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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성인(四大聖人)
사대성인은 예수 그리스도, 석가모니, 공자, 무함마드, 를 일컬어서 이르는
말로, 사람으로서 가장 덕망이 있는 사람들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먼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대성인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 1 ) 예수 그리스도
요약 그리스도교의 창시자인 예수를 하느님(하나님)의 메시아로 인정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그 자체가 예수를 지칭하는 말로도 쓰인다.
출생-사망 : BC 4? ~ AD 30
별칭 : 하느님, 하나님, 야훼
활동분야 : 종교
예수라는 이름은 헤브라이어로 '하느님(야훼)은 구원해 주신다.'라는 뜻이며,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구세주'를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물음은, 예수 탄생 이래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물음이다.
그리스도교도에게는 그리스도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다.
《마태오의 복음서》 제16장 15~17절을 보면,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하고 물었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자,
예수는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라고 말했다고 적혀 있다.
《요한의 복음서》에는 첫머리에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모세에게서는 율법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은총과 진리를 받았다.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 주셨다."
생애
예수는 어머니가 되는 동정녀(童貞女) 마리아와 약혼자인 목수 요셉이
호구조사의 등록을 하러 간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태어났다.
예수가 태어나던 날 밤 천사가 목자들 앞에 나타나 예수의 탄생을 고하며,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라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루가 2:14).
예수 탄생 뒤 그 일가는 헤롯왕의 유아살해(幼兒殺害)를 피하여
이집트로 여행하고, 헤롯이 죽은 후 나사렛으로 돌아갔다.
나사렛에서 예수는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는데(루가 2:51), 열두 살이
되던 해, 유월절(逾越節) 명절을 맞아, 해마다 그랬듯이 부모를 따라 명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예수는, 성전에서 학자들과 성서(구약)에 관한
토론을 벌였다. 학자들은 예수의 지혜와 그 대답에 경탄하고 있었는데,
그를 잃어버리고 찾아 헤매던 부모를 보고 예수는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루가 2:49).
예수는 30세경 공생애(公生涯)를 시작하였다.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예수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마태 4:1)
40주야의 금식기도를 하면서 악마로부터 세 가지의 시험을 받았다.
성서에 기록된 말들을 인용,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고(마태 4:11, 루가 4:8)
광야에서 머무른 후 예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마태·마르코·루가의 세 복음서는 예수의 선교활동에 관한 똑같은
기록들을 전해주고 있는데, 예수의 발자취를 정확히 더듬는다든지,
그가 방문한 고장을 차례대로 추적하기란 곤란한 일이다.
그러나 《요한의 복음서》에 보면, 광야에서 나와 베다니로 돌아갔는데, 여기서
첫 번째 제자를 얻어 그들과 함께 갈릴리로 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첫 기적을 행하였다.
공생활에서의 최초의 유월절(과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을 순례하고,
거기서 성전 안의 장사꾼들을 몰아내었다.
예수는 유월절 동안 예루살렘에 머무르면서, 어느 날 밤 조용히 찾아온
바리새파(派) 지도자의 한 사람인 니고데모에게 자신을 계시(啓示)하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을 일러 주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중생(重生:거듭 남) 또는 신생(新生:새로 남)의 교리이다.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 갇힌 후 유다 지방을 떠나 사마리아를 지나서
갈릴리로 향하였다. 도중에 사마리아 지방 시카르(수가)라는 동네에 있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한 사마리아 여자에게 자기가 메시아임을 밝혔는데,
그녀로 말미암아 사마리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구세주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요한 4:41)고 한다. 그 뒤 갈릴리의 가버나움으로 내려간
예수는 그곳 회당(시나고그)에서 사람들을 가르쳤고, 신약의 복음을 전하며,
"사람의 아들[人子]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다."(루가 6:5)라고 가르쳤다.
이렇게 하여 예수는 온 갈릴레아를 두루 다니며 회당에서 가르치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며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었다.
이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지자, 사람들은 갖가지 병에 걸려 신음하는
환자들과 신들린 사람·간질병자·중풍병자들을 모두 그의 앞에 데려왔다.
예수는 그들도 모두 고쳐 주었다. 그러자 갈릴리·데카폴리스·예루살렘·유다,
그리고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 와서 예수를 따랐다
(마태 4:23∼25).
