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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순정리론 제44권
4. 변업품 ⑫
10. 시류(施類)ㆍ계류(戒類)ㆍ수류(修類)의 세 가지 복업사(福業事)
10.1. 복업사의 정의와 3류(類)의 본질
계경에서 설하기를, “세 가지의 복업사(福業事)가 있으니, 첫째로는 시류(施類) 복업사이며, 둘째로는 계류(戒類) 복업사이며, 셋째로는 수류(修類) 복업사이다”고 하였다.21) 여기서 무엇을 일컬어 복업사라고 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보시ㆍ지계(持戒)ㆍ수정(修定)의 세 종류는
각기 그것이 상응하는 바에 따라
복(福)ㆍ업(業)ㆍ사(事)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으니
각각의 차별은 업도에서 설한 바와 같다.
논하여 말하겠다.
세 종류는 모두 다 복(福)이며, 혹은 업(業)이며, 혹은 사(事)로서,22)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업도(業道)의 경우에서와 같이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즉 10업도를 분별하면서, ‘업’이면서 역시 ‘도(업의 길)’가 되는 것도 있으며, ‘도(업의 길)’로서 ‘업’이 아닌 것도 있다고 설한 것과 마찬가지로,23) 여기서도 ‘복’이면서 역시 ‘업’이고 ‘사’가 되는 것도 있고, ‘복’과 ‘업’이면서 ‘사’가 되지 않는 것도 있으며, ‘복’과 ‘사’이면서 ‘업’이 되지 않는 것도 있으며, 오로지 바로 ‘복’일 뿐 ‘업’도 아니고 ‘사’도 되지 않는 것도 있는 것이다.
먼저 시류(施類) 중에서 신업과 어업의 두 가지는 복ㆍ업ㆍ사의 세 종류의 뜻을 모두 갖추고 있으니, 선(善)이기 때문에 바로 ‘복’이며,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역시 ‘업’이며, 능히 신ㆍ어업의 사(思,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보시하려고 하는 의지작용)를 등기(等起)할뿐더러 소의문(所依門)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역시 ‘사(事)’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신ㆍ어업)과 등기하는 사(思)는 오로지 ‘복’과 ‘업’이라고만 이름할 뿐이며, 사(思)와 구유(俱有)하는 법은 오로지 ‘복’이라는 명칭만을 획득할 뿐이다.24)
계류(戒類)는 이미 오로지 신ㆍ어업만을 자성으로 하는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것들은 복ㆍ업ㆍ사라는 명칭을 모두 획득할 수 있다.
수류(修類) 중에서 자(慈)는 오로지 ‘복’과 ‘사’라고만 이름할 뿐이니, 그것은 바로 업의 근거[事]이기 때문이다.25) 즉 ‘자’와 상응하는 사(思)는 ‘자’를 근거[門]로 하여 조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와 구유하는 사(思)와 계(戒)는 오로지 ‘복’과 ‘업’이라고만 이름할 뿐이며, 그 밖의 구유하는 법은 오로지 ‘복’이라고 이름할 뿐이다.
비(悲) 등에 대해서도 모두 이에 준하여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복업(福業)은 ‘복을 짓는다[作福]’는 뜻을 나타내니, 이를테면 복의 가행을 말하며, ‘사(事)’는 소의를 나타내니, 이를테면 보시ㆍ지계ㆍ수정은 바로 복업의 ‘사’인 것이다. 즉 그 같은 세 가지를 성취하기 위해 복의 가행을 일으키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는 설하기를, “오로지 사(思) 만이 참된 복업이며, 복업의 사(事)란 이를테면 보시ㆍ지계ㆍ선정을 말하니, 이와 같은 세 가지를 근거로 삼아 복업이 일어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26)
10.2. 시류(施類)의 복업사
1) 보시와 그 과보
어떠한 법을 일컬어 보시라고 이름하는 것이며, 보시는 어떠한 과보를 초래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것에 의해 희사되는 것을 보시라고 이름하니
이를테면 다른 이를 공양하고 이익 되게 하는
신ㆍ어업과, 능히 이것을 낳는 것으로서,
이 같은 보시는 크나큰 부귀의 과보를 초래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비록 희사되는 물건과 능히 희사하는 작구(作具)를 모두 ‘보시’라고 이름할 수 있을지라도, 여기서 설정된 보시라고 하는 말은 다만 희사의 작구에 근거한 것이니, 이러한 작구에 의해 희사하는 일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으로, 희사의 연유가 되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보시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27) 이는 마치 인식되는 대상[所度境]이 ‘인식수단[量]’이라는 명칭을 획득하지 못하며, 능히 인식하는 작구(즉 의식)에 근거하여 인식수단이라고 하는 명칭이 설정되는 것과도 같다.
혹은 승부를 겨루는 과정[角勝]에서, 저장(저축)해 두려는 의도에서, 칭예(稱譽)나 가문의 관례[傳習] 때문에, 다른 이를 친애하거나 가깝다는 등의 이유에 의해서도 역시 희사하는 일이 이루어질 수 있지만, 이것은 보시의 올바른 뜻으로 설해진 것이 아니다.28) 바로 이 같은 사실과 구별하기 위해 [본송에서] ‘다른 이를 공양하고 이익 되게 하는 것’이라고 설한 것으로, 이미 열반에 든 이에 대해서는 오로지 공양하기 위한 것일 뿐이지만, 그 밖의 다른 이에 대해서는 [공양뿐만 아니라] 역시 이익 되게도 하니, 저들(열반에 들지 못한 이)에게는 대종으로 이루어진 온갖 근(根)이 있어 보시를 행할 때 다만 그것을 이익 되게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작구’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신ㆍ어업과 아울러 그것을 능히 낳는 것[能發]을 말한다.
‘능히 낳는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무탐(無貪)과 함께 작용하면서 능히 이러한 [신ㆍ어업을] 일으키는 취(聚,심ㆍ심소법의 취)를 말한다. 다시 말해 신ㆍ어업과, 능히 그것을 일으키는 마음과 아울러 이와 함께 작용하는 것(즉 심소법)을 모두 보시의 본질[體]이라고 말하니, 어떤 이가 게송으로 말한 바와 같다.
만약 어떤 사람이 청정한 마음으로
자신을 제쳐두고 보시를 행하였다면
이러한 찰나의 선한 5온에 대해
모두 ‘보시’라고 하는 명칭을 설정하는 것이로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와 같은 시류(施類)의 복ㆍ업ㆍ사는 해탈로 회향할 경우 역시 이계과를 획득할 수 있다. 그렇지만 [본송에서는] 다만 그 과보를 가까운 시기에 초래하는 결정업에 근거하여 ‘능히 크나큰 재물과 부귀의 과보를 초래한다’고 설하였을 뿐이다.
무슨 뜻에서 이같이 ‘크나큰 재물과 부귀’라는 말을 설한 것인가?
