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TTA-NIPÂTA 5-7, 8(89, 90)(有聞有慧聖弟子배움이 깊고 지혜로운 제자........)
89.
“양심을 속여 선한 척하고 오만하여 집안을 더럽히며 빈 말, 아첨하고 남을 헐뜯는 말이나 늘어놓고 자제력이 없이 바른 일을 행하지 않은 자를 ‘도를 더럽히는 자’라 한다.”
90.
“배움이 깊고 지혜로운 제자들은 네 부류의 수행자들을 살펴 그들 모두 내가 말한 바와 같음을 알아 믿음에 물러섬이 없으니, 어찌 오염됨과 오염되지 않음, 깨끗한 것과 깨끗하지 않음을 분별하지 못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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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He who although counterfeiting the virtuous is forward, disgraces families, is impudent, deceitful, unrestrained, a babbler, walking in disguise, such a one is a maggadûsin (that is, defiling the way). (7)
90.
'He who has penetrated these (four Samanas), who is a householder, possessed of knowledge, a pupil of the venerable ones, wise, having known that they all are such,--having seen so, his faith is not lost; for how could he make the undepraved equal to the depraved and the pure equal to the impure?' (8)
八九
覆蓋偽裝行善務眾中傲慢污在家
虛談諂謾不自制非勝行者污道者(七)
*覆蓋복개: 덮개. 덮는 일
虛談허담: 빈말
傲慢오만
諂첨: 아첨하다
謾만: 속이다. 헐뜯다
九〇
有聞有慧聖弟子洞察此等四沙門
彼等一切知如斯如斯見已不退信
云何染污不染污淨與不淨可辨比」(八)
*聞: 견문. 식견
如斯如斯: 이러이러하게
已이: 이미. 벌써
云何운하: 어떻게. 어찌
辨변: 분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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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
네 부류의 수행자의 마지막 오도자污道者, ‘도를 더럽히는 자’의 설명을 끝으로 ‘춘다경’이 끝납니다. 붓다가 지적한 이런 부류의 사람의 특징을 일별해보면 내가 어디론가 숨고싶은 심정은 왜일까요? 쩝!
동양 문화 곳곳에 배여든 그 도道라는 개념에 대해 한 번을 짚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요. 앞으로도 수없이 이와 마닥뜨리게 될 터이니까요. 이 도를 발명한 중국의 정신사의 궤적을 앞의 연聯을 다루면서 잠깐 언급했지요? 기원 5세기경에 소위 하늘의 명(天命)의 절대 신성이 모든 자연과 인간의 작동원리였던 시대에서 산업구조의 재편으로 촉발된 인간의 의식의 변화가 인간의 신으로부터의 독립선언을 꾀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창안해낸 개념이 바로 ‘도’라는 것입니다. 즉 ‘천명’이 ‘도’로 대치되는 것이지요. ‘천명’을 끌어내리고 이제 ‘도’의 깃발을 드높이 올린 그들이 해야 할 당면한 과제는 인간의 문제를 어떻게 자기 스스로 해결한 것인가였을 겁니다. 이제 자신들의 길흉화복에 기대거나 탓을 돌릴 무소불위의 거대한 허상을 스스로 폐기했으니 그 대안이 절실하지 않았겠습니까.
물론 이러한 문화사적 대변혁이 단순히 걸출한 몇몇 사상가들이 나타나 선봉에 섬으로서 가능했다기보다는 그러한 시대적 요청이 끊임없이 분출되고 마침내 그것이 시대정신으로 보편화되는 바탕 위에 나타난 인물이 노자와 공자라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이 천명을 대치한 도를 바라보는 관점과 인본人本의 사회구조 속에서 실현되어야 할 접근방법은 서로 극명하게 대치가 되지만 그러나 이 두 사상의 和諍, 즉 대립과 화해가 중국의 전 역사를 관통하는 핵심 흐름이 되는 것이지요. 물론 한대漢代에 유입되는 불교와 융합되면서 결국 주희의 주자학에 이르러 하나로 통합되기는 하지만.....
대개 중국사상과 불교를 논할 때는 거개가 노자와 견줍니다. 물론 저도 그렇고요. 그러나 공자에게서 주목하는 것은 그 양반의 도의 실천과정입니다. 잘 알다시피 공자 사상의 핵심은 당연히 ‘인仁’이지요. 최진석교수 외 여러 현대 학자들의 지적처럼 이 인이라는 것이 보통 우리가 아는 ‘어질다’의 뜻이 아니라 본래 ‘씨앗’이라는 것이랍니다. 즉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그 씨앗, 즉 인간일 수밖에 없는 일종의 DNA 같은 것을 인간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지니고 있다는 말이지요. 따라서 공자의 문제의식은 바로 이 씨앗을 지닌 가능태를 어떻게 가장 원숙한 인간으로 성장시켜 전체 사회의 이상과 질서를 구현할 수 있게 하느냐하는 것이었겠지요. 그래서 창안한 방법이 바로 배움(學)과 익힘(習)이었고, 이상적 사회를 실현할 인간의 가장 핵심적 바탕을 소박하게 인간의 생명과 삶의 가장 근원적 토대인 가족윤리인 ‘효孝’로 설정을 합니다. 효의 실천양식을 통해 인을 계발한 인간들이 구축해야할 이상적 단계의 그 지점을 ‘예禮’라 하여 최종적으로 주자에 이르러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유가의 핵심 키워드로 잡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공자의 씨앗으로서의 ‘인’과 불가의 ‘불성佛性’이라는 것이 여러모로 겹치지 않나요?
2021. 7. 1 샘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