과거불은 인간 수명이 만년, 이 만년 팔만 년까지 산 시대에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 인간과 지금 우리와는 많은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수명이 10살이 될 때도 있는데 10살이 되면 고양이 같은 인간이 됩니다. 고양이는 1년에 3~4번 정도 새끼를 낳는다고 합니다. 수명에 따라 인간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과 많이 다를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중요한 것은 업과 인연입니다. 아쇼까(Ashoka) 대왕이 죽어서 바로 뱀이 되었습니다. 마힌다Mahinda) 장로의 어머니가 남편인 아쇼까 왕이 사람을 많이 죽였기 때문에 죽어서 어디로 갔는지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그런데 장로가 일주일간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신 일주일 후에 “도솔천에 태어났습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뱀이 되었을 때는 어머니의 물음에 답을 하지 않고 있다가 도솔천에 태어났을 때 도솔천에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공덕 회향으로 인해서 도솔천에 태어났다고 그 과보가 다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아직 수다원이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 과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중간에 엄마 배속에서 아기가 갑자기 없어지기도 합니다. 아기가 잠시 머물러 있다가 더 좋은 곳에 태어날 수 도 있고 안 좋은 곳에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엄마가 몸에 아무 이상이 없는데 유산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누군가 일찍 죽는다는 자체가 안타깝습니다. 30대에 사고로 죽으면 모두들 슬퍼합니다. 사실 안타까워할 일만은 아닙니다. 좋은 세계에 태어날 수 있는데 문제는 우리가 모르니까 슬퍼합니다. 더 좋은 곳에 가기 위해서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중간에 바뀌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 뱃속에 인연이 들어 왔다가 갔습니다. 그래서 죽었다고 해서 버렸는데 나중에 보니 살아있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화생으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다른 식(識)이 들어온 것입니다. 사람은 화생으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도 화생으로 태어난다고 하는 경이 있습니다.
꾸마라 깟사빠 스님이 연꽃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죽었다고 해서 누가 버린 아이였습니다. 이 아기를 왕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이것은 화생이지 다른 존재가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아주 드문 이야기지만 원래 있었던 존재가 나가고 새로 들어온 존재라는 것입니다.
12연기는 인류사에 가장 빛나는 가르침의 시작입니다. 12연기로 의심에서 해방되지 않고서는 다음 단계의 지혜로 나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12연기를 부정하면 안 됩니다. 12연기는 원인과 결과를 최상의 방법으로 설명하신 것이지만 예외가 있을 수 있습니다. 12연기의 순서는 기존의 12가지 순서로 갈 수 있지만 중간에 화생 문제가 나와 있습니다. 부처님은 다른 사람한테서 온 것이 아니고 보살로 다섯 가지를 보셨다고 합니다. 보살과 중생이 다른 것은 보살은 본인이 선택해서 이 세상에 오고, 중생은 선택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도솔천에서 태어날 곳을 선택하는데 어머니, 카스트, 나라, 시기, 민족 등 다섯 가지를 선택해서 왔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본인이 선택해서 태어나셨고, 우리는 업에 따라서 태어난 것이다. 12연기에서 업의 생성으로 태에 들어가 생을 받는 과정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보살일 때를 보디삿따(Bodhisatta)라고 합니다. 보디삿따(Bodhisatta)라는 말은 깨달음으로 가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보살은 붓다라는 깨달음을 얻고자 서원을 세운 구도자입니다. 경전에서 내가 보디삿따(Bodhisatta)일 때 뭐를 했고 뭐를 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가끔 부처님이 보디삿따(Bodhisatta) 이야기와 미륵불 이야기를 하십니다. 보디삿따(Bodhisatta)의 보디(Bodhi)는 깨달음이고 삿따(satta)는 중생입니다. 삿따(satta)를 중생으로 보고 모든 존재가 중생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모든 중생이라고 한다면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까지 중생입니다. 보디삿따(Bodhisatta)에서 삿다(satta)는 중생보다는 존재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태어남의 선택권이 있고 바라밀을 목적으로 합니다. 선택권이 있어서 지옥에 태어나지 않습니다. 수다원, 사다함도 선택권이 있습니다. 그래서 4악도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깨달음의 증명을 받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도과를 성취하면 무조건 그 흐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데와닷따(Devadatta)는 원래 악한 사람이 아니었고 일반인들에게 인기도 많았습니다. 평생을 시체를 덮은 천을 걸치고, 채식만 하고, 초대받아서 공양하지 않고 탁발로만 살았습니다. 그러나 중도가 없었고 극단주의 적인 성향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극단적인 사람들만 모여 있으면 수업하기가 힘들고 소통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선한 극단은 괜찮지만 데와닷따(Devadatta)는 악한 극단주의자였습니다.
