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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좌담회어서 참고자료 - 개목초(開目抄)
강한 신심으로 이겨내라! 고난을 이겨내라
‘개목’은 문자 그대로 ‘눈을 연다’는 뜻입니다.
또 ‘눈을 열라’는 대성인의 호소로 배독할 수도 있습니다.
감긴 마음의 눈을 어떻게 뜨게(열게) 할 것인가.
무명(無明)의 어둠을 어떠한 광명으로 비출 것인가.
그 해결의 길을 여신 분이 말법의 본불이신 니치렌 대성인입니다.
<어서전집 234쪽 7행~9행>
나와 더불어 나의 제자(弟子)는 제난(諸難)이 있을지라도 의심(疑心)이 없으면 자연(自然)히 불계(佛界)에 이르리라. 천(天)의 가호(加護)가 없음을 의심(疑心)하지 말 것이며 현세(現世)가 안온(安穩)하지 않음을 한탄(恨歎)하지 말지어다.
나의 제자(弟子)에게 조석(朝夕)으로 가르쳐 왔건만 의심(疑心)을 일으켜서 모두 버렸으리라. 어리석은 자(者)의 버릇이란 약속(約束)한 일을 필요한 때에는 잊어버리느니라.
※ 개목초(開目抄)
상하(上下)2권(卷). 1272년 2월. 니치렌 대성인이 51세의 때, 사도유죄 중에 쓰카하라에서 술작하시어 문하일동에게 주신 어초.
니치렌대성인 어서 5대부, 10대부의 하나. 관심의 본존초가 법본존개현(法本尊開顯)의 어서라면, 개목초은 인본존개현(人本尊開顯)의 어서에 해당한다.
당체의초문단에서는 일련정종의 교행증(敎行證)으로서 개목초는 일대성교(一代聖敎)의 승열천심(勝劣淺深)을 교판(敎判)하고, 5단(段)이 교상(敎相)을 설하는 고로 ‘교(敎)’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
일련정종 제26세 니치칸저(著) ‘개목초문단(文段)’에는 ‘개목초’라고 제호한 요지는 맹목(盲目)을 여는 의(義)에 있다 하고, 진실의 삼덕(三德)구비의 구원원초의 본불을 모르는 일체중생의 맹목을 열게 하는 상(相)을 밝히는 고로 ‘개목초’라고 이름지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니치렌은 일본국의 제인(諸人)에게 주사부모(主師父母)이니라’라고 결론짓고 있듯이, 니치렌대성인 자신이 수량문저하종의 주사친삼덕을 갖춘 말법의 본불이라는 것을 명백히 밝힌 논문이다.
또한 니치칸상인은 개목초의 ‘일념삼천의 법문은 단 법화경의 본문·수량품의 문저에 잠겨 있느니라 (중략) 다만 우리의 천태지자만이 이것을 마음에 품었느니라’의 일문(一文)을, 수량문저심비(沈秘)의 진문(眞文)으로 하여 ‘삼중비전초’를 저술하고, 이 일문(一文)을 3단(段)으로 나누고, 의(義)에 십문(十門)을 열어서 대성인의 삼중비전(三重秘傳)의 오의(奧義)를 상설(詳說)하고 있다.
☞ 어서사전 33~34쪽
◇
사도의 가혹한 환경 속에서 집필
이 <개목초>을 쓴 유래에 대해 대성인 자신이 <사도초>에 자세히 쓰셨습니다.
“그리하여 모두 돌아갔기에 거년(去年)의 십일월부터 생각해 오던 개목초(開目抄)라는 문(文) 이권(二卷)을 만들었는데, 참수(斬首) 당한다면 니치렌의 불가사의를 남겨 두려고 생각하여 침사(沈思)하였느니라.