[그 때 초래된] 재물[과 부귀]는 미묘 광대하여 탈취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승부를 겨루는 과정 등에서 보시한 것(다시 말해 승부욕에서 뇌물을 시여한 것 등)은 [도리어] 독 가시가 되어 상처를 입히니, 비록 보시하였을지라도 크나큰 재물과 부귀의 과보를 [초래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시류(施類)의 복’이라는 말은 ‘보시를 본질[體]로 삼는다’는 뜻을 나타내니, ‘진흙 종류[泥類]의 그릇’이라 하고 ‘나무 종류[木類]의 기둥’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29) ‘들려진 종류[聞類]의 지식’이라고 하듯이 ‘류’라고 하는 말이 본질의 뜻을 나타내지 않는 경우도 역시 찾아볼 수 있지만,30) [이 경우는] 지금 여기서 인정하는 바가 아니다.
나아가 계류(戒類)와 수류(修類)라는 말에 대해서도 이(施類)에 준하여 해석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2) 보시의 목적
그렇다면 어떠한 이의 이익을 위하여 보시를 행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자신과 다른 이와 둘 모두를 이익 되게 하기 위해
또한 둘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면서 보시를 행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시주(施主), 즉 보시하는 자가 보시를 행할 때에는 두 가지의 이익을 관찰하니, 첫째는 선근의 과보를 초래하는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서이며, 둘째는 다른 이의 제근(諸根) 대종을 이익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시주에도 두 가지 유형이 있으니, 첫째는 번뇌를 가진 자이며, 둘째는 번뇌를 갖지 않은 자이다. 번뇌를 가진 자에는 다시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아직 욕탐(욕계의 애탐)을 떠나지 않은 자이며, 둘째는 이미 욕탐을 떠난 자이다. 이 두 가지 중에도 각기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로는 온갖 성자[로서 욕탐을 떠나지 않은 자와 이미 욕탐을 떠난 자]이며, 둘째로는 온갖 이생[으로서 욕탐을 떠나지 않은 자와 이미 욕탐을 떠난 자]이다.
이 중에서 아직 욕탐을 떠나지 않은 성자와 이미 [욕탐을 떠났거나] 아직 욕탐을 떠나지 못한 이생이 제다(制多, caitya, 塔廟를 말함)에 공양[奉]하고 보시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이다. 즉 그것에 의해 자신의 두 종류의 선근을 증장하게 되니, 첫째는 능히 크나큰 부(富)를 과보로서 초래하는 것이며, 둘째는 상의(上義, 즉 열반)의 자량(資糧)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온갖 유정으로서 이미 욕탐을 떠난 성자가 제다에 공양하고 보시하는 것은, 순현법수업을 제외하고는 크나큰 부를 초래하지 않으니, 그는 필경 이미 그 같은 이숙과의 경지를 초월하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상의(열반)의 자량을 획득하게 된다고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이는 역시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한 보시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이것(제다에 대한 보시)은 능히 다른 이의 제근 대종을 이익 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이를 이익 되게 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번뇌를 갖지 않은 자가 다른 유정에게 보시하는 것은 오로지 다른 이를 이익 되게 하기 위해서이니, 이를테면 능히 다른 이의 제근 대종을 이익 되게 하지만, [그것에 의해] 자신의 두 종류의 선근은 증장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나아가 번뇌를 갖은 자가 다른 유정에게 보시하는 것은 자신과 다른 이 둘 모두의 이익을 위한 것이고, 번뇌를 갖지 않은 자가 제다에 공양하고 보시하는 것은, 순현법수업을 제외하고는 둘 모두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떤 논사는 오로지 ‘보시가 크나큰 부를 초래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보시의 과보를 분별하였는데, 그는 이같이 논설하였다.
“이 중에서 아직 욕탐을 떠나지 않은 모든 이와 이미 욕탐을 떠난 이생의 존재[類]가 자신의 소유물을 갖고서 제다(制多)에 공양하고 보시하는 경우, 이러한 보시를 일컬어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 하고, 다른 이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하니, 이로 말미암아 스스로 이익을 획득하기 때문이다.31)
만약 온갖 성자로서 이미 욕탐을 떠난 이가 온갖 유정에 대해 보시하였을 경우, 순현법수업을 제외한 이러한 보시를 일컬어 오로지 ‘다른 이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하니, 그들은 이로 말미암아 요익을 획득하게 되기 때문이며,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고 하니, 그(이미 욕탐을 떠난 성자)는 그러한 [이숙]과의 경지를 초월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아직 욕탐을 떠나지 않은 모든 이와 이미 욕탐을 떠난 이생의 존재가 자신의 소유물을 갖고서 온갖 중생에게 보시하는 경우, 이러한 보시를 일컬어 ‘[자신과 다른 이] 둘 모두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만약 그러한 성자로서 이미 욕탐을 떠난 이가 제다에 보시하였을 경우, 순현법수업을 제외한 이러한 보시를 일컬어 ‘둘 모두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닌 것’이라고 한다. 즉 이것은 오로지 공경과 보은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32)
3) 보시의 과보가 다른 이유
앞에서 보시는 크나큰 부를 초래한다는 사실에 대해 전체적으로 밝혔다. 이제 다음으로 마땅히 보시의 과보가 다른 이유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시주와 시물과 복전(福田)이 다르기 때문이니
그래서 보시의 과보에는 차별이 있는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보시에 차별이 있는 것은 세 가지 원인 때문이다. 즉 시주(施主)와 보시하는 재물 즉 시물(施物)과 복전(福田, 즉 시물을 받는 자)에 차별이 있기 때문으로, 보시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그 과보에도 차별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시주와 재물과 복전에 차별이 있다고 하는 말은, 이를테면 이와 같은 종류의 보시에 있어 시주와 재물과 복전이 그 밖의 다른 보시의 시주와 재물과 복전에 비해 뛰어나고 저열한 등의 차이를 말한다.
3-1) 시주(施主)에 의한 차별
먼저 시주에 의한 차별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시주의 차이는 믿음 등에 의한 것이니
공경하고 존중하는 따위의 보시를 행하면
존중받고, 광대한 재물을 애락하며
때에 맞는, 탈취되기 어려운 과보를 획득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혹 어떤 시주는 인과에 대한 결정적인 믿음을 획득하고서, 혹 어떤 시주는 인과에 대해 마음에 유예(猶豫, 의심)를 품고서, 혹 어떤 시주는 경솔하게 욕망에 따르면서, 혹 어떤 시주는 청정한 시라(尸羅)를 갖추고서, 혹은 조금 어기고서, 혹은 계를 전혀 지니지 않고서, 혹 어떤 시주는 부처님의 교법을 구족하여 많이 듣고서, 혹은 조금 듣고서, 혹은 아무 것도 들은 일이 없으면서 혜시(惠施)를 행하기도 한다.
