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영남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해감
설현민
새벽 물때다 사촌들과 바지락을 캐러간다
이모를 도와야 했다 엄마, 엄마, 나는 이모를
본 적 없는데요
가족이잖니 단숨에 알아차릴 거다
모래사장은 구덩이로 가득하다
저 안에서 움직이는 게 보이니 저기 너희 이모가
있잖아 움직이는 게 너무 많은걸요 네 이모처럼
움직이는 것은 하나 뿐이란다
등을 돌려 앉은 엄마는 쇠갈괭이로 발 밑을 푹푹
퍼 올린다
나는 양동이를 끌어안고 음푹한 바닥을 들여다본다
모래 속에는 모래가 들어 있다
어린 사촌들은 껍데기를 손에 쥐고 땅을 헤집는다
또 다른 껍데기를 주워 자랑한다
바지락을 얼마나 더 캐야 하나요
노인들의 배를 채우기에는 아직 모자라구나
이모는 왜 그렇게 깊이 파들어 가죠 깊은 곳엔
먹을 게 없잖아요
네가 그렇게 태어났지
모래를 툭툭 털고 너를 꺼냈단다
바지락이 쌓여간다
나는 그것을 씻어 다른 양동이에 옮겨 담는다
빈 껍질을 골라낸다
아이들은 조개껍데기를 묻어 성호를 긋고
너는 어쩌면 이렇게도 다 커버렸구나 이젠 무엇도
몰라보겠구나
검은 천으로 양동이를 덮는다
내 입안에서 서걱거리는 것이 들어있다
나는 이모가 엄마를 닮았다고 말했다
이모는 엄마보다 많이 늙어 있었다고
저기 모래를 뱉고 있는 것이 있다
나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다
[2021 영남일보 문학상] 詩 심사평 - "자신의 존재성 확인, 고백의 언어로 풀어내"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열세 분의 응모작 중 실험적인 작품이나 형식의 파격을 보이는 작품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대상을 관조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특성을 보여서 서정의 밀도와 품격을 유지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개별 작품에서 맞춤법에 어긋난 어구의 사용이 꽤 많이 눈에 띄었는데, 시도 한글 문장의 규범 안에서 창작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점은 조심해야 할 것이다.
세 분의 작품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고래가 그래'는 응모 작품 중 드물게 생태학적 사유를 동원하고 있어서 문제의식의 진지함이 주목을 받았다. 고래 내장에 축적된 폐기물로 생태계의 위기를 표현한 착상은 새로웠지만 그 주제가 시적인 언어로 유연하게 형상화되지는 못하였다. '우리 집은 기상청 지부'는 아버지의 삶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하면서 그사이에 연민의 정서를 적절히 병치하는 솜씨를 보였고, 감정을 절제하고 대상과의 거리를 조절하면서 삶의 내력을 표현한 점도 뛰어났다. 그러나 아버지의 '기후'의 의미가 모호해서 공감의 폭을 확장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리빙 포인트' 외 2편을 투고한 분의 작품 중에서는 '리빙 포인트'보다 '해감'에 더 눈길이 갔다. '리빙 포인트'가 일상적 삶의 무료함을 다양한 형상의 교차를 통해 새롭게 표현하기는 했지만 그 다양함이 시상의 집중을 방해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비해 '해감'은 어릴 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평범한 경험을 통해 자신의 존재성을 확인하는 과정을 고백의 언어로 자연스럽게 풀어가고 있어서 그의 시적 재능이 앞으로 더 발전하리라는 예감을 받았다. 이에 '해감'을 당선작으로 밀며 축하의 말을 전한다.
[2021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돌의 찬 손이 이마를 짚어주다
백향옥
부풀어 오르는 흙이 좋아 맨발로 숲을 걸었다
바닷물에 발을 씻다가 만난 돌은
손바닥에 꼭 맞는 매끄러운 초승달 모양
열병을 앓을 때 이마를 짚어주던 당신의 찬 손
분주하게 손을 닦던 앞치마에 묻어 온 불 냄새,
바람 냄새, 놀란 목소리
곁에 앉아 날뛰는 맥을 지그시 눌러 식혀주던
손길 같은
차거운 돌을 쥐고 있으면 들뜬 열이 내려가고
멋대로 넘어가는 페이지를 눌러두기에 좋았는데
어느 날 도서관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져
깨져버렸다
몸 깊은 곳에서 금이 가는 소리를 들었다
놓친 손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두 동강 난 돌을 잇대보았지만
깨진 돌은 하나가 될 수 없고
가슴에서 시작된 실금이 무섭게 자라났다
식었다 뜨거워지는 온도 차가
돌 안쪽에 금을 내고 있었던 걸 몰랐다
이제 그만 됐다고 따뜻해진 돌이 속삭였다
그날, 달빛 밝은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
