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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론 62
요한계시록 16:8-11
넷째와 다섯째 대접
셋째 대접이 쏟아졌을 때 물을 차지한 천사 곧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참되고 의로우며 마땅한 것이라고 선포한다. 그리고 이제 넷째 천사와 다섯째 천사에 의해 대접이 쏟아진 장면을 본다. 대접이 쏟아지자 사람들의 반응은 하나님을 비방하며 회개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넷째 천사가 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또 회개하지 아니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더라”(8-9절). 넷째 나팔 재앙에서는 해가 빛을 잃고 삼분의 일이 어두워진 반면(8:12), 넷째 대접 재앙은 해가 오히려 뜨거워져서 사람들을 불로 태운다고 말씀한다. “해가 권세를 받아”라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넘겨받았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대접을 해에 쏟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해”가 무엇이며 “불로 사람을 태우니”라는 표현이 정말 자연 현상이 이렇게 일어나는 것을 말씀한 것일까? 그래서 지구의 기후를 잘 관리하기 위해 우리가 자연을 더럽히지 않고 최대한 친환경적인 것으로 이끌고 가야 하는 것인가? 사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본문을 자연 현상에 대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연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우리가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차원으로 말한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의 관심이 자연에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 있는가? 이미 살펴보았던 7장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13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계 7:13-17)
“흰옷 입은 자들”, 즉 교회요 성도는 해의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해”는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와 관련된 표현이다. 마태복음 13:43에 의하면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넷째 날에 창조하신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창 1:16)라고 하였다. 이때 “광명체”라는 ‘마오르’는 ‘빛을 담은 그릇, 빛이 비추어지는 장소’로 성막에서 ‘성소’를 지칭하는 것이었다(출 27:20-21). 때문에 히브리어에서 ‘해’라는 단어 ‘셰메쉬’가 있지만 이 단어를 쓰지 않고 ‘마오르’를 사용한 것은 첫째 날 창조하신 빛을 반사하는 존재로서 낮에 속한 존재를 보여주시기 위한 표현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이 있는데 긍휼의 그릇이 하늘 영광의 풍성함을 드러내기 위해 부르심을 입은 “우리”라고 하였다(롬 9:21-24).
“태우니”라는 말의 ‘카우마티조’는 ‘카우마’에서 유래한 단어인데 ‘열, 광채’라는 뜻으로 7:16에서는 ‘뜨거움’으로, 본문에서는 ‘태움’으로 번역하였다. 즉 광채를 내고 빛을 비추는 것을 의미한다. “불로”라는 말을 직역하면 ‘불 안에서’라는 말이다. 불 안에 있다는 것은 심판 가운데 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자면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라는 말씀은 단순히 자연 현상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들이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를 넘겨받아 광채를 내는 것을 말씀한다. 다시 말해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 해의 역할이다. 따라서 말씀이 된 자들이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면 인간의 죄성인 어두움이 드러난다.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상태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 3:17-21)
교회가 진리를 드러내면 이 땅은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있음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진리를 드러낸 그 결과를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라고 말씀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람들”이란 일반적인 차원에서 대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16:2)로 짐승에게 속한 자들이다. 짐승에게 속하여 짐승이 된 자들은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또 회개하지 아니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더라”라고 하였다. “비방하며”라는 말의 ‘블라스페메오’는 마태복음 9:3, 26:65에서 “신성 모독”이라고 번역하였다.
하나님은 본래 이름을 가질 필요가 없는 분이다. 이 땅의 존재에게만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이름”이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이름을 가진 분으로 오셨다는 뜻이고 구원의 이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따라서 “주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더라”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죽음으로 이루신 대속의 은혜를 베푸신 것을 거부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는 것이며 회개하지 않는 상태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회개할 수가 없는 상태에 있다. 죄의 권세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누군가 빼내 주지 않으면 회개란 있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회개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찾아오심을 의미한다. 짐승에게 속한 자는 십자가가 결코 구원의 은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그저 십자가를 모독할 뿐이다. 믿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다는 것은 율법적인 자기 행위로 열심히 구원을 이루려는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진리를 전해주면 진리를 진리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모든 인간은 마귀에게서 나서 마귀를 아버지로 여기고 따르는 존재이기에 그 속에서는 결코 진리가 나올 수 없다. 애굽은 열 재앙이 주어져도 완악할 뿐이었고, 이스라엘은 그 재앙을 경험하였을지라도 광야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을 원망함으로 그 완악함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진리의 말씀이신 하나님을 대적할 수밖에 없는 자로 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는 것이다. 결국 재앙을 통해 증명되는 것은 죄인은 스스로 회개할 줄 모르는 완악함 속에 있기에 거기서 불러내 주시는 십자가 은혜 안에 하나 되는 것이 회개이다.