예수는 이 무렵 유명한 산상(山上) 설교를 하였으며,
또한 12제자를 선발하였다.
예수는 고향인 나사렛으로 돌아갔는데, 나사렛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안식일에 회당으로 가 예수는 이사야 예언서의
다음과 같은 대목을 낭독하였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18∼19).
사람들은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가 이스라엘 민족의 구세주라는 것을
믿지 않았는데, 예수는 예언자 엘리야가 동포인 이스라엘 민족보다도
이방(異邦)의 어떤 과부에게로 보내졌다는 사실, 예언자 엘리사도 이스라엘의
나병환자는 고쳐주지 않고 시리아 사람인 나아만만을 고쳐주었다는 사실을
알려, 그가 말하는 구원이 이스라엘 민족만의 구원에 그치지 않고
전 인류의 구원이라는 뜻을 비쳤다.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화가 나서
들고 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끌어냈다.
그 동네는 산 위에 있었는데 사람들은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 떨어뜨리려 하였으나,
예수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의 갈 길을 갔다(루가 4:25∼30).
세례자 요한이 헤롯왕에게 살해된 사실을 안 후, 예수는 갈릴리를 떠나
필립비의 가이사리아 지방으로 떠났는데, 그 길에 제자들에게 구세주로서의
자신의 사명을 말해주었다.
예수가 제자 중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갔을 때
예수가 그들 앞에서 변모하여 얼굴은 해같이 빛나고 옷은 빛같이 눈부셨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함께 있었다.
즉, 예수가 고난과 죽음의 길을 택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계시(啓示) 방법으로
모세와 엘리야, 율법과 예언자의 신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자들은 깨달았던 것이다(마태 17:1∼8, 마르코 9:2∼8, 루가 9:28∼36).
그 후 예수는 은밀히 예루살렘으로 가 설교도 하고, 병자들의 병을 고쳐 주곤
하였는데, 그의 설교가 지닌 권위에 놀란 유대인들은 예수가 누구인가의
문제를 놓고 논란이 일었다.
예수는 요르단 강을 건너 베레아 지방으로 가, 베다니에서 마리아의 동생
라자로를 죽음으로부터 살려내었다.
이때 예수는 마리아의 자매 마르타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요한 11:25∼26)라고 말하였다.
죽음과 부활
죽은 라자로를 예수가 살려냈다는 이야기가 전파되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대사제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를 위험시하여 의회를 소집하고,
"그 사람이 많은 기적을 나타내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
그대로 내버려 두면 누구나 다 그를 믿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로마인들이
와서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백성을 짓밟고 말 것입니다."하며 의논하였다
(요한 11:47∼48).
그날부터 그들은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요한 11:53).
유월절 전날 목요일 밤에 예수는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들고, 그날 밤은
게쎄마니 동산에서 기도하였다.
게쎄마니에서 잡힌 예수는 로마의 총독 빌라도 앞에서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을 선고받고, 이튿날 아침 십자가를 지고 온갖 조롱과 멸시·천대를 받으며
골고타 언덕길을 올라가 거기서 강도들과 함께 신을 모독하였다는
중죄인으로서 십자가 나무틀에 못 박혀 죽었다.
일요일 아침, 예수가 묻힌 무덤은 비어 있었다.
예수는 생전에 자신이 예언한 바와 같이 부활하였고,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제자들은 그후 여러 곳에서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
복음서들은 그 사실과 함께 그가 올리브산(감람산)에서 승천(昇天)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참조항목
그리스도교, 복음, 부활, 사도, 수난일, 십자가, 야훼, 크리스마스
역참조항목
가야파, 갈릴리, 갈바리아언덕, 그리스도의 선재, 그리스도의 족보, 기적,
기체화설
[네이버 지식백과] 예수 그리스도 [Jesus Christ] (두산백과)
( 2 ) 석가모니 [Śakyamuni, 釋迦牟尼]
출생 - 사망 : BC 563년경 ~ BC 483년경
본명 : 고타마 싯다르타(Gautama Siddhārtha)
직업 : 사상가, 분야 : 불교
국적 : 고대인도(지금의 네팔)
최초로 불교를 세운 고대인도(지금의 네팔) 사람으로,
성(姓)은 고타마(Gautama)이고 이름은 싯다르타(Siddhārtha)이다.
