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江陵 鶴山 金光坪) 이야기
15. 글로 써서는 안 되는 이야기
도토리(구람) / 곤드레(고려엉겅퀴) / 누리대(누룩취) / 참나물
우리 동네는 매년 봄이면 먼 산으로 점심을 싸 가지고 산나물을 뜯으러 가고, 또 가을이면 구람(도토리)을 주우러 가는 것이 연중행사처럼 반복되었다. 양식이 부족하던 시절이니 산나물과 도토리는 훌륭한 대체식품의 역할을 했었다.
쑥이나 달래, 냉이, 명이나물 등은 집 근처에도 많아 언제든지 뜯어다 먹을 수 있었지만 곤드레를 비롯한 각종 취나물, 참나물, 잔대싹, 노린내가 나는 누리대, 머위대, 참당귀, 우산나물, 어린 다래순... 거기다 귀한 더덕이나 산도라지, 두릅과 엄나무 순 등은 먼 산에 가야만 채취할 수 있었다. 이런 나물들은 각종 잡곡에 넣어 나물밥을 지어 먹기도 하고 그냥 무쳐서 반찬으로 먹기도 했는데 너무나 향기로워서 봄철에만 맛볼 수 있는 별미였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구람(도토리)을 주우러 갔는데 어떤 집은 가마니로 주어다 갈무리해 두었다가 양식에 보태고는 했다.
구람은 껍질을 벗기고 개울가에 큰 자배기를 놓고 물에 담가 놓으면 우러나서 도토리 특유의 떫은 맛이 어느 정도 가시는데 요즘처럼 가루를 만들어 간식이나 반찬꺼리로 묵을 쑤어 먹는 것이 아니라 둥근 알맹이째 잡곡과 섞어 밥을 지어 먹었다.
보리쌀처럼 아무리 물을 많이 붓고 푹 삶아도 돌덩이처럼 딱딱했고, 또 어찌나 떫은지 먹기가 정말 힘들었는데 식량이 부족하던 시절이니 그것으로나마 주린 배를 채워야 했다.
도토리나무는 마을에서 가까운 산에는 없어 도토리를 주우려면 깊은 산까지 가야 했고 멀어서 점심도 싸 가지고 다녔는데 혼자 다니면 산짐승이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해코지(피해) 당할지 몰라 항상 서너 명씩, 많으면 대여섯 명이 함께 다녔다.
우리 마을에 아들이 많은 집에 중간에 고명딸이 있는 집이 있었는데 그 누나 이름을 편의상 명자(가명)라고 해 두자.
아들 틈에서 자라서 그런지 명자 누나는 어찌 보면 말괄량이 선머슴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조금 칠칠맞은 구석이 있는 누나였다. 어느 해 형님 또래 처녀∙총각들이 대여섯 명이 먼 산으로 구람(도토리)을 주우러 간 적이 있었다. 한나절 헤매며 구람을 줍다가 점심때가 되어 제각기 싸 온 점심을 풀어놓고 먹는데....
도시락이 귀하던 시절이니 장아찌를 박은 주먹밥을 물 묻힌 베보자기에 싸 왔을 터이다.
모두 앉아 밥을 먹는데 명자는 쪼르르 옆에 있는 바위 위로 올라가더니 ‘아 시원하다’ 어쩌구 하면서 혼자 밥을 먹는다. 바위 아래서 밥을 먹던 청년들이 올려다보니 다리를 벌려 세우고 앉았는데 치마가 들려 속이 훤히 드려다 보였고 산속을 헤매다 그랬는지 낡은 속옷이 찢어져서 하필 여자의 그 중요한 부분이 보였던 모양이다. 청년들은 배를 쥐고 뒹굴며 웃고, 얼굴이 홍당무가 된 다른 처녀들이 바위로 뛰어 올라가 치마를 감싸며 바위에서 끌어 내리고....
싱겁데기 우리 형님은 심심하면 어머니와 누나가 있는 자리에서,
‘어머이, 난 멩자 그그르 봤장가....’ 하면 우리 어머니는,
‘에이 싱거워 빠진 자슥.... 그래 니는 그그르 보니 그러 좋더나....’
하면서 어머니와 누나는 파대 웃음을 터뜨리고는 했다. 어린 나는 괜히 얼굴이 빨개져서 형한테 눈을 흘기며 어머니 뒤로 숨고는 했다. 사람들한테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명자 어머니는,
‘어이구 칠칠맞은 년, 우떠 하더거 그런 실수를 했나.... 집안 형편이 어렵다보니 하나 뿐인 지즈바 빤쓰도 제대로 해 입히지 못해서.... ’ 하며 눈물을 찍어내고는 했다고 한다. ♣지즈바-계집아이(강원도 사투리)
어머니도, 누님도, 그리고 그 싱겁데기 형님도 벌써 고인이 되신지 오래다.
이 글을 쓰면서 갑자기 인자하시던 우리 어머니, 괄괄한 성격의 우리 막내 누님과, 나한테는 너무도 소중하던, 하나뿐이던 우리 형님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