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태행산(太行山)은 경치가 웅장하고, 웅대한 영혼을 담고 있다. '태항산'으로도 불리는 태행산은 문인묵객들의 창작의 원천이 되었고, 일제침략기에는 중국과 우리 동포에게 혁명기지가 되었다. 1500km에 이르는 인공수로 '홍기거(紅箕渠)'는 사회주의 중국 건설과 성장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태행산은 사회주의 중국의 건국정신이 살아 있는 모태이자, 사회주의 중국을 성장 발전시킨 모태이기도 하다.
태행산은 또 오행산(五行山), 왕모산(王母山), 여왜산(女娲山)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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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행산의 백미라 할 수 있는 태행산대협곡은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10대 협곡 중 하나로 꼽힌다. 이 협곡은 남북으로 50km, 동서로 1.5km의 거대한 협곡으로 미국의 그랜드 캐년에 견주어 중국의 그랜드 캐년으로 불린다. 그 중 하남성 임주와 신향, 산서성 장치의 협곡 풍광이 뛰어나다. 특히 임주에 위치한 길이 45km 높이 800~1700여m에 달하는 대협곡이 압도적이다.
태행산은 미국 그랜드캐년을 방불케하며, 아시아에서 제일 큰 협곡이자 세계 제일의 활공기지인 국제글라이딩기지(國際滑翔基地) 있는 곳이다. 태행산대협곡은 중국 4A급 자연생태풍경구로 주요관광지로는 태행산의 혼으로 불리우는 왕상암(王相岩)풍경구, 깊은 골짜기에 위치한 도화곡(桃花谷)풍경구, 삼복더위에도 얼음을 볼 수 있는 태극빙산(太極氷山)풍경구, 산과 물이 장관을 이루는 선대암풍경구, 그리고 태행평호(太行平湖)가 있다.
또한 태행산 대협곡은 오지협(五指峡), 용천협(龙泉峡), 왕장협(王莽峡) 3대 협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태행산은 산 아래에서 위까지 차로 이동이 가능해 남녀노소 누구나 손쉽게 거대한 자연의 숨결을 느낄 수 있으며 울창한 원시삼림은 단풍과 눈꽃 등 철마다 다른 옷을 갈아입고 색다른 매력을 발산한다.
◈ 태행천로(天行天路)
전체 길이가 25km인 태행천로는 도화곡에서 왕상암까지는 1000m 이상 높이의 산허리에 지그재그 도로로 차가 달릴 때 아슬아슬하면서 경이로움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전망대에 도착하여 경치를 감상하며된다. 감탄사가 절로 터뜨릴만큼 전망이 아름답다. 태행산 특유의 산봉우리가 사방으로 펼쳐져 있고 협곡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태행천로를 이동하는 중에 그 높은 지대에, 사람 사는 마을들이 있는데, 30호 안팎의 마을들은 뒤로는 높은 산이요, 바로 아래는 절벽이다. 집들은 지붕과 벽은 물론, 바닥까지 돌 일색이다. 지붕은 얇고 편편한 석판암들이 얹혀 있고, 돌판의 크기는 얼추 24인치 크기만 하였다. 수없이 펼쳐진 다랑이 밭들은 석축이 잘 되어 거대한 예술작품 같다.
◈ 도화곡(桃花谷) 풍경구 |
도화곡은 한겨울에도 복숭아꽃이 핀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한겨울에 피는 복숭아꽃, 한 여름에도 계곡에 어는 얼음덩이, 그리고 내리치면 돼지 울음소리를 내는 '저규석(猪叫石)'은 도화곡의 3대 명물이다.
도화곡 입구에서 100m 가량 가면 황룡담이 있고, 배부른 듯한 석편암이 양쪽으로 배치되어, 그 사이로 하얀 실비단 같은 구연폭포(九連瀑布)가 옥빛 못으로 흘러내린다. 황룡담에서 위쪽 바위 옆으로 빙 둘러쳐진 철계단을 따라 10여분 가량 올라 가면 10m 폭포와 못이 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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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원은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도화원기(桃花源記)'와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등에 등장하여 속세에서 떨어진, 이상향을 상징한다.
송나라 시인 왕안석(王安石:1021~1086)의 시 '도원행(桃源行)'은 전란을 피해 은거한 삶이 이상향임을 노래하고 있다.