데와닷따(Devadatta)는 나도 붓다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담마(Dhamma)와 승가에는 귀의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10바라밀을 행해서 붓다가 되었다는 것을 믿지 않고, 싯다르타도 붓다가 됐는데 나도 붓다가 될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을 했습니다.
불교방송에서 드라마 붓다를 방영했는데 거기서 데와닷따(Devadatta)가 죽어가면서 ‘붓당 사라낭 갓차미(Buddhaṃ saraṇaṃ gacchāmi)’라고 했습니다. 이는 ‘부처님을 의지해서 나아가겠습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은 잘 표현한 것입니다. 부처님이 붓다라는 것을 데와닷따(Devadatta)가 너무 낮게 봤습니다. 과거 부처님들도 바라밀을 행해서 붓다가 됐다는 것을 믿지 않고 있었습니다. 데와닷따(Devadatta) 입장에서는 동생이 붓다가 되었는데 나도 붓다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결국 붓다는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마지막 순간에 깨우친 것입니다. 그래서 데와닷따(Devadatta)는 나중에 벽지불이 된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부처님께 의지하겠다는 서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변 승가들에게 석가모니만 붓다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너도 붓다가 될 수 있고 모두 다 붓다가 될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는 승가를 갈라지게 하는 행위를 한 것입니다. 아라한이 된다고 하는 것보다 붓다가 된다고 하면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가질 수 있고 재미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말입니다. 데와닷따(Devadatta)는 아자따삿뚜(Ajātasattu) 왕에게 너는 아버지를 죽여서 왕이 되고 나는 부처님을 죽여서 붓다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선정은 노력하면 누구나 얻었는데 붓다도 그런 과정으로 될 수 있다고 데와닷따(Devadatta)는 믿었었던 것입니다.
다음은 6개의 욕계 천상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욕계천상의 형성조건은 믿음, 보시, 지혜의 과보를 받아서 태어납니다. 생성방식은 화생입니다. 욕계천상의 수명은 사천왕천이 500 천상 년입니다. 그리고 위로 올라갈수록 곱으로 늘어나서 여섯 번째 천상인 타화자재천은 16,000 천상 년입니다. 인간의 시간과 욕계천상의 시간은 다릅니다.
첫 번째, 사천왕천인데 욕계 천상에서 가장 낮은 천상입니다. 여기는 천계의 수호신들이 부하들과 함께 머무는 곳입니다. 이곳은 네 명의 왕이 다스리는 천상입니다.
두 번째, 삼십삼천에는 삼십삼 명의 천신들이 거처하는 천상입니다. 이들 33명의 천신들은 사회봉사 활동을 많이 한 마가{Magha)와 그의 친구들입니다. 이들은 이장의 질투를 받아서 관아에 고발을 당하고 코끼리로 밟아 죽이라고 명했는데 코끼리가 그들 가까이 가서 죽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애명상을 하면서 지역에서 길도 만들고, 다리도 만들고, 우물도 파고, 마을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열심히 봉사활동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고따마 부처님께서 보살 때 33천에 태어났습니다. 삼십삼천이란 이름은 마가와 그의 친구들 32명이 죽어서 선업공덕의 과보로 태어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전에 이 세계가 없었다는 것이 아니고 이 이름으로 유명해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천신들에게 3개월 동안 아비담마(abhidhamma)를 가르치신 곳이 삼십삼천입니다. 이때 도솔천에 있는 천신들이 부처님의 법문을 듣기 위해 이곳을 방문하셨습니다.
세 번째, 야마천에 있는 천신들은 고통을 제거하는 존재입니다. 사천왕천, 삼십삼천, 야마천 등으로 올라갈수록 행복이 많아지고 내려올수록 괴로움이 더 많아 집니다. 부처님께 천신들이 와서 물어보는 것이 수준이나 내용이 다 다릅니다. 이 존재의 세계를 공부하는 이유는 경전을 볼 때 천신들이 하는 질문을 통해 어떤 세계에서 어떤 괴로움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무신이 와서 물어보는 것과 색계의 신들이 물어보는 것과 욕계의 천신들이 물어보는 것이 다 다릅니다.
네 번째, 도솔천은 뚜시따(Tusita)입니다. 뚜시따(Tusita)는 만족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기 위한 모든 조건을 완전히 갖추고 있습니다. 수다원이 여기에 많이 있다고 합니다. 모든 보살이 여기에 계시다가 인간 세계에 태어나서 깨달음을 얻습니다. 미래에 오실 미륵불도 이 세계에 거주하면서 인간으로 태어나 붓다가 될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야부인도 도솔천에 태어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삼십삼천에서 아비담마(abhidhamma)를 설법하셨는데 도솔천의 천신들이 삼십삼천으로 내려와서 법문을 들었습니다. 위에서 밑으로는 내려올 수 있지만 아래에서 위로는 못 올라갑니다. 삼십삼천에서 아비담마(abhidhamma)를 설법하셨을 때 마야부인도 내려오셔서 설법을 들으셨습니다. 아비담마(abhidhamma)는 일반적인 경전에 나오는 이야기와 달라서 삼십삼천의 의식 수준에 맞춰서 설법을 한 것입니다. 도솔천은 경쟁이 없기 때문에 즐거움보다는 항상 만족하고 편안합니다.