이 문(文)의 심(心)은 니치렌에 의하여 일본국의 존망(存亡)은 결정되리라. 비유컨대 집에 기둥이 없으면 지탱할 수 없고 사람에게 혼(魂)이 없으면 사인(死人)이니라. 니치렌은 일본 사람들의 혼이로다. 헤이노사에몬은 이미 일본의 기둥을 쓰러뜨렸느니라.
지금 세상이 혼란하여 이렇다 할 사유 없이 꿈과 같이 망어(妄語)가 출래하여 이 일문(一門)을 동족상잔(同族相殘)하고 후에는 타국으로부터 침공당하리라. 예컨대 입정안국론에 자세히 말한 바와 같으니라. 이와 같이 적어서 나카쓰카사사부로자에몬노조의 사자(使者)에게 주었노라”(어서 919쪽)
이 구절은 1272년 2월 <개목초> 집필 당시의 마음을 후에 회고하신 내용인데, 우선 ‘거년의 11월’ 즉 사도 도착 직후인 1271년 11월부터 <개목초>를 구상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대성인이 혹한의 땅인 사도의 쓰카하라에 도착하신 때는 11월 1일, 사도의 쓰카하라삼매당이란 “사자(死者)를 버리는 곳”(어서 916쪽) 즉 묘지에 있는 당(堂)을 말합니다.
한 칸 정도의 작은 건물로, 모셔야 할 부처도 없고 마룻바닥은 틈이 벌어졌으며 벽은 헐고 부서져, 완전히 폐가와 다름없었습니다. 찬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치고 눈이 쌓이는 환경에서 도롱이를 입고 바닥에는 모피를 깔고 하루하루를 보내셨습니다.
익숙지 않은 북방의 혹한에 더욱이 식량도 부족하여, 11월에는 함께 따라온 몇 명의 제자도 돌려보내셨습니다.
“필단(筆端)으로 쓰기가 어려우니라”(어서 956쪽)라고 하시듯이, 필설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현신(現身)에 아귀도(餓鬼道)를 느끼고, 팔한지옥(八寒地獄)에 떨어졌다고 느끼는 상황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곳에 유배된 자는 끝내 살아난 일이 없으며, 설혹 살아났다 하여도 돌아간 일은 없느니라. 또 때려 죽였다 해도 책망하시지 않는다” (어서 917쪽)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에서 니치렌 대성인은 깊이 사색하면서 인류를 구제하기 위한 대저(大著)를 쓰셨습니다.
지금의 200자 원고지로 말하면 200여 매에 상당하는 저술을 약 3개월동안 구상하고 집필하셨습니다.
대성인은 사도에 도착하고 바로 민중 구제의 서(書)를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대성인이 사도에 유배당하실 때의 경지(境地)에 대해 “성불의 경애란 절대적인 행복경(幸福境)이다. 그 무엇에도 침범당하지 않고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순간순간의 생명이 맑은 대해와 같고 구름 한 점 없는 허공과 같은 것이다.
사도유죄 당시, 대성인은 이와 같은 경애였다고 배견된다.
그러면 “이 몸을 법화경과 바꿈은 돌을 금(金)으로 바꾸고 분(糞)을 쌀로 바꾸는 것이니라”(어서 910쪽), “니치렌의 유죄는 금생의 소고(小苦)이므로 한탄스럽지 않노라. 후생에는 대락(大樂)을 받게 될 것이니 크게 기쁘구나”(어서 237쪽)라고 말씀하신 것은 본불님의 경애라고 생각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도다 조세이 전집>제3권)
사실, 니치렌 대성인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역경에서 어떻게 하면 전 인류를 부처로 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셨습니다.
그리고 <개목초>와 <관심의 본존초>를 집필하여 그 방도를 명확히 나타내셨습니다.
옛날부터 대난을 참고 견딘 자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성인이 더욱 위대한 까닭은 그 대난에서도 자신보다 민중 구제와 인류 구제를 위해 고뇌하셨다는 점입니다.
☞ 개목초 강의 - 제1회 ‘개목(開目)’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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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때’에 투쟁하는 신심을
이번 달 어서는 ‘난을 극복하는 신심’을 가르치신 중요한 성훈입니다.
