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캥이(잘피)의 짭조름하고 달짝지근한 그때 그 맛의 추억
내 고향은 부산이다. 그중에서도 기장군이다. 또 그중에서도 태어난 곳은 철마면이라는 곳이다. 요즘은 그 망할 놈의 코로나 때문에 열리지 못하고 있지만 해마다 가을이면 철마한우축제가 열리는 곳이다. 자란 곳은 기장읍이다. 자라고 학교 다니고 취직하여 직장 다니고 그리고 결혼하여 아들, 딸 낳은 곳이 기장이다. 기장읍은 해마다 4월이면 멸치 축제가 열리고 가을이면 붕장어 축제 그리고 차성 문화제가 열리는 살기 좋은 곳이다. 기장의 이 모든 축제와 문화제가 그놈의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열리지 못하고 있다.
기장은 바다에 접해 있다. 우리 집은 바다가 바로 보이는 갯가는 아니지만 걸어서 2~30분이면 죽성 바닷가와 대변항(大邊港)이 있고 일광해수욕장이 있다.
그리고 지금은 해운대에서 살고 있다. 해운대 역시 바다에 접해 있다. 여름이면 해마다 피서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대한민국 최고의 해운대 해수욕장과 송정 해수욕장을 품고 있다.
나는 바다와 인연을 끊을 수 없는 모양이다. 비록 방안에 있어도 파도 소리 들리고 방문을 열면 갯비린내 나는 갯가는 아니지만 바다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쫓아가서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에서 살았고 지금도 5분만 걸어가면 푸르디 푸룬 청사포 앞바다를 볼 수 있다.
기장은 옛부터 미역이 유명하고, 코르나 바이러스가 생기기 전까지만 하여도 해마다 축제가 열리는 멸치가 유명하다. 그리고 기장 인근 바다에는 갈치와 복어도 많이 잡혔다.
지금은 근해의 어자원 고갈로 갈치와 복어가 거의 잡히지 않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하여도 기장 어촌에서는 복어와 갈치가 엄청 많이 잡혔다. 기장은 물론 지금은 울산시 울주군의 행정구역이지만 한때는 지금의 부산 기장군의 5개 읍. 면과 함께 경상남도 동래군이었던 서생 어촌에서 잡은 복어까지 기장 시장으로 와서 판매하였던 관계로 복어가 많이 잡히는 겨울에는 넘쳐나는 물량으로 생선 가계 좌판에 진열하여 파는 것이 아니고 시장 한쪽 노지에 가득 쌓아 놓고 팔았던 모습이 기억난다.
내가 어릴 때 내가 태어나고 자란 기장에서는 복어를 복찌라 하였다. 참복찌, 꺼끌복찌 졸복찌 등 다른 지방은 몰라도 기장에서는 그렇게 불렀다. 지금은 다 표준말 복어로 부르지만.
복어 하면 나는 내 혼자 바보 같은 생각이 떠올라 가끔 웃음을 짓곤 한다.
나는 식당에 가서 외식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은 그런 식당들이 없겠지만, 내가 부산 초량동에 있는 직장에서 근무할 때 인근에 값싸고 반찬 푸짐한 식당에 같이 근무하는 직원들과 단골로 점식 식사를 하곤 하였다. 요즘 많이 사용하는 말로 가성비가 좋은 식당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 장면을 보기전 까지는.
식사를 주문한 뒤에 화장실에 가는데 그때가 여름이라 주방 문을 열어 놓고 음식 조리를 하는데 손님이 식사하고 나간 후 잔반들을 버리지 않고 일부 잔반들을 재활용을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 후로는 꼭 식당에 가야 할 피치못할 경우가 아니고는 식당에 잘 가지 않는 습관이 들었다..
이렇게 식당에 잘 가지를 않으니 식당 음식의 메뉴에 대해서도 겨우 평범한 음식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지만 별미의 특별한 음식들 메뉴에 대해서는 잘 몰라었다.
이렇게 식당의 음식 메뉴에 밝지 않았는데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는 친목계에서 복어 요리집에서 모임을 갖는다는 연락이 왔다. 복찌가 복어라는 것을 생각지도 못한 상태라 복국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모임 장소에 가서 드디어 궁금해하던 복국을 맞이하였다. 앞에 마주한 복국의 생선을 자세히 보니 맙소사 이건 복찌가 아닌가. 나 혼자만의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의 뇌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다. 어째서 복찌가 복어라는 것을 몰랐는지 지금 도리켜 보아도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여튼 그렇게 자랄 때 엄마가 끓여 주시던 복찌국을 먹어 보고는 참 오랜만에 복찌국이 아닌 복국을 먹어 보았다. 복국에는 입맛을 돋두는 미나리, 콩나물 등 다양한 식재료가 많이 들어갔지만 그 옛날 엄마가 끓여 주시던 복찌국의 그 맛이 아니있다.
