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교를 지나자 습한 기운이 덮쳐왔다. 그곳에 둘레 120㎝, 높이 15m에 이르는 닥나무가 있었다. 지금까지 본 닥나무 중에서 가장 큰 나무다. 부러뜨리면 ‘딱’소리가 나는 나무다. 가지를 꺾을 때 소리가 나지 않는 나무가 어디 있으랴마는 그 소리가 너무 커서 그리 불렸다. 섬유질에 풍부해 한지를 만들고, 옷을 짓기도 했다.
작은 섬 청등도에 자리한 닥나무는 모양이 예사롭지 않아 한때 문화재 지정을 검토하기도 했다. 다가가서 두 팔로 안아 보니 손이 닿지 않았다.
청등도는 은빛 모래의 해수욕장과 명품마을로 유명한 진도군 조도면 관매도에서 불과 1㎞ 남짓 거리에 있는 작은 섬이다. 1770년에 관매도 관호마을에서 김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마을이 섬 중턱에 자리를 잡아 선창에서 마을까지 걸어가는 길이 매우 불편하다. 그래서 가까운 길이지만 화물차를 타고 이동하기도 한다.
고기 잡아 번 돈으로 갱번 구입
청등도에서 닥나무보다 더 유명한 것이 있다. 작은 멸치와 돌미역이다. 멸치는 죽항도와 청등도 사이에 낭장망을 놓아 잡고, 돌미역은 ‘갱번’이라 부르는 미역바위에서 채취한다. 관매도가 고향인 강씨는 30여 년 전 청등도에 집보다 먼저 ‘갱번’을 샀다. 당시 치렀던 값이 8만 원이었다. 몇 년 뒤 집을 사는데 9만원을 주었다. 물가와 시세를 고려하면 집값보다 갱번이 더 비쌌다.
집보다 갱번을 먼저 샀던 것은 아이들을 안심하고 가르치려면 미역밭을 갖고 있는 것이 제일 안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향에서는 갱번을 얻기도 힘들고 농사지을 땅도 없어 너무 살기 힘들었다. 그래서 외가인 청등도로 이사를 했던 것이다.
청등도 미역밭은 마을 공동의 미역밭과 개인 미역밭이 있다. 원도(청등도 본섬)의 갱번은 모두 개인 밭이다. 하지만 신우도, 솔섬, 꼭두도 등 딸린 섬(무인도)의 미역밭은 마을 공동의 소유다. 주민 16가구 중 거동이 불편한 두 사람을 제외하고 14가구가 소유권을 행사를 하고 있다. 미역밭이 없었다면 작은 섬에 사람이 정착하고 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처음에는 입도 성씨대로 미역밭을 나누어 관리했을 것이다.
좁은 돌담길을 걷다가 다른 김씨를 만났다. 그는 딸 다섯에 아들 둘을 두었다. 어려운 살림에도 아들을 대학까지 보낼 수 있었던 것은 미역밭 덕분이라고 했다. 지금은 몸이 불편해 직접 미역밭에 나가지 못하지만 사위가 와서 작업을 돕고 있다고 했다. 돌김도 만들어 놓으면 가져가는 사람이 있다.
이처럼 미역밭이 소중했기 때문에 고기를 잡아 번 돈으로 갱번을 구입했던 것이다. 미역밭은 ‘교육보험’이었던 것이다. 당시 한 뭇에 60∼70만 원에 거래되었으니 보통 큰돈이 아니었다.
멸치 맛 아는 사람은 ‘낭장멸치’
마을 서남쪽 샛바 양공지산에 남자봉우리와 여자봉우리가 있다. 옛날 추석이면 처녀 총각들이 남녀로 나뉘어 봉우리에 올라 제상을 차린 뒤 ‘까마귀와 까치야 동네 편안하게 해주라, 고기도 많이 잡게 해주라’고 빌었던 곳이다. 항상 여자봉우리쪽에 까마귀가 많이 왔다고 한다. 그래야 동네도 평안하고 미역도 잘된다고 믿었다.
요즘에는 미역 못지않게 멸치가 인기다. 인근 슬도, 죽항도 등과 함께 청등도 멸치는 진도는 물론 멸치 맛을 아는 사람들이 찾는 낭장멸치다. 조류를 따라 이동하는 멸치는 통영을 거쳐 남해, 여수, 진도, 신안으로 이동해 연평도로 나간다.
강씨는 멸치가 알을 배서 낳기 직전에 진도 앞을 지나며, 그때가 제일 맛이 좋다고 했다. 이런 저런 말 끝에 관매도와 청등도 사이에서 죽방렴으로 멸치를 잡았다는 말도 전해줬다. 여수와 돌산 사이에 죽방렴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조도에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남해의 지족해협에서는 지금도 죽방렴으로 멸치를 잡아 높은 값에 판매하고 있으며, 관광자원으로도 활용하고 있다.
올해는 미역도 제법 잘 되었고, 멸치도 들기 시작하고 있다. 다행이다. 돌미역은 양이 많지 않아 미리 주문을 해야 한다. 금년 멸치반찬은 진도산으로 결정하면 어떨까. 직접 어촌계나 진도군으로 연락하면 좋겠다. 햇멸치 두 상자와 그물에 들어 온 갑오징어 몇 마리를 사서 배에 올랐다.
첫댓글 멋진 풍경입니다.
수고덕에 조도 풍경 만나니 반갑기만 합니다.
오늘도 좋은 날 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