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익(金在益) 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
김재익(1938년∼1983년)은 안동김씨(구안동,익원공파)로 아버지 김응묵(金應默), 어머니 강병주(姜炳周) 사이에서 9남매의 막내로 출생하였다. 부인은 숙명여자대학교 문헌정보학 교수인 이순자(李淳子) 여사이다. 슬하에 한회(翰會), 승회(承會) 두 아들이 있고, 손자로 태완을 두었다.
선조의 고향은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읍 소정리다. 경제학자·경제관료로 경기 중고교, 서울대 외교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국제정치학 석사), 미국 유학으로 하와이 주립대학대학원(경제학 석사), 스텐포드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통계학 석사, 경제학 박사)한다.
귀국하여 한국은행 조사부 조사역, 경제기획원 기획국장. 국보위 경제과학분과위원회 위원장, 대통령 경제수석 비서관을 역임한다. 그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신봉자로 1980년대 한국경제의 밑그림을 그린 인물이다.
1962년 혜화동 성당에서 결혼식후.
김재익은 서울 출생으로 경기고등학교 2학년 때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에 입학하였다. 1960년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1962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한 다음 미국 하와이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였고, 다시 미국 스탠포드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여 1973년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72년 둘째 김승회의 돌 기념 가족사진
1972년 미국 유학시절 둘째 아들이 갓난아기였을 때
1973년 박사학위를 얻은 해에 귀국하여 한국은행에 적을 둔 채 청와대비서실로 들어간 김용환 경제수석 밑에서 자문역으로서 관계에 첫발을 내딛었다. 이때 부가가치세 도입의 이론적인 바탕을 마련하였다.
1974년 경제기획원으로 자리를 옮겨 비서실장, 경제기획관을 거쳐 경제기획국장이라는한국경제의 근간을 그린 요직을 차지하였다.
1977년 어머니를 모시고 찍은 가족사진
1975년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관, 1976년 경제기획원 기획국장, 1980년 경제기획원 경제협력차관보 등을 역임하였고, 80년 5월 하순 사표를 내고 한국개발연구원(KDI) 객원 연구위원으로 가려던 김재익을 전두환 전 대통령은 경제 담임교사로 차출하게된다.
당시 대학생이던 김재익의 아들이 아버지가 독재정권에 협력한다고 항의하자 그는 "경제의 개방화와 국제화는 결국 독재체제를 어렵게 하고 시장경제가 자리잡으면 정치의 민주화는 자연히 따라온다"고 타일렀다. 또 친구들이 그가 전두환 정권에 참여한 데 대해 "김재익은 김일성 밑에 가서도 일할 사람"이라고 비난하자 그는 "만약에 내가 김일성을 설득시켜 그 사람의 생각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으면 해야지"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부인 이순자 여사의 회고다.
제5공화국이 출범하면서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으로 발탁된 김재익은 한국경제의 성장과 안정은 저금리·저물가정책을 기초로 하여야 한다는 평소 그의 경제관을 경제정책에 반영하였으며, 그의 경제정책은 이후 계속 한국경제계획의 기저가 되었다.
김재익은 전두환 정권 당시의 청와대 경제수석으로서 금융실명제, 물가안정화 정책, 정보화 정책, OECD 가입, 수입자유화 정책 등을 입안한 인물이다.
1980년 집에서 부부.
또한 김재익은 경기고 1년 후배인 오명을 청와대 경제비서실 과학기술 담당 비서관으로 임명하여 통신혁명의 기틀을 잡았다. 오명은 전기통신사업을 체신부에서 분리해 한국통신공사(현 KT)가 탄생하였으며, 전자교환기를 도입하였다.
김재익은 미국에서 신고전파 경제학을 공부하였다. 1980년초기의 한국 사회의 인플레이션을 수습하기 위하여 금융과 재정을 긴축하고, 수입을 자유화하며, 임금상승은 생산성 증가의 범위 내로 억제하고, 환율과 금리는 시장에서 결정되도록 해야 한다는 기조를 유지하였다. 또한 경제의 능률 향상을 위해서는 개방과 경쟁이 필수적이고 정부의 간섭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원칙을 가졌다
42세의 나이로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에 발탁된 김 전 수석은 당시 우리 경제의 고질병이었던 연 15%의 고 인플레이션을 잡았을 뿐 아니라 저성장과 노사 갈등, 유가 불안 등의 어려움을 딛고 우리 경제를 견실한 성장 기반에 올려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때문에 전두환(全斗煥) 당시 대통령은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며 그를 깊이 신임했다.
