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평역 _ 임철우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별로 복잡한 내용이랄 것도 없는 장부를 마저 꼼꼼히 확인해 보고 나서야 늙은 역장은 돋보기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놓고 일어선다.
벌써 삼십 분이나 지났군.
출입문 위쪽에 붙은 낡은 벽시계가 여덟 시 십오 분을 가리키고 있다. 하긴 뭐 벌써라는 말을 쓰는 것도 새삼스럽다고 그는 고쳐 생각한다. 이렇게 작은 산골 간이역에서 제시간에 정확히 도착하는 완행열차를 보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님을 익히 알고 있는 탓이다. 더구나 오늘은 눈까지 내리고 있지 않는가.
|생략 부분 줄거리| 역장은 창밖을 바라본다. 눈이 내리고 있으나 아직 철길에는 이상이 없다. 역장은 어둠에 묻힌 철길이 오늘따라 썰렁하다고 느끼며 을씨년스러운 대합실을 둘러본다.
지금 대합실에 남아 있는 사람은 모두 다섯이다. 한가운데에 톱밥 난로가 놓여져 있고 그 주위로 세 사람이 달라붙어 있다. 난로는 양철통 두 개를 맞붙여서 세워 놓은 듯한 꼬락서니로, 그나마 녹이 잔뜩 슬어 있어서 그간 겨울을 몇 차례나 맞고 보냈는지 어림잡기조차 힘들다. 난로의 허리께에 톱날 모양으로 촘촘히 뚫린 구멍 새로는 톱밥이 타 들어가면서 내는 빨간 불빛이 내비치고 있다. 하지만 형편없이 낡아빠진 그 난로 하나로 겨울 바람의 찬 공기를 덥히기에는 어림도 없을 듯싶다.
난로 가에 모여 있는 셋 중 한 사람만 유일하게 등받이 없이 의자에 앉아 있는데, 그러고 있는 것도 힘겨운지 등 뒤에 서 있는 사람의 팔에 반쯤 기댄 자세로 힘없이 안겨 있다. 그는 아까부터 줄곧 콜록거리고 있는 중늙은이로, 오래 앓아 오던 병이 요즘 들어 부쩍 심해져서 가까운 도회지의 병원을 찾아가려는 길이라는 것을 역장도 알고 있다. 등을 떠받치고 있는 건장한 팔뚝의 임자는 바로 노인의 아들이다. 대합실에 있는 다섯 사람 가운데에서 그들 두 부자만이 역장에겐 낯익은 인물들이다.
그 곁에서 난로를 등진 채 불을 쬐고 있는 중년의 사내는 처음 보는 얼굴이다. 마흔은 넘었을까 싶은 사내는 싸구려 털실 모자에 때묻은 구식 오바를 걸쳐 입었는데 첫눈에도 무척 음울해 뵈는 표정을 지니고 있다. 길게 자란 턱수염이며, 가무잡잡한 얼굴 그리고 유난히 번뜩이는 눈빛이 왠지 섬뜩하다. 오랜 세월을 햇볕 한 오라기 들지 않는 토굴 속에 갇혀 보낸 사람처럼 사내의 눈은 기묘한 광채마저 띠고 있다.
그 셋 말고도 저만치 벽을 따라 길게 붙어 있는 나무 의자엔 점퍼 차림의 청년 하나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그리고 청년으로부터 약간 떨어진 곳에는 미친 여자가 의자 위에 벌렁 누워 있다. 닥치는 대로 옷을 껴입은 여자는 속을 가득 채운 걸레 보퉁이 마냥 몸집이 퉁퉁하다.
|생략 부분 줄거리| 농부는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가야 하는 일에 짜증이 나다가 아버지에게 죄스러운 마음이 든다. 중년의 사내는 감옥에서 만난 무기수 사상범 허씨의 부탁으로 출감하자마자 허씨의 시골집에 다녀가는 길이다. 청년은 보름 전 학생 운동을 이유로 대학에서 제적당한 후 시골 집에 다녀간다. 대합실로 뚱뚱한 중년 여자와, 처녀, 행상꾼 아낙네들이 들어온다. 값비싼 코트를 걸친 뚱뚱한 여자는 서울 말씨를 쓰고 있고 바바리 코트를 입은 처녀는 짙은 화장에다 어딘지 술집 여자 분위기가 난다.
