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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차 백두대간 산행 2013.02.17
무령-영취산-민령-깃대봉-할미봉-연수원
19.8km 7시간 30분
산길을 걷는다는것은 한편의 소설을 읽는것과 비슷하다. 주어진 일곱시간 남짓의 시간동안 나는 나만의 속력으로 책을 읽어 갈것이다. 밑줄을 치고 싶을 때는 사진을 찍고 행간을 생각할 때는 멈추어 설것이다. 괴로울 때는 울고 즐거울 때는 웃을것이다. 그러다 만약 찾아가야 할 궁극적인 곳을 발견한다면 기어이 그리로 갈것이다.
시산제
역사와 문화가 살아있는 마루금.
백두산에서 지리산에 이르는 산꼭대기에 마루금을 죽 그어놓고 그 위로 민족의 정기가 흐른다는 개념은 한마디로 개 풀뜯어먹는 소리다. 수많은 침략과 수탈을 통해 자생된 이 땅의 민족주의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경위야 어쨌던 산경표를 차용한 백두대간의 개념이 이 민족의 가슴으로 돌아와 불과 삼십년의 세월동안 이토록 대중적 사랑을 받게된것은 산에대한 우리 국민들의 신앙에 가까운 신념과 애정 때문이 아닐까.
그동안 많은 산악인의 노력에 의해 산길은 다듬어져 왔지만 아직 대간길이 다 완성된것은 아니다. 대간길이 하나의 거대한 유형의 문화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산과 산길을 아끼는 믿음과 사랑이 더 강해져야한다.
백두대간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우리 민족만의 독창적인 개념의 산물이다. 그러기에 문화요 역사가 되는것이다.
들머리 아홉시 오십팔분
아직도 잠이 덜 깬 분이 계신다.
열시 십오분
영취산 정상 예나 지금이나 감흥이 없다. 아니 엄밀히 말해 감흥을 즐길 여가가 없다.
마치 환승역같은 기분이다. 대전역에서 가락국수 한그릇 사먹던 그 옛날 짧았던 시간의 기억보다 더 여유가 없는것 같다.
산죽이 많다. 키를 넘는 조릿대가 앞길을 막는다. 조릿대의 억센 성정이 한민족과 잘 어울릴거란 근거없는 생각이 든다. 억새 위로 머리만 동동 떠다니는 모습이 누른 밀밭 위를 떠다니는 달처럼 느껴진다.
백운산과 괘관산 쪽 풍경
열시 오십칠분
모처럼의 멋진 조망처를 만나 단체 사진을 찍다.
11시의 풍경
마침내 덕유산을 정북으로 마주하며 서게되었다. 완만한 육산의 능선길이 육감적으로 굽이친다. 온통 우무질같은 잿빛 날씨 속에서도 관능을 잃지 않은 풍경이 맨몸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누드 모델처럼 누워있다. 통속적이지 않는 섹솔로지란 이런것이다. 관능이 길 위에서 무르익는다.
描法
함양군 서상면 서하면 방향의 풍경
황석산에서 거망산에 이르는 긴 능선 뒤로 기백산에서 금원산으로 이르는 능선이 겹쳐보인다,
멀리 희미한 송신탑이 보이는곳이 장수 팔공산이다.
영취산은 왕사성 북동쪽의 산으로 석가모니가 무량수경과 법화경을 설한 산이다. 나는 아직 왜 그 수많은 말씀들이 신묘한 채 떠도는지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다만 그 이름이 주는 신묘함을 느끼기에는 오늘 걷는 이 길 하나로 족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무리 천경만록을 쏟아 붓는덜 내 마음 속 달그림자 하나 흔들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랴.
하지만 나는 오늘 비로자나불과 같은 이 길고 완만한 능선길 위에서 흔들리고 또 흔들린다. 하지만 그 흔들거림이 너무 고요해 마음 한편에서는 그윽하기 그지 없는 평화로만 느껴진다.