즉 시주가 [인과를] 믿고[信], 계를 지니고[戒], [교법을] 들은[聞] 등의 차별되는 공덕으로 말미암아 시주에 차이가 있다고 하였다.33) 그리고 이러한 시주의 차이로 말미암아 보시의 차별이 생겨나고, 보시의 차별로 말미암아 과보가 다르게 획득되는 것이다.
예컨대 온갖 시주가 이와 같은 공덕을 갖추고서 능히 여법하게 공경하고 존중하여 보시하는 등의 네 가지의 보시를 행하면, 순서대로 바로 존중받는 등의 네 가지 과보를 획득한다. 즉 만약 시주가 공경하고 존중하여 보시[敬重施]를 행하면, 항상 다른 이로부터 공경 받고 존중받는 과보를 바로 초래하게 된다. 만약 스스로의 손으로 보시[自手施]하면, 능히 광대한 재물을 애락하며 수용하는 과보를 초래하여 획득하게 된다. 만약 때에 맞춰 보시[應時施]하면 때에 맞게 재물을 수용하는 과보를 초래하게 되니, 필요한 것을 때에 맞게 획득하지 다른 때에 [획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다른 이의 기분을 손상시키지 않고 보시[無損施]를 행하면, 바로 왕이나 불 등에 의해 탈취되거나 괴멸되지 않는 자재(資材)를 수용하는 과보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3-2) 시물(施物)에 의한 차별
보시된 재물에 의한 차별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시물의 차이는 색 등에 의한 것으로,
미묘한 색[妙色]과 좋은 명예[好名]와
대중들의 사랑과, 유연한 몸을 획득하여
때에 따라 낙촉(樂觸)을 갖게 되는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시여된 재물이 색과 향과 맛과 감촉을 결여하였거나, 혹은 갖추고 있음에 따라 순서대로 미묘한 색 따위를 결여하였거나 혹은 갖춘 과보를 획득하게 된다. 즉 시여된 재물에 색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바로 미묘한 색[의 과보]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며, 향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바로 좋은 명예를 초래하게 되는 것으로, 마치 향의 분분함이 모든 곳에 두루 퍼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또한 맛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바로 대중들의 사랑을 초래하게 되는 것으로, 미묘한 맛이 대중들로부터 사랑 받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여된 재물에] 감촉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유연한 몸과 아울러 때에 따라 낙수(樂受)를 낳는 촉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시여된 재물에 이와 같은 색 등의] 결여됨이 있으면, 상응하는 바에 따른 과보도 감소하게 되는 것이다.34)
이처럼 [시여된 재물이] 색ㆍ향 등을 갖추고 [결여함에] 따라 ‘시물의 차이’가 있다고 하였으니, 시물의 차이로 말미암아 보시 자체와 그 과보에 모두 차별이 있게 되는 것이다.
3-3) 복전(福田)에 의한 차별
보시를 받는 복전에 의한 차별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복전의 차이는 취(趣)와 괴로움과
은혜와 덕(德)의 차별에 의한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보시를 받는 복전에게는 각기 취(趣, 즉 5취를 말함)와 괴로움과 은혜와 덕(德)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복전의 차이[田異]’가 있다고 말한 것으로, 복전의 차이로 말미암아 보시의 과보에 차별이 있게 된 것이다.
여기서 ‘취의 차별로 말미암아 [과보에 차별이 있다]’고 함은, 이를테면 “만약 방생에게 보시하면 백배의 과보를 받고, 계를 범한 이에게 보시하면 천 배의 과보를 받는다”고 세존께서 설한 바와 같다.
백 배, 천 배라고 하는 과보의 양은 어떠한 것인가?
보시를 받는 복전이 먹을 것 등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그 만큼 수명 등이 증가하였다면, 시주도 이에 따라 인(人)ㆍ천(天) 중에서 그같이 [증가한 수명의] 백 배, 천 배와 같거나 초과하는 과보를 받게 된다. 그래서 세존께서도 “시주가 보시를 행할 때, [그것은] 보시를 받는 복전에게 수명 등 다섯 가지를 보시하는 것이니, 시주도 이에 따라 인ㆍ천 중에서 수명 등의 다섯 가지 과보를 획득하게 된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괴로움의 차별로 말미암아 [과보에 차별이 있다]’고 함은, 이를테면 일곱 가지 유의(有依)의 복업사(福業事)의 경우에서와 같은 것으로, 앞의 [계경에서도] 설하기를 “마땅히 나그네와 행려자와 병자와 간병인[侍]에게 원림(園林)과 일상의 먹거리[常食]를 보시해야 할 것이며, 아울러 춥거나 바람이 부는 등의 때에 따라 옷과 약을 보시해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또한 다시 설하기를 “청정한 믿음을 갖추고 있는 남자와 여인으로서 여기서 설한 일곱 가지 종류의 유의의 복업사를 성취하는 자라면, 그가 획득된 복덕은 감히 그 양을 취할 수도 없을 것이다”고 하였다.35)
즉 인연의 차별로 말미암아 괴로움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지금 여기서의 보시는 그것을 받는 자의 차별적인 괴로움을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과보에 차별이 있는 것이다.
‘은혜의 차별로 말미암아 [과보에 차별이 있다]’고 함은, 부모나 스승, 그리고 그 밖의 은혜 있는 자에게 보시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를테면 『본생경(本生經)』에서 곰이나 사슴 등 온갖 은혜 있는 종류에 대해 설한 바와 같다.36) 즉 [이러한 경설로] 은혜가 있는 유정에 대해 온갖 악업을 일으키면 그 과보가 바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니, 이에 따라 [은혜가 있는 유정에 대해] 보은의 선업을 행하면 그 과보가 필시 결정적임을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이다.
‘덕의 차별로 말미암아 [과보에 차별이 있다]’고 함은, 계경에서 “지계인(持戒人)에게 보시하면, 그 과보는 백 천(억) 배가 될 것이며, 나아가 부처님께 보시하면 그 과보는 가장 뛰어나 이루 헤아릴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다.
비록 [보시의 과보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고 할지라도 역시 적고 많음의 차별이 있으니, 이는 마치 긍가하(殑伽河, 갠지즈강)와 대해의 물방울이 [차별되는 것과] 같으며, 재시(財施)에 비해 법시(法施)가 보다 존귀하다고 하는 것과 같다.
4) 최상의 보시
[그렇다면] 재시(財施) 중에서 무엇이 가장 수승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해탈한 자가 해탈한 자에게 보시하는 것과
보살의 보시와 여덟 번째의 보시가 가장 수승하다.
논하여 말하겠다.
이미 해탈한 자가 이미 해탈한 복전에 대해 보시하는 것, 온갖 재시 가운데 이것이 가장 수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모든 보살이 뛰어난 의요(意樂) 등으로써 일체의 유정에게 이익과 즐거움을 주려할 뿐더러 대 보리(菩提)를 위하여 혜시(惠施)를 행하였다면, 이는 비록 해탈한 자가 해탈한 복전에 대해 보시하는 것과는 같지 않을지라도 보시의 복 중에 이 역시 가장 수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같은 보시를 제외한 여덟 가지 종류의 보시 중에서 여덟 번째 보시의 복도 역시 가장 수승한 것이라고 할 만하다.
