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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보면 또 다시 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한번 가면 다시금 찾고 싶은 장소가 있습니다.
푸른 산과 맑은 물,바람마저 소소한 곳.나무는 나무대로,하늘은 하늘대로,저마다 빛과
향기를 고이고이 간직한 곳.
눈 감으면 더 그리운 첫사랑의 모습처럼,떠나오면 언제라도 다시 찾고 싶어지는 그곳.
마음의 고향,영양 주실마을로 갑니다.
영양군 일월면 주실마을의 자연을 걸으면 도시생활에서 받은 상처와 잃어 버린 자신을
찾아 가는 자아성찰의 여행이 될 것입니다.
학자 문인을 대거 배출한 선비마을 영양일월주실마을에서 삶의 지혜를 배워 보고자하여
소개합니다.
경북 영양군 중심지 영양읍으로 달리는 길은 더욱 맑고 맑은 반변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국도 31번 길이다.
지나다 보면 국보인 산해리봉감모전오층석탑,한국 3대 전통정원의 하나인 영양서석지,산촌생활박물관,영양분재야생화전시관 및
분재테마파크, '문향 영양'이 라고 쓴 빗돌도 보이며 또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쌍계입암의 배경인
선바위경관이 있고,'오일도 시비'도 있고 천연기념물 제114호 감천측백나무숲,들판 한가운데로는 보물인 현2동 삼층석탑이 보인다.
영양읍을 지나 봉화 쪽으로 어느만큼 가다 보면 일월면이라 는 멋진 이름이 나온다. 여기가 일월산이 있는 곳인가 보다'생각하게
되고 또 어느만큼 가다 보면 갑자기 차창 오른쪽으로 산자락 아래 반듯하고 고풍스러운 한 양반촌이 나와 방문객을 놀라게 한다.
여기가 시인 조지훈의 고향으로 알려진 주실마을로 한양 조씨 집성촌이다.
1. 문향 주실마을 마을환경 및 유래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注谷里) 주실마을, 마을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뻗어내려온 흥림산(興霖山)을 안산으로 하여
마을의 입구를 막고 있으며 흥림산 아래 자연부락 감복동甘伏洞이 있고 남편에 영양읍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흥림산은 산허리에 구름이라도 돌면 비가 오기 때문에 붙여진 산의 이름이라고 한다.
마을의 입구에 쑤가 있으며 마을의 중앙을 흐르는 장군천(將軍川)을 좌우로 하여 골짜기를 서로 마주하여 이루어진 마을로
영양의 주산이고,영산인 일월산의 정기를 가장 많이 받는 마을이다.
본래 영양현에 딸린 주곡부곡(注谷部曲)이 있었으므로 하여 주실 또는 주곡(注谷)이라고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을 고칠 때에 감복동(甘伏洞)과 법곡동(法谷洞)을 합하여 주곡리라 하고 일월면에 들게 된다.
마을 이름의 상관으로 볼 때,감복동의 감(甘)은 물신ㆍ땅신과 상관을 보이므로 감복이라 함은 인간에게 물이 근본이므로
물을 숭상하고 땅을 보살피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또 주곡은 주실 또는 다른 이름으로 매계(梅溪) 혹은 매한(梅寒)이라 할 때 물이 ‘매’로 이어짐을 들 수 있다.
가령 『삼국사기』에서 수원(水原)의 옛 이름이 매홀(買忽)이라고 하였음을 상고하면 매-물의 관계를 추정할 수 있다.
하긴 주실(注室)의 주(注)도 그 뜻으로 따지자면 물과 관계가 있으며, 법곡동의 법(法) 또한 그러하다고 추정된다.
<마을의 특징>
이 마을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으로는 월록서당(月麓書堂)과 시인 조지훈(趙芝薰) 선생의 생가(生家)인 호은종택을 들 수
있으며 또한 옥천종텍(玉川宗宅)과 조지훈 선생의 시비(詩碑)들 수 있겠다.
이들에 대한 보다 자세한 자료는 2001년 12월 24일 발간한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저/동양문화산책,유교문화권
전통마을,영양주실마을 책자를 참고해 주시기를 바란다.
<주곡 주실의 유래>
주실ㆍ주곡(注谷)ㆍ주곡부곡(注谷部谷)ㆍ매계(梅溪)ㆍ매한(梅寒) 1630년 이전에는 주씨(朱氏)가 살았으나 1629년 한양인(漢陽人)
조전(趙佺) 선생이 이 마을에 처음으로 들어와 정착한 뒤 매한(梅寒)이라 하였고, 1700년 무렵 매계(梅溪) 혹은 매곡(梅谷)으로
부르다가 1914년 행정 구역을 고칠 때 주곡(注谷)으로 부르게 되었다.
