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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여호와의증인 정보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미완성교향곡
여호와의 증인이란?
여기서는 여호와의 증인의 역사, 가르침, 그리스도교회와의 차이점 그리고 그 종교 활동의 특수성을 소개합니다.
1.역사 제1부 러셀과 여호와의 증인의 기원 (96. 09. 21)
2.역사 제2부 러더퍼드에 의한 조직의 확대 (96. 10. 20)
3.역사 제3부 노아 회장과 세계 확장의 시대 (96. 11. 18)
4.역사 제4부 프렌즈 회장과 1980년대의 내분 (96. 12. 06)
5.역사 제5부 여호와의 증인의 최근의 움직임과 장래의 전망 (97. 8. 17)
6.교의 제1부 여호와의 증인의 입장에서 (96. 12. 25)
7.교의 제2부 여호와의 증인의 교의의 역사적 해설 (96. 12. 25)
8.교의 제3부 복음적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97. 04. 19)
9.여호와의 증인의 조직과 활동-90년대 후반 현재 (97. 09. 21)
* 이 글은 www.jwic.com 으로부터 옮겨 왔습니다. 운영자는 무라모토 오사무 씨, 미국에서 개업 중인 신경내과 의사이며, 1996년 도미 ,오레곤주 포틀랜드에 거주하고 있음.
그의 처와 장녀가 여호와의 증인이며 (1996년 현재-(?), 무라모토 씨는, 신흥종교(특히 여호와의 증인)가 인간 사회와 개인의 정신위생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여 왔습니다. (최대 관심사는 여호와의 증인과 워치타워협회의 활동)
영어, 일본어 사이트로 운영하여 왔지만 현재는 활동 중단 상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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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제1부 러셀과 여호와의 증인의 기원
1) 초기의 러셀과 재림파의 영향
현재의 워치타워 협회의 기초를 완성한 것은 찰스- 테이즈 러셀(1852-1916) 이다. 그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앨러게이니 (현재 피츠버그의 일부)에서 태어났다. 그는 처음에 장로교파 교회의 가정에서 자란 전통적인 크리스찬이었지만 뒤에 조합파 교회로 바꾸었다. 그는 부친이 경영하는 남성복 상점의 사업에 젊었을 때부터 참가하여, 가업은 번성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교회를 싫어하여 독립된 종교운동에 내디딘 동기의 하나로, 교회에서 가르치는 [죄인에 대한 영원한 지옥의 모진 고통]의 공포에 참을 수가 없었다는 것을 들고 있다. 일단 16세 때 교회를 떠나지만 얼마 있지 않아 재림파(adventist)의 운동에 크게 고무되었다.
그 당시 재림파는 그리스도교의 재림의 해를 여러 가지로 설정하여 그것을 널리 알렸다. 또한 그 당시 19세기의 후반에는 소위 천년왕국(millenium)의 신봉자가 다른 종파에도 다수였다. 그들이 그 후,현재의 여호와의 증인의 교의의 기초가 되는 것을 이루어 놓기는 하였지만 그 근저에는 이 당시의 재림파의 가르침과 견해가 크게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1876년24세의 러셀은 재림파의 지도자 넬손 바버와 제휴하고 1874년에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게]재림한다고 하는 교의를 내세웠다.
1877년, 그는 바버와 공저형식으로 “제 3의 세계”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이것은 실제로는 러셀이 자본을 대고 실제의 집필은 바버가 한 것으로, 그 내용은 성서 특히 요한의 계시록을 사용하여, 복잡하게 얽힌 연대계산을 되풀이하여, 최종 결론으로서 1873년은 아담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 된지 꼭 6000년째 해에 해당하고, 1874년부터 새로운 천년기의 7000년에 들어간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이 세상을 재건하는 때라고 하는 것이었다.