니치렌대성인은 “결국은 천(天)도 버리시고 제난(諸難)도 당하여라, 신명을 바칠 뿐이로다.”(어서 232쪽)라고 하여 설령 제천의 가호가 없을지라도 말법의 일체중생을 구하고자 신명을 바쳐 광선유포를 위해 투쟁하겠다는 대서원을 세우셨습니다.
“제자여, 그 스승의 사자후에 호응해서 불이(不二)의 신심으로 일어서라.” 하고 만감을 담아 외치신 부분이 “나와 더불어 나의 제자”로 시작하는 어문입니다.
일생성불을 목표로 하는 도중에 ‘삼장사마’가 다투어 일어나고 광선유포 도상에서 ‘삼류강적’이 출래함은 경전에서 설한 내용과 같습니다.
대성인은 제천의 가호가 없거나 현세가 안온하지 않음을 의심하면 안 된다, 한탄하면 안 된다고 거듭 가르치셨습니다. 불신(不信)이나 방법(謗法)은 신심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난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의심이 없으면”, 다시 말해 대성인과 같은 불석신명의 ‘강한 믿음’을 관철하면 어떠한 고난도 승리해내는 강력한 생명력을 용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연히’ 성불의 경애를 열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대성인은 제자들에게 이러한 점을 진작 가르쳤지만 현실의 난에 직면하자 많은 사람이 의심을 일으켜 퇴전했습니다.
‘필요한 때’야말로 사제의 약속을 절대로 잊지 않고 강한 신심으로 맞서야 합니다.
이케다 SGI 회장은 말씀하셨습니다.
“‘난즉오달(難卽悟達)’ 인생에서 불법(佛法)의 난, 신앙하는 도중에 일어나는 난은 모두 ‘부처가 되려고 일어나는 난’입니다. 부처가 된다는 것은 ‘영원한 행복’ ‘영원한 승리’를 의미합니다.
영원한 부처와 동등한 인격과 인간으로서 궁극적인 힘을 지닌 자기 자신이 될 기회입니다.”
‘필요한 때’에 투쟁하는 신심에 ‘불계’가 빛난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다부지게 전진하지 않겠습니까.
☞ (1206) ‘월간법련’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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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할 때’에 싸우는 사람이 부처
니치렌 대성인 불법(佛法)의 진수는 ‘신(信) 즉 성불(成佛)'입니다.
그 ‘신’은 자신과 만인의 불성을 믿는 ‘깊은 신’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관철하는‘지속의 신’이어야 합니다. 또 어떤 마성도 지지 않는 ‘강인한 신’이 성불하게 합니다.
이 ‘신’ 즉 ‘성불’의 깊은 뜻을 설한 <개목초>의 다음 한 구절은 정말 유명합니다.
“나와 더불어 나의 제자(弟子)는 ··· ··· ” (어서 234쪽)
어떤 고난에 직면해도 ‘의심하는 마음’을 일으키면 안 됩니다. 제천의 가호가 없고 현세가 안온하지 않더라도 ‘한탄하는 마음’에 빠지면 안 됩니다.
불퇴의 마음으로 신앙을 관철하는 사람이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신심의 핵심을 밝힌 가장 근본적인 지도이며 영원한 지침입니다.
사제(師弟)의 정수를 밝힌 일절
이 어서의 첫머리에 “나와 더불어 나의 제자”라고 호소하십니다.
<개목초>에서 니치렌 대성인 자신은 근원악(根源惡)인 방법(謗法)과 싸우는 ‘진실한 법화경 행자’이고, 일본을 법멸(法滅)과 망국(亡國)의 위기에서 구제하는 ‘일본의 기둥’이며, 범부성불을 밝힌 대법을 나타내어 말법 시대 어둠을 영원히 비추는 ‘말법의 본불’이시라고 밝히십니다.
