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산에 있으니 찾아가는 것처럼.[살기좋은 영월 2019년 4월호 제149호]
명예기자 김원식
사람의 역사인 날자 에는 영월을 지켜준 인물의 공덕이 있었기에 ‘살기 좋은 영월’을 꿈꾸게 됩니다. 생각을 더하면 더 좋은 생각을 모을 수 있으니 발길 이어질 영월여행에 하나를 나열합니다.
한 분 한 분을 기억하면
⦿1457.6월 상왕을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되자 원호(원주), 조려(함안), 이수형(우계) 3인은 영월을 찾아와 충의로 충절을 지켰고
⦿1457.10월 엄흥도(영월)는 버려진 임금의 옥체를 ‘동을지산’에 모셨기에 역사는 이어졌으며
⦿1541.9.7일 부임한 박충원(밀양)군수는 노산군 묘를 찾아내어 봉분을 높이고 제례를 올리면서 짓게 된 ‘제노릉문’을 남겼고
⦿1581.1.6일 감사 정철(연일)은 노산군 묘 수개와 석물 세울 것을 청하여 선조의 명이 내려졌고
⦿1584.8.2일에 부임한 김륵(예안)군수는 정곤수(청주)감사에게 청하여 1585년에 제청 3간, 재실, 부엌간을 묘 옆에 짓게 되었습니다.
⦿1685.3월 감사 홍만종(풍산)은 도사 유세명(풍산), 군수 조이한(양주)과 영월 선비 5명이 뜻을 모아 ‘노산군 묘우’ 보수와 ‘육신사’를 건립, 사육신과 엄흥도를 함께 모셔 첫 제례를 올렸고
⦿1685.7월 하순에 송시열(은진)은 영월 선비 ‘엄민도’의 청으로 ‘영월군육신사기’ 기문을 지었습니다.
⦿1698.9.30일 신규(평산)의 상소를 근거로 숙종은 단종으로 복위시켰고
⦿1699.2월 대제학 서종태(대구)는 ‘장릉정자각 상량문’을 지었습니다.
⦿1725.7.24일 부임한 윤양래(파평)부사는 외면 받던 청냉포(淸冷浦)를 청령포(淸泠浦)로 하여 금표를 세웠기에 온전하게 지켜졌으며, 또한 1733.6.19일 영조 임금에게 장릉 표석을 청하여 ‘조선국 단종대왕 장릉’비가 세워졌습니다.
⦿1741.9.15일 부임한 홍성보(풍산)부사는 ‘민충사’를 건립한 후 소(牛)가 3일 동안 밭갈이 할 땅(약 육천평)을 마련, 영월호장에게 매년 세금을 거둬들여 한식제향을 올리게 하였고
⦿1791.2.6일 관찰사 윤사국(칠원)은 부사 이동욱(평창)과 함께 ‘자규루’ 옛 터를 186년 만에 찾아내어 복원하였고, 정조 임금의 명으로 판중추부사 이복원(연안)은 ‘중건 자규루 기’ 기문을, 좌의정 채제공(평강)과 이조판서 홍양호(풍산)는 ‘자규루 상량문’을 지었고
⦿1791.10월에 승지 서영보(달성)는 어명으로 지은 ‘영천입석기’문을 영월부사 박기정(순천)이 받아 비석에 옮겨 써서 장릉에 세운 ‘영천비’가 있고
⦿난고 김병연(안동 1807.3.13~1863.3.29)선생은 글을 남겼기에 노루목 양백지간에서 공경 받고
⦿박영국(반남 1917.9.13~1994.4.2) 선생은 난고의 내력, 주거지, 유시, 묘 등을 찾아냈기에 ‘시와 별 문학의 고장 영월’이 될 수 있었습니다.
더 찾아내서 공경의 예를 표하면 어떠할까요? 즉,
1월은 연일 정 씨,
2월은 평강 채 씨⦁평창⦁연안 이 씨⦁칠원 윤 씨⦁대구 서 씨,
3월은 풍산 홍 씨⦁유 씨⦁양주 조 씨, 안동 김 씨,
4월은 반남 박 씨,
6월은 함안 조 씨⦁원주 원 씨⦁우계 이 씨,
7월은 파평 윤 씨,
8월은 청주 정 씨,
9월은 밀양 박 씨⦁평산 신 씨,
10월은 영월 엄 씨⦁달성 서 씨 등,
‘문중의 달 의례⦁행사’를 진행하는 방법입니다.
그리한다면,
후손 분들은 가문의 역사인 영월을 영예롭게 방문할 수 있으니 복되고 신바람 나는 영월로의 여행이 될 것입니다.
마치 산은 산에 있으니 찾아가는 것처럼
【참고⦁인용문헌】
『조선왕조실록』,『영월군부읍지(선생안)엄흥용』,『역대관찰사현황 강원감영홈』,『역주장릉지속편 한국학중앙연구원』.
산은 산에 있으니 찾아가는 것처럼(한자 포함).hwp
산은 산에 있으니 찾아가는 것처럼(출판적용분).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