(질문 1) 부처님이 삼십삼천에 가셨을 때 몸이 직접 갔는지, 아니면 신통으로 힘으로 나투어서 가셨는지요?
(답변 1) 과학적으로 보면 오온은 위에 올라가서 살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은 이띠빠다냐나라고 해서 여러 몸을 만들 수 있는 신통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디가니까야에 부처님의 여덟 가지 냐나(ñāṇa)가 나옵니다. 냐나(ñāṇa)는 지혜, 앎, 아는 마음입니다. 8가지 냐나(ñāṇa) 중의 하나가 이띠빠다 냐나로 여러 몸을 만들 수 있는 신통입니다. 쭐라빤타까(Cūlapanthaka)도 1000개의 몸을 만드는 신통이 아라한이 되면서 생겼습니다. 승가에서 전부 공양 초대를 받아서 가는데 쭐라빤타까(Cūlapanthaka) 스님만 공양을 초대하지 않아서 못 갔습니다. 부처님이 바보인 쭐라빤타카(Cūlapanthaka)에게 하얀 천을 주면서 '하얀 천이다, 하얀 천이다'라고 암송하라고 했습니다. 쭐라빤따까(Cūlapanthaka)는 그것을 암송하면서 무상으로 알고 깨쳤습니다. 부처님께서 왜 쭐라빤타까(Cūlapanthaka)를 초대하지 않았느냐 하고 물으니 그 스님은 초대하지 않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 쭐라빤타까(Cūlapanthaka)의 형이 그 절의 주지 스님이었습니다. 동생이 수행을 안 하니 관심을 갖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쭐라빤타까(Cūlapanthaka)를 데리고 오라고 해서 그를 데리러 갔는데 천명의 쭐라빤타까(Cūlapanthaka)가 있었습니다. 천명의 스님들이 계시는데 다 쭐라빤타까(Cūlapanthaka)입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하고 말씀 드리니 그때 부처님께서 쭐라빤타까(Cūlapanthaka)가 아라한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동네 바보가 아라한이 되었다고 하면 누가 믿겠는가, 그래서 그는 천 명의 분신을 만든 것입니다.
이때 수행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안 한 사람이 어떻게 신통까지 얻을 수 있냐고 물어봅니다. 쭐라빤타까(Cūlapanthaka)는 멀지 않은 과거 생에 선정을 닦아서 그 힘으로 아라한이 되면서 신통한 힘도 나타난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명상수행을 하는 것이 후에 훌륭한 성인을 만날 때 힘으로 나타납니다. 부처님께서 나는 갈 테니 쭐라빤타까(Cūlapanthaka)에게 법문을 하라고 시켰습니다. 이처럼 쭐라빤타까(Cūlapanthaka)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깨치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기 전에 쭐라빤타까(Cūlapanthaka)는 게송 하나도 암송 하지 못했습니다. 쭐라빤타까(Cūlapanthaka)는 전생에 선정수행만 하고 교학은 하지 않아서 생긴 과보로 게송을 한 구절도 외우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선정의 힘이 있어서 아라한이 된 것에 그치지 않고 신통한 힘을 얻는 과보를 받은 것입니다.
다섯 번째, 화락천은 죽어서 자기가 보는 대상을 변화시키면서 즐거움의 대상으로 가질 수가 있습니다. 자기가 보는 대상들을 항상 긍정적인 대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절대 부정적인 대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부정적인 대상에서도 즐거움의 대상으로 볼 수 있는 곳이 화락천입니다. 화락천은 항상 즐거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섯 번째, 타화자재천은 남의 즐거움을 자신들의 것으로 사용할 수 있는 천신들의 세계입니다.
이러한 6개의 욕계 천신들은 몸이 인간보다 더 미묘하고 세련되어 있으며 평범한 눈으로는 인식될 수 없습니다. 이 천상의 천신들은 체질, 거주지, 음식들이 인간보다 월등히 낫지만 지혜에 있어서는 인간보다 뛰어나지 못합니다. 그들은 화생으로 태어나는데 15세와 16세 정도의 청년과 처녀로 나타나서 삽니다. 이들 욕계천상은 일시적인 즐거움의 장소인데 여기에 사는 천신들은 덧없는 감각적 욕망의 즐거움을 느끼면서 삽니다.