처녀의 이름은 춘심이다. 그래, 춘심이가 내 이름이다. 어쩔래. 그녀는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도대체 사람들은 뻔뻔스럽게 왜 남을 찬찬히 훑어보는 개 같은 버르장머리를 갖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쳐다보는 듯한 눈치가 뵈면 아주 딱 질색이다. 그것은 흡사 온몸을 하나하나 발가벗기는 것 같아서 불쾌하기 그지없다. 참 알 수 없는 일인 것이, 그녀는 어둠 속에서 혹은 빨간 살구알 전등이 유혹하듯 은근한 불빛을 쏟아 내는 방구석에서, 또는 취한 사내들과 뚜덕뚜덕 젓가락 장단을 맞춰 가며 뽕짝을 불러 대는 술자리에서라면 누구 못지않은 용감한 여자인 것이다.
부끄러움? 흥, 그 따위 잊은 지 왕년이다. 실오라기 같은 팬티 한 잎 걸치고 홀랑 벗어 제친 몸뚱이 하나만으로도 사내들 얼을 빼놓기쯤이야 그녀에게 식은 죽 먹기다. 춘심이. 적어도 신촌바닥에서 민들레집 춘심이 하면 아직은 일류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대낮에 행길에 나서기만 하면 형편없는 겁쟁이 계집애가 되고 마는 거였다. 무슨 벌거지떼처럼 무수히 거리를 오가는 행인들 중에 민들레집 춘심이의 얼굴을 기억할 사람이라곤 좀체 없을 터인데도 그녀는 언제나 고개를 쳐들기가 어려웠다. 벌써 삼 년째 되어 가는 이력에도 불구하고 그 버릇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춘심이는 애써 고개를 빳빳이 세워 뚱뚱이 여자가 자기를 여전히 뻔뻔스레 훑고 있음을 확인한다. 이제 춘심이는 아까보다 훨씬 오만한 표정을 떠올리며 무심한 척 난로의 불빛만 들여다보기로 한다.
|생략 부분 줄거리| 본명이 옥자인 춘심은 상경한지 삼 년 만에 고향에 다녀가는 길이다. 산골짜기 고향집에선 아무것도 모른 채 그녀를 환영하고, 동생이 취직까지 부탁하자 그녀는 가슴이 아려 온다. 그 사이 특급열차가 멈추지 않고 지나쳐 간다. 역장은 대합실의 사람들을 살펴보다가 중년의 사내가 말하기를 꺼려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내는 기차를 타기 전, 서울역 앞에서 그 굴비 한 두름을 샀었다. 언젠가 감방에서 허씨가 흰 쌀밥에 잘 구운 굴비를 먹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비록 허씨 자신은 먹을 수 없겠지만, 홀로 산다는 허씨의 칠순 노모에게 빈손으로 찾아갈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역 광장의 행상꾼에게서 한 두름을 샀다. 그리고 밤 내내 완행열차를 타고 이날 새벽 사평역에서 내려 허씨가 일러 준 대로 그 조그마한 산골 마을을 찾아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허씨의 노모는 이미 만날 수가 없었다. 죽어 묻힌 지가 오 년도 넘었다고 했다. 노모가 죽은 이듬해, 허씨의 형도 식솔들을 데리고 훌훌 마을을 떴고, 그 후 그들의 소식은 영영 끊어졌다는 거였다.