여덟 가지 보시란 무엇인가?
첫째는 수지시(隨至施)이며, 둘째는 포외시(怖畏施)이며, 셋째는 보은시(報恩施)이며, 넷째는 구보시(求報施)이며, 다섯째는 습선시(習先施)이며, 여섯째는 희천시(希天施)이며, 일곱째는 요명시(要名施)이며, 여덟째는 마음을 장엄하기 위해, 마음을 자조(資助)하기 위해, 유가(瑜伽)를 자조하기 위해, 상의(上義) 즉 열반을 획득하기 위해 행하는 혜시(惠施)이다.
여기서 ‘수지시’란, 이를테면 유정이 자신에게 오면 뜻에 따라 의복이나 음식을 시여하는 것으로, 깊이 공경 존중하여 행하는 보시는 아니다.
‘포외시’란, 이를테면 재앙을 [닥치는 것을] 보고서 그것을 종식시키기 위해 행하는 혜시(惠施)를 말한다. 혹은 이러한 재물에 괴상(壞相)이 현전하는 것을 보고서 차라리 보시하여 망실되지 않게 하기 위해 행하는 혜시를 말한다.
‘습선시’란, 이를테면 선인(先人)이나 조부, 가법(家法)을 익혀 행하는 혜시를 말한다.
‘마음을 장엄하기 위해 [행하는 보시]’란, 이를테면 신(信) 등의 [7]성재(聖財)를 인발하기 위해 행하는 혜시를 말하며,37) ‘마음을 자조하기 위해 [행하는 보시]’란 이를테면 인색한 마음을 소멸하고 제거하기 위해 행하는 혜시를 말하며, ‘유가를 자조하기 위해 [행하는 보시]’란 이를테면 선정의 즐거움이 전전(展轉)하는 생인(生因)을 추구하기 위해 행하는 혜시를 말하는 것으로, 이러한 보시로 말미암아 바로 후회함이 없는 마음[無悔]을 획득하며 마침내 심일경성(心一境性)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상의(上義)를 획득하기 위해 [행하는 보시]’란 이를테면 열반을 획득하기 위해 [행하는 보시를] 말하는 것으로, 처음에는 재물을 버리고 나아가 마침내 일체의 생사도 능히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혜시를 행하는 것은 바로 이것(열반)의 뛰어난 생인이니, 이에 근거하여 능히 열반을 증득하는 법을 인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밖의 보시에 대해서는 알기 쉽기 때문에 별도로 해석하지 않는다.38)
5) 무량의 과보를 획득하게 되는 이생(異生)의 복전
세존께서 설하기를 “성자에게 보시하면 그 과보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고 하였다.39) 혹 성자가 아닌 이에게 보시하여도 그 과보가 역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경우가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부모와 병자와 법사와
최후생의 보살은
비록 성법을 증득한 자가 아닐지라도
보시의 과보는 역시 무량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이와 같은 다섯 종류는 비록 이생일지라도 그들에게 보시하면 역시 능히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과보를 초래한다. 그리고 최후의 존재로 머무는 이(보살)를 ‘최후생’이라고 이름하였다.
법사는 네 가지 복전 중에서 어떠한 복전에 포섭되는 것인가?40)
바로 은혜의 복전[恩田]에 포섭된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설법사(說法師)는 장차 온갖 악취에 떨어지려고 하는 자에게 능히 안온(安穩)의 성문(城門)을 열어 보여줄뿐더러 생천과 해탈의 도(道)을 열어 보여주기 때문이다. 즉 이미 비리(非理)의 행(行)을 지은 자로 하여금 능히 여리(如理)의 행을 짓는 이로 바뀌게 하니, 흑품과 백품의 법(즉 불선법과 선법)의 자성과 그 과보의 대치 등에 대해 능히 잘 선양하였기 때문이며, 무지(無智)의 눈먼 자에게 혜안(慧眼)을 보시하여 설법사가 설한 가르침에 의해 전도됨이 없이 염정(染淨)의 품류를 능히 잘 관찰할 수 있게 하였기 때문이다.
요컨대 좋은 설법사는 바야흐로 능히 부처님이 하시는 일을 행하기 때문에 그는 오로지 승의의 은혜의 복전일 따름으로, 그에 대해 보시할 경우 필시 마땅히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과보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6) 업의 경중(輕重)
6-1) 6인(因)에 의한 경중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과보를 초래하는 일체의 업은 상ㆍ하의 품류가 모두 평등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어째서인가?
여섯 가지 원인으로 말미암아 일체의 업에 경중이 성취되기 때문이다.
그 같은 여섯 가지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후기와 대상[田]과 근본과
가행과 사(思)와 의요(意樂),
이것에 상ㆍ하가 있기 때문에
업에도 상ㆍ하의 품류가 성취된다.
논하여 말하겠다.
‘후기’란 이를테면 [근본업도를] 짓고 나서 혹은 단박[頓]에, 혹은 자주[數] 선행된 업에 따라 짓는 업을 말한다. ‘대상[田]’이란 이를테면 그것에 대해 선을 짓거나 악을 짓는 것을 말한다. ‘근본’이란 근본업도를 말하며, ‘가행’이란 그것(근본)을 인기하는 신ㆍ어업을 말한다. 그리고 ‘사(思)’란 이를테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업도가 구경에 이르게 되는 것을 말하며, ‘의요’란 이를테면 ‘나는 마땅히 이러 이러한 일을 지을 것이다’고 마음먹는 것[意趣]을 말한다.
따라서 만약 이러한 여섯 가지 원인이 모두 상품이라면, 이때의 업이 가장 무겁다. 그리고 이와 반대되는 경우의 업이라면 가장 가벼우며, 이 [둘]을 제외한 중간의 경우는 가장 무거운 업도 아니고, 가장 가벼운 업도 아니다.
즉 혹 어떤 업은 오로지 후기에 섭수(攝受)됨으로 말미암아 중품(重品)을 획득하는 경우가 있으니, 결정코 [후기가] 그것의 이숙과를 안립하기 때문이다.41) 나아가 혹 [어떤 업은] 오로지 의요로 말미암아 [경중이] 성취되기도 한다. 그리고 두 가지와 세 가지 원인 등에 의해 [경중이 성취되는 것에] 대해서도 이치대로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42)
6-2) 조작업(造作業)과 증장업(增長業)
계경에서 설하기를 “살펴 생각[審思]하여 지은 업을 일컬어 조작업(造作業)이라 하고, 역시 증장업(增長業)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는데, 어떠한 원인에 의해 지어진 업을 설하여 ‘증장업’이라고 일컬은 것인가?43)
다섯 가지 종류의 원인에 의해 지어진 업이다.