어릴 때 엄마는 새벽에 기장 저자(시장)에 가서 복찌를 여러 마리 사 와서는 씨알이 굵고 살이 많은 놈은 두툼한 살을 포로 떠내어 제사 때 산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간장에 절여놓고 껍데기는 깨끗이 씻어서 빨랫줄에 걸어 말린다. 말린 복찌 껍데기는 보관하여 두었다가 무를 삐져 넣어 국을 끓이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그렇게 씨알이 굵은 놈은 제수용으로, 국거리용으로 준비하여 놓고는 씨알이 작은 놈들은 즉석 생복찌국을 끓이신다. 그 당시 엄마가 끓여 주시던 복국에는 요즘 식당의 복국처럼 다양한 식재료도 들여가지 않고 그저 깨끗이 손질한 복찌를 솥에 넣고 땅에 묻어 두었던 무를 깨끗이 씻어 한 손에는 무를 들고 한 손의 칼로 쓱싹쓱싹 삐져 넣는 것이 전부였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렇게 엄마가 끓여 주시던 복국의 그 맛은 요즘 유명한 맛집의 복국은 비교가 안 될 정도다. 그기다가 같이 사 온 복찌 이레라도 같이 넣어 끓이면 그야말로 그 맛은 환상적이다. 엄마가 끓여 주시던 그 복찌국 그 맛이 너무나 그리워진다.
그리고 당시에는 기장 갈치도 많이 잡혔고 맛이 좋다고 유명하였다. 지금 기억하기로는 갈치는 주로 밤에 조업을 나가서 새벽에 잡은 갈치를 싣고 어항으로 와서는 동이 트기 전 어두컴컴한 새벽에 기장 시장의 도로 옆으로 갈치 전이 형성되는데 기장 갈치는 그물로 잡지 않고 낚시로 잡기 때문에 비늘 하나 흠집이 없는 관계로 판매 좌판에 진열한 갈치의 은빛 비늘이 상가나 가로등의 불빛에 반사되어 머리와 꼬리가 뾰쪽한 갈치들이 옛날을 배경으로 한 전쟁 영화에 나오는 장군들의 칼날같이 번쩍거렸다. 물론 싱싱한 기장 갈치는 맛 또한 일품이었다.
기장 저자(시장)에 가면 생선 종류 외에도 미역, 다시마, 곰피, 펄뜩께이, 까시리, 몰, 청각 등을 얼마든지 살 수가 있었다. 요즘과 달리 전부 자연산이다. 요즘은 바다가 오염되어 자연산은 많이 생산도 안되거니와 양식을 하여도 일부 경제성만 있는 종류만 양식을 하므로 어떤 종류의 해산물은 귀하여 금값이다.
시장에서 사 온 곰피나 펄뜨게이는 푹 삶아서 기장멸치로 담근 멸치젓깔로 쌈을 사 먹으면 그야말로 진미 중의 진미다.
까시리는 무채나 콩나물 또는 김장김치 배추김치를 촘촘하게 썰어 고춧가루 넣고 국을 끓여 밥과 함께 한 그릇 먹고 나면 무슨 보약이나 먹은 것 같이 이마에서는 땀이 송골송골 맿힌다.
비록 기름진 음식은 아니지만 지독하게 가난하였던 그 시절에 그 음식들은 생활의 활력소가 되고 우리의 건강을 지켜 주었다.
그 시절 가난하였던 어린이들에게 군것질은 감히 언감생심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그때 바다는 어린이들에게 군것질거리도 내주었다.
바다가 어린이들에게 내어 준 군것질거리 중 하나가 바로 몰캥이(잘피)이었다.
내가 다닌 기장 초등학교의 소풍 장소는 주로 기장 산성산, 일광산의 백두사, 죽성 왜성, 월전 강계, 연화리 오랑대 등이었다. 지금 기억하기로는 연화리 오랑대에 소풍 갔을 때 소풍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대변항(大邊港) 바닷가를 거친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하여도 대변항(大邊港) 은 지금처럼 항구 전체가 콘크리트로 선박의 접안 시설이 되어 있지 않고 바닷가를 거닐면서 바닷물에 발을 적실 수 있었다. 바닷물에는 어린이들의 간식거리인 몰캥이(잘피)가 파도에 휩쓸려 둥둥 떠다녔다. 그러면 신발을 벗고 얕은 곳에 들어가서 뽑는 건지 건지는 건지 두 손 가득 쥐고 나와서는 깨끗한 것만 한 움큼 골라 쥐고 집으로 걸어오면서 딱딱한 걷대궁은 버리고 속대궁만 쪽쪽 빨면 바닷물의 짭조름한 맛과 속 부분의 달짝지근한 맛이 희한하게 조화되어 입을 즐겁게 하여 집에 까지 3~4km 되는 길을 지루한 줄 모르고 오곤 하였다. 집에 와서 다 먹고 나면 속 부분의 달짝지근한 맛은 다 사라지고 입안에는 오직 짭조름한 맛만 남아 있다. 그러면 정지간(부엌)에 가서 시원한 찬물 한 사발 들이켜고 입안에 남아 있는 짭조름한 맛을 씻어 내곤 하였던 기억이 희미하게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 같다.
물질 만능주의 시대에서 자라고 있는 이 시대의 어린이들은 달콤하고 새콤한 가공된 단맛에 익숙하여 짭조름하고 달짝지근한 맛의 바닷풀은 거덜 떠 보지도 않고 버리겠지만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 보잘것없는 바닷풀도 소중하였던 군것질거리의 추억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