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달라진 세상
며칠 동안 두 사람은 그 '미궁' 테이프에 매달려 있다가
마침내 몇 가지 결론을 얻어냈다.
첫째, 그 테이프는 원래 공테이프였는데 레코드판의 '미궁' 곡을 녹음한 것이다.
라벨 자리에는 손으로 '황병기의 미궁'이라고 써 넣었는데 그것은 고봉길의 글씨였다.
둘째, 비명의 목리는 성문(聲紋)으로 보아 설희주의 것에 가깝다.
그러나 100프로 설희주의 목소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세째, 카세트 테이프에서는 여러 명의 지문이 나타났다.
설희주, 고봉길, 고봉식, 정혜와 영혜, 그리고 추경감과 강형사, 그중 추경감과
강형사의 것은 뒤에 만진 것이지만,
고봉식은 사건 전에 만졌는지, 추경감이 그 집에 다시 가서 그 테이프를 가져올 때 만졌는지
분간하기 어렵다.
네째, 그 테이프에 최초의 녹음, 즉 '미궁'을 녹음한 것은 고봉길이었고,
설희주가 특히 그 곡을 좋아해서 주었다
는 것을 알아냈다. 따라서 비명은 원래 곡을 녹음할 때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뒤에
삽입한 것이 분명했다.
"반장님, 나는 처음부터 고정혜와 정정필 부부가 수상하다고 보았는데,
이 테이프에까지 고정혜의 지문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그 로마 칼, 지문, 살인 동기 등 그 여자가 가장유력한 용의자 아닙니까?
어때요, 다시 한번 연행해 올까요?"
강형사의 눈이 반짝였다. 그가 곧 사건이 끝날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고 추경감은 생각했다.
"그것 가지고는 약해. 강형사가 정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들 부부에 대한 방증을 더 조사해 봐."
강형사는 추경감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 다시 그들 부부의 그날 행적을 더 세밀하게
더듬기 시작했다.
"그게 아니요, 젊은이. 걔들은 그럴 위인, 아니지 악인이 못돼요.
미운 사람을 죽이고자 할 때는."
고회장은 큰 기침을 두어번 해서 목에 걸린 가래를 뱉어 낸뒤 말을 계속했다.
"강형사라고 했나?"
"예."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자 할 때는 그만한 용기와 결단력이 있어야 하는 걸세.
정혜와 정필이? 허허허, 걔들은 내가 잘 알아요. 비겁하고 교양 없고,
결단력 없고 소견머리 없는 애들이요. 누굴 죽일 만한 위인들이 못 돼요."
고회장의 이상한 논리가 그럴 듯하다고 강형사는 생각했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살인범들을 보아 왔는데,
그들은 그들대로 범인으로서의 특징이 있었다고 생각되었다.
그게 지금 고회장이 말하는 결단력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장님 말씀에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고,
설희주가 살해되는 바로 그 시각, 즉 그날 오후 4시경 정혜씨와 정실장은 회장님과
같이 있었다고 주장을 하는데 맞습니까?"
강형사가 벼르고 벼르던 질문을 했다.
추경감이 절대로 그런 직설적인 질문은 하지 말고 방증을 수집하라고 했지만 이게
더빠른 길이라고 생각했다.
"인정머리없는 애들이에요. 남들은 딸자식이 더 자상하다고 하던데,
우리 딸년들은 애비가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도 자주 들여다 보지도 않는단 말야."
고회장은 강형사 질문에 답변은 않고 엉뚱한 불평을 했다.
호텔 브이아이피 룸에 거처를 마련하고, 침실, 거실, 부엌에 비서방까지 딸린 곳에서
호화 생활을 하면서 '이 고생'이라고 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한 끼에 수만원씩 하는 식사를 하면서 임시로 가설한 직통 전화 두 대로 업무 지시를 하고 있었다.
"왜 이 호텔에 계십니까? 저택이 더 편하실 텐데. 살인사건이 났기 때문입니까?"
강형사가 내친 김에 더 물었다.
"말도 마쇼. 미친 놈들이 일은 안 하고 모두 서울로 기어 올라와 본사 건물을
애워싸고 지랄을 하고 있으니 사무실에 갈수도 없고."
"댁은."
"사무실에 오는 놈들이 집엔 안 옵니까?"
"왜 그렇습니까?"
"이런 답답한. 당신도 공무원이요? 지금 빨갱이 비스무리한 놈들이 사방서
설치는 것 모르시오?