무엇을 다섯 가지라고 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살펴 생각하고 원만함에 의한 업은
악작과 대치가 없을 뿐더러
조반(助伴)과 이숙을 갖기 때문에
이러한 업을 ‘증장’이라고 이름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살펴 생각함[審思]에 의한 업’이란, 이를테면 살펴 생각하여 지은 업으로, 경솔하게 생각나는 대로 지은 것도 아니고, 또한 역시 아무런 생각 없이 지은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원만함에 의한 업’이란, 이를테면 마땅히 악취에 떨어질 만한 양(量)의 업을 말하는 것으로, 이같이 업이 원만하게 성취된 것을 ‘증장업’이라 이름하며, 그 밖의 업은 오로지 ‘조작업’이라고 이름할 뿐이다. 예컨대 어떤 유정류는 [3]악행 가운데 한 가지 악행을 원인으로 하여 악취에 떨어지는 경우도 있고, 내지는 세 가지 악행으로 말미암아 악취에 떨어지는 경우도 있으며, 10업도 가운데 한 가지 업도로 말미암아 악취에 떨어지는 경우도 있고, 내지는 열 가지 업도로 말미암아 악취에 떨어지는 경우도 있는데, [마땅히 악취에 떨어질 만한 양의 업을 ‘증장업’이라고 하는 것이다.]
‘악작과 대치가 없기 때문에’라고 함은, 이를테면 [지어진 악업에 대해] 후회하는 일도 없고, 그것을 대치할만한 업도 없는 것을 말한다.
‘조반을 갖기 때문에’라고 함은, 이를테면 불선의 업을 지으면서 그것을 보조하는 불선업을 수반하는 경우를 말하는데, 남의 재물을 훔치면서 다시 다른 이의 첩실을 더럽히거나 다른 이의 아들을 죽이는 등의 경우가 그러하다.44)
‘이숙을 갖기 때문에’라고 함은, 이를테면 과보를 낳는 시기가 결정되어 있지 않은 업[時不定業]일지라도 결정코 이숙과를 낳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선업의 경우는 이와 반대이다.
나아가 이와 다르다면(다시 말해 이상의 다섯 가지 원인에 의해 지어진 업이 아니라면), 오로지 ‘조작업’이라고 이름할 뿐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7) 제다(制多)에 보시할 때의 복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이 아직 욕탐을 떠나지 않은 자 등이 제다(制多,탑묘)에 공양하고 보시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보시를 수용하는 이가 없는데, 어떻게 보시의 복이 성취될 수 있을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제다에 대한 보시는 희사[捨類]의 복으로
자(慈) 등에도 이를 수용하는 자가 없는 것과 같다.
논하여 말하겠다.
우리는 [보시의 복이] 오로지 재물을 희사하는 것에 의해서만 성취되는 것이라고는 인정하지 않는다. 받는 자가 [시물을] 수용할 때 보시의 복은 비로소 성취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대들이] 인정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를테면 모든 보시의 복에는 간략히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희사할 때의 복이며, 둘째는 수용할 때의 복이다. 희사하는 종류[捨類]의 복이란 선심에 의해 다만 자재(資材)를 희사할 때 일어나는 복을 말하며, 수용하는 종류[受類]의 복이란 보시를 받는 복전이 시물을 수용할 때 비로소 일어나는 복을 말한다. 따라서 제다에 공양되고 보시되는 공구(供具)에는 비록 수용하는 종류의 복은 없을지라도 희사하는 종류의 복은 있는 것이다.
즉 희사하는 종류의 복은 먼저 자재를 희사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니, 이러한 복은 바로 탐(貪)의 대치를 성취하였기 때문이며, 무탐(無貪)과 함께 작용하는 사(思)에 의해 등기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용하는 종류의 복은] 자재를 희사하고 나서 보시를 받은 복전이 [시물을] 수용함에 따라 생겨나지만, 혹 시물을 수용하지 않더라도 복이 망실되는 일은 없다.45)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어떤 이가 승가에 보시하거나 다른 어떤 이에게 생활에 사용되는 온갖 자구(資具)를 별도로 보시하더라도 혹 그것이 아직 사용되지 않았을 경우, 시물의 복은 바로 망실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이와 같은 시주의 시물은 마땅히 쓸모없게 되어 보시의 복은 생겨나지 않아야 할 것이니, 당래의 과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아직 사용하지 않았거늘 무엇에 의해 복이 생겨날 것인가?
비록 수용함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복[用福]은 없을지라도 그것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복[受福]은 있다고 할 수 있다.
제다는 받는 일도 없는데, 복은 무엇에 의해 생겨나는 것인가?
그렇다면 다시 어떠한 근거[因]에서 ‘복은 요컨대 [복전이 시물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생겨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인가?
받지 않았을 경우, 그들에게 섭수되어 이익 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결정적인 논증이 아니다.
어째서 그러한가?
예컨대 자정(慈定) 등을 닦을 때에도 역시 복이 생겨나기 때문이다.46) 즉 자정을 닦으면 모든 유정에 대해 평등하게 즐거움을 주려는 의요가 발기하여, 비록 받는 자가 없고, 역시 또한 [다른 이에게] 섭수되어 이익 되게 하는 일도 없다고 할지라도 승해(勝解)의 힘으로 말미암아 많은 복이 생겨나게 된다. 비(悲) 등의 선정을 닦아 복을 획득하게 되는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제다에 보시할 때 생겨나는 복의 종류도 역시 마땅히 그렇다고 해야 할 것이니, [이미 멸도 하였을지라도] 공덕이 있는 복전에 대해 그를 쫓아 승해를 낳고 지극히 존중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켜 제다에 공양하고 보시하면, 비록 받는 자도 없고 역시 또한 섭수되어 이익 되게 하는 일도 없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의지력(思力,즉 존중 공경심)으로 말미암아 많은 복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쓸데없이 보시와 공경의 업을 일으킨 것은 아니니, 요컨대 그 같은 업을 일으키므로 말미암아 비로소 뛰어난 의지력[勝思]을 일으키게 되고, 뛰어난 의지력이 비로소 능히 뛰어난 복을 낳기 때문이다.47)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원수를 해치고자 하였을 때, 그 원수의 목숨이 비록 끊어졌을지라도 여전히 원한의 마음을 품고서 여러 가지의 악한 신ㆍ어업을 일으켜야 많은 비복(非福)을 낳으며, 단지 마음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는 [많은 비복을 낳지] 않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대사(大師)께서 비록 과거로 사라졌다고 할지라도 그를 쫓아 공경하고 공양함에 있어 신ㆍ어업을 일으켜야 비로소 많은 복을 낳게 되니, 단지 마음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는 [많은 복을 낳을 수] 없는 것이다.
