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김제에 있는 금산교회는 ‘ㄱ’자교회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지금도 보존되어 있는 옛적 한옥 예배당 모습이 기억자 형태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선교 초기에 전라도지역은 미국의 남장로교 선교구역이었다. 1904년 봄 말을 타고 전주에서 정읍을 왕래하며 복음을 전하던 테이트(최의덕 1862-1929)선교사는 오가는 길 중간 지점인 김제 용화마을에 머물곤 했다. 선교사는 어느 날 용화마을에서 제일 큰 부자였던 조덕삼의 집 마방에 말을 맡기고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오랫동안 테이트 선교사를 지켜봐왔던 조덕삼은 그에게 "살기 좋다는 당신네 나라를 포기하고 왜 이 가난한 조선 땅에 왔는가?“고 물었다" 테이트 선교사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당시 보수적인 유교사상에 투철했던 조덕삼에게는 참으로 놀라운 말이었다. 이후 조덕삼은 자신의 집 사랑채를 내어주어 예배를 보도록 했다. 이것이 금산교회의 출발이다. 그런데 이 교회에서 더욱 놀라운 사건이 발생했다. 조덕삼의 집에는 머슴 겸 마부로 일하던 이자익이라는 청년이 살고 있었다. 그는 경남 남해출신으로 6세 때 부모를 여의고 굶주림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고향인 남해를 떠나 곡창지대인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것이다. 첫눈에 그를 불쌍히 여긴 조덕삼이 그를 거둬 머슴 겸 마부로 고용한 것이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공부를 전혀 하지 못한 이자익은 어깨너머로 배운 천자문을 줄줄 외웠다. 그를 지켜본 조덕삼은 비록 자신의 머슴이었지만 아들(조영호)과 함께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신앙생활도 같이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조덕삼과 이자익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며 몇 년 지나 두 사람 모두 집사를 거쳐 영수가 되어 있을 때인 1907년 금산교회는 장로 장립 투표를 실시했다. 그런데 조덕삼과 이자익 두 사람이 후보에 올랐다. 당시만 해도 신분질서가 명백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주인과 머슴이 경쟁상대가 된 것이다. 투표 결과는 더욱 놀라웠다. 머슴 이자익이 주인 조덕삼을 누르고 장로로 선출된 것이다. 성도들도 놀랐다. 그런데 조덕삼영수에게서 더욱 놀라운 인사말이 나왔다.
"우리 금산교회 성도님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는 이자익 영수(장로보다 낮은 직분으로 교회의 행정과 설교를 맡아서 하는 직책)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훨씬 높습니다. 그를 장로로 뽑아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자신을 누르고 장로로 먼저 피택된 머슴을 조금도 미워하거나 질투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리고 실제로 장로가 된 이자익이 테이트 선교사를 대신해 교회 강단에서 설교할 때면 조덕삼은 교회 바닥에 꿇어 앉아 그의 설교를 들었다. 집에서는 이자익이 조덕삼을 주인으로 깎듯이 섬겼다. 조덕삼은 자신의 머슴을 장로로 섬겼을 뿐 아니라 그가 평양에서 신학을 공부할 수 있도록 추천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조덕삼은 그로부터 3년 뒤 비로소 장로가 되었다.
조덕삼장로는 교회를 신축할 수 있도록 자신의 땅을 헌납했다. 교회는 한옥으로 ㄱ자 모양으로 지어졌다. ㄱ자 중심에 강대상이 마련되었고, 양 날개 부분에 남자와 여자 성도들을 따로 앉도록 했다. 출입문도 양쪽으로 냈다. 예배 도중 남녀가 얼굴을 서로 바라볼 수 없도록 중간에 휘장을 쳤다. 강단 뒤쪽에 목사들이 출입하던 작고 낮은 쪽문은 '겸손'을 자연스럽게 가르쳐줬다. 테이트 선교사는 교회에 들러 이 쪽문을 드나들 때면 늘 "주께서 겸손을 가르쳐 주시는 것 같다"고 뿌듯해했다.
이 ㄱ자교회는 전북문화재 제136호다. 교회구조와 배치가 한국 전통사회의 남녀 구분이라는 과제를 해결한 것과 함께 지주와 머슴의 신분질서를 뛰어 넘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자익은 주인 조덕삼장로의 배려로 훗날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1915년 금산교회 2대 목사로 부임했다. 이자익을 담임목사로 적극적으로 청빙한 사람이 조덕삼장로였다. 조덕삼은 이자익을 담임목사로 깎듯이 예우했고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이자익 역시 사랑으로 성도들을 돌봤고, 교단에서 세번씩이나 총회장을 지내는 한국교회사의 거목이 되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다.
ㄱ자교회로 유명한 전북 김제 금산교회는 매주 순례객들로 붐빈다. 한 주에 보통 십여개 교회의 성도들이 찾는다고 한다. 한옥 ㄱ자 형태가 그대로 보존돼 있는 모습과 함께 믿음의 선조들이 꽃피운 아름다운 신앙 이야기가 큰 감동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금산교회는 100여년 전에 남녀, 양반과 머슴으로 구분 짓던 신분질서 시대에 참된 소통과 섬김, 평등, 인권 같은 기독교적 가치와 사랑을 실천한 모범적인 역사와 사례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금산교회를 세운 조덕삼 장로는 아들과 손자까지 3대째 장로로 섬긴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오래전에 대전신학대학교에서 ‘이자익목사기념관 현판식’이 있었다. 그 행사에 조덕삼 장로의 손자 조세형장로(국회의원)와 이자익 목사의 손자 이규완장로(고분자학 박사)가 만났다. 이규완 장로가 조세형 장로에게 허리를 굽혀 “옛날에 우리 할아버지께서 주인을 참 잘 만났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주인을 잘못 만났더라면 지금의 저희들도 없고 우리 할아버지도 안계셨을 것입니다.”라고 정중히 인사했다고 한다. 조상들의 섬김과 나눔을 대를 이어 기억하며 고마워하는 마음이 참으로 정답고 훈훈하다.
지난 2009년에 조세형장로가 별세했다. 당시 천정배 의원은 추도사에서 “김제에 이름난 기독교 집안이었던 당신 조부께서는 집안 머슴이 먼저 장로로 뽑히는 일을 기꺼이 지원하고 동의하셨습니다. 위아래 없는 민주적 가치가 바로 당신의 유전자였던 것입니다.”라고 했다.
조덕삼은 1906년에는 자비를 들여 유광학교를 설립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청소년 교육에 나선 것이다. 학생들은 날마다 예배를 드리며 한글과 역사를 배웠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유광학교 교장이 된 조영호는 나라 사랑을 가르치며 태극기를 그리게 했다. 3․1운동 때는 그 태극기를 꺼내들고 만세를 불렀다. 이 일로 조영호 교장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곤욕을 당하다가 북간도로 가서 독립군과 협력했다. 독립애국지사다./홍익교회 장로,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