마을 중앙을 흐르는 장군천(將軍川)을 좌우로 용골ㆍ논골ㆍ성지골ㆍ새미골ㆍ감부골ㆍ앞산골 등의 골짜기가 서로 맞닿아 있어
이루어진 마을이라 하여 주실 또는 주곡이라 불러 왔다고 한다. 유형문화재인 월록서당(月麓書堂)이 이 마을에 있다.
이 고장은 시인 조지훈(趙芝薰) 선생의 고향이기 때문에 최근 그의 시비를 마련하여 세웠다. 이 곳의 조씨(趙氏)를 흔히 주실 조씨라
부른다.
선비의 고장으로 유명한데 마을 전체 분위기와 짜임이 다른 마을과는 달라 학자와 문인이 많이 배출되었다.<영양군지 참조>
앞에서 풀이한 바와 같이 주실-매계-매한-매곡으로 이루어지는 흐름과 감복-법곡으로 맞몰려 있는 땅 이름의 흐름으로 볼 때,
이는 물 곧 장군천 혹은 반변천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감부골ㆍ감복골ㆍ감복동(甘伏洞/甘福洞)>
흥림산 동쪽에 있는 마을로 물을 다스리는 물신(水神)과 땅을 다스리는 땅신(土神)이 있는 마을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1600년 무렵부터 감복동(甘伏洞)이 였으나, 1914년 법곡동(法谷洞)과 통합하여 주곡동이 된 후에 감부골,감북골,감북곡(甘北谷
)이라 부르고 있다.
감천, 감내,감복의 '감'은 물신이요 땅신을 상징한다. 최남선의 「신자전」을 보면 신을 '검' 이라고 하였으니,
여기 감은 검과 같은 뜻으로서 거북신앙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거북은 옛말로 거붑이요. 다시 이는 '검'에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이다.(양산 민요 '왕거미 노래'의 거미-검-거북) 모든 삶의 가능성은 물과 땅에서 말미암는 것이니
땅신을 중심으로 함은 너무나도 당연한 귀결이라 할 것이다. 우리말 감내를 이에 가까운 한자로 대응을 두어 감천이라고
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감복골은 가마실의 사마-감과 같은 계열의 마을 이름으로 종교적인 뜻으로라면 물신과 땅신의 동네라는 말이 된다.
<주실마을 전경>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注谷里) 주실마을, 마을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뻗어내려온 흥림산(興霖山)을
안산으로 해 마을의 입구를 막고 있으며 흥림산 아래 자연부락 감복동(甘伏洞)이 있고 남편에
영양읍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마을의 입구에 이 마을 이 낳은 한국의 대표적인 문학가 지훈(芝薰) 조동탁 선생의 시비가 있으며
마을의 중앙을 흐르는 장군천(將軍川)을 좌우로 해 골짜기를 서로 마주하며 이뤄진 마을로 영양의
주산이고,영산인 일월산의 정기를 가장 많이 받는 마을이다.
2. 주실마을 문화재
<월록서당月麓書堂>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72호로서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227번지에 위치하고있다.
이 건물은 조선 영조(英祖) 49년(1773)에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隣, 1658~1737)의 손자인
월하(月下) 조운도(趙運道, 1718~1796)가 발의하고 한양조씨(漢陽趙氏), 야성정씨(野城鄭氏),
함양오씨(咸陽吳氏)등이 주축이 되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하여 건립한 서당이다.
이 서당에서 공부한 이들 가운데 많은 석학(碩學)과 명현(名賢)들이 배출되었다.
한양조씨는 원래 영양에 입향한 후 원당리(原糖里: 영양읍 하원동)에 살다가 호은공 조전(壺隱公 趙佺)선생이
주곡동으로 옮겨간 뒤 자손이 번성하고 벼슬과 학문이 끊이지 않았으며 호은선생의 아들 정형(廷珩)선생은 1630년
(인조8年)에 진사하고, 증손 호봉(壺峯) 덕순(德純)선생과, 옥천(玉川) 덕린(德?)선생의 형제가 숙종조에 대과하여
호봉은 문과에 장원하여 벼슬이 지평에 이르렀고, 옥천은 승지로서 성학과 문장으로 당시 남인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그러나 옥천 선생의 손자 월하(月下) 조운도(趙運道) 선생과 만곡(晩谷) 조술도(趙述道)선생이 서당이 없어
학자의 수업에 지장이 있음을 크게 개탄하고 월록서당을 영건하게 되었다.