불교에서 천신들은 공덕을 지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천신이나 영가에게 합장하지 않습니다. 양손을 가슴 앞에서 한 손으로 한 손을 감쌉니다. 공덕은 나보다 높지만 지혜는 나보다 낮을 수 있습니다. 여섯 개의 욕계천상은 하나로 묶인 것과 같습니다. 그 다음의 색계부터는 다릅니다. 욕계 천신들의 세계는 그렇게 부러워할 세계가 아닙니다. 깨달음을 놓칠 수 있는 세계입니다. 만약에 미륵불이 깨달음을 얻었는데 불법을 설하지 못하는 곳에 있으면 천신들은 오온의 즐거움과 육근을 즐기면서 살기 때문에 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곳은 눈먼 사람처럼 삽니다. 불교는 항상 도솔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천신들의 세계 중에서도 도솔천에 태어나면 좋다고 합니다. 불자들이 많고 불교와 인연 있는 분들이 많이 있고 불법을 공부한 사람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타화자재천도 괴로움이 없으니 지혜가 계발되지 않습니다. 죽음을 상징적인 존재로 표현하는 마라(Māra)는 타화자재천 출신인데 모든 욕계에 다 왔다 갔다 하는 존재로 알려져 있습니다. 타화자재천의 왕은 사천왕이나, 인간계에도 왔다 갔다 합니다. 그래서 욕계에는 마라(Māra)가 없는 데가 없고 도솔천만 안 간다고 합니다. 경전에 보면 삼십삼천, 사천왕천, 아수라천, 인간, 지옥까지 관여합니다. 타화자재천을 존재로서 이야기할 때는 마라(Māra)라고 하지만 불교에서 마라(Māra)고 할 때는 오온으로 나옵니다. 부처님이 이것을 존재로 설명한 적도 있고 그냥 비유적으로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라(Māra)를 죽음으로 표상화한 것입니다. 이때의 표상화가 바로 의인화입니다. 당시 인도사회는 단지 죽음을 마치 죽음을 관장하는 존재가 있는 것으로 아는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대중들에게 설법을 하실 때 그냥 죽음이라는 마라(Māra)를 마라 빠삐만(Māra Pāpimant)이라고 의인화해서 설명하셨습니다. 빠삐만(Pāpimant)은 죽음을 관장하는 악마와 같은 존재로 표현했습니다.
누가띠(nuggati)와 수가띠(sugati)가 있습니다. 수가띠(sugati)는 우리가 공덕을 지으면 이 과보로 행복한 세계인 수가띠(sugati)에 태어납니다. 그러나 악행을 지으면 어두운 곳인 누가띠(nuggati)에 태어납니다. 수가띠(sugati)의 수(su)는 좋은, 착한, 행복한, 운명이라는 뜻입니다. 가띠(gati)는 가다, 진행, 윤회 등의 뜻입니다. 그래서 좋은 곳으로 가다, 행복한 곳으로 가다는 뜻이라서 선취(善趣)라고 합니다. 여기에 비해 누가띠(nuggati)는 나쁜 운명이라서 악취(惡趣)라고 합니다. 그래서 누가띠(nuggati)는 사악도를 말합니다. 수가띠(sugati)는 인간세계 위에 있는 천상입니다. 인간은 누가띠(nuggati)에도 수가띠(sugati)에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사천왕천은 신들이 동서남북 사방으로 있습니다. 천신이라는 존재는 한 천신을 중심으로 수많은 천신들이 모여 있습니다. 벌처럼 한 여왕벌에 의해서 천 마리 벌이 있듯이 한 천신을 중심으로 수많은 신들이 몰려 있습니다. 왕따를 당하는 천신들도 있다고 합니다. 이는 빛과 공덕의 차이로 그렇게 된다고 합니다. 알베삭까는 빛과 위신력이 없는 천신들을 말합니다. 마헤삭까는 빛과 위신력이 많은 천신들을 말합니다.
다음은 색계 천상입니다. 이곳에서부터는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선정의 세계에서는 욕망이 사라졌기 때문에 남녀의 몸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색계천상은 크게 네 개가 있고 각 선정의 세계마다 더 세분화된 세계가 있습니다. 색계천상의 형성조건은 초선을 닦을 존재는 초선정의 과보를 받아 초선정의 세계에 태어납니다. 이선정을 닦은 존재는 이선정의 세계에 태어납니다. 삼선정을 닦은 존재는 삼선정의 세계에 태어납니다. 사선정을 닦은 존재는 사선정의 세계에 태어납니다. 생성방식은 화생입니다. 수명은 욕계천상과 다릅니다. 초선정의 범중천은 1/3무량겁입니다. 초선정의 범보천은 1/2무량겁이고, 초선정의 대범천은 1무량겁입니다. 이런 식으로 아나함의 세계인 정거천의 색구경천의 수명은 16,000대겁입니다. 처음에 무량겁으로 시작해서 이선부터 대겁으로 바뀝니다. 이러한 색계와 무색계를 범천(梵天)이라고 합니다. 힌두교들은 이 범천을 자기들의 세계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색계는 선정의 세계입니다. 초선부터 4선까지 있는데 첫 번째 초선천은 모든 감정의 동요가 사라진 세계입니다. 초선천은 다시 세 개의 세계로 나뉘는데 첫 번째는 수행자들의 세계인 범중천입니다. 두 번째 범보천은 대신들의 세계입니다. 세 번째 대범천은 대범천들의 세계입니다. 이 세계 중에서 제일 높은 곳입니다. 이 세계에 거주하는 천신들은 그들의 정신적 발전의 타고난 공덕의 과보로 다른 천신들보다 행복하며 아름답고 수명이 훨씬 깁니다.
