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에 관한 추억들
이두백
나에게 서울역하면 먼저 떠오르는 시절이 1969년이다. 서울철도국 소속 국가운수직 5급을(지금 9급) 공무원생활을 2월부터 시작한 것이다. 고교졸업 후 합격해둔 대학도, 입학식 날 바로 휴학하고 경춘선 금곡리역에서 역무원으로 근무를 시작했고, 4월부터 한 달간 서울역에서 특별교육기회가 주어졌다.
서울역의 서쪽 역 소위 서부역에서 잘 짜인 강의를 약 30명이 같이 받기 시작했다. 이화여대를 나와 서울역 중앙 안내데스크에서 근무하던 분, 남편이 철도사고로 별세하자 부인에게 근무기회를 부여하여 청량리역에서 근무하던 분, 인천, 의정부 등 서울철도국 산하 여러 지역 기차역들에서 근무하던 분 등 근무지역도 다양했고 연령층도 다양했다.
21세 혈기왕성할 때였고, 9개월여 전인 1968년 5월 부친의 큰 교통사고 처리 및 후유증으로 공부집중이 잘 안되어, 부러 고향을 훌쩍 멀리 떠나온 터라 마음껏 놀고 마음 편하게 1년을 보내자고 마음먹고 시작한 공무원생활이라 매일이 즐거웠다.
기차 무료탑승 가능한 소위 패스권을 모두 지녔기에, 서로 근무하는 역들을 교대로 가보기도 했고 주말에는 서울역에서 의정부를 거쳐 타원형으로 한 바퀴 빙 도는 교외선을 타고 백제. 일영, 송추지역 유원지들도 많이 다녔고 더 먼 거리 합동 야유회도 갔었다. 더 멀리는 몇몇이 강릉 경포대에도 다녀왔다.
서울역 서부쪽역에서 오전에 교육 받던 중에 갑자기 사람이 죽는 경우도 봤다. 나이 지긋하시고 풍채도 좋으신 강사 분께서 칠판에 무얼 쓰시면서 설명하시다가는 그냥 쓰러지셨던 것이다. 당황한 수강생들이 우왕좌왕하다가 용산에 있던 서울철도국 사무실에 연락을 취했고 사람이 와서 병원에 모시고 갔는데 결국 돌아가셨다. 뇌출혈이 사망 원인이었다는데 응급조치로 피를 흘리게 했어야했는데 마땅한 기구도 없었고 응급조치방법을 아는 수강생도 없었다. 수강생들 모두 인천 가기 전 당시 시골이었던, 부평지역까지 문상을 갔는데 모두 허탈한 심정이었다.
몇 주 교육받다가 고등학교 때의 펜팔여학생이 생각나서 전북 김제를 다녀오기도 했다. 고2~3학년 중 거의 매주 몇 차례씩 즐겁게 편지를 교환 했었다. 사진도 몇 장 교환했었다. 48매 편지를 쓴 적도 있었다. 편지지 12장 양면에 편지를 써서 우송했는데, 집에 와서 보니 1매가 빠져 있었다. 그걸 보내는 김에 또 추가로 쓰기 시작하여 편지지 12장 양면을 가득 채웠었다. 무슨 할 말들이 그리 많았었던가! 크리스마스선물과 고교 졸업 선물도 보내줬던 그 펜팔여학생이 갑자기 마지막 편지라고 보내오면서 그 편지 받았다는 간단한 엽서라도 보내달라고 했었다. 그래서 만나서 그 복잡했을 사연을 알고 싶었었다.
서울역에서 야간 보통 급행열차를 타고 새벽에 익산역에 도착했고, 거기서 완행열차를 갈아타고 부용역에 도착하여 편지에 적혀졌던 주소를 따라 그 마을을 찾아갔고 결국 만났다. 평소 교환하는 편지들을 꼭 부모님께 읽어준다고 하였기에 용기를 내어 찾아갔었지만 사전에 알리지 않고 시골집을 찾아간 것이었기에 매우 미안했다. 펜팔여학생의 부모님 오빠 여동생 모두 만나봤고 부친과 겸상으로 점심대접을 받기도 했다. 쪽지에 내주소를 적어줬었지만 그 펜팔여학생이 편지를 보내오지 않아 그 후 편지 교환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40년 후인 2009년. 2008년 말에 낸 내 첫 수필집<상처뿐인 영광> 2권을 펜팔여학생의 오빠에게 보내면서 짧은 편지를 동봉했다. 동봉한 편지엔, 1969년 사전 연락 없이 시골집을 찾아간 것 죄송스럽게 생각하면서, ‘어디서 잘 살고 계실 여동생께도 1권 보내드리기를 부탁합니다.’라고 썼었다. 책2권은 다행히 반송되어 오질 않았다.