월록서당은 영산서당을 서원으로 승격한 후 서당으로서 영양군에서는 처음이며, 일월산록에 간좌곤향(艮坐坤向)으로 위치가
한적하고 집이 4칸 겹집으로 넓고, 앞으로는 장군천이 남쪽으로 흘러 서당 앞을 돌아서 낙동강의 원류를 이루었으며,
주봉인 일월산이 뻗어내려 만장광경(萬丈光景)을 이루었으니 그 전망(展望)이 화려하며 수석(水石)이 깨끗하고 아름다워서
유생들이 공부하기 좋은 곳이다. 앞으로는 독산과 멀리는 흥림산이 안대(眼帶)를 이루고 있다.
서당의 중간은 마루이고 양쪽이 방인데, 왼쪽은 존성재(存省齋), 오른편은 극복재(克復齋)라는 편액이 불어 있으며, 대산 이상정
(大山 李象靖)의 서당기와 천사 김종덕(川沙 金宗德)과 간옹 이헌경(艮翁 李獻慶)의 시판이 새겨져 있다.
이 서당은 월하와 만곡을 위시하여 향내 후진양성은 물론 동남문풍의 중심이 되었다.
서당의 현판은 숙종조 영의정인 번암 채제공(樊巖 蔡濟恭)선생의 친필이다.
서당건물구조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인데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렸으며
전면에는 4주문을 세워 서당으로 출입케 하였다. 평면른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 1칸씩을 연접시켰는데,대청의
전면에는 각 칸마다
4분합문을 설치하여 마루방을 이루게 하였다.서당의 전면에는 계자난간을 세웠으며 양측면에는 평난간을 둘렀다
가구는 오량가의 굴도리집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만곡정사晩谷精舍>
향토유적이며 문화재(지정번호 제341호) 입니다.
소재지는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175번지입니다.
이 정자는 조선 정조(正祖) 때의 유학자(儒學者)
조술도(趙述道, 1729~1803)가 후학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게 하기 위하여
1790년 영양 원당리(元塘里) 선유굴(仙遊窟) 위에 건립한 강정(江亭)을 문하생들이 주곡동으로 옮겨
미운정(媚雲亭)이라 하였고, 그 뒤 현 위치로 옮겨 만곡정사(晩谷精舍)라 하였다.
그는 한양(漢陽) 조씨(趙氏) 조희당(趙喜堂)의 아들로 자는 성소(聖紹) 호는 만곡(晩谷)이라 하였고
학문과 후학 양성에 힘쓴 분이다.
이 정자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 평면이나 좌측 온돌방 뒤쪽의 물건을 넣어 두는 수장공간(收藏空間)과 폐쇄형 마루 등의
독특한 구조와 나무를 다듬는 방식은 조선 후기의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호은종택>
조지훈 생가(趙芝薰 生家)
경상북도 기념물 제78호
소재지 :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201번지
이 집은 청록파(靑鹿派) 시인의 한 사람이며, 대표적인 한국 현대시인이고 국문학자였던
조지훈(1920~1968)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그의 본관은 한양(漢陽)이고 본명은 동탁(東卓)이며 지훈은 호이다.
선생은 1939년 문장지(文章誌)에 [고풍의상, 古風衣裳]이 추천되면서
문단에 나와 ≪청록집≫, ≪풀잎단장≫, ≪조지훈시선≫ 등을 남겼다.
그는 시인이자 국문학자로서 유명한 것은 물론 지조(志操)있고
풍류(風流)있는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집은 영양군 일월면 주실마을에 처음 들어온 호은(壺隱) 조전(趙佺)의
둘째 아들 조정형(趙廷珩)이 조선 인조(仁祖) 때 지은 것이다.
이 집은 경상도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양반가(兩班家)의 모습을 하고 있는 ‘ㅁ'자형집으로
정침(正寢)과 대문채로 나누어진다.
정침은 정면 7칸, 측면 7칸이며 정면의 사랑채는 정자 형식으로 되어 있고 서쪽에는 선생의 태실(胎室)이 있다.
대문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되어 있고 솟을대문이 있다.
6.25전쟁 당시 일부가 소실되었으나 1963년 복구되었다.
<옥천종택>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42호로서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189 번지에 위치하고있다.
이 집은 17세기말 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양(漢陽) 조씨(趙氏)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隣, 1658~1737)의 고택(古宅)이다.
조덕린은 조선 숙종(肅宗) 17년(1671)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교리(校理)와 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이 집의 구조는 살림채인 정침(正寢)과 글을 읽는 별당(別堂)인 초당(草堂)과 가묘(家廟)인 사당(祠堂)으로 구성되어 있다.
살림채는 안동지역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는 ‘ㅁ자'형 뜰집의 전형적인 구성을 보이는데
다만 안방이 동쪽에 오고 사랑방이 서쪽으로 배치된 점만이 다르다. 집의 평면구성에 좌우가 바뀐
이 같은 형식은 18세기부터 안방과 부엌이 서쪽으로 배치되는 평면구성으로 통일되는 특징을 가지는데,
이 살림집은 지붕을 박공(朴工)으로 처리하는 등 상당히 오래된 건축기법을 간직하고 있다.