제 2선의 이선천은 기쁨이 일어나면서 마음이 집중이 된 세계입니다. 이선천의 세계도 세 개가 있습니다. 첫 번째 선광천은 빛이 조금 있는 세계입니다. 두 번째 무량광천은 무량한 빛을 가지고 있는 세계입니다. 세 번째 광음천은 빛을 발하는 범천들의 세계입니다.
언젠가 지구가 없어지면 지구에 사는 인간이 광음천에 간다고 아간냐 숫따(Aggañña sutta)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광음천 천신들이 말랑 말랑한 지구를 먹게 되면서 이 지구에 대한 집착이 생깁니다. 강아지가 쫓겨나면서 독성에 중독되듯이 광음천 천신들도 지구를 왔다 갔다 하면서 인간의 세계에 물듭니다. 하지만 천신들이 지구에 오기 싫어하는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의 세계에 물들면 자신들이 갖고 있던 빛들이 사라진다고 합니다. 안 좋은 것들을 보고 듣고 하면 선정의 힘이 약해집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선정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합니다. 집과 밖이 많이 차이가 나면 선정의 초선, 2선, 3선, 4선에 머물지 못합니다. 그래서 옛날에 수행자들은 숲밖에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항상 숲 속에 머물러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알아차림을 알려주시면서 선정에 대한 인식이 깨졌습니다. 그래서 안과 밖에서 똑 같이 알아차림을 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옛날에 선정의 느낌으로 부처님이 설법하셨던 사라나트 녹야원에서 있었습니다. 거기서 우리 일행이 앉아서 명상을 했습니다. 그때 허공에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최고의 선정 느낌을 느꼈습니다. 누가 와서 옆에서 뭐라고 할 때도 모르고 다음 날 아침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마치 전생에 거기에 있었던 느낌이 있었습니다. 다른 곳으로 성지순례 해야 하는데 거기서 선정상태에 계속 있고 싶은 마음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장소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이러한 선정을 집착하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근처 호텔에 머물면서 오후에 점심을 먹고 다시 그곳에 가서 명상한 기억이 납니다.
제 3선의 삼선천은 마음의 통일과 지혜가 일어납니다. 삼선천도 세 개의 세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 소정천은 미세한 영기(靈氣)를 띤 범천들의 세계입니다. 두 번째 무량정천은 무한한 영기(靈氣)를 띤 범천들의 세계입니다. 세 번째 변정천은 한결 같은 영기(靈氣)를 띤 범천들의 세계입니다.
제 4선의 사선천은 지혜도 헤아림도 모두 소멸하여 단지 청정한 마음만 있는 세계입니다. 사선천은 세 개의 세계가 있는데 광과천, 무상유정천, 정거천이 있습니다. 이 중에 정거천은 아나함의 도과를 얻은 존재만 갈 수 있는데 다시 다섯 개의 세계가 있습니다.
사선천이 첫 번째 광과천은 광대한 과보가 있는 범천들의 세계입니다. 두 번째 무상유정천, 또는 무운천은 마음 중에서 상(想)이 사라지고 없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활동이 멈춰진 상태입니다. 세 번째 정거천은 청정한 세계로 5개로 나눠집니다. 정거천의 첫 번째 무번천은 번뇌가 없는 세계입니다. 정거천은 오직 아나함이 태어나는 범천이고 거기서 아라한이 되어 윤회가 끝납니다. 수많은 아라한들이 무번천에 있습니다. 정거천의 두 번째 무열천은 마음이 고요한 세계입니다. 정거천의 세 번째 선현천은 오직 선한 것이 보이는 세계입니다. 정거천의 네 번째 선견천은 명확히 보이는 세계입니다. 정거천의 다섯 번째 색구경천은 가장 높이 보이는 세계입니다.