석가모니란 석가족(釋迦族)에서 나온 성자(聖者)라는 뜻이다.
불타(佛陀, Buddha : 깨달은 사람이란 뜻), 여래(如來), 세존(世尊),
사주(師主) 등의 존호(尊號)가 있다.
왕족(王族)의 태자(太子)로 출생하여 결혼하고 아들까지 있었지만, 인생문제에
깊이 괴로워하다가, 29세에 출가하여 수행(修行)하였다.
35세 때 크게 깨달음을 얻고(大悟成道), 각지에서 교화(敎化)를 실시하였으며,
80세 때 입적(入寂)하였다.
그는 당시의 지나친 사변적 논리를 떠나, 인간 현실에 주목하였으며,
우선 인생의 무상과 고통과 무아 (無我)를 이해하였다.
이것에 관한 그의 이야기는 허무(虛無)의 밑바닥까지 관철하고 있지만, 이것이
오히려 진실의 근거를 개시(開示)하는 것이 되었다.
다르마(☞ 법(불교의))가 그것이다.
그는 죽음에 즈음하여, 자기를 근거(根據)로 하여 다른 것을 규정하지 말고,
자기 스스로를 등불로 하고, 법을 등불로 할 것을 부탁하였다.
전자(前者)를 자등명(自燈明), 후자를 법등명(法燈明)이라 한다.
불타(佛陀)의 설교를 정리한 것으로 사제(四諦), 팔정도(八正道),
십이인연(十二因緣)(☞ 연기)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석가모니 [Śakyamuni, 釋迦牟尼]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 3 ) 공자
출생 - 사망 : BC 551년 ~ BC 479년
대표분야 : 유가철학, 대표이론 : 정명론, 대표학파 : 선진유학
대표저서 : 논어, 관련철학자 : 맹자
공자의 조상은 송나라 미자(微子)의 후손이다. 아버지 숙량흘은 안씨의 딸
징재와 야합(野合)하여 공자를 낳았다.
숙량흘은 첫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딸만 아홉을 두었고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있었지만 다리 장애인이었다.
건강한 아들을 원했던 그가 안씨의 딸과 혼인하기를 구하자
그 딸은 아버지의 명에 따라 혼인을 했다.
야합(野合)이란 숙량흘은 70살이 넘었는데 안징재는 16세여서 예에 맞지
않음을 일컬은 것이라고도 하나, 아무튼 정상적인 혼인관계가 아니었다.
어머니 안씨가 이구산(尼丘山)에 기도하여 공자를 얻었다.
나면서부터 머리 위가 오목하게 들어간 고로 인하여 구(丘)라고 이름지었다.
공자가 출생한 후 곧 숙량흘은 죽어서 방산(防山)에 묻혔다.
공자는 아버지의 무덤의 위치를 몰라, 어머니가 돌아가자 거리에 빈소를
차렸다. 지방의 나이든 여인이 아버지의 무덤을 알려주자 공자는 어머니를
방산에 합장했다. 공자는 가난하고 천하여 자라서는 계씨의 창고지기도 하고
축사지기 노릇도 하였다. 공자는 키가 9척 6촌이나 되어 사람들이 모두
‘키다리(長人)'라고 부르며 이상하게 여겼다.
공자 나이 17세 때의 일이다. 대부 맹희자(孟釐子)가 병이 나서 곧 죽게
되었을 때, 그는 후계자인 의자(懿子)에게 훈계하며 말하였다.
"공구(孔丘)는 성인의 후손인데, 그 조상은 송나라에 있을 때 멸망당하였다.
그 조상 불보하(弗父何)는 원래 송나라의 후계자였으나,
아우 여공(厲公)에게 양보하였다. 정고보(正考父)에 이르러 대공(戴公),
무공(武公), 선공(宣公)을 섬길 때, 세 번 명을 받았는데,
매번 명을 받을 때마다 더욱 공손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정(鼎)에 새겨놓은 명문(銘文)에 이르기를 '첫 번째 명에 몸을 숙이고,
두 번째 명에 허리를 굽혀 절하고, 세 번째 명에는 큰 절을 한 뒤 받았다.
길을 걸을 때는 중앙을 걷지 않고 담장가를 따라 다녀서 누구도 감히 나를
경멸하지 않았다. 이 솥에 풀과 죽을 쑤어서 청렴하게 살아왔다'라고 하였다.