초당은 전형적인 서당의 평면구성을 보이고 있으며, 사당은 18세기말 건물로서 일반적인 형식에 속한다.
이 집은 경북 북부지방의 폐쇄적인“ㅁ자형 뜰집”의 민가(民家) 형식을 잘 갖추고 있다.
3.지훈문학관
+ 개관연도 ㅣ 2007년 5월 18일
+ 위 치 ㅣ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222번지외 2필지
+ 대지규모 ㅣ 2,792㎡ (846평)
+ 건축면적 ㅣ 538㎡ (163평)
+ 주요시설 ㅣ 관리사, 시청각실, 전시실
+ 부대시설 ㅣ 지훈 시공원, 주차장, 탐방로 등
+ 지훈선생 작품 및 유품
지훈육필원고집, 부채, 여권, 가죽장갑, 모자, 넥타이,
모시두루마기, 삼베바지, 초상화, 사방탁자, 문갑,
제1회 지훈상 수상식 초대장, 제2회 지훈상 수상식 초대장,
고 지훈 조동탁 선생 20주기 추모학술대회 초대장,
조지훈 선생 비문제막식 초대장, 지훈시비 제막식 초대장,
1982년도 문화의 날 기념식 팜플렛,
1996 문학의 해 문인모습 및 작고문인 육필 전시회 팜플렛,
금관문화훈장, 편지 2통3장, 신라국호연구논고,
신문스크랩-전교학신문제39호 문화일보 제222호,
릴테이프, 육성녹음 테이프, 시낭송테이프등 다수가 있다.
지훈문학관 은 청록파 시인이자 지조론의 학자
조지훈 선생을 후세에 길이 기리기 위해 건립한 문학관이다.
미망인 김난희 여사가 직접 현판을 쓴 문학관을 들어서면
170여 평 규모에 단층으로 지어진 목조 기와집이 'ㅁ'자 모양으로 방문객을 맞이한다. 문학관에 들어서면 조지훈의
대표적인 시 '승무'가 흘러나오고, 동선을 따라 조지훈 선생의 삶과
그 정신을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동선을 따라가보면 지훈의 소년시절 자료들,
광복과 청록집 관련 자료들,
격정의 현대사 속에 남긴 여운, 지훈의 가족 이야기,
미망인 김난희 여사가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린 작품, 지사로서의
지훈 선생의 삶, 지훈의 시와
산문, 학문 연구의 핵심 내용, 조지훈 선생의
선비로서의 삶의 모습 등등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전시물 중에는 지훈 선생이 쓴 주례사와
여러 곳에서 받은 감사장,
위촉장 표창장 등의 자료를 비롯하여 평소 썼던
문갑과 서랍도 있다. 그리고
30대 중반에 썼다는 검은색 모자와 가죽 장갑,
40대에 사용했다는 부채, 그리고
세상을 뜨기 6~7년 전부터 애용했다는 담배 파이프와
안경 등을 비롯하여
외출할 때 즐겨 입었던 외투와 삼베 바지 등도 전시가
되어 있다.
또, 문학관을 돌아나오기 전 한쪽 벽면에는 그의 삶의
단상을 보여주는 1백개의 사진들이 걸려 있으며,
그 맞은편 헤드폰을 통해서는 투병 중인 그가
여동생(조동민)과 함께 낭송했다는 시 '낙화'를 들을 수 있다.
지훈문학관 전경입니다....
문학관 안의 모습입니다....
훌륭한 시인에 관한 많은 기록들이 있었고....
일일이 다 읽고 나오기에는 시간이 모자랐습니다.....
밖에는 많은 시인들의 작품이 입간판 처럼 놓여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 [기다림]이란 시를 읽어 보았습니다.....
4.지훈시공원
<지훈 시 공원>
시인 조지훈 의 시 세계의 본령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아와 자연의 동질성에서 찾을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지훈은 1939년 일제 말기 최고의
문예지인 {문장}을 통해 시단에 등장한 시인으로
전통적 서정성을 현대시에 계승,
발전시킨 대표적인 시인의 한 사람이다. 제재에 있어서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전통문화와 자연 관조, 선(禪) 취미 등을 채택한
것이라든가
시형과 시어에 있어서 고아한 품격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그의 시세계가
한국문학의 전통(지속성)에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내
보여준다.
지훈의 초기시는 유년기에서 청소년기에 이르는 동안
조선 전통의
서당식 교육과 학교 교육을 통해서, 그리고 그 자신의
문학수업을
통해 획득한 서구문학의 영향 속에서 출발한다.