8) 악전(惡田)에 대한 보시
그런데 어떤 이는 힐난하여 말하기를 “선한 복전에 보시라고 하는 업의 종자를 뿌릴 때에는 참으로 애호할 만한 과보가 생겨날 것이지만, 악한 복전에 뿌렸다면 그 과보는 참으로 애호할만한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힐난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악한 복전에도 애호할 만한 과보가 생겨나니
열매가 종자와 다르게 달리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지금 바로 보더라도 밭에 뿌린 종자와 그 열매가 바뀌는 일은 없다. 예컨대 말도가(末度迦)의 종자에서는 끝내 쓴 열매는 생겨나지 않으며, 임바(賃婆)의 종자에서는 끝내 달콤한 열매가 생겨나지 않는다.48) 즉 밭(복전)의 힘으로 말미암아 종자와 그 과실이 바뀌는 경우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밭이 나쁠 경우, 뿌려진 종자에는 열매가 적게 열리기도 하고, 혹은 전혀 열리지 않기도 한다.49)
이와 마찬가지로 [시주가] 비록 악한 복전[惡田]에 다른 이를 이롭게 하고 즐겁게 하려는 마음으로 보시의 [씨앗을] 뿌렸을지라도 오로지 애호할 만한 과보만이 생겨날 뿐, 애호할 만한 것이 아닌 과보는 초래되지 않는다.
10.3. 계류(戒類)의 복업사
이상 시류(施類)복업사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이제 마땅히 계류(戒類)의 복업사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범계(犯戒)와 차죄(遮罪)에서 떠나는 것을
‘계(戒)’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각기 두 가지가 있다.
그리고 범계와 그 원인에 의해 파괴되지 않으며
대치와 멸(滅)에 의지한 것 등을 ‘청정계’라고 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범계(犯戒)라고 하는 말은, 이를테면 온갖 불선업의 색으로서, 여기(본송)서는 살생으로부터 잡예어에 이르는 성죄(性罪)를 ‘범계’라고 말하였다.
차죄(遮罪)란 이를테면 부처님께서 하지 못하도록 한 업으로서, 때 아닌 때에 먹는 것[非時食] 따위이니, 이것은 비록 그 자체가 죄는 아닐지라도 부처님께서 정법과 유정을 지키기 위해 별도의 뜻에서 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50) 그리고 수계(受戒)한 자가 이를 범하게 되면 이 역시 ‘범계’라고 하지만, [여기서는] 다만 성죄와 구별하기 위해 ‘차죄’라는 명칭을 설정하였을 뿐이다.
바로 이 같은 성죄와 차죄를 떠나는 것을 다같이 ‘계(戒)’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각기 두 가지가 있으니, 말하자면 표업과 무표업이 바로 그것으로, [계는] 신ㆍ어업을 자성으로 삼기 때문이다.
계(戒)가 네 가지 덕을 갖출 경우 청정계(淸淨戒)라고 일컬을 수 있지만, 그 중 어느 하나라도 결여할 경우 청정계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여기서 네 가지 덕이란, 첫 번째로는 범계로 인해 파괴되지 않은 것이니, 여기서 범계라고 하는 것은 [우연히 혹은 무심코 범한 것이 아니라] 살펴 헤아려 범하는 것[審思犯]을 말한다. 두 번째로는 그 같은 [범계의] 원인으로 인해 파괴되지 않은 것이니, 여기서 그 같은 [범계의] 원인이란 탐 등의 번뇌와 수번뇌를 말한다. 세 번째로는 대치(對治)에 의지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염주(念住) 등에 의지한 것을 말한다. 즉 이것은 범계와 그 원인을 능히 대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네 번째로는 멸(滅)에 의지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열반에 의지한 것을 말한다. 즉 [계는] 열반으로 회향하기 위한 것이지 재물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51)
그리고 [본송에서] ‘등’이라고 말한 것은 이밖에 다시 이설(異說)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즉 어떤 이는 설하기를 “계의 청정은 다섯 가지 원인에 의해 [성취되니], 첫째는 근본업도가 청정한 것[根本淨]이고, 둘째는 권속 즉 가행과 후기가 청정한 것[眷屬淨]이고, 셋째는 욕심(欲尋) 등에 의해 침해되지 않는 것[非尋害]이고, 넷째는 염주(念住)에 섭수되는 것[念攝受]이고, 다섯째는 적정(寂靜)으로 회향하는 것[廻向寂]이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다.52)
그러나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계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포외계(怖畏戒)이니, 살아갈 수 없을 것[不活]과 악명(惡名)과 처벌과 악취를 두려워하여 시라(尸羅)를 수호하는 것을 말한다. 두 번째는 희망계(希望戒)이니, 이를테면 온갖 존재[有]와 수승한 지위와 많은 재물과 공경과 칭예(稱譽)를 탐하여 정계(淨戒)를 수지하는 것을 말한다. 세 번째는 순각지계(順覺支戒)이니, 이를테면 해탈과 정견 등을 추구하기 위해 정계를 수지하는 것을 말한다. 네 번째는 청정계(淸淨戒)이니, 이를테면 무루계를 말하는 것으로, 그는 능히 업과 번뇌의 더러움[垢]을 영원히 떠났기 때문이다.”
10.4. 수류(修類)의 복업사
계류(戒類)의 복업사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이제 마땅히 수류(修類)의 복업사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등인(等引)의 선법을 ‘수(修)’라고 이름하니
마음에 매우 잘 훈습되어 스며들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등인(等引)의 선법(善法)이란 이를테면 선정 중에 나타나는 등지(等持,즉 心一境性의 三摩地) 자체와 그것의 구유법(俱有法)을 말하는 것으로, 이를 ‘수’라고 이름한 것은 매우 잘 마음에 스며들기 때문이다. 즉 ‘수’란 바로 훈습의 뜻이다. 마치 호마(胡摩,참깨)의 꽃향기가 호마에 훈습되듯이, 온갖 선정에서의 선법은 마음의 상속에 매우 잘 훈습되어 온갖 덕의 종류[德類]를 성취하게 하지만, 선정에 들지 않고 획득되는 선법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선정의 선법만을 독립적으로 ‘수’라고 이름한 것이다.
10.5. 계류ㆍ수류복업사의 과보
앞에서 보시의 복은 능히 크나큰 부를 초래한다는 사실에 대해 분별하였다. 그렇다면 계류와 수류의 두 가지 복업사에 의해 초래되는 과보는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계류와 수류는 뛰어나니, 순서대로
생천(生天)과 해탈의 과보를 초래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계류의 복업사는 생천, 즉 하늘에 태어나는 과보를 초래하고, 수류의 복업사는 해탈의 과보를 초래한다.
