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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대통령 이승만(2)-공적과 과오
남정욱 외 저자들이 집필한『이승만 깨기-이승만에 씌워진 7가지 누명』(2015)은 이승만에 씌워진 누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건국을 해놓고도 아버지 소리를 못들었다.
- 민주주의를 몸소 실천하고도 독재자 소리를 들었다.
- 침략군이 쳐들어와서 당연히 컨트롤 타워를 옮겼는데도 도망자 취급을 받았다.
- 북쪽에 먼저 정부가 들어섰기에 우리도 정부를 세우자고 했다가 분단의 원흉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 미국을 압박해 어렵게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는데 돌아온 건 미국의 앞잡이라는 손가락질이었다.
- 정작 친일정권에 세워진 건 북한이었는데 골고루 사람을 기용해 세운 남한정부는 친일정부 누명을 썼다.
- 폼만 나고 실익은 없는 무장투쟁 대신 국제정세에 유익한 외교 전략을 활용한 혜안은 몸사리는 겁쟁이란 비난으로 돌아왔다.
이제 그런 어리석고 못난 일을 끝낼 때가 되었다.
◇ 이승만에 대한 단계적 폄하
책은 이어서 한국의 초중고 교과서가 얼마나 이승만을 단계적으로 폄하하는가를 지적한다.
이승만을 역사에서 매장시키려는 획책은 대단히 치밀하게 단계적으로 진행된다.
초등학교 때는 이승만은 '독재자'라 배운다. '초딩'의 머리로는 그 정도가 적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 어느 독재자가 국민이 내려오란다(하야)고 바로 내려오나.
중학교에 가면 이승만은 '부정선거로 당선됐다'고 선전한다. 4∙19혁명이 일어난 제4대 대통령 선거 때 이승만은 이미 대통령 선거 확정상태였다.
부정이 저질러진 것은 부통령 선거였다. 그런데도 이승만은 그 책임을 자기가 졌다. 데모하는 학생들을 칭찬했다. 다친 시민이 있다는 말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북한군이 쳐들어오자 서울을 버리고 도망치면서 한강 다리를 끊어 백성들을 억울한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설명은 고등학교 때쯤 나온다.
전쟁이 벌어졌을 때 제일 먼저하는 게 도로 통제와 교량 폭파, 그리고 대통령과 지휘부는 전시 후방에 빠지는 것이다.
비난하는 자들에게 묻고 싶다. 그럼 대통령이 서울에 남아서 권총으로 항전하기를 바라는가? 오히려 고집 피우다가 피난을 너무 늦게 갔다. 이게 오히려 지적할 문제다.
그리고 한강교 폭파는 이승만이 아니라 북한군이 서울에 입성하자 참모총장 채병덕 장군의 지시로 공병대가 실시한 것이다.
공병대가 6월28일 새벽에 한강교를 파괴했지만 다른 곳의 폭탄이 터지지 않아서 북한군은 사흘 후 이를 통해 서울을 점령했다.
'국민들에게 피난가지 말고 안심하라'고 한 방송은 이승만이 한 것이 아니라 국방부 정훈국이 심리적으로 국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방송인데, 방송국에서 끄지를 않아 계속 방송된 것이다.
2차 대전 때 일본은 항복할 때까지 '계속 잘 싸우고 있다'고 독려하는 바람에, 한인들은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일본을 도우면서 후진양성에 매진하다가 일본이 갑작스럽게 망하는 바람에 '친일파'로 낙인 찍힌 사람들도 많다.
이렇게 해서 머리가 여물지 못한 아이들은 독재자와 부정 선거의 주범과 비겁한 도망자로 기억에 이승만을 새긴다.
대학교에 가면 좀 더 정밀하게 왜곡이 펼쳐진다. '정읍 발언'을 문제 삼아 분단의 원흉으로 몰고간다. 아쉬운 점은 이승만은 '늦었지만 우리도'라는 말을 해야 했다.