지훈이 도달한
근원적인 힘이란 사실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의 시 속에서 전통문화, 민족정서,
불교와 선미 등 여러 가지 형태로 형상화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자연>이라는 포괄적인 용어로 집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시작품의 근원적 세계인 <자연>이란
좁게는 순수한 대상적 자연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넓게는 그가 체험한 삶 전체를 포괄하는 자연인 셈이다.
이 <자연>은 그의 시 속에서 때로는 순수한
대상적 자연으로. 또 때로는 전통문화나 민족정서로
혹은 불교적 선미 등으로 변용되어 나타난다.
특히 이 <자연>은 그의 정신세계를 끊임없이
괴롭혀온 자아의 문제와 결합되면서 역사의식의 문제로
확대되기도 한다.
따라서 자아에 대한 응시는 곧 <자연>에 이르기 위한
것이고 자연에 대한 관조는 다시 자아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순수서정시와 민족문학의 건설을 지향하는
그의 문학관에 비춰보면,
그가 자연을 통해 탐구한 자아의 내용은 한편으로는 인간,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연은 자아의
배후에 존재하는
거대한 근원적인 질서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지훈은 청록파 시인이라는
유파적 명칭을 얻은 시인으로. 순수문학을 옹호하고 민족
문학의 건립을 주창한 순수서정시의 시인이다.
민족의 신화를 시로 표현한 조지훈
조지훈(1920-1968)은 이미 생전에 우리 시문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고
세상을 떠난 후에는 우리 국민의 가슴속에 신화처럼
자리잡고 있는 시인이다.
새삼스럽게 그의 작품 세계를 조명해 보는 일이 참으로
가당치 않은 느낌마저 든다.
지훈이 약관 19세의 몸으로 시단에 등단한 것은
1939년 [문장]을 통해서였는데
이때의 추천 위원은 시인 정지용이었다.
지훈의 데뷔 작품인 [고풍의상], [승무], [봉황수] 등은
한결같이 뛰어난 천분(天分)과 기교가 조화된 작품으로,
한 시인의 초기 작품의 차원을 벗어나서 이름 그대로
그의 출세작이 되고
또 대표작이 되었다. 일제에 의한 조선어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풍전등화
같던 모국어의 운명을 지훈 혼자서 담당하게 되는
역사적인 운명이 데뷔 당시에 이미 부여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梧桐)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 [승무] 전문
지훈이 젊은 나이에 도달한 모국어의 시적 성취는
그 후 반세기가 흐른 지금도 여전히 압권이다.
지훈의 시적 생애는 원숙한 경지에서 실험적 경지로
또 현실적 경지로 옮겨갔다. 다른 시인들에 비하면
역코스를 진행해 갔으므로 개인사적인 측면으로 볼 때는
불행한 감이 없지 않으나,
우리의 시문학사적인 측면으로 볼 때는 매우 희귀하고
값진 바 또한
적지 않다.
[고풍의상][승무][봉황수] 등 고전적
아름다움과 품격담긴 시 발표
식민 치하의 시공(時空)을 살면서 그가 무엇보다도
절실히 느낀 것은
아마도 모국어의 따뜻한 숨결이었을 것이다.
그는 우리 시에 고전적인
아름다움과 품격을 부여한 시인이다. 해방된 조국의
국민에게 사랑 받는
시인이 될 것을 미리 예기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벌래 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 소리 날러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든 거미줄 친
옥좌(玉座) 우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佩玉)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正一品)
종십품(從十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둘 곳은 바이 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九天)에 호곡(呼哭)하리라.
― [봉황수] 전문
유장하게 흐르는 [봉황수]의 율조 속에 담겨 있는
비극적인
결연한 어조는 망국의 한을 달래면서도 미래를
꿈꾸는 봉황의
큰 뜻을 은연중에 담고 있다. 시인은 머지않아
이민족의 손아귀를
벗어날 '푸르른 하늘'을 노래하였다.
지훈의 이와 같은 비장미(悲壯美) 넘치는 어조는
바로 우리 겨레의
은근한 기다림과 인내의 결실과도 맞닿아 있어서,
개인의 천분 만을
노래했던 많은 시인들과 구별된다. 민족의 역사적
인식을 천부적으로
타고난 시인이 아니고서는 도달할 수 없는 뛰어난
높이에 도달하고
있다.
정말로 놀라운 일이다. 어떻게 열 아홉 스무 살의
나이에 그러한
천부적 역사 인식이 가능했을까.
한국의 현대시라는 장르가
소월과 지용을 거치면서 이제 막 자리잡아 가고 있던
형성기에,
어떻게 지훈은 가장 오래 남아서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될
수 있는 '시(詩)'로 발견해 낼 수 있었을까.