그리고 대성인은 “결국은 천도 버리시고 제난도 당하여라, 신명을 바칠 뿐이로다.”(어서 232쪽)라고 각오하시고 “나는 일본의 기둥이 되겠노라. 나는 일본의 안목(眼目)이 되겠노라, 나는 일본의 대선(大船)이 되겠노라.”(어서 232쪽)고 서원(誓願)을 사자후하며 정신의 핵심을 밝히셨습니다.
이 말씀과 비교하면 “나와 더불어 나의 제자”로 시작하는 구절은 스승이신 대성인의 정신과 호응하는 신심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십니다.
“나의 제자들이여, 스승과 함께 일어서라!”
“사자왕의 자식답게 의심과 한탄을 타파하라!”
“필요한 때에 신심을 망각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면 안 된다!”
‘대성인과 함께’라는 스승과 같은 결의로 일어서서 광선유포에 매진하는 이가 진정한 제자입니다.
누구든지 대성인과 같은 마음에 서서 “니치렌의 일문”(어서 1360쪽)이 되었을 때 이미 성불의 길은 널리 열려 있습니다. 그 대도(大道)를 똑바로 걸어가면 ‘자연히’ 성불합니다.
부처가 설한 법은 만인의 생명 속에 부처의 생명이 있다고 밝힙니다.
사람들 가슴속에 그대로 잠들어 있던 ‘불지견(佛知見)’을 열고<開>, 나타내고<示>, 깨닫고<悟>, 들게<入> 한다. 모든 사람을 부처가 되게 해야 부처 출세(出世)의 본회(本懷)가 이루어진다고 법화경에서 명확하게 설합니다.
자기와 같이 만인을 ‘위대한 인간’이 되게 하는 실천이 불교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어디까지나 스승과 같은 마음으로 투쟁하는 제자를 육성하는 데 주목적이 있습니다. 불교는 ‘사제의 종교’임이 틀림없습니다.
“천도 버리시고 제난도 당하여라, 신명을 바칠 뿐이로다.”라고 말씀하신 니치렌 대성인의 빛나는 혼의 불길이 모든 문하의 가슴속에 불타오를 때 ‘사제불이의 종교’는 완성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와 더불어 나의 제자”라는 호소에 “나의 문하들이여, 이진 삼진으로 뒤따르라.”는 진심이 담겨 있다고 배견됩니다.
불석신명이 사제의 유대
“나와 더불어 나의 제자”라는 말씀은 배독할 때마다 金文字(금문자)와 같이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보통 종교인이라면 “나의 제자들이여”라고 일방적으로 물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성인은 “나와 더불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도 그렇다”라고 말씀하시는 마음에 사제일체(師弟一體)의 불법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제를 관통하는 강인한 핵(核)이 ‘불석신명’입니다.
스승인 니치렌 대성인 자신도 또한 법에 대해 ‘불석신명’하셨기 때문에 불법을 만인에게 열어 알리는 민중의 지도자라 할 수 있듯이, 제자도 역시 제자의 차원에서 법을 홍통하기 위해 스승과 똑같이 ‘불석신명’을 실천하여 끝까지 투쟁해야 합니다.
‘필요한 때’에 무명과의 투쟁을 잊지 마라
“의심이 없으면 자연히 불계에 이르리라.”고 말씀하시듯이 ‘신’의 일념만이 의심과 한탄 등 무명의 생명을 타파하고 묘호렌게쿄의 역용(力用)을 생명에 나타내는 힘을 지닙니다.
그러나 ‘무명’의 힘도 매우 집요하고 뿌리가 깊습니다. 무명과 진정으로 싸워야 할 때 무명은 우리 마음속에 살면서 다가와 생명을 침해합니다.
그 어리석음을 “어리석은 자의 버릇이란 약속한 일을 필요할 때에는 잊어버리느니라.”고 훈계하십니다.