또한 바버는 후에 여호와의 증인 교의의 중핵이 되는 1914년을 [이방인의 때](누가21:24) 의 끝으로서 처음으로 설정하였다. 확실히 지금의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와는 미묘한 차이가 있지만 (현재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는 1914년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재림한 해이며, [이방인의 때]는 이 해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눈에 보이지 않게 재림] 그리고 1914년이라고 하는 현재 여호와의 증인의 교의 핵심이 되어 있는 것은 이 19세기 후반의 재림파(adventist)의 지도자가 내세운 새로운 교의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2) 러셀의 독립과 워치타워종교의 시작
그러나 러셀과 바버 두 사람의 제휴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속죄에 관한 교의의 차이로 인해 이 두 사람은 인간관계를 끊었다. 러셀은 바버가 발행하고 있던 [아침의 전령-Herald of the Morning]에 전면적인 자금지원을 하고 있었지만,1879년 러셀은 새롭게 자기가 주관하는 잡지 [시온의 파수대 및 그리스도 임재의 전령-Zion's Watch Tower and Herald of Christ's Presence]를 창간하였다. 이것이야 말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파수대]지의 시작인 것이다. 이 두 사람은 그 후 서로의 독자를 자신의 잡지로 끌어 들이기 위해, 옛날의 친구는 오늘의 적인 양, 서로 비난을 펼치게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워치타워 종교의 요람기에, 그 창시자인 러셀은 자신의 종교가 장래에 크게 확대된 조직이 되어 계속해 나갈 것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 그가 쓴 것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 당시 러셀의 관심은 가까이 닥친 이 세상 끝과, 자신을 포함한 14만 4천(계시록 7장, 14장)이 영적 존재로서 하나님께 들려 올리움을 (데살로니카 전서4:17) 받는 것이어서 그 앞의 일까지 계획하고 있던 모습은 엿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일이 일어나리라고 예상된 1881년이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간 무렵부터 러셀의 태도는 서서히 변화해 간다. 1882년 그는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교리를 전면에 내세우고, 재림파를 포함한 기존의 그리스도교 교파로부터 완전히 결별한다. 1880년대는 그의 종교의 성장기였다. 엄청나게 많은 책과 잡지를 출판하고, 전도활동을 광범위하게 확대하였다. 러셀은 러셀 목사로 불려지고, 그의 주된 저서인 6권의 “성서연구”는 1886년부터 1904년까지 차례로 출판되었다. 그리고 1886년, 현재의 [워치타워성서책자협회]의 전신인 [펜실베니아 워치타워성서책자협회]가 법인조직으로 확립되어, 이로서 조직화된 종교로서의 워치타워 종교의 기초가 확립되었던 것이다. 정력적인 러셀의 전도활동으로 열매를 맺는 신자의 수는 착실히 증가하였다.
3) 하나님의 대변자 러셀
초기의 러셀의 종교조직은 [성서연구생]으로 불리었지만, 그 조직은 지금의 워치타워협회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조직의 임원은 모두공개 선거로 뽑았고, 현재의 사법위원회와 같은 징벌기관으로, 조직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를 처벌하는 것도 없었다. 실제로 초기의 러셀은 조직화된 종교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으며 조직보다도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개인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러셀의 태도도 해가 감에 따라 변해갔다. 그 자신도 그의 주변도 서서히 그를 카리스마적 종교지도자로 만들어 갔다. 그 극단적인 예는 그의 주요 저서인 [성서연구]에서 그 자신을 하나님의 ‘대변자’로 칭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러셀의 6권으로 된 [성서연구]는 본질적으로는 성서를 주제별로 옮겨다 놓은 것이어서, 실질적으로는 성서 그대로였다. 따라서 성서 그 자체를 읽지 않아도 [성서연구] 만을 읽고 있다면 [빛]가운데 있는 것이지만, 혹여 [성서연구]를 읽지 않고 성서만을 읽는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어둠에 들어가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파수대 1910년 9월 15일). 요컨대 그는 자신이 쓴 책을 성서 이상으로 중요한 책으로서 신자들에게 읽게 하였다.