1982년서울대교정에선 부부.
특히 김 전 수석은 개발독재의 유산이 짙게 깔려 있던 당시에는 혁명적발상이나 다름없었던 ‘안정, 자율, 개방’의 경제철학을 실천한 ‘용기있는’ 관료였다는 것이 주위의 회고다.
국적 항공사의 경쟁 체제를 도입한 것도 그의 공이다
김재익이 젊은 나이에 숨지지 않았으면 나라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38년생인 그는 만 42세인 80년 청와대 경제수석에 발탁됐지만 저서 한 권 없고 언론과의 인터뷰도 극력 기피해 이렇다할 외형적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를 기리는 작업이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미국 유수의 경제학자들은 김재익을 가리켜 "동방의 천재"라 경탄 을 금하지 못하였으며 그를 자국의 학자로 수입하려고 애썼다고 한다.
부인 이순자 교수는 1992년 정초에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집에 새해인사를 하러 간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가 전두환 전대통령에게 "어르신, 택시를 타고 오는데 택시운전기사가 요즘 경제가 너무 안 좋다며 하소연을 하는 겁니다. 차라리 경제기획원 장관에 전두환씨를 앉히자 이런 말까지 하더라고요. 5공이 다른건 몰라도 물가 하나는 확실히 잡지 않았느냐? 라는 말도 덧붙이면서요." "에이-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마세요. 김재익이라도 살아 있어서 비서실장이라도 해주면 모를까, 나 혼자 어떻게 되겠어요" 그만큼 전두환-김재익의 만남은 유비와 제갈공명의 만남 만큼 극적인 것이었다. 전두환은 그에게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는 말과 함께 경제에 전권을 쥐어주었다고 한다.
또한 김재익은 청렴한 인물이었다. 청와대에 있는 동안 김재익에겐 인사청탁이 끊이질 않았는데, 아무리 가까운 지인이 보낸 지원자라도 모두 돌려 보냈다고한다.
김재익의 어머니가 사망한 뒤에는 그의 옷장에서 많은 분량의 이력서가 발견됬다고 한다. 워낙 꼿꼿한 성품의 소유인 아들을 잘 아는지라 아무리 인사 청탁이 들어와도 어머니는 아들에게 아예 말도 꺼내지 않고 옷장속에 쌓아두었던 것이다.
1996년 Stanford University 김재익 추모 세미나실 개관 기념식후 가족들의모습.
1983년 10월 9일. 당시엔 한글날이 공휴일이었다. 이날 낮 동남아를 순방 중이던 전두환 전 대통령을 노린 북한의 테러가 미얀마(전 버마) 아웅산 국립묘지에서 발생했다. 全전대통령을 수행했던 서석준 경제부총리, 이범석 외무장관, 함병춘 청와대 비서실장, 김재익 경제수석 등 17명이 순직했다. 미얀마의 국부 아웅산이 묻혀 있는 국립묘지의 건축물과 함께 대한민국의 동량(棟梁)이 쓰러졌다.
미국 유수의 경제학자들이 "동방의 천재"라 경탄 을 금하지 못하였으며 그를 자국의 학자로 수입하려고 애썼던, 경제체제 자율화, 개방화, 국제화 정책의 선구자였던 김재익은 1983년 전두환(全斗煥)의 대통령의 버마 예방을 수행하였다가 1983년 10월 9일 아웅산묘소 폭발로 45세에 순직하였다.
김재익 전 대통령 경제수석 서거 20주기 추모 기념집 출판 기념회에 참석한 내빈들.전두환 전대통령 부부의 모습도 보인다.공교롭게도 김전수석의 부인과 전 영부인 이순자여사와 동명이다.
김재익 전경제수석의 가족 일동(사진/김태인).
■참고자료:중앙일보,한국일보,한국경제,안동김씨대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