그리고 [본송에서] ‘뛰어나다’고 말한 것은, 뛰어난 것에 대해 말하자면 그렇다고 하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즉 보시도 역시 능히 생천의 과보를 초래하지만 [생천의 과보를 초래하는] 뛰어난 것으로서 ‘계’를 설한 것이며, 지계(持戒)도 역시 능히 이계(離繫)의 과보를 초래하지만 [이계의 과보를 초래하는] 뛰어난 것으로서 ‘수(즉 修定)’를 설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계’와 ‘수’도 역시 크나큰 부를 초래하지만 [크나큰 부를 초래하는] 뛰어난 것으로 보시를 설한 것이니, 예(例)에 준하여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10.6. 범복(梵福)의 양과 그 과보
경에서 설하기를 “네 사람은 능히 범복(梵福)을 낳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53) 여기서 네 사람이란 첫째는 여래의 타도(馱都)에 공양하기 위해 졸도파(窣堵波)가 아직 세워지지 않은 곳에 그것을 세우는 자이며,54) 둘째는 사방승가(四方僧伽)에 공양하기 위해 절을 짓고 원림(園林)을 보시하며, 네 가지 물건을 공급하는 자이며,55) 셋째는 화합이 깨어진 불제자들을 능히 화합시키는 자이며, 넷째는 유정에 대해 널리 자정(慈定) 등을 닦는 자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이의 범복의 양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1겁 동안 하늘에 태어나는 복 따위를
1범복(梵福)의 양이라고 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유여사(有餘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56)
“복업에 따라 능히 1겁 동안 하늘에 태어나 온갖 쾌락을 향수하니, 이것을 1범복의 양이라고 한다. 즉 그에게 초래된 쾌락을 향수하는 시간이 범보천(梵輔天)의 1겁의 수명과 동일하기 때문이니,57) 다른 부파의 어떤 가타(伽他)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믿음과 정견을 가진 이로서
열 가지 뛰어난 행[勝行]을 닦은 자는
바로 범복(梵福)을 낳게 될 것이니58)
1겁 동안 하늘의 쾌락을 얻기 때문이다.”
이미 욕탐을 떠난 자로서 4무량심을 닦은 이는 상계의 하늘에 태어나 1겁의 수명 동안 쾌락을 향수한다. 그러나 만약 아직 욕탐을 떠나지 않은 자로서 졸도파를 건립하고, 절을 짓고 승가를 화합시키며, 능히 자(慈) 등의 가행을 부지런히 수습한 이라면, 그들도 역시 4무량의 근본을 닦은 자와 마찬가지로 1겁 동안 하늘의 쾌락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어찌 앞에서 설하지 않았던가? 욕계의 선법으로서 능히 1겁 동안의 이숙을 초래하는 것은 없다고. 어떠한 선업도 불선업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일 찰나에 능히 1겁의 수명을 초래하는 일이 없다.
이와 같은 이치에 따라 “한 가지 일에 대해 다수의 의지[思]를 일으켜 순서대로 능히 1겁 동안의 하늘의 쾌락을 초래한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즉 그곳에서 죽고 나서 다시 거기에 태어나기 때문에 ‘1겁에 걸친 쾌락’이라는 말은 앞에서 한 말과 모순되는 허물이 없는 것이다.59)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이(1범복)는 [앞서] 보살의 묘상업(妙相業)을 분별하면서 언급한 1복의 양과 같다”고 하였다. 즉 오로지 최후신의 보살을 제외한 그 밖의 일체 유정이 닦아 부락(富樂)의 과보를 초래하는 업이 바로 1복의 양과 동등하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60)
10.7. 법시(法施)
계경에서 설하기를 “보시에는 간략히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재시(財施)이며, 둘째는 법시(法施)이다”고 하였다.
재시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법시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법시란 염오하지 않은 마음으로
참답게 계경 등을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만약 온갖 유정들을 위해 염오하지 않은 마음으로써 능히 참답게 계경 등을 분별하고, 올바른 이해를 낳게 하였다면, 이것을 일컬어 ‘법시’라고 한다.
[본송에서] ‘참답게[如實]’라고 하는 말을 설한 것은 법시를 베푸는 이가 계경 등을 이해함에 있어 전도됨이 없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타내며, ‘염오하지 않은 마음’이라고 하는 말을 설한 것은 법시를 베푸는 이는 [자신의] 이양(利養)이나 공경, 명예를 희구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다시 말해 시주가 자신의 이양 등을 희구하여 계경을 분별하였다면), 자신이나 타인 모두의 복이 모두 줄어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계경 등’이란 그 밖의 열한 가지를 함께 [취한다는] 말로서 바로 계경 내지는 논의(論議)를 나타낸다.
1) 방론-12분교(分敎)와 3장(藏)
계경(契經)이라 함은, 이를테면 세속(世俗)과 승의(勝義)의 견실한 이치의 말씀을 순서에 따라 전체적으로 포섭하고 용납(容納)한 것을 말하니, 이와 같은 계경은 바로 부처님께서 설한 것이다. 혹은 부처님의 허락 하에 불제자들이 설한 것이다.61)
응송(應頌)이라 함은, 이를테면 뛰어나고 미묘한 문구와 언사를 모아 앞의 계경에서 설한 바에 따라 기술하고 찬탄한 것을 말한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 역시 불요의경(不了義經)이다”고 하였다.62)
기별(記別)이라 함은, 이를테면 다른 이의 물음에 따라 대답하고 분별 분석한 것[辯柝]을 말하니, 예컨대 파라연나(波羅衍拏) 따위 중에서 분별한 바와 같다. 혹은 과거[曾]ㆍ미래[當]ㆍ현재에 존재하는 온갖 진실 된 뜻을 분별하는 말을 모두 기별이라고 이름하기도 한다.63)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는 바로 불설(佛說)로서 요의경이다”고 하였다.64)
풍송(諷頌)이라 함은, 이를테면 뛰어나고 미묘한 문구와 언사를 모아, 앞의 계경에서 설한 바에 따라 기술하는 것이 아니면서 찬탄하고 노래한 것을 말하니, 경우에 따라 2구(句)ㆍ3구ㆍ4구ㆍ5구ㆍ6구 등으로 이루어진다.65)
자설(自說)이라 함은, 이를테면 어떤 이의 요청에 의해 설해진 것이 아니라 세존께서 정법을 오래 머물게 하기 위해 희유하고 기특한 일들을 보시고 기쁜 마음에서 스스로 설하신 미묘한 분별의 등류(等流)를 말하니, 예컨대 ‘이 나가(那伽,용)는 저 나가에 의한 것이다’라는 등으로 설한 바와 같다.66)
연기(緣起)라 함은, 이를테면 일체의 교설이 일어나게 된 연유를 설한 것으로, 대개는 조복(調伏,비나야, 계율을 말함)과 상응하는 논도(論道)를 말하니, 그것은 연기(사정)에 의해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67)
비유(譬喩)라고 함은, 이를테면 설해진 종의를 깨닫게 하기 위해 여러 갈래의 비유와 사례[比例]를 널리 인용하여 나타낸 것으로, 예컨대 『장유계경(長喩契經)』 등에서 설해진 것과 같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는 바로 모든 보살을 제외한 그 밖의 다른 이들의 본생의 수행[本行]에서 능히 깨달은 바가 있었음을 설하여, 교화될 이들에게 나타낸 말이다”고 하였다.68)
본사(本事)라고 함은, 이를테면 옛날부터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를 설한 것이니, 설한 사람을 나타내지 않고 설해진 내용만을 이야기한 것이다.69)
본생(本生)이라 함은, 이를테면 보살(석가보살을 말함)이 일찍이 실천[本行]하였던 수행을 설한 것이다. 혹은 과거세의 일에 근거하여 온갖 언어적 논의[言論]를 제기하여 과거세의 일에 의해 언어적 논의가 구경에 이르게 되는 것은 ‘본사’라고 이름할 뿐으로, 『만타다경(曼馱多經)』과 같은 것이 그러하다. 그러나 만약 현재세의 일에 근거하여 온갖 언어적 논의를 제기할지라도 요컨대 과거세의 일에 의해 그 같은 언어적 논의가 구경에 이를 경우, ‘본생’이라고 이름하니, 『나찰리사경(邏刹利私經)』과 같은 것이 그러하다.70)
방광(方廣)이라 함은, 이를테면 정리(正理)로써 제법을 널리 분별한 것을 말하니, 일체법의 성상(性相)은 다양하기 때문에 광박(廣博)한 언사가 아니고서는 능히 분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71) [방광은] 또한 ‘광파(廣破)’라고도 이름하는데, 이 같은 광박한 언사에 의해 지극히 견고한 무지의 어두움을 능히 깨트릴 수 있기 때문이다. 혹은 ‘무비(無比)’라고도 이름하는데, 이 같은 광박한 언사로 말미암아 이취(理趣)가 깊고도 넓어 이에 비견할 만한 것이 달리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는 대 보리(菩提)의 자량을 널리 분별한 것이다.”고 하였다.