물론 우리 회사 노조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믿지만. 애들이 뭐 철이 있어야지.
꼭 떠드는 소리가 625 때 완장 찬 놈들 하는 소리 같아."
"요구 조건이 무엇입니까?"
"늘 하는 얘기지 뭐. 임금을 두 자리 숫자로 올려라, 족벌 경영 그만두라,
식당 메뉴 개선하라, 뭐 그런 건 다 좋아요.
아, 이익 나는데 두 자리 아니라 세 가리 숫잔들 왜 못 올리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꼭 그런 건 아니지.
우선 대기업하는 사람들이 물가 걱정해야 하고 나라 경제 걱정해야 하는 것 아니유?
대기업에서 돈 좀 번다고 임금을 펑펑 올리면 경제가 어떻게 될 거요?
그러니까 적당한 선에서 해결해야지.
가령 노총에서 말하는 도시민 최저 생계비에 근거한다든가,
금년도 소매 물가상승률을 참고한다든가 하는,
어떤 사회적 공적 책임 하에 임금이 이룩되어야 하거든.
받는 사람이야 많이 받을수록 좋다고 하지만길게 보면 결국 자기 꼬리 잘라 먹는 결과가 되지.
또 족벌 경영 그만 두라 아우성이지만 그건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 아닌가.
솔직이 말해 자기 자식이 다 똑똑해서 사장감 되는건 아니야.
하지만 나도 아들딸 넷에 사위, 동생, 처남 등 수십 명의 친척이 있지만 회사일에
관여하는 건 큰놈과 사위뿐이야. 큰놈은 내 가업을 이어야 하니까 장차 대주주가 될 것이고,
사위야 내가 비서로 데리고 있는데 뭐가 족벌 기업이야?
솔직이 말해 이 그룹 종업원 모두 합치면 8만명은 될 거야.
그런데 아들하나 사위 하나 관여한다고 그게 족벌 기업이야?
친척 중 똑똑하고 적성 맞는 사람 있으면 데려다 써야지 어떻게 할 거야? 식당 개선하라?
우리 식당에서 밥 먹어 보았소? 원가가 점심 한 끼에 1천2백30원 들어요.
장삿속으로 하는 무교동 식당 가면 3천5백원짜리요.
그런데 반찬 나쁘다 밥맛 없다 트집이거든.
나도 2주에 한번씩은 계열회사 돌아다니며 밥 먹어 본다구.
그런데 이게 뭐 하는 짓들이야? 자기 여편네까지 부사장으로 나오고 사돈의 팔촌까지
친척이면 모두 한자리씩 하는 우리나라 다른 재벌에 비하면 뭐가 그리 나쁜가 나쁘길!
솔직이 말해 젊은 시절부터 허리끈 졸라매고 피땀 흘리며 이룩한 회사야,
이게. 근데 자기네 회사처럼 어제 그저게 들어온 놈들이 설쳐대? 덮어 놓고 파업이다,
작업 거부다, 회장은 나와서 해명하라, 이거 뭐하는 짓들인지 모르겠어. 솔직이."
회장은 계속 솔직이란 말을 넣어가며 기염을 토했다.
자기 말대로라면 노조가 떠들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노조 농성이 겁나 사무실에도 못 가고 호화판 호텔 룸에 숨어 있는 것은
어쩐지 그의 말과 괴리된 무엇이 있는 것 처럼 느껴졌다.
"요즘 젊은이의 사고방식은 회장님 같은 분과 다른 게 많지요."
강형사는 동조도 거부도 아닌 말을 했다.
"다르면, 사원이 하루 아침에 사장 되고 사장이 죄인 되는 세상인가!"
"그런 말씀이 아니고. 하여튼 그건 그렇고, 제가 질문한 것은."
"알고 있어. 며늘아이가 죽는 시간에 딸년과 사위가 나하고같이 있었다는데 그게 맞느냐는,
말하자면 알리바이를 확인하려는 거지!"
"그렇습니다."
강형사가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정확하게 며늘아이 당한 시간이 그날 몇시인가?"
"오후 5시께입니다."
"정확한가?"
"검시 의사들의 견해입니다. 그러나 다소 오차는 있을 것입니다만."
고회장은 한참 동안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것들이 어처구니없는 짓들을 해가지고 나한테 달려와 보라고 아우성이었어요.
그날 5시반부터 사장단 회의가 있었는데 그때가 바로 그 시간이었거든."
"댁에서 여기까진 얼마나 걸립니까?"
"아마 4, 50분 걸리지."