현재의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의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마태 24: 45의 비유 가운데 나오는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실제로는 워치타워협회의 지도부, 특히 통치체를 가리키고 있으며, 이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의 통치체가 일반신자인 증인들에게 [때에 따라 양식], 요컨대 그 때 그 때에 따른 교의(한국어 번역자 주: 가르침) 을 정하고 나누어 준다 (이것을 [영적 양식]이라고 증인들은 말한다) 는 것이다
이 교의가 여호와의 증인의 믿음의 바탕이 되는 까닭에, 그들은 통치체가 잇따라 내 놓는 새로운 교의를 모두 성서에 근거한 [새로운 빛]으로서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교의 항목을 참조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이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 가’ 의 해석은 러셀의 시대에는 달랐다. 러셀 자신이 자기 자신을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으로 칭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지만, 적어도 그 당시의 추종자들은 러셀을 하나님께서 쓰시는 특별한 사자, 또는 대리인으로 보고 있었던 것은 틀림이 없다.
또한 2대 회장이었던 러더퍼드는 그의 저서 [성서연구] 제 7권에서 러셀 개인을,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택함을 받은 자로, 바울과 동등한 하나님의 사자로서 간주 하였다. 이와 같이 만년의 러셀은 하나님과 인류의 사이를 중개하는 카리스마적 종교지도자로서의 지위는 흔들림 없는 것이었다.
4) 러셀의 사생할
신흥종교의 창시자에게는 스캔들이 따르기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말하여 개인의 스캔들은 그 개인의 업적과는 거리를 두고 고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변자, 하나님의 중개자를 자칭하거나, 그렇게 불리어지는 종교지도자에 대해서는 그 프라이버시에 메스를 대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대변자의 자격에는 그의 인간 전체의 평가가 관계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러셀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그와 그의 처 마리아 러셀과의 여러 해에 걸친 이혼재판 기록가운데 꽤 상세히 기록되어있다. 그 가운데에는 러셀 부부의 이상한 성생활, 러셀의 폭군적인 남편으로서의 태도, 마리아의 성적 불만, 파수대 잡지 편집에 있어서 마리아가 자유가 없었던 것, 마리아가 남편을 중상하는 문서를 대대적으로 배포한 것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부부의 진흙탕속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는 오랫동안의 가정불화와 수차 거듭된 이혼 조정은 1894년부터 시작하여 1908년 이혼 성립까지 장장 계속되었다.
이 가운데 분명하게 들어난 러셀 부부관계의 상세한 사실들을 어떻게 평가하는 가는. 확실히 어느 편에서 보느냐에 따라 크게 다를 것이다. 예를 들면, 워치타워협회 공식 역사서인 [여호와의 증인-하나님의 왕국 선포자]에서는, 이것을 그리스도교국의 성직자가 러셀의 평판을 훼손하기 위하여 꾸며 낸 것이라고 신자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어느 편에서든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사실은, 이 [성서연구생]이라는 이름의 같은 종교 (당시에는 ‘여호와의 증인’ 이란 명칭은 사용하지 않았다) 의 신자이며, 한편 [하나님의 중재자]로서의 최고 권위자인 남편과, 다른 한편으로는 그 남편을 공공연하게 전면적으로 도와, [파수대]지의 편집을 직접 다루어 온 처와는 사생활의 면에서는 어느 쪽이든 잘못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여러 해에 걸친 이전투구의 가정불화를 계속해 왔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선 형제자매로서, 또한 하나님이 맺어준 부부로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화해가 되지 않고 이전투구의 싸움 끝에 가정파국으로 끝났다.
이 종교의 창시자이며 최고 권력자였던 러셀 부부의 모습은, 그 후 이 종교가 세상에 초래한 가정 파괴의 갖가지 모형으로서, 이 종교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그 초창기부터 제시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덧붙여서, 다음의 제 2대 회장 러더퍼드도 그 이상한 부부관계로 알려져 있다.
5) 내외의 적
카리스마적인 종교지도자에게는 적이 있기 마련이다. 러셀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1880년 그는 [새로운 진리]로서 기묘한 속죄의 교리를 내 놓았다. 그것은 14만 4천의 그의 추종자들은 그리스도에 의한 대속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되어 대속을 한다는 것이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14만 4천에게는 대속을 해줄 중개자가 없이,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함께 대속을 한다는 것이었다. 러셀은 또한 기묘한 서약을, 자신이 내세워 1908년에는 그의 추종자들에게도 같은 서약을 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 서약 가운데에는 [나는 이성에 대하여 공적인 경우에 행동하는 것과 전적으로 동일하게 사적인 경우에도 행동 한다]고 하는 항목이 포함되어 있었다.