그 말을 전해 듣는 순간 사내는 사지의 힘이 일시에 빠져나가는 듯한 허탈감을 맛보았다. 어느덧 초로에 접어든 허씨의 쓸쓸한 모습이 눈앞에 선히 떠올랐다. 노모의 죽음조차 모르고 비좁은 벽돌담 안에 갇힌 채 다만 다른 사람들의 것일 따름인 그 숱한 계절들을 맞고 보내다가, 어느 날인가는 푸른 옷에 싸여 죽음을 맞아야 할 한 늙고 병든 무기수의 얼굴이 사내의 발길을 차마 돌릴 수 없도록 만드는 거였다. 등 뒤에 두고 돌아서려니, 사내는 그 마을이 바로 자기의 고향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고향은 본디 이북이었지만 피난통에 가족들과 헤어져 집도 부모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커 왔던 것이었다.
|생략 부분 줄거리| 청년은 대합실에 붙어 있는 지명 수배자 포스터를 들여다본다. 수배자의 사진 가운데에는 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몇 달 전부터 수배되어 있는 선배의 사진이 끼여 있다. 사진을 골똘히 바라보던 청년은 역장이 부르는 소리에 적이 놀란다.
“이봐요. 젊은이 추운데 거기 있지 말고 이리와서 불 좀 쬐구려.”
청년은 우물쭈물하더니 이윽고 난로 쪽으로 걸어온다. 그리고 역장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다.
“누구……더라.”
역장은 의외라는 표정이다. 청년의 얼굴이 금방 기억나지 않는다.
“저, 역장님은 잘 모르실 거예요. 고등 학교 때 통학하면서 줄곧 뵈었는데…… 재 너머 오동삼 씨가 제…….”
“아아, 이제야 알겠네. 자네가 바로 오씨 큰아들이구먼. 지금 대학에 다닌다면서, 그렇지?”
“예…….”
“맞아. 작년 여름에 내려왔을 때도 봤었지. 그래, 방학이라서 집에 왔구먼.”
“예…….”
역장은 청년을 새삼 믿음직스러운 듯 바라본다. 역장은 그를 기억해 낼 수 있다. 어릴 때부터 남달리 성실하고 착한 학생 같았었다. 여느 애들과는 다르게 생각이 많아 뵀고 늘 손에 책이 들리어져 있는 것도 대견스러웠다. 그러길래 청년이 인근 마을에선 유일하게 도회지의 국립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그게 우연이 아니라고 여겼던 것이다.
“아믄, 공부 열심히 해서 성공해야지. 뒷바라지하시느라 촌구석에서 뼈빠지게 고생하시는 부모님 호강도 시켜 드리고. 고향에 좋은 일도 많이 해야 하네. 알겠는가.”
“예…….”
역장이 어깨를 툭툭 두르려 주며 격려했고, 청년은 고개를 떨군 채 희미한 대답을 한다.
불현듯 청년의 뇌리엔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소나무 등걸처럼 투부룩한 아버지의 손. 그 손으로 아버지는 평생 논밭만 일구며 살아왔다. 아버지의 꿈은 판사 아들을 두는 거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내일 죽어도 한이 없겠노라고, 젊은 시절을 남의 집 머슴으로 전전했던 가난한 아버지는 대학생이 된 아들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곤 하던 거였다.
|생략 부분 줄거리| 청년은 부모에게 차마 대학에서 제적당했음을 알리지 못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이다. 행상 아낙 중 한 명이 팔다 남은 북어를 구워서 나눠 준다. 서울 여자는 자신의 음식점에서 일하던 사평댁이 돈을 가지고 도망치자 그녀의 고향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사평댁의 비참한 모습과 영양 실조에 걸린 그녀의 아이들을 확인하자 가진 돈을 모두 주고 돌아가게 된다. 그 사이 또 한 대의 특급열차가 지나간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말을 잊었다. 어쩌면 그들은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중년 사내는 담배를 입에 문 채 성냥불을 댕기려다 말고 멍하니 난로의 불빛을 들여다보고 있다. 노인을 안고 있는 농부도, 대학생도, 쭈그려 앉은 아낙네들도, 서울 여자도, 머플러를 쓴 춘심이도 저마다의 손바닥들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망연한 시선을 난로 위에 모은 채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만치 홀로 떨어져 앉아 있는 미친 여자도 지금은 석고상으로 고요히 정지해 있다. 이따금 노인의 기침 소리가 났고, 난로 속에서 톱밥이 톡톡 튀어 올랐다.