우리를 남덕유의 관문인 할미봉으로 안내할 긴능선길
내가 백두대간길을 걸어보고 싶은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는 길을 보기 위함이다. 대간길 위에는 길이 주는 선묘의 아름다움과 삶을 통해 놓쳐서는 안될 종교적 통찰이 깔려있다.
백두대간 길은 또한 사역을 요구 한다. 종교가 아니면서도 산티아고의 길만큼 종교적이다. 철학이 아니면서도 철학서와 같다.
대간이 지닌 문화적 요소는 이처럼 길을 통해 읽고 느끼며 배워가는데 있는것이 아닐까.
우리가 나아가야할 길
아주 먼 곳에 산이 보인다. 낯선 바람이 부는 곳에서 낯선 방식으로 산을 만난다. 남덕유에서 바라 본 검은 묵화의 풍경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너울처럼 산이 요동한다. 언어가 필요없는 세상은 얼마나 정직한가. 나는 걷고 걸어 오로지 앞만 쳐다보고 걸어 저 곳에 도착해야한다. 실측이 해체되고 오직 마음의 길만이 외롭게 열려있다. 산중에서 만난 지는해처럼 가벼운 두려움이 배회한다.
북바위
세상을 조망하기 좋은 곳에 북을 걸어두고 위급을 알렸을만한 곳이다. 황석산 을 넘어 안의를 정벌한 왜병들이 병정개미처럼 떼지어 몰려왔을 먼 옛날을 상상해본다.
산행은 앞서 언급한 바 처럼 독서와 참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은 책을 빨리 읽고 어떤 사람은 한 줄 한줄 천천히 읽는다. 물론 빨리 읽는다고 책이 주는 의미를 얻지 못하는것도 아니고 천천히 읽는다고 뜻을 다 헤아릴 수 있는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은 느낌을 중시하고 어떤 사람은 애초부터 느낌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어떤 사람은 A를 읽으며 B를 생각하지만 어떤 사람은 A를 읽어도 A를 모른다.
나는 특별히 재미를 위주로 한 가벼운 소설이 아니면 대체로 숙독을 하는 편이다. 책을 읽으며 행간을 이해하고 작가와 인물에 몰입하며 책이 만들어내는 가상의 쾌락을 즐기는 편이다.
나는 길도 그렇게 걸어야 비로소 마음이 개운해진다. 그래야만 제대로 된 산행을 한것 같다. 후기는 그래서 독후감과 유사하다. 걸음을 통한 나만의 느낌이랄까.
열두시 오십육분
하지만 대간 길을 걸으면서 산행의 패턴이 많이 달라졌다. 걸음이 너무나 불편해졌다. 걸음과 풍경에 몰입하고 싶어도 그럴만한 여력이 없다. 꼴찌에게도 예의가 있고 구실이 필요하다. 아무리 내가 혼신의 힘으로 걷는다고는하지만 그것도 다 내 입장에서의 이야기다. 남들은 차차 빨라질것이라고 하지만 앞으로 남아있는길은 더 험하고 더 체력을 필요로하는 길이니 더 빨라진다는것은 엄두도 못낼 일이다.
FESTINA LENTE!
빠르게 서둘러라. 얼마나 멋진 말인가. 산행을 시작 하면서부터 늘 내 머리 속에 맴도는 한마디. 페스티나 렌테.
렌테는 아주 느린것을 의미한다. 산길을 걷다 걸음을 잠깐 멈추고 세상을 돌아보는 시간이 렌테다. 그러기에 렌테의 삶은 진중하다. 깊은 통찰과 단단한 철학이 인생의 깊은 품위를 만든다. 하지만 너무 딱딱한 삶은 단단하기만 할 뿐 재미가 없다.
바로 이때 페스티나가 필요하다. 경쾌하고 빠른 발걸음. 혼불을 춤추게 하는 빛나는 영감과 예지는 순식간에 찰라적으로 다가온다. 이 때의 감흥을 놓쳐서는 안된다.