<도원행(桃源行)> - 왕안석
망이궁에서는 사슴을 말이라고 했는데
진(秦)나라 백성 중 절반은 만리장성 아래서 죽었다
시대의 전란을 피한 것은 상산의 늙은이만이 아니고
또한 도화원에서 복숭아 심는 자도 있다
여기에 와서 복숭아를 심은 지 봄이 몇 번인가
복사꽃을 따고 복숭아를 먹고 그 나뭇가지는 땔나무가 되었다
자손을 낳고 길러도 세상과 단절되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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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은 있지만 군주와 신하의 구별이 없구나
어부는 배를 띄웠으되 얼마나 나아갔는지 깨닫지 못하고
복숭아꽃 사이에서 서로 보고 묻는다
세상에서는 예전에 진(秦)나라가 있었다는 것을 어찌 알겠으며
산 속에서는 지금이 진晋 나라 세상임을 어찌 짐작하겠는가
듣건대 장안에 전란이 끊이지 않는다니
봄바람에 고개 돌리며 수건이 젖는다
요순 이후 이런 곳을 또 어디서 찾을까
천하는 어지러 진秦나라를 몇 번이나 거쳤는가 |
◈ 태행산 또는 임려산(林慮山) 활공기지인 국제글라이딩기지(國際滑翔基地) |
임주시 태행춘천호텔(太行春天大酒店)에서 석판암향 방향으로 약 7.5km를 오르면 태행산(임주시에서는 임려산(林慮山)으로 불림) 터널을 만난다. 그리고 터널을 통과하자마자 좌측으로 태행산 활공기지로 올라가는 편도 1차선의 좁은 시멘트 길을 한없이 올라가야 한다.
터널 입구에서 석판암향까지는 편도 5km. |
◈ 인공수로 홍기거(紅箕渠) |
'홍기거'는 홍기를 내걸고 만든 수로라는 의미다. 길이가 자그마치 1500km나 된다. 물이 넘치는 만리장성이라고 할 만하다. 하남성 임주시에 사는 주민 30만명이 10년에 걸쳐 이뤄낸 대역사이다. 1960년부터 10년간 공사가 진행되었으며, 공사 중 숨진 사람이 80명에 이른다. 가파른 절벽에 폭 4m, 높이 3~4m의 수로를 냈다. 수로를 내기 위해 뚫은 동굴이 400개나 된다. 가장 난공사 지점인 '청년동(靑年洞)'의 일화는 유명하다. 길이 615m인 이 동굴은 이 마을 남녀 청년 300명이 1년 5개월에 걸쳐 뚫었다고 한다. 이 지점은 물길의 요지로 이곳의 성패가 전체 공사의 성공여부를 좌우할 정도였다. 이 마을 청년들은 공사 제한시간을 무시하고, 날마다 몰래 자발적으로 작업을 강행해 눈물겨운 완공을 이뤄낸 것이다.
홍기거지역은 예로부터 물이 귀한 곳이다. 마을이 700~800m 절벽 위에 있으니 물을 끌어올 곳도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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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물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며느리의 일화가 있다. 물을 길으러 간 시아버지를 마중나간 며느리가 물동이를 시아버지로부터 넘겨받아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그만 넘어지고 만다. 다음날 시어머니가 이웃집에서 물을 꿔오는 것을 본 며느리가 부끄러운 나머지 자살하고 만다. 그 시부모와 남편 역시 동네를 떠났다.
물이 귀해 식용유보다 비싸다는 이곳. 홍기거 공사를 주도한 사람은 당시 29살의 젊은 당서기 양귀였다. 그는 주민의 숙원인 물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주은래 수상에게 수로사업을 건의해 승인을 얻어냈다. 70km 구간의 수로에 낙차가 10m 밖에 되지 않아 공사에 애를 먹기도 했다. 섬서성의 장하에서 끌어들인 물은 1500km의 수로를 따라 임주시 인민의 목을 축이고 논밭을 축축히 적신다. 임주시 인구 70만명의 65%가 홍기거 혜택을 받고 있다고 한다. 홍기거는 '산과 물을 바로잡는다'는 홍기거 정신을 낳았다. 최근 불리어지는 '산가(山歌)'는 홍기거 정신을 잘 반영하고 있다.
<산가(山歌)>
한 사나이 외바퀴 수레 밀고가네
뜨끈한 칼국수, 술 고기 부럽지 않아
수레를 밀고 밀고 밀어
홍기거 만들어냈고
또 밀고 밀고 밀어서
밖에 나가 일하니 희망이 넘치고
또 밀고 밀고 밀어
의식주가 풍요롭네
지금도 밀고 밀고 밀어
희망찬 생활로 나아가고 있다. |
◈ 우공이산(愚公移山) - 바보의 산 옮기기 |
愚: 어리석을 우. 公: 귀 공. 移: 옮길 이. 山: 메 산.