강성한 ‘신심’을 일으켜야 할 때 반대로 불신을 품고 의심을 일으켜 퇴전해 버린다면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지금이 ‘성불의 때’가 아닌가! 이 대난을 돌파하면 영원히 행복을 이룰 수 있다!”는 대성인이 외치는 혼의 울림이 전해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의심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한탄하지 않는다. 이런 강인한 정신을 가진 사람은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창가학회의 역사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 전 마키구치 선생님이 투옥되셨을 때, 대전 후 재건기에 도다 선생님의 사업이 어려웠을 때, 그리고 종문이 삼류의 강적으로서 악랄한 정체를 드러냈을 때 등, 지금까지 여러 대난에 직면했습니다.
이때 무엇을 어떻게 했는가. 여기에 제자로서, 불법자로서 실직적인 본질이 나타납니다.
“필요한 때”에 투쟁하는 신심에 오직 '불계'가 빛나는 것을 결코 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을 이 어서의 한 가지 결론으로 배견할 수 있습니다.
☞ 개목초 강의 - 제16회 ‘나와 더불어 나의 제자’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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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의 왕자들
신심은 무한한 희망이고 가장 강한 용기다. 깊은 어둠에서 새벽빛을 바라듯, 인생에서 가장 힘겨운 고난의 나날 속에서 아버지, 어머니는 필사적으로 어본존 앞에 앉아 기원하고 ‘어서’를 펼쳤다.
어서는 단순히 글자가 아니었다. 니치렌대성인의 사자후(師子吼)이자 자애에 넘친 육성이었다. 한 구절 한 구절을 대성인과 대화하듯 배독하고 생명에 새겼다.
“나와 더불어 나의 제자는 제난(諸難)이 있을지라도 의심이 없으면 자연히 불계(佛界)에 이르리라. (중략) 어리석은 자의 버릇이란 약속한 일을 필요한 때에는 잊어버리느니라.”(어서 234쪽)
이 어서를 배독하고 나서 지금이 ‘필요한 때’라고 정하고 ‘질 수 없다’며 고개를 들고 태양과 같은 웃는 얼굴로 지역을 비추는 어머니가 있다.
성훈에는 “나무를 심는 데는 대풍(大風)이 불어도 강한 지주(支柱)를 세우면 넘어지지 않으나”(어서 1468쪽) 하고 씌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도우며 꿋꿋이 살아야 한다고 한사람 또 한사람, 한 집 또 한 집 끈기 있게 발걸음을 옮기며 격려하는 아버지가 있다. 그러한 도전으로 정의로운 ‘오용사(반에서 장년부 5명 구축)’의 연대도 크게 넓히고 있다.
얼마나 존귀한 ‘여설수행(如說修行)의 아버지, 어머니들’인가!
“난(難)이 옴을 가지고 안락(安樂)”(어서 750쪽)이라며 맞선다. 그렇게 각오할 때 대성인과 똑같은 부처의 생명이 용현한다.
그것은 목숨을 위협하는 대난에도 물러서지 않고 사자왕(師子王)의 마음으로 민중구제를 위해 대투쟁을 펼치신 어본불에 직결하는 생명이다.
삼세의 제불(諸佛)이 상찬할 지용(地涌)의 기수인 ‘서민의 왕자(王者)’가 우리 도호쿠에는 무수히 많다.
☞ 수필· 창가의 大城이여 영원하라 (3)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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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민중이 출현
아쓰하라의 농민신도가 보여준 삶의 자세와 행동은 궁극적인 신심을 말해준다.
신심은 학식이나 사회적 지위, 재력 등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럼 무엇으로 정해지는가?
그것은 법난이라는 큰 시련과 맞닥뜨렸을 때 결코 좌절하지 않고 엄연히 맞서는 용기와 굳게 정한 마음이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싸워야 할 때’라고 받아들이고 스승의 말씀을 떠올려 마음속 깊이 새기고 자신이 정한 길을 관철하는 신념이다.