북쪽에 정권이 차근차근 만들어지는 가운데 우리는 손놓고 있었다. 남한의 정부는 북한 정부 보다 출발이 2년 늦었다. 실제로 북한은 1946년에 정부 수립을 완료했다. 남한에는1948년8월15에 정부가 들어섰다.
◇ 투쟁론과 외교론
항일운동을 하지 않았다는 모략은 좀 치사하다. 북한의 김일성이 소련의 앞잡이였기 때문에 이승만을 그렇게 보는가 보다.
사람은 잘하는 걸 해야 한다. 미국은 '입에 칼을 물고 뛰는 노인(이승만)'에게 질릴 대로 질렸다.
이승만은 외교를 잘하는 정도가 아니라 숱하게 '신의 한수'를 던졌다. 그리고 외교의 효과는 총질 보다 몇 배나 컸다.
중국 춘추전국 시대에 ‘세 치 혀가 백만대군 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다.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2차 대전 중, 식민국 중에 유일하게 카이로 회담(1943.11.22~12.1)에서 독립을 약속한 국가는 한국밖에 없다.
카이로 선언은 미∙영∙중 원수들이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 ‘적절한 시기’ 또는 ‘절차’에 의해(in due course)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종전에는 중국의 장제스(장개석) 총통이 임시정부 지도자들에게 약속한 것을 실천했다고 이해해왔다.
그러나 미국 외교 문서를 중심으로 한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이승만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한국의 독립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고, 이승만을 위해 조직된 한미협회 이사들과 기독교인친한회 소속 목사 등이 루즈벨트에게 제출한 청원 등이 루즈벨트와 특별보좌관 홉킨스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도움을 준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루즈벨트 대통령이 홉킨스에게 지시하여 문구를 작성했고, 윈스턴 처칠이 이 문구-“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킨다-에 근거한 초안을 작성하여 미(루즈벨트)∙영(처칠)∙소(스탈린) 원수들이 서명하여 공표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승만의 또 다른 탁월한 '신의 한수'는 한미협정 체결이다. 1951년 시작된 휴전 회담을 이승만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국토와 국민이 결딴났는데 통일도 없이 분단된다는 것은 새 지옥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7만 명 이상의 미군 인명 손실과 막대한 전쟁 비용으로 인한 국내 여론 악화로 전쟁을 지속하기 어려웠다.
이승만은 이대로 휴전이 이뤄지면 미군은 한국을 떠날 것이고, 고립된 섬으로 남는 한국이 중·북·소련에 의해 적화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보았다.
그렇지 않더라도 일본 세력권에 편입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전망이었다. 미국은 그걸 원하고 있었다. 이승만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953년 5월부터 7월까지 3개월간 '이승만 대(對) 미국'의 살벌한 갈등은 약소국이 살아남는 지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한편의 교과서다.
1953년 3월 소련의 스탈린이 죽자 휴전 회담이 다시 활기를 띠었다.
이승만은 4월 22일, 중공군의 북한 주둔을 허용하는 휴전 협정이 맺어지면, 한국군은 유엔군에서 이탈해 독자적으로 북진통일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미국은 두번째로 이승만 제거 작전인 '에버-레디'(Ever Ready) 작전을 세웠지만 취소했다. 다른 한 번은 이승만이 미군정이 지지하는 좌우합작정부 수립을 반대했을 때였다.
이승만은 휴전협정에 동의하는 대신 한미협정 체결을 요구했다.
이승만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한·미 동맹 없이 휴전되는 것은 한국에 대한 사형 집행'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7월 9일, 휴전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약속과 함께 한·미 동맹 조약 초안을 제시했다.
미국은 6∙25전쟁 이후의 한국에 대해서도 별 '전략적 가치'를 두지 않았다.
그러나 이승만의 독단적인 '반공포로 석방'(1963.6)에 미국은 물론 전세계가 경악했다.
반공포로 석방으로 공산측이 휴전협정체결을 거부할 것을 두려워한 미국은 이승만이 향후 어떤 망령된 일이라도 벌일 수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했다.