물론 이것은 그의 천부적인 자질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우리 겨레의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현대 시사에 이름을 남긴 시인들이 그들의 특수한
개인적 체험을 형상화한 데 비하여 지훈은 만해와 더불어
우리 겨레의 신화적 진실을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로
형상화하였다.
시인 조지훈이 이 땅에 살았다는 사실을 우리 겨레의
행운으로 껴안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해방 후에 곧바로 시단의 중심적인 위치에서
지도자적인 시인으로 자리잡게 되고 때로는 좌파와 대결하고
때로는 독재 정치와 대결하면서 마침내 지사(志士)
또는 마지막 선비라는 호칭도 받았지만,
그러나 그에 대한 영원한 호칭은 '시인'이었다고
해야 옳다.
지훈의 시를 가리켜 자연과 인공의 극치라고 말한
사람은 정지용이다.
자연이라고 한 말은 지훈 시에 등장하는 복고적이며
조선적인 풍물을 두고 한 말이었지만
지훈 시의 '자연'은 우리 민족어의 근원이요
민족 신화의 모태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된다.
인공이라고 한 말은 율조의 유려함과 형태미의
완벽성을 지칭한 말이었지만,
이것은 곧 지훈 시가 본래부터 지녔던 고전미,
즉 광범위하게 읽혀지고 애송되어 민족시 또는
국민시로 자리잡게 되는
지훈 시의 운명적 진로를 의미한 말로 이해되어야
하리라고 본다.
시의 운명과 시인의 운명은 동일한 것일까.
지훈 시의 화려한 성취는
곧 시인 조지훈의 성공적 생애를 의미하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을 염두에 둘 때 나는 곤혹감을 느낀다.
데뷔작이 시인의 대표작이 되는 일은 흔히 있으며
또 이런 경우에는 그 시인의 시세계의 협소함을
뜻하는
부정적인 경우가 많으나 유독 지훈의 경우에는
유별난 의미가 부여된다.
해방 후 좌파,
독재 정치와 대결하여 '마지막 선비'라는 호칭 얻어
데뷔작이 대표작이 되고 국민시가 되는
이 화려한 가치 부여의 한켠에는 조지훈이 길지 않은
생애가 민족 분단과 전화(戰禍)와 독재 정치라는
예술과 현실의 대립적 구도 속에서 훼손되고 노래되어
온 안타까움 또한 엄연히 존재한다.
이미 생전에 문학사적 위치를 확고히 차지하고 또 이승을
떠나서는 가장 존경받는 지식인으로 추앙되는 조지훈은
우리 겨레가 애송하는 주옥같은 작품에 의하여 마침내
'국민 시인'이라는 빛나는 월계관을 부여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살아 생전에 쌓아올린 지사적 풍모나 학자적
양심을 예술 그 자체에 용해시켜 좀더 많은 작품을 남겼으면
하는 바람이 정말로 크다.
지훈을 두고 박목월은 '크고도 섬세한 손'이라고 했다.
역사 인식을 뚜렷이 하는 거대한 안목과 섬세한 서정의
실마리를 다듬은 서정 시인으로서의 면목을 가리킨 말이다.
지나가는 자여, 발길을 멈추게나. 지훈의 주옥같은 작품들이
섬세한 이슬방울처럼 크고 높은 솟대처럼 우리 민족의 꿈길에
불멸의 꽃으로 피어나고 있으므로….
* 자료출처 : 오탁번<1943년생, 고려대 영문과와 국문과 졸,
현 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 시인>의 글입니다.
5. 지훈시비
<지훈 시비>
1972년 서울 남산에 '지훈선생시비'가
1982년에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마을쑤에
주실마을숲 속에 "지훈시비"가 건립되었습니다.
시비에 음각되어 있는 시詩
빛을 찾아가는 길 / 조지훈
사슴이랑 이리함께 산길을 가며
바위틈에 어리우는 물을 마시면
살아있는 즐거움의 저 언덕에서
아련히 풀피리도 들려 오누나
해바라기 따라가는 내 눈동자는
자운이 피어나는 청동의 향로
동해동녁바다 해 떠오는 아침에
붇받치는 설음을 하소하리라
돌부리 가시밭에 다친 발길이
아물어 꽃잎에 스치는 날은
푸나무에 열리는 과일을 따며
춤과 노래도 가꾸어 보자
빛을 찾아가는 길에 나의 노래는
슬픈구름 걷어가는 바람이되리.
6.주실 마을숲
영양 주실마을 숲은 마을 주민들이 오랜 세월 지극 정성
가꾸어온 숲이다.
예부터 영양에서 봉화로 가기 위해서는 주실마을을
지나야 하는데 주실숲은 길목에 위치하여 마을을 살짝
가려주고 열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원래 천연림이었으나
100여년 전에 숲의 서북쪽 밭을 구입하여 소나무를 보식,
현재 규모의 숲으로 확장되었다. 숲으로 들어서면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거져 있으며 상충목, 중층목,
하층목이 빼곡히 들어선 매우 건강하고 아름다운 숲이다.
