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세계의 크기, 세계는 끝이 있는가, 세계는 끝이 없는가
세계의 끝
두 종류의 세계
몸의 조건과 세계의 크기
마음의 조건과 세계의 크기
삼천대천세계
욕계
색계와 무색계
질문: 세계는 끝이 있는가, 세계는 끝이 없는가
이제 세계의 끝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세계의 끝은 세계의 크기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세계의 크기’라는 제목으로 서술했다.
[세계의 끝]
잡아함경에는 ‘세계의 끝’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① 저는 그때 또 이렇게 생각하였었습니다.
‘나는 지금 이렇게 빠른 신통력을 성취하였다.
오늘은 <세계의 끝>을 찾아보리라.’
이렇게 생각하고는 곧 출발하였습니다.
오직 밥 먹고 대소변을 보는 동안만 제외하고는, 잠을 자는 것까지도 아껴가면서, 끊임없이 걸어 백 년 동안을 갔습니다.
그러다가 거기에서 목숨을 마쳤으나, 그때까지도 <세계의 끝>을 지나, 나지도 않고 늙지도 않으며, 죽지도 않는 그런 곳에는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잡아함경_1307. 적마경)
② 적마여, 만일 비구가 세간의 괴로움을 알아 끊고, 세간의 발생을 알아 끊으며, 세간의 소멸을 알아 증명하고, 세간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알아 닦으면, 적마여, 이것을 <세계의 끝>을 얻는 것이요, 세간의 애욕을 벗어나는 것이라 하느니라. (잡아함경_1307. 적마경)
많이 들어 아는 거룩한 제자들은, 6입처에 대해, 그것의 발생ㆍ소멸ㆍ맛들임ㆍ재앙ㆍ벗어남에 대해 사실 그대로 아나니, 이것을 거룩한 제자가 <세간 끝>에까지 이르러 세간을 알며, 세간의 존경을 받고 세간을 건넌 것이라고 하느니라. (잡아함경_234. 세간변경)
이상에서 보면, ‘세계의 끝’은 두 기지로 나누어 말하고 있다. 하나는 ‘멀리 걸어가서 찾는 것(①)’이고, 다른 하나는 ‘(12입처와 5음인) 세계의 발생과 소멸을 사실 그대로 알아 이르는 것’(②)이다.
[두 종류의 세계]
이에 따르면 세계도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①의 세계는 물리적인 공간으로서의 세계이고,
②의 세계는 인식 주체의 인식의 공간으로서의 세계이다.
우리가 보통 세계라고 하면, 먼저 ①의 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이고,
②의 세계는 우리가 ①의 세계를 인식하고 경험함으로써 얻어지는 세계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불경에 따르면 12입처와 5음이 바로 세계이며,
그 세계는 12입처와 5음에 대한 집착으로 생겨난 것이라고 본다.
(인식은 5음의 하나인데, 이 글에서는 인식을 중심으로 말하고자 한다.)
곧 ②의 세계가 인식 주체로부터 생성된 세계이며,
①의 세계는 ②의 세계를 생성하는 인식 주체의 인식에 비친 세계이다.
여기서 ①의 세계는 인식 주체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세계는 바로 인식 주체로부터 생성된 세계이다.
그런데 이 세계는 인식 주체의 몸과 마음에 영향을 받는다.
12입처에서 보면, 6내입처에서 마음을 제외한, 눈, 귀, 코, 혀, 몸은 몸을 가리킨다.
5음에서 보면, 빛깔은 몸이고, 느낌, 생각, 의도, 인식은 마음(이나 마음의 작용)이 다(잡아함경, 298. 법설의설경의 ‘명색’의 정의).
[참고] 불경 번역의 문제(7)_의(意)와 심(心), 식(識), 마음, 인식
우리가 세계를 인식할 때는, 몸으로는 빛깔, 소리, 냄새, 맛, 감촉을 알고, 마음으로는 법[일, 현상]을 안다.
따라서 세계의 모습이나 크기는 이러한 몸과 마음의 조건들에 영향을 받아 결정될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래에서는 이에 대하여 간략히 살피기로 한다.
[몸의 조건과 세계의 크기]
이 세계의 모습과 크기가 인식 주체의 몸의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은 짐작해 볼 수는 있겠다.
그렇지만 불경에는 이에 대하여 찾아보기 어렵다. 또 과학적으로도 이데 대한 지식은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된다.
이런 까닭으로 여기서는 일단 몸의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세계의 모습이나 크기에 대하여 상상해 보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한다.
먼저 인간과 축생의 예를 들어보기호 하자.
인간과 축생은 지구라는 동일한 공간에서 생활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인과과 축생이 동일한 세상에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곧 그들이 같은 세상에서 살명서 같은 세상을 바라보지만,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로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으로 생각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동잃성과 차이에 따른 인식의 차이는 있음과 없음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가져온다.
따라서 인식의 주체에 따라 전혀 다른 세계를 구성하게 된다.
그러한 인식의 차이에 영향을 주는 것은 여러 요신들이 있겠지만, 인식 주체의 몸의 크기와 수명, 삶의 터전 등과 깊은 관현이 있다고 생각된다.