미국은 하는 수없이 이승만의 요구를 수락했다. 미국은 5월 30일 이승만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 외에는 6·25전쟁을 중단할 방법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협정은 이승만의 요구대로 '한미상호방위조약'(1953.10.1)이 되었다.
조약의 핵심은 '한쪽이 공격을 받으면 다른쪽이 자동적으로 개입한다'는 조항과, 미군 2개 사단을 한반도에 주둔시키고 국군 20개 사단의 무장에 필요한 군사원조와 경제부흥 자금을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이 타국과 이런 조약을 체결한 것은 전무후무했다.
이승만은 "한·미 동맹으로 우리 후손들이 여러 대에 걸쳐 갖가지 혜택을 누릴 것"이라고 했는데 그대로 적중했다.
한국은 한미협정 덕분에 70년 동안 전쟁 없이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좌파들은 이승만의 외교정책은 폄하하고 무력독립항쟁은 높이 평가한다.
물론 독립항쟁 정신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실제적 효과는 미미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리 한인이 항일운동에 투철해도 소수의 병력이 소총과 몇 개의 수류탄으로 당시 첨단무기로 무장한 정규군만 800만 명에 달하는 일본군을 대항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일제를 대첩한(?) 청산리 전투(1920.10)나 봉오동 전투(1920.6)는 모두 확대 과장된 역사왜곡이란 사실이 최근 밝혀지고 있다.
미국도 원자폭탄을 사용하기 전에는 혼자서 일본군을 대적하기가 버거워서 소련의 스탈린에게 대일 참전을 수차례 종용할 정도였다.
일제는 당시 최고의 항공모함과 탑재 전투기 및 거포를 장착한 군함으로 청나라와 러시아군을 물리치고 미국을 힘들게 만들 정도의 군사대국이었다.
더군다나 독립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후, 일제는 반드시 그 주변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독립군에게 양식과 거처를 제공했다는 명목으로 무자비한 보복을 했다.
이 때문에 이승만은 효과는 미약하고 후유증이 큰 투쟁론보다는 강대국 설득을 통한 외교론을 고수했다.
이승만이 감옥 동기이자 무장투쟁론자인 박용만과 갈라진 것도 이러한 견해차이 때문이었다.
일제 요인 암살과 무력투쟁을 지휘한 김구도 미국의 원자탄 폭격으로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자 한국의 해방에 ‘지분’(持分. 공헌)이 없음을 알고 독립과정이 순탄하지 않은 것이라고 예감했다.
예감 대로 미군정은 한국인의 독립투쟁이나 임시정부 등의 조직이나 공헌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고 이승만이나 김구의 입국을 ‘개인 자격’으로 허용했다.
◇ 한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재명 민주당 전 대선후보는 대한민국은 미군정과 친일파를 등에 업고 이승만 개인의 권력욕으로 세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고 말했다.
이승만의 독립투쟁은 '민족'과 민중'은 아랑곳없이 대통령이 되겠다는 권력욕 탓이라고 좌파들은 비난한다.
이승만을 최초로 매도한 자는 남로당 공산주의자 박헌영(1900~1955)이다. 해방 후 박헌영은 남로당 대표로 이승만을 일방적으로 추대해 놓았다.
그러나 이승만은 귀국 후 박헌영의 요청을 당연히 거절했다. 박헌영은 수차례 요청했지만 거절 당하자 그때부터 이승만을 '친일파', '반민족주의자'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승만 폄하는 박헌영의 아들대로 이어졌다. 전 서울 시장 박원순과 박헌영의 아들 원경 승려(본명 박병삼)는 '역사문제연구소'를 설립(1986)하여, 한국의 대표적 종북좌파 힉자들을 대거 영입하여 한국 역사를 본격적으로 왜곡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특히 이승만과 박정희를 매도했다.