저명한 러셀의 추종자의 일부는 공공연히 러셀의 행동에 의문을 던졌다. 몇 개의 회중과 그 주된 지도자들은 [신약신봉자]라는 잡단을 형성하고, 더욱 정당한 그리스도에 의한 모든 사람의 대속을 신봉하여 러셀로부터 나뉘어 분파하였다. 1909년의 일이었다. 약 1만 명이었던 [성서연구생] 가운데 수백 명이 분파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편 외부에 대해서 러셀은 그의 치열한 그리스도교회 성직자들에 대한 공격의 결과, 다수의 적들을 그리스도교 각파 가운데 만들었다. 그 선두에 선 것은 캐나다 침례교회(baptist)의 로스 목사였다.
러셀은 자신의 이혼문제와 그에 따르는 비방 중상 이외에도, 1903부터 1913년에 걸쳐서 재판사태의 연속이었다. 그것들은 명예훼손, 허위 등의 죄상이었다.
6) 러셀의 만년
1914년은 러셀의 예언의 가장 중요한 해였다. 이 해는 현재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에 대단한 관건이 되는 해이지만, 당시의 러셀과 그의 추종자들에게는 다른 의미에서 중요하였다. 그들은 1914년에 [이방인의 때]가 종말을 고하고, 이 세상은 멸망 된다 (아마겟돈), 그리고 러셀과 그의 추종자들은 하늘로 올려지고, 그리스도의 천년통치가 시작 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 정도의 큰 예언의 성취를 기다리는 데에는 신경이 곤두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러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이미 이 해가 얼마나 확실한 것인가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해 왔다. [때는 가깝다]의 가운데서, 그는 [아무리 늦게 온다고 해도 불완전한 인간의 통치는 1914년을 넘기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고 썼다. 그러나 그 1914년이 가까워오자, 그는 얼마간의 표현을 사용하여 그 예언이 그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경우의 변명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자신은 영감을 받은 예언자는 아니다 (따라서 잘못될 수 도 있다). 가령 예언이 빗나가도 경고를 주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세계의 무정부상태와 그리스도 교회의 붕괴는 1914년 이 지난 후에 올지도 모른다. (최초에는 이러한 일들이 1914년의 전조로서 일어난다고 말했었지만, 1914년이 아주 가까워 오자 이것도 달라지지 않을 수 없었다) 등등.
그렇기는 하지만 1914년 가을에 세계 제1차 대전이 발발하자, 러셀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 고 확신했다. 그는 그해 가을 [이방인의 때]는 끝나고, [지금은 아마겟돈의 가운데 있다] 고 생각했다. 그들이 하늘로 올라가지 않는 것 등은 어찌 되었든, 러셀의 추종자들도 예언은 성취된 것이라고 확신했다. 러셀은 1914년부터 1916년에 걸쳐서 적극적인 전파활동을 계속하며, 세계 제1차 대전은 1918년의 아마겟돈 전쟁에서 끝나고, 그들은 하늘로 올라갈 것이라고 널리 알렸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1916년 10월 31일, 러셀은 전파활동중의 기차 차중에서 병사하였다. 이것은 추종자들 사이에서도 가장 해석하기 곤란한 사건이었다. 그들은 앞으로 2년 남짓한 사이에, 러셀을 중심으로 하여 하늘로 올라갈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혼란은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지상의 정부가 모조리 산산이 박살나기는 커녕 세계 제1차 대전은 1919년, 벨사이유 조약에 따라 평화롭게 해결되고 말았다.
러셀의 사후, [성서연구생] 의 종교 활동은 대부분 정지되지 않을 수 없었다.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중핵이 되는 교의의 붕괴, 전쟁 비협력으로 인한 각 정부와 분노한 대중들로 부터의 박해, 그리고 후계자들 간의 내부 다툼이 점차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1. [여호와의 증인 - 하나님의 왕국 선포자] 워치타워성서책자협회 1993년
2. "Apocalypse Delayed " M. James Penton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