우공이 산을 옮긴다는 뜻으로, 어떤 큰 일이라고 끊임없이 노력하면 반드시 이루어짐의 비유.
춘추 시대의 사상가 열자[列子:이름은 어구(禦寇)]의 문인들이 열자의 철학 사상을 기술한《열자(列子)》〈탕문편(湯問篇)〉에 다음과 같은 우화가 실려 있다.
먼 옛날 태행산(太行山)과 왕옥산(王玉山) 사이의 좁은 땅에 우공(愚公)이라는 90세 노인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사방 700리에 높이가 만 길이나 되는 두 큰 산이 집 앞뒤를 가로막고 있어 왕래에 장애가 되었다. 그래서 우공은 어느 날, 가족을 모아 놓고 이렇게 물었다.
"나는 너희들이 저 두 산을 깎아 없애고, 예주(豫州)와 한수(漢水) 남쪽까지 곧장 길을 내고 싶은데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모두 찬성했으나 그의 아내만은 무리라며 반대했다.
"아니, 늙은 당신의 힘으로 어떻게 저 큰 산을 깎아 없앤단 말예요? 또 파낸 흙은 어디다 버리고?"
"발해(渤海)에 갖다 버릴 거요."
이튿날 아침부터 우공은 세 아들과 손자들을 데리고 돌을 깨고 흙을 파서 삼태기로 발해까지 갖다 버리기 시작했다. 한 번 갔다 돌아오는데 꼬박 1년이 걸렸다. 어느 날 지수(知未)라는 사람이 '죽을 날이 멀지 않은 노인이 정말 망녕'이라며 비웃자 우공은 태연히 말했다.
"내가 죽으면 아들이 하고, 아들은 또 손자를 낳고 손자는 또 아들을... 이렇게 자자손손(子子孫孫) 계속하면 언젠가는 저 두 산이 평평해질 날이 오겠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란 것은 두 산을 지키는 사신(蛇神)이었다. 산이 없어지면 큰일이라고 생각한 사신은 옥황 상제(玉皇上帝)에게 호소했다. 그러자 우공의 끈기에 감동한 옥황상제는 역신(力神) 과아(誇娥)의 두 아들에게 명하여 각각 두 산을 업어 태행산은 삭동(朔東) 땅에, 왕옥산은 옹남(雍南) 땅에 옮겨 놓게 했다. 그래서 두 산이 있었던 기주(冀州)와 한수(漢水) 남쪽에는 현재 작은 언덕조차 없다고 한다. |
◈ 현대판 우공이산(愚公移山), 맨손으로 일군 태항산(太行山) 궈량동(郭亮洞) |
'세계 9대 불가사의'라 일컬어지는 인공 터널 '궈량동(郭亮洞)'이 또한 유명하다. 예로부터 궈량춘에서 외부와 통하는 길은 오직 협곡과 절벽 위를 이어주는 '천제(天梯)' 뿐이었다.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오르내리는 것도 너무 위험했다.
1971년 가을, 마을 서기였던 선밍신(申明信)의 제의로 선신푸(申新福), 왕휘이당(王懷堂), 선푸구이(申福貴) 등이 밧줄을 사용해 절벽의 높이와 거리를 측정했고 전통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 상급기관의 전문가에게 터널 공사에 관한 자문을 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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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도 인공 터널 건설에 적극적이었다. 자발적으로 산양, 약초 등을 내다 팔아 해머, 정 등 돌 깨는 장비를 구입했다. 전기도 없고, 기계도 없는 최악의 조건이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13명의 ‘동굴 굴착 돌격대’를 조직했다. 허리에 줄을 감고 절벽에 매달려 정으로 돌을 깨 홍암절벽 곳곳에 일렬로 발파구를 만들었다.
13명의 청년들은 궈량춘의 유일한 절벽 길인 '천제' 아래 모여 반드시 절벽을 뚫어 길을 내겠다고 다짐하고 1972년 3월9일 본격적인 터널 공사에 들어갔다.
궈량춘은 해발 고도가 높고, 경작지가 적고, 농사가 가능한 서리 없는 날도 짧았다. 1년에 단 한번 농작물을 파종해 살아가는 가난한 곳이다. 이런 상황에서 '13인의 돌격대'도 0.12위안의 식비로 모두가 버텨야 했다. 강냉이로 만든 죽, 떡, 찜이 하루 세끼의 전부였다. 매일 한 사람에게 배당한 옥수수가 두근 밖에 되지 않았다.