이들은, "이승만·박정희 정권이 수호한 것은 ‘민주주의’가 아닌 ‘반공 군사독재’였다.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반북·멸공을 위해 민주주의를 유보하자는 ‘사이비 민주주의’였을 뿐 민주주의로 간주됐던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과연 그런가? 그렇지 않다. 이승만은 한성감옥에서 회심하고, 성경과 서구문물을 통하여 독립한국은 영국이나 미국같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기초한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비전과 소망을 이루기 위해, 40여년간에 걸친 힘들고 외롭고 고달픈 독립투쟁을 해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비판자들은 이러한 비전과 투쟁은 쏙빼버리고 이승만의 활동을 대통령이 되겠다는 개인의 권력욕 탓으로 돌린다.
또한 좌파들이 말하는 '민족'과 '민중'은 공산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다.
그 당시 민중들은 어떤 체제의 국가를 원했는가?
미군정청이 1946년에 ‘어떤 체제의 국가를 원하는가’란 설문조사를 했는데 사회주의가 70 퍼센트, 공산주의 10퍼센트, 자본주의 13 퍼센트였다
당시 한국의 문맹율은 78퍼센트였고, 북한에서 46년에 토지(농지)를 무상몰수하여 무상분배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당시 대다수가 농민이었던 한국 백성은 사회주의나 자본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기들도 무상으로 토지(농지)를 분배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서 사회주의를 택했을 가능성이 크다.
민주주의는 이승만처럼 서구 문물이나 선교사를 통해 주로 기독교인들이 주창한 체제였다.
당시 이승만, 김구, 안창호 등은 모두 기독교 신자였다. 이처럼 한국의 민주주의는 기독교인이 주도하여 정착시킨 제도이다.
만일 당시에 자본주의나 민주주의에 대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대중의 여론을 바탕으로 사회주의 국가가 설립되었다면 지금의 한국은 김정은 치하에서 암흑시대를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민족의 정론지이자 우파성향을 자처하는 조∙중∙동의 창업자 모두 기독교인이 아닌 탓에, 지금도 이들은 우파성향을 띄면서도 기독교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 북한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
필자가 보기에 오히려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야말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북한은 소련의 괴뢰정부로 탄생했다.
북한은 소(련)군정의 치밀한 주도 하에, 똑똑하고 대중적 기반도 있는 박헌영 대신에 좀 둔하지만 말 잘 들을 것 같은 김일성(김성주)을 스탈린이 북한 책임자로 임명하여 소련의 각본 대로 북한을 다스리게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유엔 감시 하의 공개선거(1948.5.10)에서 당선된 국회의원들을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둘째, 북한 정권수립은 이미 1946년 2월에 스탈린에 의해 결정되었다.
단정(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 이승만의 정읍 발언(1946.6)은 북한이 단독정부를 수립한 이후의 발언이다. 한국의 실제의 정부수립일은 1948년8월15일이다.
북한은 남한 보다 정부가 늦게 설립되었다는 핑계로 1946년9월9일을 정부수립일로 조작 발표하여 시행하고 있다.
◇ 북한이 친일 정부
셋째, 북한은 정부 초기에 친일파를 대거 등용했다. 남한이 아니라 북한이 오히려 친일정부였다.
김일성은 정부 수립 과정에서 친일파를 강력하게 숙청하였음을 공언했다.
그렇다고 해서 해방 직후 한국에서보다 북한에서 친일파 청산이 더 잘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북한 정권에서 기용한 친일인사로는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가 관동군에서 통역사로 복무하였고, 장헌근 사법부장은 일제 중추원참의, 강량욱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은 일제하 도의원, 남로당 2인자 리승엽은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정국은 문화선전성 부부상은 일제의 밀정, 김정제 민족보위성 부상은 일제 시대 관료, 조일명 문화선전성 부상의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경력 등이다.
더군다나 무용가 최승희는 일제 시대 곳곳을 돌아다니며 천황 폐하를 위해 목숨을 버리라고 선전전을 벌인 대표적 친일파다. 그는 공연 수익금을 일본군에 헌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해방 후 친일 행각이 도마위에 오르자 월북한 뒤 승승장구했다.
그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선무용가동맹중앙위원회 위원장, 국립무용극장 총장을 지냈고, 공훈배우와 인민배우란 칭호까지 받았다. 김일성이 가장 좋아하는 예술가이기도 했다.