“흐유, 산다는 게 대체 뭣이간디…….”
불현듯 누군가 나직이 내뱉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 말꼬리를 붙잡고 저마다 곰곰이 생각해 보기 시작한다. 정말이지 산다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중년 사내에겐 산다는 일이 그저 벽돌담 같은 것이라고 여겨진다. 햇볕도 바람도 흘러들지 않는 폐쇄된 공간. 그 곳엔 시간마저도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마치 이 작은 산골 간이역을 빠른 속도로 무심히 지나쳐 가 버리는 특급열차처럼…… 사내는 그 열차를 세울 수도 탈 수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기다릴 도리밖에 없다는 것, 그것이 바로 앞으로 남겨진 자기 몫의 삶이라고 사내는 생각한다.
농부의 생각엔 삶이란 그저 누가 뭐래도 흙과 일뿐이다. 계절도 없이 쳇바퀴로 이어지는 노동. 농한기라는 겨울철마저도 융자금 상환과 농약값이며 비료값으로부터 시작하여 중학교에 보낸 큰아들 놈의 학비에 이르기까지 이런저런 걱정만 하다가 보내고 마는 한숨철이 되고만 지도 오래였다. 삶이란 필시 등뼈가 휘도록 일하고 근심하다가 끝내는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이리라고 여겨졌으므로, 드디어 어려운 문제를 풀어 냈다는 듯이 농부는 한숨을 길게 내쉰다.
서울 여자에겐 돈이다. 그녀가 경영하고 있는 음식점 출입문을 들어서는 사람들은 모조리 그녀에겐 돈으로 뵌다. 어서 오세요. 입에 붙은 인사도 알고 보면 손님에게가 아니라 돈에게 하는 말일게다. 그래서 뚱뚱이 여자는 식사를 마치고 나가는 손님들에게 결코 안녕히 가세요, 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또 오세요다.
그녀는 가난을 안다. 미친 듯 돈을 벌어서, 가랑이를 찢어 내던 어린 시절의 배고픈 기억을 보란 듯이 보상받고 싶은 게 그녀의 욕심이다. 물론 남자 없이 혼자 지새워야 하는 밤이 그녀의 부댓자루 같은 살덩이를 이따금 서럽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는 두 아들을 끔찍이 사랑했다. 소중한 두 아들과 또 그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에 쓰여질 돈, 그 두 가지만 있으면 과부인 그녀의 삶은 그런대로 만족할 것도 같다.
춘심이는 애당초 그런 골치 아픈 얘기는 생각하기도 싫어진다. 산다는 게 뭐 별것일까. 아무리 허덕이며 몸부림을 쳐 본들, 까짓 것 혀꼬부라진 소리로 불러 대는 청승맞은 유행가 가락이나 술취해 두들기는 젓가락 장단과 매양 한가지일 걸 뭐. 그래서 춘심이는 술이 좋다.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게 해 주는 술님이 고맙다. 그래도 춘심이는 취하면 때로 울기도 하는데 그 까닭이야말로 춘심이도 모를 일이다.
대학생에겐 삶은 이 세상과 구별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스물셋의 나이인 그에게는 세상 돌아가는 내력을 모르고, 아니 모른 척하고 산다는 것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그런 삶은 잠이다. 마취 상태에 빠져 흘려 보내는 시간일 뿐이라고 청년은 믿고 있다. 하지만 그는 얼마 전부터 그런 확신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는 걸 느끼고 있다. 유치장에서 보낸 한 달 남짓한 기억과 퇴학. 끓어오르는 그들의 신념과는 아랑곳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강의실 밖의 질서…… 그런 것들이 자꾸만 청년의 시야를 어지럽히고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중이다.