깨진 돌을 가만히 놓아주었다
달에게 돌려주었다
[2021 농민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국수
박은숙
허리가 굽은 노인이
식당 구석진 자리에 앉아
국수 한그릇을 시킨다
네명의 자리에 세명을 비워두는 식사
아마도 매 끼니를 빈자리들과의
합석이었을 것 같다
잘 뭉쳐져야 여러 가닥으로 나뉠 수
있는 국수, 수백 번의 겹이
한 뭉치 속에 모이는 일, 뜨겁게 끓인 다음에
다시 찬물에 식혀야
질겨지는 음식, 그 부피를 많이 불리는 음식은
힘이 없다지만,
그래서 여럿이 먹어도 한가지 소리를 내는 국수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는 저 노인의 슬하는
이남 삼녀의 망종
꽃 핀 곳 없는 행색이지만
한때는 다복했었을것이다
잇몸으로 끊어도 잘 끊어지는 빗줄기 같은 국수,
똬리를 튼 국수를 쿡 찔러 풀어 헤친다
치아도 없는 노인이 먹는데
후루륵, 비 내리는 소리가 난다
비 오는 날 마루에서 들리던 엄마의 청승같이
뚝뚝 끊던 빗소리,
맑은 물에 헹군 국수발 같은 주름이
입안에 가득 고인 빗소리에
바람이 흩날리며 든다
[2021 머니투데이경제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모천
김철
청계천 골목 어디쯤
모천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양양의 남대천이 아닌
뜨끈한 국수를 파는 국수집 근처 어디라고
국수 발 같은 약도 적힌 메모를 들고 찾아간
미물도 명물로 만든다는 그 만물상
주물 틀에서 갓 나온 물고기 몇 마리 사왔지
수백 마리 수천 마리 붕어빵 구워낼 빵틀
파릇한 불꽃 위를 뒤집다 보면
세상의 모천을 찾아오는 물고기들
다 중불로 찍어낸 붕어빵 같지
한겨울 골목 경제지표가 되기도 하는
천원에 세 마리, 구수한 해류를 타고
이 골목 입구까지 헤엄쳐 왔을
따뜻한 물고기들
길목 어딘가에 차려 놓으면
오고 가는 발길
멈칫거리는 여울이 되는 것이지
파닥파닥 바삭바삭
물고기 뛰는 모천의 목전쯤 되는
영하의 파라솔 아래
엄마가 하루 종일 서 있던 그곳
[매일신문]
야간산행
여한솔 시인
공룡처럼 죽고 싶어
왜
뼈가 남고 자세가 남고
내가 연구되고 싶어
몸 안의 물이 마르고
풀도 세포도 가뭄인 형태로
내가 잠을 자거나 울고 있던 모습을
누군가 오래 바라볼 연구실
사람도 유령도 먼 미래도 아니고
실패한 유전처럼
석유의 원료가 된대
흩어진 눈빛만 가졌대
구멍 난 얼굴뼈에서
슬픔의 가설을 세워 준 사람
가장 유력한 슬픔은
불 꺼진 연구실에서 흘러나왔지
엎드린 마음이란
혼자를 깊이 묻는 일
오래 봐줄 것이 필요해
외계인이거나
우리거나
눈을 맞추지
뼈의 일들
원과 직선의 미로 속으로
연구원이 잠에 빠진다
이게 우리의 이야기
강이 비추는 어둠 속에서
신발 끈을 묶고
발밑을 살펴 걷는 동안의
여한솔: 1994년 대전 출생, 단국대 문예창작과 졸업
[심사평]
“신선한 목소리와 상상력 돋보여”
총 2천332편의 응모작 중 예심을 거친 10명의 작품이 올라왔다. 코로나19로 인한 환경 탓인지 예년보다 전체적으로 우울한 정서를 반영하는 시가 많았고, 무엇보다 '가족'을 다루는 시가 많았다. 산문시의 경향과 개별적 감수성에 편중된 시들이 많았던 예년에 비해 공동체적 감수성 속에서 개인의 영역을 시로 이끌어 내는 가편들을 보면서 다양한 결들의 시들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심사위원들은 '백자무늬 꽃무늬병', '야간산행', '제자' 등의 작품에 주목했다.
'백자무늬 꽃무늬병'은 농익은 솜씨에 전체적으로 시가 자연스럽고 안정되어 있었다. 당장 당선작으로 선택을 하여도 손색이 없을 만큼 매끈하고 반듯한 매력이 장점이었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느낌이 아쉬웠다.
'야간산행'은 신선한 상상력이 눈에 들어왔다. 언어를 익숙하게 다듬고 길들이는 과정보다 상투를 벗어난 새로운 발상과 시적 호기심을 끌고나가는 감각이 신선했다. 다만 응모해온 시들이 다소 직선적인 전개로 이루어진 점이 아쉬움으로 지적되었다.
'제자'는 담백한 화법과 리듬이 인상적이었다. 발상도 위트가 있고 매력이 가득한 시였다. 무엇보다 시들을 이끌어 가는 호흡이 독특해서 심사위원의 눈길을 오래 끌었다. 다만 동봉한 다른 작품들의 수준이 고르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당선작에 가까운 시와 다른 시들의 편차를 극복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논의 끝에 당선작으로 '야간산행'을 결정했다. 거칠고 투박한 면들이 곳곳에 있지만 이미지가 활달하고 선명했다. 신인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신선한 목소리와 상상력이 다른 시들을 제외시킨 결정적인 이유였다. 삶의 상투성으로부터 끝없이 새로운 시를 개척해가는 앞으로의 행보를 기대해보며 새로운 시인에게 축하를 전한다.
심사위원: 장옥관 시인, 김경주 시인.
예심: 김욱진 시인, 박미영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