1981년에 북한에서 발행된 한 역사책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지난 날 공부나 좀 하고 일제기관에 복무하였다고 하여 오랜 인테리들을 의심하거나 멀리하는 그릇된 경향을 비판 폭로하시면서 오랜 인테리들의 혁명성과 애국적 열의를 굳게 믿으시고 그들을 새 조국 건설의 보람찬 길에 세워 주시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북한 정권은 그동안 남한의 이승만 정권을 가리켜 친일파를 숙청하지 않은 친일정권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김일성은 북한의 친일파를 숙청하지 않았다. 오히려 김일성은 이승만 정권보다 친일 인텔리를 더 환영했고 그들에게 관대했다.
김일성은 친일 인텔리에게 정부의 고위직을 주고 그들로 하여금 우상화작업을 하게 했다.
일제가 해왔던 것처럼 히로히토와 같은 우상화 작업을 해나갔다. 일본 제국주의가 우상화에 동원한 수사(修辭)를 그대로 빌려왔다.
북한은 친일파 정도가 아니라 소련의 지시에 따라 아예 일본인 900여 명의 기술자들을 산업 시설 가동을 위해 귀국도 못하게 막고 고임금을 주면서 고용하였다.
오원철 전 청와대 제2수석은 북한 당국이 일본인 기술자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생명과 재산을 보장한다는 신분증을 발부하고, 생필품과 주택을 포함해 최고 대우를 해주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남한에는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법절차에 따른 친일파에 대한 수사와 재판기록이 남아 있지만, 북한은 친일파 청산을 철저히 했다는 말만 무성할 뿐 이에 대한 아무 기록도 없다.
정당한 법적 절차 없이 자의적으로 진행된 일들에 대한 기록이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이 주장하는 철저한 친일파 청산은 무력을 동원하여 자행된 공산화 과정에서의 숱한 인권유린을 정당화시키고 남한에 대한 정치 공세를 펼치기 위한 공허한 수사일 뿐이다.
이승만이 정부에 친일 인사를 많이 기용했다고 '친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내각이나 장관급은 모두가 독립군 출신이고 하위 관료 특히 군대나 경찰 계통에 친일 관료들이 다소 있었다.
좌파들이 인정하는 친일파 연구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이승만 정부 내 일제 관료 출신은 32퍼센트인데 이 대통령 하야 후 수립된 장면 4·19 혁명정부 내각의 60퍼센트가 부일 협력자라고 한다. 그렇다면 4·19 혁명정부는 아예 일본 하위 기관인가.
2016년 독일 언론 조사에 의하면 2차 대전 패망 후 서독 법무부 간부의 53퍼센트가 히틀러 나치당 당원이었다.
많은 국·실에서 간부의 70퍼센트 이상이 나치 당원이었다. 악명 높은 나치스돌격대(SA) 출신도 20퍼센트에 달했다.
2차 대전 후 독립한 140여개의 신생국가들은 대부분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때 북한이나 남한처럼 이전 지배 정부의 관료들을 등용하였다.
인재풀이 없는 상황에서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삼국지에서 조조는 '천하를 도모하려는데 인재가 없다'고 한탄하면서, 이후 적국의 장수라도 투항하면 중용했다.
숙적인 유비의 의형제 관우를 포섭하려 했던 그의 노력은 애절하기까지 했다.
◇ 전문성이냐 도덕성이냐?
공평과 정의를 내세운 문재인 전 대통령은 도덕성을 갖추지 않은 장관은 임명하지 않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느 정권보다 도덕적 흠결이 있는 장관(급)을 가장 많이 임명했다.
문재인(33명), 노무현(3명), 이명박(17명), 박근혜(10명)에 비해 2배 이상이다.
그러면서도 문 전 대통령은 이에 대해 사과하기는커녕, '청문회 때 시달린 사람이 일 더 잘한다'고 변명했다.
‘도덕’과 ‘원칙’ 보다는 ‘현실’과 ‘전문성’(?)이 앞선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증거한다.