선정세계에서 위빠사나 지혜가 있는 세계가 딱 하나가 있는데 무상천(無想天)입니다. 무상천은 존재들이 인식이 없이 태어납니다. 그래서 인식과 지각이 사라진 무상천(無想天)이라고 합니다. 여기는 오로지 물질적인 흐름만이 존재할 뿐이다. 마음은 선정의 힘이 흐르는 동안 일시적으로 정지됩니다. 일반적으로는 마음과 물질이 분리될 수 없는데 때때로 명상의 힘에 의해서 마음으로 부터 물질을 분리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아라한이 멸진정을 얻을 때도 의식이 일시적으로 멈춥니다. 이런 상태를 우리는 거의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세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색계 사선천에 있는 정거천은 청정한 거주 지역으로 오직 아나함의 도과를 성취한 성자들만 사는 세계입니다. 아직 아라한이 되지 않아서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아 아나함은 불환과(不還果)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지 않는 존재를 말합니다. 아나함이 되어 정거천에 태어난 존재는 아주 오랜 세월을 보낸 뒤에 수명이 다하면 아라한이 되어 윤회가 끝나는 대장정의 막을 내립니다. 부처님께서는 다른 세계는 경험하셨지만 정거천은 가지 못하셨습니다. 그곳에 가면 아라한이 되어서 윤회가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윤회가 끝나면 인간으로 태어나서 붓다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스리랑카의 나라다 마하테라 스님이 쓰신 책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스리랑카에서 많이 알려진 스님으로 약 50년 전에 쓰신 책입니다.
(질문 2) 아라한이 멸진정을 들어가신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요? 선정하신 분들이 들어가나요?
(답변 2) 선정을 하지 않은 스님은 멸진정에 못 들어갑니다. 아라한들이 다 멸진정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멸진정은 8선정을 완성한 아나함과 아라한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비상비비상처를 경험해야 합니다. 사리불 존자, 목련존자도 멸진정에 들어 가셨는데 멸진정으로 제일 유명한 스님은 마하깟사빠 존자입니다. 일주일씩 멸진정에 들어 계시다가 일주일에 한 번씩 탁발하러 나가셨습니다. 그러나 멸진정은 상수멸진정이라고도 하는데 상(想) 수(受)가 소멸하고 행(行)만 남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식이 사라지고 느낌도 사라지고 오직 업인 행만 남아있기 때문에 업까지도 소멸한 열반과는 다릅니다. 멸진정은 오직 선정수행은 한 존재만 경험하는 정신세계입니다.
(질문 3) 우리가 살아서 선정을 경험하면 죽어서 경험한 세계에 태어나는가?
(답변 3) 예를 들어, 3선정을 경험하면 죽어서 반드시 3선정의 세계에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순간에 죽음의 마음인 쭈띠 찟따(cuti citta)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대부분 명상을 하는 수행자들이 어떤 수행 방법으로 든 초선, 이선 삼선, 사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절하면서, 염불하면서, 만트라(mantra)를 하면서도 얻을 수 있습니다. 만트라(mantra)는 주문, 경구, 진언을 암송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선정이 잠깐 될 수도 있고 오래 유지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에 선정에 들어가야 색계에 태어납니다. 초선, 2선, 3선, 4선에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아쇼카 왕도 죽어서 뱀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본인이 전쟁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죽인 죄책감 속에 있다가 죽었습니다. 나쁜 일을 한 것은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특히 죄책감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죽는 순간에는 좋은 일을 많이 해도 생각이 안 나고 나쁜 일 한 죄책감이 많이 생각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쭈띠 찌따(cuti citta)에 따라 달라집니다.
다음은 무색계 천상입니다. 무색계의 형성조건은 색계와 달리 선정 중에서 무형상의 선정을 닦은 과보로 태어납니다. 이는 수행을 하면서 몸이 사라지고 마음만 있는 상태의 수행을 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아는 마음만 있는 상태가 바로 무색계의 상태입니다. 사념처 중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지 않으면 이 단계의 정신상태를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무색계의 생성방식은 화생입니다. 이곳의 수명은 첫 번째 공무변처천은 20,000 대겁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 비상비비상처천은 84,000 대겁입니다. 이토록 상상을 초월하는 세월동안 살기 때문에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선 세계입니다. 무색계 역시 색계처럼 남녀의 성의 구별이 없습니다. 몸이 없고 마음만 있는 존재에 성은 무의미합니다. 무색계는 이미 몸이라는 감각기관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마음만 있는 정신세계입니다.
무색계는 네 개의 세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 공무변처는 무한한 공간의 세계입니다. 여기서는 끝없는 허공을 대상으로 봅니다. 두 번째 식무변처는 무한한 의식의 세계입니다. 여기서는 허공을 보는 마음을 대상으로 봅니다. 세 번째 무소유처는 무(無)의 세계입니다. 여기서는 첫 번째와 두 번째의 마음이 다 없다는 것을 대상으로 봅니다. 네 번째 비상비비상처는 지각도 지각 아님도 아닌 세계입니다. 이런 상태는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을 대상으로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는 마음이 아주 미세해서 여기에 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자가 아니고서는 이 상태에 이르기가 어렵습니다.