이 렌테와 페스티나가 알뜰히 만나는 산행이야말로 제대로 된 산행이 아닐까. 인생도 마찬가지다. 길은 어차피 삶을 관통해 지나가는 것이니까.
열세시 이분
산과 산이 격자처럼 어울려 노는 가운데 제석천의 제왕처럼 장수 팔공산이 맨 후미를 받쳐준다.
삶이 지치고 긴장감이 사라진지 오래라 생각되면 산으로 가라.
산으로 가서 산의 언어를 들어라. 침묵은 말이 없음이 아니라 언어의 또 다른 표현이다.
물 바람 바위와 숲이 주는 그들의 언어를 읽어라 인간이 이땅에 존재하기 훨씬 이전의 언어 보다 본질에 가까운 말들을.
정말 사후 세계가 있어 내가 살아 온 행적을 아주 잠간만이라도 되돌아 볼 수 있을 기회가 있다면 나는 내가 걸어 가는 뒷모습을 한번 바라보고 싶다.
걸음이 늦은 나는 풍경 속에 나보다 한발 앞서 걷는 이의 뒷모습을 담기를 좋아한다. 참으로 진중하고 아름다운 모습들이다.
아가들의 종종걸음에서부터 삶이 묻어있는 노인의 걸음까지 걸음이 깃든 풍경들은 참으로 아름답다.
사후의 세계가 아무리 아름답고 화려하게 치장된들 이 짧고 경건에 찬 생명의 움직임에 비할 수 없다.
백운산과 장안산 사이에 놓인 영취산의 산즐기가 세상을 양분하며 힘차게 뻗어나온다.
황석산과 거망산을 잇는 마루금
그 뒤로 금원산의 그림자도 얼핏 보이고.
얼핏 보아도 눈 앞의 능선이 지정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했음을 알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황석산 아래 안의성에는 조선 군관민 삼사천이 살고 있었고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가토 키요마사가 이끄는 왜군들의 진격에 놀란 조선 관민들은 당황한 나머지 무조건 황석산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뜻밖으로 그들은 황석산을 넘어 진격해 오던 왜장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왜병들과 만나게 된다. 진퇴 양난의 백성들은 마침내 황석산 피바위 위에서 몸을 날려 옥쇄하고 말았다. 자결하지 않아도 어짜피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다. 죽은 백성들의 코와 귀는 베어져 소금으로 절여 일본으로 보내졌다.
안위성이 함락된 후 얼마나 왜병들이 쉽게 육십령에 도달했을지는 불문가지다.
마침내 할미봉
할미봉은 남덕유의 關山이다. 목우즐풍,신산고초를 다 이겨낸 근신강골의 사천왕이다.
칼날능선과 월봉산
월봉산 뒤로 산마루금이 이어지며 큰목재 지나 금원산으로 휘돌아간다
열세시 삼십육분
군사는 기를 꽂아 깃대봉이라 하고 풍수는 터를 보고 구시봉이라 하였으니 깃발없는 깃대는 산중에 허무하고 빈 구유에는 사람만 가득하다.
구시봉아 잘있거라. 깃대봉도 잘있거라.
잊기 위해서는 강해져서는 안된다. 네가 아니면 안된다는 절대성,강렬함의 이기심으로 부터 벗어나야한다.
유연해 져라. 떠나가는 자의 뒷모습처럼.
이 모습을 담기 위해 나는 얼마나 아까운 시간을 저들 뒤에서 기다려야했는지. 그 유연함의 십분의 일이라도 표현되었는지 모르겠다.
엉망진창 육십령
덕유종주를 마친후 육십령을 빠져나오며 "千經萬論이 다 바람소리다"라고 큰 소리쳤던 그 날의 분위기는 다 어디가고 나를 깨울 바람은 아예 불어 오지도 않는다.
열다섯시 십일분
할미봉을 마주한다. 다리에 힘이 빠지고 이따금 쥐가 내린다. 걸음이 조심스러워지고 피로가 엄습했다.