이런 잣대를 이승만의 친일파 등용에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은가?
이승만의 친일파 등용도 '친일 많이 한 사람일수록 빨갱이 더 잘 잡는다'는 변명이 성립될 수 있지 않을까?
친일파가 척결한 공산주의자 중에는 일제 시대에 항일운동 한 사람도 많다. 이들은 해방 후 새로운 이승만 정권에서도 파괴적인 공산주의 운동을 했기 때문에 척결된 것이다. 친일파가 순수한 독립운동가들을 척결한 적은 없다.
그런데 좌파들은 이승만의 친일파들이 독립인사들를 처형했다고 비난한다. 아니다. 독립군이 아니라 신생 대한민국 전복을 도모한 뻘갱이들을 척결한 것이다.
◇ 이승만에 대한 평가
“이승만의 애국심, 학문적 실력, 역사적 혜안, 정치적 투지, 종교적 초월성 등은 높이 살만 하며, 한국 역사상 누구보다도 국민들의 두터운 신망을 획득한 인물로, 다른 나라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지도자이다.
그의 이름은 위인을 많이 배출한 한국 역사에서 단연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 기록될 것이다.”
-로버트 올리버 교수, 이승만 대통령 정치 고문.
“나는 이승만의 용기와 뛰어난 지성에 감명을 받고 한국을 떠났다.
공산주의자들을 상대할 때 예측할 수 없게 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승만의 통찰력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했다.
그 후 그의 현명함을 더욱 더 높게 평가하게 되었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 제37대 미국 대통령.
“한국의 애국자 이승만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반공지도자로 존경한다.”
-마크 클라크, 전 유엔군사령관.
“이승만은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에서는 타협을 몰랐고, 자기 국민에 대한 편애가 심했고, 불가능한 일을 끈질기게 요구했으나 마음속에는 깊은 애국심으로 가득했고, 애국심에 의지해 오랜 망명생활을 보내고 귀국한 이후 눈뜬 시간의 거의 전부를 나라를 위해 바쳤다.”
-매튜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을 역임한 맥아더 후임 미국 제8군 사령관.
“이승만을 위대한 한국의 애국자·강력한 지도자·강철 같은 사나이·카리스마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자기 체중만큼의 다이아몬드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닌 인물이다.”
-제임스 밴 플리트, 전 미국 제8군사령관.
“5·16으로 집권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른바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것은 이승만 시대의 유산을 잘 활용한 덕택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세우고 지키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번영의 기틀을 다졌다.
4·19 세력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질서란 헌법정신을 훼손하려 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이승만과 4·19는 같은 세력이다.
4·19의 중요성을 강조하다 보니 4·19가 혁명으로 불렸을 뿐이라는 얘기다.
4·19 세력은 어렵게 출발한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이데올로기를 바꾸려 했다기 보다 부정선거 규탄에 강조점을 두었다.”
-이인호,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서양사학과 명예교수이자 명지대학교와 카이스트 석좌교수,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
"이승만의 장기집권은 정치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 중산층의 미성숙을 고려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한국사적 측면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수호와 경제발전을 위하여 권위주의 정치체제를 유지했던 것이다.”
-안병직,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로 1970년대 대표적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이승만 초기 대통령은 장기집권과 3.15부정선거 등 비판받아 마땅한 정치적 과오가 있지만 전 생애에 걸친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수립, 6.25동란에 나라를 수호하는 등 빛나는 업적은 마땅히 평가돼야 한다.”
-남시욱, 고려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과 석좌교수 역임, 세종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석좌교수.
“대한민국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그를 지지하는 자유민주주의 세력에 의해 건국됐다.
그런 뜻에서 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다. 아버지가 없으면 아들이 없듯이 이승만이 없었으면 대한민국은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라시아대륙의 대부분이 공산혁명의 파도에 휩쓸릴 때 한반도의 남부를 자유민주주의로 지켜낸 것은 차라리 기적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승만이 그 일을 해낸 것이다.”
. -이영훈, 전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역임, 낙성대경제연구소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