주실마을은 350여 년 전 한양조씨가 입향하면서 생성된
집성촌으로서 청록파 시인이자
승무(僧舞)의 시인 '조지훈 선생'의
생가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산 아래 고즈넉이 자리 잡은 고택(古宅)들이 전통적인
유교문화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
마을에서는 주실숲을 '시인의 숲'으로 부르며 보존하고
있으며
숲을 훼손하지 않는 최소한의 공간에 조지훈 선생을 기리는
기념 시비와 무대를 마련하여 문학해설이나 백일장 등을
열고 있다.
영양읍에서 주실마을로 들어서려면 반드시 주실숲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이곳 숲은 마을로 들어서는 문이자 마을을 가려주는 커튼
역할을 하고 있다.
마을의 당산목인 250년생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낯선 방문자들에게 반가운 미소를 던진다.
기존의 천연림이 있던 곳을
보완하여 나무를 심고
오늘날 나무들이 두 팔벌린 듯 뻗어 있는
모습이 아름다운 장관을 이룬다. 마을 앞 개울은
숲으로 이어져
주실숲의 싱그러움을 더하고
다양한 식물과 곤충들이 생태적인
아름다움을 이루고 있다.
주실숲은 마을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종중이 지방자치단체의 도움을 받아 관리하고 있으며,
개발 대신
숲을 보존하고 자연 그대로의 숲으로 보존하려는 노력이
돋보이는 곳이다.
<2008년도 올해 ‘아름다운 숲’에 경북 영양 주실마을숲이 선정됨>
(사)생명의 숲<이사장 김후란>국민운동에서 선정해서 발표하였슴니다.
7. 주실마을 규방가사 일월산가 (日月山歌)
어화우리 벗님네야 일월산에 구경가세
이래가지 아니하면 우리평생 갈수없네
전날부터 수군수군 우리딸네 언약하니
집집마다 할머니들 궁금해서 야단이나
점심고리 보에싸서 옆에끼고 나아가니
이른아침 안개속에 나물꾼의 행진이라
솔순같이 자란우리 치렁치렁 땋은머리
남아볼가 두려워서 앞에넘겨 수건쓰고
힐끗힐끗 눈치보며 나물꾼에 섞여서니
얼시구나 절시구나 오늘우리 소풍이라
옛날에는 가마타고 출가할때 나아갈길
우리발로 몰래가니 으레꾸중 각오하며
우리조씨 자작일촌 주실동리 벗어날새
일보일보 들어갈새 첩첩산중 찰당골은
팔밭쪼아 먹고사는 평화촌이 여기런가
봄날에는 나물뜯어 일년먹을 준비하고
여름에는 길쌈해서 입고남아 판단하니
남녀같이 꾸려사는 자족자급 촌이로다
난리나면 피난드는 찰당골을 바라보며
심삼유곡 폭포소리 찾아보니 벽계수라
옥수같이 맑은물을 훌쩍훌쩍 뛰어가네
우리들은 일자봉을 쳐다보면 올라갈새
고불꼬불 십리길에 나물꾼이 줄을지어
허덕허덕 숨가쁘게 기어올라 돌아보니
나무하나 없는고개 산채만이 우거졌네
알숭달숭 금죽만은 이산에만 나는산채
옛날에는 나라님께 진상하던 이나물이
일월산에 매년돋아 옛이야기 하는듯다
푸른잎에 붉은띠는 마디마디 둘러있고
향기로운 그냄새에 아름다운 금북이라
질러가면 오백리요 돌아가면 천리길에
대궐안에 들어가면 삶아우려 다진나물
계란씨워 끄린국을 수라상에 올림이라
상감께서 잡숴보고 무릎치며 하신말씀
어허좋다 선미로다 속이편해 좋은지고
이말슴에 황송하야 궁녀환광 조아리며
삼신산이 불로초와 못지않은 산채라고
아조옛날 진시황은 장생불사 하고지고
동남동녀 오백인을 수륙만리 태워보내
삼신산의 불로초를 캐오라고 시킨지라
영남출신 역대왕비 이산채를 모르시랴
청송심씨 왕비마마 나신소을 인접이요
두고두고 사랑받던 진상나물 금죽이요
우리나라 역대임금 불로장생 하시라고
가초가초 심은듯이 당귀금죽 무성한듯
망월같이 둥근밥취 동글동글 예쁠시고
미미나리 높은향기 그냥꺾어 먹고지고