또 사리사욕과 보신에 집착하지 않고 법을 위해 이 한 몸을 내던지겠다는 각오다. 그리고 한 점 의심도 망설임도 없는 불법(佛法)의 법리에 대한 강한 확신이다.
반대로 퇴전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을 니치렌대성인은 다음과 같이 갈파하셨다.
“겁쟁이이고 법리를 기억하지 못하며, 욕심이 많고 의심이 많은 자들은 옻칠한데다가 물을 끼얹고 허공을 자르는 것과 같은 것이외다."(어서 1191쪽)
여기서 말씀하신 “법리를 기억하지 못하며”란, 대성인이 “어리석은 자의 버릇이란 약속한 일을 필요한 때에는 잊어버리느니라”(어서 234쪽) 하고 지적하셨듯 신념을 끝까지 관철하지 못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잊고 마음을 바꾸는 나약함과 어리석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미사와초>에는 제육천의 마왕이 권속에게 “그의 제자와 단나와 그리고 국토의 사람들 마음에 바꾸어 들어가서 혹은 간(諫)하고 혹은 위협해 보아라”(어서 1488쪽) 하고 명령했다고 씌어 있다.
아쓰하라법난 때도 승려인 다이신보와 산미보, 재가인 오타 지카마사와 나가사키 지로 효에노조 도키쓰나 등 대성인 문하가 퇴전해 교치 일파에 가담해 박해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정말이지 이 법리대로라고 할 수 있다.
본디 있을 수 없는 사태나 예상 밖의 상황을 만들어 신심을 교란시킨다. 이것이 제육천의 마왕이 노리는 일이다.
그러므로 광선유포의 싸움에서 방심하면 안 된다.
도다 조세이(戶田城聖)는 이렇게 읊었다.
“더욱더 / 험준한 산에 / 접어들었노라 / 광포의 여행 / 각오하고 나아가라”
☞ 신·․인간혁명 ‘常樂(17)’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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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御書)를 심간에 새겨라
전쟁이 한창일 때, 도다 선생님은 군부정부의 탄압으로 2년간 어두운 감옥 생활을 하셨다. 선생님은 감옥에서 ‘자신의 평생사명은 광선유포에 있다’고 궁극의 사명을 자각하셨다.
원통하게 옥사하신 마키구치 선생님의 제자로서, 거만하고 비열한 무리에게 복수하고자 맹세하셨다. 총살형도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출옥과 동시에 광선유포의 대투쟁을 시작하셨다.
그러나 똑같은 법난을 받은 다른 제자들은 모조리 퇴전했다.
<개목초>에서 “어리석은 자의 버릇이란 약속한 일을 필요할 때에는 잊어버리느니라”(어서 234쪽)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필요한 때’ 두려워하고 비겁해져 스스로 정의의 보검을 버리고 말았다.
도다 선생님은 한탄했다! 도다 선생님은 울었다!
어째서 감옥에 들어갔다고 퇴전해 버리는가!
더욱 영광스럽고 영원한 대공덕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아니었는가!
비겁한 신심 따위 어서의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다.
도다 선생님은 반성했다. 곰곰이 생각했다. 밤낮으로 철저하게 생각했다. 어째서 퇴전하는 것일까!
천재인 도다 선생님의 결론은 이러했다.
마땅히 신심의 추진력이 돼야 하고, 신심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교학이 없었다. 어서를 읽히는 것을 잊고 있었다.
교학, 어서를 심간에 새겼더라면 퇴전 따위 할 리가 없다. 겁쟁이가 분기(奮起)하고 일어나 용기를 갖고 투쟁해야 한다.
“어서다! 어서다!”
그 깊은 체험으로 깨달은 도다 선생님의 지도 아래 학회는 간부도, 회원도 어서를 자신의 몸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교학이 없는 불법(佛法)은 없다.
신심이 없는 불법은 불법이 아니다.
시간만 있으면 어서 연찬에 면려(勉勵)했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회합에서 어서를 배독하고, 논하고, 서로 공부했다.