1975년 말, 공사는 가장 어려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마을 사람들에겐 더 이상 내다 팔 산양도, 나무도 없었다. 식량도 떨어졌다. 어느 곳을 찾아봐도 동전 한 닢 나올 곳이 없었다. 그러나 어려움에 처하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팔을 걷고 나섰다. 새벽 5시에 일어나 5km의 산길을 올라가 두더지처럼 구멍을 파고 또 팠다. 마을 서기에겐 도화선과 폭약 등 굴착 장비를 빨리 구해오라고 다그쳤다.
궈량춘 절벽의 평균 높이는 약 105m. 절벽 중간에서 발파 작업을 하려면 밧줄이 필요했지만 이를 살 돈이 없었다. 달리 방법이 없자 집집마다 소의 고삐를 풀어와 하나 하나 이어서 밧줄을 만들었다.
공사 인부로 나선 청년들은 목숨을 건 열정으로 절벽의 도랑을 길로 바꿔 놓았다.
궈량춘 사람들은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5년 동안 거대한 절벽에서 2만6000㎥의 돌덩어리를 캐냈고, 정 12톤을 마모시켰고, 8파운드짜리 쇠추 4000개를 소모했다.
70세의 노인부터 10대의 소녀까지 공사에 참여해 하다못해 돌가루를 실어 나를 정도였다. 커다란 돌덩어리는 손으로 들어서 옮기고, 작은 것은 광주리나 바구니에 담아 어깨나 머리에 걸쳐 운반했다. 손가락마다 피가 터지기 일쑤였다.
가장 힘든 공정 때는 현 교육국의 전문가 100여명이 위엔융(原永) 국장과 함께 공사 현장에 합류, 빠른 진행에 힘이 돼 주었다.
마침내 1977년 5월1일 ‘절벽장랑(絶壁長廊)’이라 불리는 궈량 터널은 왕후이당 등 희생자들을 남기고 공식 개통됐다.
궈량동은 절벽을 횡으로 1.25km나 뚫어나가면서 높이 5m, 폭 4m로 만든 터널이다. 태항산 동쪽에 만든 '인공천하(人工天河)' '홍치쥐(紅旗渠)'와 함께 현대판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실례이자 가난한 민초들이 일궈낸 '기적'으로 자리매김 했다.
궈량 터널에는 절벽 쪽으로 크고 작은 구멍 35개가 나있다. '천창(天窓)'이라 불리는 통풍구이고 채광창이자 전망대다. 공사 중에는 굴에서 캐낸 돌을 밖으로 내놓는 배출구 역할까지 했다.
궈량춘에는 곽씨와 더불어 신씨들도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원말 명초, 신씨 일가는 난징에서 관직을 맡고 있는 권세가였다. 그러나 주원장이 권력을 잡자 도읍의 구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인적 청산'을 단행했다. 신씨 가문은 서역의 칭하이(靑海)로 쫓겨 갈 상황이 되자 산시로 도주했다. 수백여명의 일가 친척의 식사를 한꺼번에 만들 수 있는 커다란 가마솥을 쪼개 집집이 나눠줬다. 동서로 흩어졌다 훗날 다시 만나면 원래대로 붙일 심산이었다. 그래서 '큰 가마솥 신(大鍋申)씨'라 불린다.
당시 궈량춘에 들어와 뿌리를 내린 신씨들은 지금도 이 곳에 살고 있고, 그 후손들이 바로 궈량동을 만드는데 앞장 선 사람들이다.
궈량춘에는 항일 전쟁 중에 팔로군 사령부가 있었고, 산 아래는 리샹양(李向陽)이 이끄는 ‘평원유격대’의 근거지였다.
'중국의 그랜드캐년'이라 불리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태항산의 협곡을 끼고 온갖 풍파를 이겨낸 궈량춘은 '중국 제일의 드라마 촬영지'로 각광 받고 있다. 셰전(謝晉)이 연출한 '청량사의 종소리(淸凉寺的鐘聲)' 등 40여편의 드라마가 이곳에서 촬영됐다.
태항산 일대에는 인간의 무한한 힘을 보여준 궈량 터널 외에도 5곳의 인공 터널이 더 있다. 쿤산(昆山) 터널, 시야(錫崖) 터널, 후이롱(回龍) 터널, 징디(井底) 터널, 전쟈위안(陳家園) 터널 등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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