행상꾼 아낙네들은 산다는 일이 이를테면 허허한 길바닥만 같다. 아니면, 꼭두새벽부터 장사치들이 때로 엉켜 아우성치는 시장에서 허겁지겁 보따리를 꾸려 나와, 때로는 시골 장터로 혹은 인적 뜸한 산골 마을로 돌아다니며 역시 자기네 처지보다 나을 것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시골 사람들 앞에서 거짓말 참말 다 발라가며 펼쳐 놓는 그 싸구려 옷가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녀들에겐 그 따위 사치스런 문제를 따지고 말고 할 능력도 건덕지도 없다. 지금 아낙네들의 머릿속엔 아이들에게 맡겨 둔 채로 떠나온 집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어린것들이 밥이나 제때에 해 먹었을까. 연탄불은 꺼지지 않았을까. 며칠째 일거리가 없어 빈둥대고 있는 십 년 노가다 경력의 남편이 또 술에 취해서 집구석에 법석을 피워 놓진 않았을까…….
그러는 사이에도, 밖은 간간이 어둠 저편으로부터 바람이 불어 왔고, 그 때마다 창문이 딸그락거렸다. 전신주 끝을 물고 윙윙대는 바람 소리, 싸륵싸륵 눈발이 흩날리는 소리, 난로에서 톡톡 튀어 오르는 톱밥. 그런 크고 작은 소리들이 간헐적으로 토해 내는 늙은이의 기침 소리와 함께 대합실 안을 채우고 있을 뿐, 사람들은 각기 골똘한 얼굴로 생각에 빠져 있다.
대학생은 문득 고개를 들어 말없이 모여 있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여겨본다. 모두의 뺨이 불빛에 발갛게 상기되어 있다. 청년은 처음으로 그 낯선 사람들의 얼굴에서 어떤 아늑함이랄까 평화스러움을 찾아 내고는 새삼 놀라고 있다. 정말이지 산다는 것이란 때로는 저렇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청년은 무릎을 굽혀 바께쓰 안에서 톱밥 한 줌을 집어 든다. 그리고 그것을 난로의 불빛 속에 가만히 뿌려 넣어 본다. 호르르르. 삐비꽃이 피어나듯 주황색 불꽃이 타오르다가 이내 사그라져들고 만다. 청년은 그 짧은 순간의 불빛 속에서 누군가의 얼굴을 본 것 같다. 어머니다. 어머니가 주름진 얼굴로 활짝 웃고 있었다.
다시 한 줌 집어넣는다. 이번엔 아버지와 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또 한 줌을 조금 천천히 흩뿌려 넣는다. 친구들과 노교수의 얼굴, 그리고 강의실의 빈 의자들과 잔디밭과 교정의 풍경이 차례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음울한 표정의 중년 사내는 대학생이 아까부터 톱밥을 뿌려 대고 있는 모습을 곁에서 줄곧 지켜보고 있는 참이다. 대학생의 얼굴은 줄곧 상기되어 있다.
이 젊은 친구가 어쩌면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그러면서도 사내 역시 톱밥을 한 줌 집어 낸다. 그리고는 대학생이 하듯 달아오른 난로에 톱밥을 뿌려 준다. 호르르르. 역시 삐비꽃 같은 불꽃이 환히 피어오른다. 사내는 불빛 속에서 누군가의 얼굴을 얼핏 본 듯하다. 허씨 같기도 하고 전혀 낯모르는 다른 사람인 것도 같은, 확실치 않은 얼굴이었다. 사내의 음울한 눈동자가 간절한 그리움으로 반짝 빛나기 시작한다. 사내는 다시 한 줌의 톱밥을 집어 불빛 속에 던져 넣고 있다.
어느 새 농부도, 아낙네들도, 서울 여자와 춘심이도 이젠 모두 그 두 사람의 치기어린 장난을 지켜보고 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사평역을 경유하는 야간 완행열차는 두 시간이나 지난 후에야 도착했다.