산길을 걷다 어디선가 멈추어 서서 풍경을 담고 싶은 순간만큼 소중한 시간은 없다. 산은 무심한 그대로이다. 나는 그 그대로의 풍경을 기억에 담고 싶은것이다.
부동의 이미지로서의 기억. 그 기억으로부터 느낌을 만들어낸다. 언어가 필요없지만 언어를 약속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대간길을 걷는다는것은 내가 얼마나 먼 거리를 걸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 스스로 내가 걸어 온 길을 얼마나 채웠느냐의 문제이다.
안도감과 위기감이 묘하게 뒤섞인 휴식. 잠시 다리를 쉬게하고 남아있던 영양갱 하나를 먹는다. 싸락눈이 나리기 시작한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간지럽다.
열다섯시 사십분
할미봉에서 너무 놀았다는 생각이 들어 하산
열다섯시 사십육분
악명 높은 할미봉 로프구간을 통과한다.
무엇이 문제인가. 그래 날은 저물어 가고 싸락눈은 내린다.
이제 산 아래로 가면 따뜻한 목욕물이 우리를 기다리고 피로를 가져갈 숙면의 밤이 또 기다리는데.
대리석의 집, 멋진 차들이 무슨 소용이랴. 나는 지금 눈내리는 덕유산 할미봉에 서 있다.
그리하여 눈 위에 눈이 덮히는 그 속절없는 풍경들을 보게되겠지만 당신이 가질 수 없는 한가지 나는 겨울산을 또 하나 가지게 되었다.
열일곱시 삼십분
- 후 기-
산행이란 생각할수록 참 멋진것이다. 세상 어딘가에 끝을 정해두고 전력을 다해 갔다가 더 이상 힘이 남아있지 않는 상태가 되어 돌아오는것.
비록 완전히 힘이 고갈된 상태는 아니지만 최선을 다했기에 당당히 승리라 느끼는것.
내 언제 시키지 않은 일을 위해, 아니 주어진 일에서 조차 이토록 신명을 다해 본적이 있었던가.
세상 어디에도 이토록 짧은 시간 안에 자신을 완성하고 회복시키는 일은 없을것이다. 참으로 빠르고도 느린 하루였다.
찬란한 슬픔 Glittering Sadness (편곡 김대중)
원곡 Shostakovich, Jazz Suit No.2-Ⅳ Waltz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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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poll님!
즐겁고 행복한 마음이 가득 담긴....
작품들...
이런 예술 작품을 보는 것은 아마도 나에게도 큰 행운이 아닐까요!!!!
산행 내내 수고하셨고...
잘 감상하고 갑니다..
대간길 내내 좋은 작품 남겨 주시기 바랍니다....
poll님의 멋진글 과 작품이 12기 회원님들의 활력소가 되리라 생각 합니다.
항상 모든 이들이 마음속으로만 멋진글과 작품을 생각 할뿐인데 Poll님이 이 모든걸
대신해 주시니 감사 합니다...
종주를 위해 작품의 비타민을 주시는 poll 님 감사 합니다.
침묵은 말이 없음이 아니라 언어의 또 다른 표현이다.***** 별다섯
주옥 같은 언어의 유희
poll님!
백두대간 그 넓은 등고선에 휘날리는 시어들이
하얗게 쌓여지고 잔잔한 음률이 그 날을 자꾸 회상케 합니다.
늘 즐산 안산으로 힘찬발길 이어지시길 소망 드립니다.
올린 사진 잘 보고 갑니다..
채곡채곡 쌓아 책한권 엮어도 되겠는데요
좋은 그림 . 좋은글 항상 잘 보고 있고
기다려집니다 ㅡㅡㅡ다음 편이ㅡㅡ
대간길 만큼이나 깊이있고 감동이 묻어납니다.
산행과 함께 느끼는 또 하나의 묘미가 아닐까
싶네요.
정말 수고 하셨습니다.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입니다.
멋진 사진, 감동적인 글 즐감 하고 갑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