“또 다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짐승의 왕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아픈 것과 종기로 말미암아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더라”(10-11절). 다섯째 천사가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어두워지고 사람들이 종기로 인하여 자기 혀를 깨물 정도로 아픔을 겪는다고 하였다. “짐승의 왕좌”란 곧 용의 권세요 보좌이다.
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 2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계 13:1-2)
이 재앙은 애굽에 내렸던 흑암의 재앙을 반영한 것이다(출 10:21-29). 출애굽의 상황으로 보자면 바로를 태양의 아들로 신격화하여 하늘의 권세를 가진 것으로 나타내는 왕의 보좌에 내려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땅에 모든 자는 자신이 하나님이 되었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짐승의 보좌에 앉은 존재이다. 문자적인 율법을 행하여 하늘의 영생을 탐하는 우리가 그런 존재이다. 그렇다면 다섯째 대접의 재앙은 죄를 짓게 하는 그 근원에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짐을 말씀한 것이다.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라는 말씀은 단순히 자연 현상으로 어두워졌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로 인하여 용의 권세와 보좌를 넘겨받은 짐승의 세계가 극도의 혼돈과 흑암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창조에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라고 말씀하셨다. 즉 하나님의 영이 품어서 구원을 이루어 주시기 전의 상태가 흑암으로 인한 혼돈과 공허의 상태이다. 그래서 70인역에서 “흑암”을 ‘스코토스’로 쓰고 있는데 여기서도 “어두워지며”라는 말을 명사 ‘스코토스’의 수동형 동사 ‘스코토오’라는 같은 뜻의 단어를 사용하였다.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아파서”라는 말의 ‘포노스’는 ‘수고, 아픔, 고통’이라는 뜻이며, “혀”의 ‘글롯사’는 ‘혀, 언어, 말, 방언’이라는 뜻이고, “깨물고”의 ‘맛사오마이’는 ‘씹다, 깨물다, 먹다, 삼키다’라는 뜻이다. 즉 수고하는 고통 가운데서 자기 언어, 자신의 말을 진리로 삼아서 먹는 상태라는 의미이다. ‘맛사오마이’의 미완료 용법 ‘에마손토’로 표현한 것은 반복되는 행위가 과거로부터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자기 말이 교리가 되어서 그 말을 먹는 행위가 지금까지 계속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존재하고 있음을 말씀한다.
“아픈 것과 종기”에서 “아픈 것”은 ‘포노스’(‘수고, 아픔, 고통’)이고 “종기”는 ‘헬코스’인데 6:2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헌데, 종기, 곪은 상처’라는 뜻으로 짐승과 하나 되어 죄의 권세 아래에서 비진리를 좇아가는 상태를 곪은 상처로 고통 중에 있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려는 자기 행위로 하나님을 향해 도전하기 때문에 받는 고통이다. 죄의 권세에 매인 인간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한 열심으로 똘똘뭉친 존재일 뿐이다.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죄인들은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종교를 찾고 교회를 찾는다. 자기에게 맞는 자기를 위한 종교를 찾는 것이다. 교회를 찾고 복음을 받아들인다고 하지만 그것은 자기 교리를 진리로 먹고 마시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아픈 것과 종기로 말미암아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더라”라고 선언한다. 죄인이 찾는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으로 만들어 더욱 공고히 해주는 하나님이고, 내가 믿는다는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위해 무슨 소원이든지 들어주는 알라딘 요술램프의 지니 같은 유령이며, 우리가 받고 싶어 하는 성령은 나의 능력을 한층 업그레이드시키는 은사를 주는 내 수하의 종과 같은 허깨비이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인간은 재앙 속에서 내가 불행을 당하는 것, 힘들고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을 어떻게 하면 해소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관심뿐이다. 그래서 늘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있는가?’ 혹은 ‘왜 나만 이런 일을 당하는가?’ 하는 항변만 있다. 이러한 인간에게 회개란 결코 있을 수 없다. 자신의 행복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성도는 자연 현상을 보고 나의 회개를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회개에 의해 세상이 심판 가운데 있음을 아는 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자신의 죄를 먼저 보면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완성되는 생명을 사는 것이다(20231224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