예를 들면 수행자가 몸과 마음을 알아차릴 때 어느 정도 집중이 되면 몸의 느낌과 호흡이 사라집니다. 이때 숨을 쉬지 않는 것이 아니고 호흡이 너무 미세해서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마지막 남은 것이 마음입니다. 이때 알아차릴 대상은 오직 마음밖에 없기 때문에 나중에 생긴 마음이 먼저 있는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립니다. 이것을 수행자들은 앎이라고 하거나 아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이때 나중에 생긴 마음이 먼저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마음을 알아차리려는 마음을 새로 내야 합니다. 이것이 매우 어려운 과정입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물질인 마음을 새로 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때는 알아차림이 처음에 수행을 시작할 때의 행위인 두는 알아차림이 아니고 있는 알아차림이 되어서 아주 미세한 마음의 상태가 됩니다. 있는 알아차림은 알아차리려는 강력한 의지가 없어도 지혜가 수반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생기는 알아차림을 말합니다. 이렇게 있는 알아차림을 하다가 아는 마음조차 사라지는 순간을 열반이라고 합니다. 열반에 들었다고 해서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은 항상 대상이 있어야 일어나는데 이때의 마음은 열반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서 수행자가 마음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필름이 끊어진 상태와 같습니다. 이것은 수행하는 세계에서 감추어진 내용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것이 어렵다고 표현합니다. 이런 이유로 사념처 수행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심념처(心念處)수행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 번째 무소유처의 세계에서 무(無)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무소유처는 허공을 대상으로 보는 마음이나 허공을 보는 마음을 대상으로 보는 마음이 사라져서 두 가지 마음이 없는 것을 대상으로 봅니다. 이런 상태는 뛰어난 선정이 집중력이 생겼을 때의 일이라서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이때는 대상과 보이는 것이 다 없습니다. 하지만 이때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대상으로 삼고 보는 것입니다. 마음은 죽기 전까지 어느 상태에서나 없을 수가 없습니다. 단지 집중력이 강해져서 미세한 마음을 느낄 수가 없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단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심념처 수행을 해야 이해하기 쉽습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선정의 알아차림으로 대상을 겨냥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무소유처의 세계 때문에 선정하는 사람들이 불교를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無)의 세계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아라한의 세계를 공(空)한 세계, 무(無)의 세계로 봅니다. 중국에서 공(空)을 무(無)로 변역 했습니다. 하지만 공(空)이라는 것은 무(無)가 아닙니다. 무(無)의 세계가 힌두교 쪽에서 보면 이것이 최고의 경지이고 열반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무(無)의 세계를 뛰어넘어서 공(空)의 세계가 있다. 그 공(空)의 세계는 깨)달음의 세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대승에서는 공성(空性)의 세계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원래의 공(空)은 실체가 없는 것이고 무상, 고, 무아를 다 합친 단어입니다.
무(無)는 한국 불교가 가지고 있는 맹점입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있는 것을 자꾸 없다고 합니다. 마음은 있지만 이것을 소유하는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순냐(suñña)라고 합니다. 순냐(suñña)는 빈, 텅 빈, 공허한, 비실체적인, 공(空)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비실체적이라는 말은 이것을 소유하거나 주도하는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결국 무아(無我)를 말하는 것입니다. 몸에 관해서 말할 때 몸이 있는 것을 유신(有身)이라고 합니다. 누구나 몸이 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신(有身)에 견(見)이 붙으면 유신견(有身見)이 되어서 나의 몸이라는 잘못된 견해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있는 몸을 아예 없는 것으로 시작하면 실재하는 진리와 만나기 어려운 허구에 빠집니다. 그래서 무(無)는 없는 것이 아니고 실체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유신견(有身見)처럼 유심견(有心見)도 똑같습니다. 몸과 엄연히 있는 것이고 마음도 엄연히 있는 것입니다. 단지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져서 나의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아트만(Atman)을 무아로 번역하면서 아(我)가 없다는 뜻에서 ‘나’가 없다고 합니다. 아트만(Atman)은 힌두교의 교리로 자기 자신, 자아(自我), 항상 하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있는 것은 엄연히 있는 것이며 단지 이것을 주도하는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경전에 의하면 무아(無我)는 나와 나의 것이 없다는 것이고 이 말을 더 정확히 해석하면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눈과 보이는 형상에서 눈도 없고 색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으로 즉, 자아(自我)가 없다는 것입니다. 무(無)를 실체가 없다는 뜻이 아닌 무아(無我)로 해석하다 보니까 ‘아(我)’가 없다는 해석이 나옵니다. 그래서 무(無)는 무아가 아닌 실체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다른 표현을 빌리면 주인공이나 주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경전에 보면 항상 부처님은 나와 나의 것 항상 두 개를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항상 나만 얘기합니다. 이것은 내 몸과 마음이는 유신견을 가지고 살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 비상비비상처는 지각도 지각이 아님도 아닌 세계입니다. 여기서 지각은 오온 중에서 상(想)을 의미합니다. 상(想)은 지각, 인식, 표상, 기억, 이미지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라다 마하테라 스님이 얘기하는 것은 부처님은 어떤 우주적인 이론의 설명도 시도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31개의 존재의 세계는 원인과 결과로 나온 것입니다. 부처님은 오직 몸과 마음만 얘기했을 뿐입니다. 몸과 마음이 일어나는 과정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직 한 인간의 괴로움을 해결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괴로움을 해결하려면 원인과 결과가 소멸하여 윤회가 끝나야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원인과 결과가 진행되는 일련의 과정에 31개의 존재의 세계가 있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지 처음부터 31개의 존재를 밝히기 위해서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비상비비상처 존재들은 마치 자기가 창조주인 신들처럼 생각합니다. 이곳에서 너무나 오래 사니까 천신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수행을 하다가 비상비비상처에 이르면 몸을 움직이지 않으므로 몸이 그냥 굳어버려서 나중에 오고 싶어도 못 옵니다. 뱀이 와서 집을 짓거나 벌레가 와서 집을 짓는다고 합니다. 그 상태에서 죽어서 비상비비상처의 세계로 갑니다.