희법(希法)이라 함은, 여기에서는 오로지 희유하고 기특한 출세간의 법을 설한 것을 말하니, 이에 따라 능히 삼승(三乘)의 희유함을 바로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삼보에 대해 분별하는 말은 세간에서 좀처럼 듣기 어렵기 때문에 ‘희법’이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다.72)
논의(論議)라고 함은, 이를테면 앞에서 논설한 온갖 분교(分敎)의 뜻에 대해 그 난점을 전도됨이 없이 해석하고 결택(決擇)하여 나타낸 것을 말한다.73)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미 진리를 본 자나 혹은 그 밖의 지혜로운 이가 이치에 따라 경에서 설한 심오한 뜻을 분별하고 해석한 것을 역시 ‘논의’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또한 ‘마달리가(摩怛理迦)’라고도 이름하는데, 그 밖의 다른 경의 뜻을 해석할 때 이를 본모(本母)로 삼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아비달마(阿毘達磨)라고도 이름하는데, 능히 모든 제법의 상(相)과 직접 대향하기 때문이며, 전도됨이 없이 제법의 상을 현시하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설한 12분교를 간략히 설하면 삼장(三藏)에 포섭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여기서 삼장이라 함은, 첫째는 소달람장(素怛纜藏, sūtra piṭaka), 즉 경장(經藏)이며, 둘째는 비나야장(毘奈耶藏, vinaya piṭaka), 즉 율장(律藏)이며, 셋째는 아비달마장(阿毘達磨藏, abhidharma piṭaka), 즉 논장(論藏)이다.
이와 같은 삼장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 것인가?
아직 선근이 심어지지 않았고, 아직 승의에 대해 기뻐하지 않는 자에게 선근을 심고, 승의에 대해 기뻐하게 하기 위해 계경(契經, 즉 수트라)을 설하였으며,74) 이미 선근이 심어지고 이미 승의에 대해 기뻐하는 자에게는 그 상속을 성숙시켜 행해야 할 것을 행하게 하기 위해 조복(調伏, 즉 비나야)을 설하였다. 그리고 상속이 이미 성숙하고 행해야 할 것을 이미 행한 자에게는 올바른 방편을 깨달아 해탈하게 하기 위해 대법(對法, 즉 아비달마)을 설하였다.
혹은 복잡하거나 간략한 청정 미묘한 문사(文詞)로써 잡염과 청정의 법을 편집하여 알기 쉽도록 설한 것을 ‘계경’이라 이름하고, 수행과 시라(尸羅)와 궤칙(軌則)과 청정한 생활[淨命]의 방편을 널리 설한 것을 ‘조복’이라고 이름하며, 온갖 계경 중의 심오한 이취(理趣)의 말을 능히 잘 나타낸 것을 일컬어 ‘대법’이라고 한다. 혹은 증상의 마음과 증상의 계(戒)와 증상의 혜(慧)에 의해 일어난 논도(論道)를 순서대로 계경ㆍ조복ㆍ대법이라고 이름하였다.
혹은 소달람장은 바로 힘[力]의 등류이니, 온갖 경 중에 설해진 이치는 필경 능히 굴복시키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비나야장은 바로 대비(大悲)의 등류이니, 시라는 악취로부터의 구제를 분별하여 설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비달마는 바로 무외(無畏)의 등류이니, 능히 진실의 법상을 확고히 건립하여 문답의 결택에 대해 두려워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등의 이유에서 삼장은 동일하지 않으니, 이에 대해서는 이미 『대비바사론』 중에서 널리 분별하였다.75)
10.8. 순복분(順福分)ㆍ순해탈분ㆍ순결택분의 선업
앞에서 세 가지 복업사에 대해 이미 개별적으로 해석하였다.
이제 경에서 설하고 있는 순삼분(順三分)의 선업에 대해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76)
게송으로 말하겠다.
순복(順福)과 순해탈(順解脫)과
순결택분(順決擇分)의 세 가지는
순서대로 애호할 만한 과보와
열반과 성도(聖道)를 초래하는 선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순복분(順福分)의 선업이란 이를테면 인(人)ㆍ천(天) 등의 세간 중에서 참으로 애호할 만한 과보를 초래하는 종자를 말하니, 이 같은 선업의 힘에 의해 능히 세간의 고귀하고 위대한 종족, 큰 부자, 묘색(妙色), 전륜왕, 제석, 마왕, 범왕 등과 같은 참으로 애호할 만한 온갖 종류의 과보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순해탈분(順解脫分)의 선업이란, 이를테면 해탈의 선한 아세야(阿世耶)를 확고히 건립하여 어떠한 경동(傾動)도 없게 하는 것을 말하니, 이러한 선업에 의해 결정코 당래 반열반을 증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선근의 자성 등에 대한 분별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현성(賢聖)에 대해 분별하는 곳에서 설한 바와 같다.77)
그리고 순결택분(順決擇分)의 선업이란, 이를테면 난법(煖法) 등의 네 가지 선근을 말하니, 이 역시 뒤에 현성에 대해 분별하는 곳에서 설하는 바와 같다.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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