몸에 대한 조건을 생각해 보면, 예컨대 몸이 아주 큰 코끼리와 몸이 아주 작은 개미가 바라보는 세상은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동일한 빛깔과 모양과 성질을 가졌다고 가정되는 어떤 사물을 대하더라도, 몸의 크기가 다르면 당연히 인식과 느낌과 의도 등에서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수명의 길이가 다를 생명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며,
강과 바다 등의 물에서 생활하는 물고기와 땅에서 생활하는 짐승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요컨대 몸의 크기와 수명과 삶의 터전이 다른 것들은 애초에 동일한 환경을 경험조차 할 수 없거나,
동일한 사물들을 경험한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요인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들은 다음과 같은 세상을 볼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첫째로 그 세계들은 그 세계들을 구성하는 사물들의 목록이 다를 것이다.
둘째로 사물들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한 요소들의 목록과 우선순위도 다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차이로 말미암아, 동잃성과 차이에 따른 인식의 차이를 보이는 존재들은,
비록 동일한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경우라 할지라도, 전혀 다른 세계에 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존재들은 적어도 동일한 시간의 경계 안에서는 각각의 세상들에 갇혀 있으며,
다른 세상들을 넘보거나 넘나들지 못할 것이다.
지옥, 아귀, 아수라, 하늘 등도 몸의 조건들이 다르며,
하늘의 존재들도 여러 종류가 있고, 그 종류들에 따라 몸의 조건들이 다르다.
불경에서는 이 존재들의 몸의 크기나 수명 등의 몸의 조건들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일일이 언급하기에는 너무 번거로우므로 생략하고, 다만 <증일아함경_49. 방우품>에 있는 아수라의 몸의 크기에 관한 글을 언급해 두기로 한다.
“지나간 세상에 수염(須焰)이라는 아수륜왕(阿須倫王)이 가만히, ‘해와 달을 붙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바다 밖으로 나가 그 몸을 아주 크게 변화시키자, 바닷물이 허리춤에 왔다.
그때 그 아수륜왕의 아들 구나라(拘那羅)는 그 아버지에게 아뢰었다.
‘저도 지금 바닷물에 목욕하고 싶습니다.’
수염은 말하였다.
‘바다에 들어가 목욕하려 하지 말라.
왜냐하면 바닷물은 매우 깊고 또 넓어, 결코 거기서는 목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구나라는 아뢰었다.
‘제가 지금 그 물이 대왕의 허리춤까지 밖에 오지 않는 것을 보고 있는데, 왜 매우 깊다고 말씀하십니까?’
그래서 아수륜왕은 곧 아들을 들어다 바다에 넣었다.
아들은 그 발이 물밑에 닿지 않자 매우 두려워하였다. 이때 수염이 아들에게 말하였다.
‘내 아까 너에게 바닷물이 매우 깊다고 타일렀었다.
그러나 너는 두려울 것 없다고 말했다.
오직 나만이 바다에서 목욕을 할 수 있으니,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증일아함경_49. 방우품[5])
[마음의 조건과 세계의 크기]
<잡아함경_1009. 심경>에서는 마음이 세계를 유지하고 제어함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엇이 세간을 유지해 가며
무엇이 세간을 이끌고 갑니까?
또 무엇이 하나의 법이 있어
이 세간을 제어합니까?“
“마음이 세간을 유지해 가고
마음이 세간을 구속해 이끌고 있다.
그 마음이 하나의 법이 되어
세간을 능히 제어한다.”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에 비추어보더라도, 마음의 상태에 따라 세계의 모습이나 크기가 달라짐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건대 화가 엄청나게 난 경우에는, 화를 불러일으킨 것과 관련된 상황을 빼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일이 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조그만 상황만 눈에 들어오고, 그 밖의 다른 세계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화가 가라앉고 나면, 화를 불러일으킨 상황을 비롯한 주변의 여러 상황들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랑에 너무 깊이 빠져도 이와 비슷한 일이 생긴다.
그런 사랑에 미친 사람은 다른 세상은 필요없으며, 그 사랑을 잃으면 온 세상을 잃어버린 것처럼 절망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그러한 절망에서 벗어나게 되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이 조금씩 보이게 될 것이다.
간단히 표현하다면, 마음이 작은 것에 비추면 작은 마음이 되고, 크고 넓은 것에 비추면 크고 넓은 마음이 된다.
이와 같이, 세계의 크기는 인식 주체의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
불경에서는 세계는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하늘이 있으며, 그것들 각각의 세계에는 다시 여러 종류의 작은 세계들이 있다.
이 많은 세계들 가운데서, 중생들은 인간 세계의 일부와 축생 세계의 일부만 안다.
그 세계를 제외한 다른 세계들은 아예 모르거나 조금 알았다 하더라도 구체적으로는 알지 못한다.
그렇게 세계를 바라보는 중생들에게는 세계가 그들이 보는 만큼 크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 모든 셰계들을 다 알고 보신다.
수행자들도 그들의 인식 수준만큼의 세계를 본다.
간추린다면, 세계는 인식 주체에게 보이는 그만큼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 나에게 ‘세계는 끝이 있는가, 세계는 끝이 없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