서울역서부쪽역에서 한 달 교육을 마치고는 경춘선 금곡리역에서 열심히 근무에 임하였다. 가끔 고향 영광을 다니러 갈 때는 경춘선을 이용해 성동역(지금은 없어짐.)에 내리거나 버스로 청량리역에 내려 서울역으로 이동하여 호남선을 타곤 했다. 그해 여름이었다. 서울역에 도착하여 호남선 가는 기차시간표와 요금표를 열심히 살펴보는데, 어떤 신사분이 옆에 와서 몇 마디 묻더니만, 잔뜩 긴장하고 경계하는 몸짓으로 내 양쪽 옷소매 끝단을 갑자기 틀어쥐는 것이었다. 권총을 꺼내거나 독침 꺼내는 것을 봉쇄하기 위한 것이었다. 금곡리역에서 야간근무를 하고 초췌해진 얼굴에다, 매우 수수하게 차려 입은 형색이 마치 북에서 파견된 간첩인 듯이 오인했던 것이다. 철도공무원증을 보여주고 서울역에서 근무하는 동료들 이름을 대면서 필요하시면 대면 확인이나 전화확인하시라고 했더니 죄송하다며 돌아서는 것이었다.
그해 가을 추석명절이 돌아왔다. 지금같이 고속버스가 없던 시절이라 서울에서 고향 갈 때는 기차만이 유일한 장거리 교통수단이었다. 예매제도조차 많지 않던 때라, 고향 가는 귀성객들은 서울역광장에 일찍 나가 길게 줄을 서서 기차표를 사야했다. 기차표를 산 다음엔 기다렸다가 서울역 안으로 들어가는 개찰절차를 밟았고, 좌석제가 아니고 선착순으로 자리를 잡았던 것 같다.
기차표를 살 필요도 없이 무료패스권을 이용해 고향 가는 기차를 일찍 탈 수 있었지만, 나는 부러 기차표를 사기 위해 서있던 귀성객들의 긴 줄로 갔다. 긴 줄을 죽 보면서 혹시 아는 고향친구나 고향 사람들을 만날 기대를 기대했다. 한참을 돌아보는데 중학교 동기동창 친구가 보였다. 서울의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는 소식만 들었었는데 4년 만에 만나니 무척 반가웠다. 대한통운에 다닌다고 했고 쌍둥이 형은 동아일보에 다닌다고 했다. 중학교 3학년 때, 나랑 그 친구, 그 친구의 쌍둥이 형이랑 모두 같은 반이었다. 여동생과 같이 고향 영광을 가려고 나왔는데 너무 긴 줄에 귀향을 포기할까도 생각했었단다. 내가 약간의 편의를 제공하여 그 친구 및 친구여동생이랑 즐거운 추석명절 귀성대열에 합류했다.
약 50년 후인 2019년경이었던 같다. 추석명절에 기차로 고향을 같이 갔던 그 친구의 쌍둥이 형을 서울에서 만났다. 쌍둥이 동생은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고 여동생도 잘 살고 있다고 했다. 한문공부를 많이 했고 주역 64괘에 통달한 덕분에 그것들을 잘 활용하는 경제적인 일을 70대인 지금도 하고 있다니 더욱 반가웠다. 평일엔 너무 바쁘다고 하여 주말에 만나 즐거운 식사와 환담시간을 가지면서 여러 소식을 나누니 반갑고 즐거웠다. 특히 중학교 때 영어를 가르쳤던 여선생님께서 시집을 내셨다는 소식을 전해주니 더욱 반가웠다. 그런데 중학교 다닐 때는 몰랐는데 나보다 세 살이나 나이가 많은 1945년생이라고 했다. 그렇게 6.25전쟁 후엔 늦게 학교를 다닌 친구들이 많았다. 중학교 다닐 때 두 쌍둥이 친구들이 그렇게 나이가 많은 줄 모르고 함부로 하지 않았었나 하고 돌아봐졌다. 이젠 서울역에서 만나 추석명절 때 귀향하기 위해 긴 줄을 섰던 서울역광장도 돌아보고 서울역의 서쪽역 소위 당시의 서부역 자리가 어떻게 변했는지도 즐겁게 확인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