새로운 혼의 불꽃이 타올랐다.
원대한 새로운 미래를 응시하는 눈이 빛났다.
어서 배독은 인간혁명이었다.
어서 배독은 신심이 무한대로 깊어지는 원동력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교학이란 관념의 교학이 아니다. 암기하는 교학도 아니다. 학자가 되기 위한 교학도 아니다.
대성인의 교학이란 꿋꿋이 사는 힘, 철저하게 투쟁하는 힘, 광선유포를 위해 힘이 되는 교학이었다.
그 교학은 자신의 피와 살이 되어 온갖 인생의 현실과 싸워 전진하기 위한, 사회에서 반드시 승리하기 위한 교학이자 대철학이다.
☞ 수필· 인간세기의 빛 (45)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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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란 얼마나 장대하고 낭만적인가
일단 유사시에 어떻게 움직이는가.
어떻게 스승과 함께 일어서는가. 어떤 일념으로 기원하고 싸우는가.
불법은 승부다. 그 궁극은 지금 이때 보여주는 ‘사람의 행동’이다. 이기느냐 지느냐 인생의 진가를 발휘할 국면은 거기에 있다.
이 일단 유사시에 비겁하고 만심에 차서 스승을 배신하고, 동지를 배신한 배은망덕한 소행은 영겁에 걸쳐 지울 수 없는 오점으로 각인된다.
“어리석은 자의 버릇이란 약속한 일을 필요할 때에는 잊어버리느니라.”(어서 234쪽) 하고 성훈에 씌어 있는 대로다.
대성인의 가책은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현재도 미래도 비추는 신심의 명경이다.
1950년 도다 선생님의 사업이 궁지에 빠졌을 때도 그랬다. 평소 잘난 체하던 인간이 침을 뱉고 앞을 다투어 도망갔다.
정의로운 사제의 길, 즉 광선유포의 명맥이 끊어지느냐, 이어지느냐 하는 학회의 존망이 걸린 위기에 나는 도다 선생님을 필사적으로 지켰다.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죽을 각오로 스승을 끝까지 지켰다.
사제의 길을, 사제불이라는 절대 승리의 황금 같은 길을 미래 영원히 장엄하게 남겼다고 자부한다.
어쨌든 지금도 마찬가지다. 진실한 청년이라면 고난이 클수록 광선유포의 대원을 드높이 내걸어야 한다.
1276년 3월 18일, 니치렌 대성인은 스승을 지키려고 진심어린 공양을 다하는 난조 도키미쓰를 이렇게 칭찬하셨다.
“법화경의 명(命)을 잇는 것이 아니겠느뇨.” (어서 1530쪽)
법화경의 진정한 행자이신 스승을 섬기는 일은 그대로 법화경의 생명인 ‘만인성불’의 정도(正道)로 들어가는 길이다.
그것이 ‘일염부제 광포’의 대도(大道)를 드넓게 열어 나아가는 것이다.
☞ 수필· 인간세기의 빛 (147)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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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체절명의 위기를 찬스로! 절망의 늪에서 소생!
신심을 다시 시작한지 3개월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라 당황스러웠다.
“나와 더불어 나의 제자는··· ··· ”(어서 234쪽)라는 성훈을 떠올리며 김씨는 ‘이번에야말로 나의 숙명을 되받아치는 기회다. 신심을 확신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고 다기지게 다짐했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창제를 했다. 반드시 아이가 건강을 되찾아 광포의 인재로 성장하기만을 바랐다.
치료과정에서 폐가 터져 바람이 새기 시작했다고 했다. 절대 동요하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고 창제를 지속했다. (중략)
☞ ‘체험의 현장’ 에서
http://m.cafe.daum.net/seikyoohknews/WE2Q/133?listURI=%2Fseikyoohknews%2FWE2Q%3FboardType%3D
2016년6월 좌담회어서참고 - 개목초(開目抄).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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