막상 열차가 도착했을 때, 대합실에서 그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승객들은 반가움보다는 차라리 피곤함과 허탈감에 젖은 모습으로 열차에 올라탔다. 늙은 역장은 하얗게 눈을 맞으며 깃발을 흔들어 출발 신호를 보냈고, 이어 열차는 천천히 미끄러져 가기 시작했다. 얼핏, 누군가가 아직 들어가지 않고 열차 난간에 기대어 서 있는 게 보였다. 역장은 그 사람이 재 너머 오씨 큰아들임을 알았다. 고개를 반쯤 숙인 채 난간 손잡이에 위태로운 자세로 기대어 있는 청년의 모습이 역장은 왠지 마음에 걸렸다. 이내 열차는 어둠 속으로 길게 기적을 남기며 사라져 버렸다.
|생략 부분 줄거리| 승객들을 배웅하고 대합실로 돌아온 역장은 미친 여자만이 대합실에 홀로 남겨져 있음을 보고 난로 불을 더 지펴야겠다고 생각한다.
임철우(林哲佑, 1954~ )
전남 완도 출생. 1981년 <서울신문> 신춘 문예에 「개도둑」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정적인 문체를 특징으로 주로 분단의 문제와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에 초점을 맞춘 소설을 썼다.
주요 작품으로 「동행」, 「아버지의 땅」, 「그리운 남쪽」, 「붉은 방」, 「그 섬에 가고 싶다」, 「봄날」 등이 있다.
작품 투시도
포인트 1 ‘사평역’은 인물들이 과거를 회상하고 연대 의식을 갖는 장소가 됨
포인트 2 ‘난로’는 과거 회상의 매개체이자 평화와 위안을 주는 도구임
작품 해설
소시민의 삶에 대한 구체적 형상화
이 소설은 눈 내리는 겨울 밤 가상의 시골 역 대합실에서 막차를 기다리는 아홉 사람들의 쓸쓸한 내면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를 소설로 창작해 낸 소설이다. 소설 「사평역」은 시 「사평역에서」과 동일한 상황과 분위기를 갖고 있지만 등장 인물의 삶을 훨씬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작가는 사평역 대합실에 모인 등장 인물 하나하나에게 번갈아 초점을 맞추며 그들의 인생을 조명한다.
내면에 대한 이해와 위로
인물들이 둘러싸고 앉은 ‘난로’는 평온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어 냄과 동시에 각자의 과거를 회상하게 하는 매개체이다. 난로는 삶에 지친 이들을 따뜻한 열기로 녹여 주고 감싸 주는 것이다. 또한 이들이 기다리는 기차는 희망을 상징한다. 삶의 고통이 쉽게 끝나지 않듯이 기차 또한 좀처럼 도착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차가 연착하는 시간 동안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회고하고 성찰하게 된다. 그들이 삶을 돌아보는 순간,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던 이들이 은연중에 서로를 이해하고 하나의 일체감을 갖게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이 소설을 따뜻하게 만드는 힘이다. 결국 이들은 각자의 삶의 자리로 열차를 타고 되돌아 간다. 그런 그들에게 ‘사평역’에서의 위안과 평화가 또 한 번 삶을 지속하게 하는 힘이 되는 것이다.
핵심 정리
갈래단편 소설, 서정 소설
배경시간 - 1970~1980년대
공간 - 어느 시골의 간이역 대합실
시점전지적 작가 시점
주제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삶과 회한
작품 내용
십이 년 간의 수감 생활 끝에 출감한 죄수. 사상범 허씨와 더불어 현대사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 줌.
데모를 주동하다 대학에서 제적당한 학생. 7, 80년대의 암울한 정치 상황을 보여 주는 인물
시골 출신으로 서울의 술집 작부가 된 젊은 여자. 평범한 사람들에게 열등감을 느낌.
돈이 인생의 목표인 현실적인 인물. 가난으로 인해 겪었던 아픔을 돈을 버는 것으로 치유하려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