"예, 알겠습니다. 그래서요?"
"그게 뭔고 하니 비디오 테이프였지. 자기들이 찍은
."
"무엇을 찍었습니까?"
"괘씸한 것들 같으니라고."
고회장은 얼굴을 찌푸리며 주먹으로 탁자를 쳤다.
"이왕 집안 망신한 거 다 얘기하지. 이것들보다 더 한심한 건 오래비 고봉식 사장이란 놈이요.
죽은 제 마누라 화해하라고 보냈더니,
화해는 커녕 밤새도록 쌈박질하고 새벽에 며늘아기 서울로 쫓다시피 보낸 뒤 뭐 한 줄 아시오?
건너편 호텔에 서울에서 미리 와 있는 비서년하고."
"양경숙씨 말입니까?"
"경숙인지 앙숙인진 몰라도 그년을 불러다 놓고,
나 이거야 원 낯이 뜨거워서. 제 마누라는 칼에 찔려 죽는 시간에 그년하고 둘이서.
그 짓 한다고 옷이 나와 밥이 나와? 그건 또 약과요. 딸년 내외도 올케 내외와 화해 좀
하라고 뒤딸려 보내 놨더니 이 물건들은 거기서 뭐한 줄 아시오?
무비 카메라 메구 제 오라비 비서년하고 놀아나는 것 졸졸 졸졸 따라다니며 몰래
비디오 촬영하느라 바빴어요."
강형사는 입을 딱 벌렸다.
"그것도 한두 장면이 아니고 두 연놈이 오골곈지 지랄인지 먹는것부터 밥 떠먹여 주는 거 하며,
껴안다시피 해서 자동차 모는 장면 하며, 하여간 찍은 테이프가 몇 통인지 몰라요.
더 낯 뜨거운 장면이 얼마든지 있어요.
무슨 포르노 영화를 만들기로 작정했는지 그렇게 많이 찍어댔더군.
하여간 인간 말짜들아니오? 내 자식 딸 사위지만 이렇게 더러운 인간 쓰레기들이오.
그것도 남도 아닌 제 오라비며 처남 일을 그렇게 한단 말이오!"
고회장은 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강형사를 한참 쳐다보고 있더니 냉수를 한 컵 따라 꿀꺽꿀꺽 마셨다.
"근데 그걸 왜 회장님께 가지고 왔나요?"
"글쎄 그것들이 그런 쓰레기들이라니까. 이때까지 뭘 들었소?
오래비 고봉식이 이렇게 계집질이나 하고 다니는 형편 없는 사람이니 삭탈관직하고
쫓아내라는 거지. 그리고 이 명왕성 그룹 후계자는 인품 좋고 똑똑한 정정필이 돼야
한다는 거야. 암, 인품 훌륭하고말고. 도둑 촬영이나 고양이처럼 하고 다녀서 그렇지!"
고회장은 아무래도 화가 나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 벽 쪽으로 갔다.
골프 퍼터를 쥐고 공을 굴려 구멍에 넣는 연습을 했다. 실내용 퍼터 연습기였다.
"따귀부터 한 대 올려 붙이려다가 마침 사람들이 들어와 참았지만,
나이 들고서 처음으로 비통한 기분을 느꼈소.
어쩌면 형제자매간인데 그럴 수가 있단 말이오?"
강형사는 고회장의 말에 거짓은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 놓고 사위녀석 하는 말이, 저희는 어디까지나 처남을 깨우쳐서 진보토록 하기
위한 충정에서였다나요.
이놈들 너희나 진보 많이 하라고 소리를 질러 주었지.
아마 이 러다가 내가 눈이라도 감게 되면 시신에 흙 덮기도 전에 저희끼리 재산
차지하겠다고 개처럼 물고 뜯고 싸움질할 거요.
그런 걸 유식한 말로 골육상쟁이라고 하던가.
그런걸 생각하면 회사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싶어요.
저 못난 놈들 모두 실업자 만들어 쫄쫄 굶게 하고,
회사 재산은 모두 장학 재단 같은 데다 내놓아 버리고 말이야."
그 말도 거짓으로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강형사는 호텔을 나오며 몇 가지 정리를 했다.
고회장이라는 사람은 사회에 대한 인식,
노사관 등에 자기 나름대로의 철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재벌의 총수라고 해서 무조건 욕심장이 부도덕한 인생관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란 것을 느꼈다.
둘째는 고정혜와 정정필이 그 시간에 거기 갔다면 알리바 이가 성립된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