비상비비상처 수행은 선정수행의 최고의 단계를 얻었지만 그냥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모든 활동이 멈췄다는 것입니다. 흉식호흡도 하지 않았습니다. 비상비비상처를 얻은 부처님의 마지막 선택은 그 선정을 멈추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고행을 해서 깨닫겠다고 한 것인데 더 이상 가면 내가 죽는다, 결국 인생이 마감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이때 몸이 몹시 약해졌고 더 이상은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몸에 벌레들이 집을 짓고 했습니다. 함께 고행하면 다섯 비구(五比丘)들이 와서 매일 닦아주고 몸을 씻어주고 했습니다. 다섯 비구가 몸을 보호해 줬다는 것은 씻어준 것입니다. 이런 고행이 1년이 될지 10년이 될지 누구도 모릅니다. 죽을 때까지 지켜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어날 때까지 몸이 굳어버려서 활동을 할 수 없습니다. 몸에 공기가 안 들어가니 상하지는 않지만 굳어서 활동을 못합니다. 이처럼 고행의 결과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그대로 죽어야 하는데 거기서 싯다르타가 벗어났고 다섯 비구는 그것을 보고 고타마는 변했다고 실망을 하고 모두 돌아섰습니다. 이때는 누구도 사성제와 8정도, 연기법을 몰랐을 때였습니다. 부처님도 비상비비상처가 최고의 경지라고 해서 수행을 하신 것입니다. 그때는 깨달음이 없었기 때문에 싯다르타도 이것이 최고의 경지라고 생각해서 시작한 것입니다. 다섯 비구도 같이 선정 수행을 해서 4선정까지 얻었었습니다. 이 분들이 마지막 끝까지 도와주겠다고 했으나 보살께서 고행을 멈추니 그만 돌아서서 싯다르타를 버리고 다는 곳으로 떠난 것입니다.
목련존자가 깨달음 과정을 부처님께 여쭈어 봅니다.
상윳따 니까야에서 부처님께서 깨달았을 때 어떠했는지 목련존자가 여쭈어 보는 것이 나옵니다. 그 때 하시는 말씀이 ‘나는 다섯 비구가 떠나고 홀로 있었다. 죽든지 살든지 결정을 해야 했다. 살이 모두 말라 살갗만 남아도, 살이 모두 말라 힘줄만 남아도, 살이 모두 말라 뼈만 남아도, 살과 피가 모두 말라 달아 없어질지라도 나는 반드시 이 수행을 성취하고 말 것이다. 붓다가 되기 전에는 이 가부좌를 절대로 풀지 않겠다. 나는 여기서 죽겠다는 각오로 임했다. 그러다 나의 과거 생을 지켜보는 과정에서 중도를 알게 되었다’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부처님께 정진을 어떻게 도모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여쭸습니다.
‘사람의 정진력으로 사람의 용맹으로 도달할 수 있는 곳에 도달하지 못하면 정진에서 일어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정진을 가졌으니까 결국 깨달았습니다. 깨달음은 목숨을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뭔가를 발견하기 위해서 목숨을 건 것입니다. 부처님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고 우리는 길이 제시되어 있으니 제시된 길을 따라가면 됩니다. 부처님의 이런 깨달음의 경험이 상윳따 니까야에 나옵니다. 모든 이야기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잘 정리해서 후대들에게 알려줘야 합니다. 우리가 매일 바라고 있는 부처님의 정법이 오래오래 머물기 위해서 잘 정리해야 합니다.
이상이 31개의 존재의 세계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존재의 세계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자기가 지은 업에 따라서 받는 과보로 이러한 세계에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31개의 존재의 세계는 살아있는 생명이 윤회하는 세계입니다. 부처님은 이러한 윤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사성제와 팔정도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