나물취는 어찌하야 백립같이 흰빛인고
우리나라 국상잦아 네가항상 복을입나
우리이조 오백년에 이실팔왕 사십왕비
국상마다 우리백성 백립쓰고 애통한중
금죽나물 많이잡숴 제일많이 사셨다네
우리조상 지평공이 금죽밥취 진상하면
옥천공은 상감님께 불로선약 산채라고
군신간에 의사소통 친밀하게 지냈으나
간신참소 의간통에 사도세자 참변당코
세자비도 폐비하란 영조대왕 호령당시
옥천공이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림이라
영조대왕 대로하사 듣기싫다 하실적에
천리귀양 가난가마 옥천앞에 놓였다네
왕명이라 할수없이 옥천승지 귀양가며
쉴때마다 상소문을 쓰시다가 객사했네
장할시고 우리조상 지평옥천 형제분이
백절불굴 바른정신 의를위해 순직한후
이산깊이 숨어돋는 불러선약 이나물이
아는이도 별로없이 우거지고 마는것가
꾸벅꾸벅 귑지않아 처음막죽 오늘이라
한잎두잎 모았다가 보에싼것 이고서서
두루두루 돌아보니 첩첩산이 둘러쌓네
태산태산 그사이에 파도같은 청산이라
만경창파 바다위에 바를타고 섰는듯다
멀리뵈는 삼각산은 한양성을 가리키며
적이오면 알리란듯 바라보고 서있건만
한일합병 되고비니 왜놈들의 세상이요
일자봉에 타던봉화 꺼진지도 오랜지라
오늘에는 나물꾼이 장사꾼이 모였으나
옛날에는 이산고개 봉화올려 유명한곳
일월산악 일자봉이 동해안에 제일높네
동해바다 바라볼제 수평선을 넘는배는
무얼싣고 달아나며 뉘를태워 가는밴고
우리나라 망할적에 왜구오던 저바다야
조국흥망 네알꺼라 우라나라 어이될꼬
중얼중얼 탄식하니 어떤부녀 일어서서
왜놈들아 물러가나 악을쓰며 발구를제
이산저산 이말받아 왜놈들아 물러가라
산올림도 비장하게 같이울어 주는이날
눈물닦고 한숨쉬며 일자봉을 비켜서니
울울창창 밀림속에 물소리가 은은해라
출렁출렁 넘는물은 부인당펀 지의약물
옛날부터 백일기도 여기와서 드림이라
눈을감고 앉은사람 방속에서 안나오네
부녀자가 모인곳에 부정탈까 안보는듯
가는사람 오는사람 이샘앞에 합장하고
물한모금 마신후에 소원성취 바라면서
점심밥을 먹으려고 나물꾼이 모여앉아
산신령과 용왕님을 두려하여 조심이라
밥을먹고 일어서니 물도같이 흘러가네
슬금슬금 기는듯이 산비탈을 내려가니
천리장정 낙동강은 예서부터 흐름이요
고금주야 쉬지않고 초지일관 유수로다
이인생도 먹은마을 변치말자 도사릴제
난데없이 겁을내어 다름박질 치며보니
절터같이 넓은땅에 잡곡심어 싹이나고
푹신푹신 검은흙은 나뭇잎이 썩고썩어
아무씨나 뿌려두면 절로자랄 땅같은데
소나무는 혹간있고 아람드리 꿀밤나무
사이사이 싸리밭은 삼서듯이 무성하며
다래덤불 칡덤불은 머리뜯어 못가겠네
호랑이가 옆에서도 전혀모를 산이로다
가랑비를 피하기엔 아조좋은 산이로다
다시해가 웃고불러 만리장고 바라보니
강남갔던 제비들은 떼를지어 북상이라
산넘어서 또산이요 또산넘어 또산인데
쉬어쉬어 가는것가 지지배배 지지골골
임자없는 옛대궐에 집지으러 가는것가
슬프도다 일월산아 봉화꺼진 일자봉아
주실동리 집집마다 너를보고 살았는데
국경없는 동해안에 무상출입 왜병이요
그중에도 수비대는 동리마다 지킴이라
오늘나도 저왜병의 말굽소리 듣기싫어
잠시라도 피해보고 서울산천 보고지고
일월산봉 봉화터에 올라갔다 내려오니
나물보에 쌓인설울 나라없는 한탄이라
목이메어 말없으니 산곡간이 고요한데
물소리만 구슬프게 이내심금 울리누나
- 을축년 봄날에 나물뜯어 이고와서 조국이 그립기에 이글을 엮어둔다.
과거를 이해하지 못하고 현재를 가늠할 수 없고,현재를 깨닫지 못하면
미래를 준비할 수 없다고 한다.
우리의 전통문화와 문학이 있는 주실마을에서 삶의 지혜를 배워볼 것을
권해 본다.
2014년 10월 일. 문화관광해설사 박원양 010-8718-95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