그 공손함이 이와 같았다. 내가 듣기로 성인의 후손은 비록 국왕의 지위에
오르지는 못해도 반드시 재덕(才德)에 통달한 자가 있다.
지금 공구는 나이는 어리나 예를 좋아하니 그가 바로 통달한 자가
아니겠느냐? 내가 죽거든 너는 반드시 그를 스승으로 모시거라."
희자(釐子)가 죽자 의자는 노나라 사람 남궁경숙(南宮敬叔)과 더불어 공자를
찾아가 예를 배웠다. 이해에 계무자(季武子)가 죽고 계평자(季平子)가 대를
이어 경(卿)의 자리에 올랐다.
노 소공(魯昭公) 20년, 공자는 나이가 서른이 되었다.
제 경공(齊景公)이 안영(晏嬰)과 함께 노나라에 갔는데, 경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옛날 진 목공(秦穆公)은 나라도 작고 외진 지역에 위치하였지만
패자(覇者)가 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공자가 대답하였다. "진(秦)나라는
비록 나라는 작아도 그 뜻이 원대하였고, 비록 외진 곳에 처하였어도 정치를
베푸는 것이 매우 정당하였습니다. (목공은) 백리해(百里奚)를 몸소 등용하여
대부(大夫)의 벼슬자리를 내리고 감옥에서 석방시켜 더불어 3일간 대화를
나눈 뒤 그에게 정사를 맡겼습니다. 이로써 천하를 다스렸다면
(목공은) 왕(王)도 될 수 있었는데, 패자가 된 것은 오히려 대단치 않은
것입니다." 경공은 매우 기뻐하였다.
공자가 35세 되었을 때, 계평자(季平子)가 후소백(郈昭伯)과 닭싸움 끝에
노 소공에게 죄를 지었다. 소공이 군대를 이끌고 평자를 공격하자 평자는
맹씨(孟氏), 숙손씨(叔孫氏)와 연합하여 3가(家)가 함께 소공을 공격하였다.
소공의 군대는 패해서 제나라로 달아났고, 제나라는 소공을 간후(乾侯)에
거하도록 하였다. 그후 얼마 안 되어 노나라가 어지러워졌다.
공자는 제나라로 가서 고소자(高昭子)의 가신이 되어 경공(景公)과 통하려고
하였다. 공자는 제나라의 태사(太師)와 음악을 토론하였는데 "소(韶)" 음악을
듣고 그것을 배워, 3개월 동안 고기 맛을 잊을 정도로 심취하자 제나라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였다.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를 묻자 공자는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고
말했다. 다른 날에 또 정치를 묻자 공자는 “정사는 비용을 절약하는 데 있다”
고 하자, 경공이 기뻐서 장차 공자를 봉하려고 하자, 안영(晏嬰)이 반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유자(儒者)란 약디 약아서 법도를 좇으려 않으며, 오만하고 제멋대로여서
아래 사람으로 삼기 힘들고, 상례를 숭상하여 애도를 다한답시고
파산할지라도 장례는 후히 하니 풍속에 득이 없고, 유세나 하고 다니면서
재물만 빌어먹으니 나라에 득이 없습니다.
큰 현인이 없어진 뒤로, 주나라 왕실이 쇠약하여 예와 음악이 없어진 지 오래
되었습니다. 지금 공자가 예복(禮服)을 성대하게 차려 입고, 임금에게 예절과
진퇴의 절도를 번잡하게 하고 있으니, 여러 대를 두고 하더라도 그 학문을
다 할 수 없고, 한 평생 하여도 그 예를 다 할 수 없습니다.
임금님께서 그를 써서 제나라의 풍속을 고치고자 하시면, 어리석은 백성을
위하는 첫째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논어』를 보면 공자는 “안영은 타인과의 교우 관계가 몹시 좋았다.
관계가 오래 지속될수록 더욱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5-17)라며
안영을 찬양하고 있다. 그 후 경공이 공자를 보더라도 예를 묻지 않았다.
다른 날 경공은 공자에게 “선생을 계씨처럼 받들지는 못하더라도, 계씨와
맹씨 사이로 대접하겠습니다”고 말하였다. 이에 제나라 대부들이 공자를
해치려고까지 하였다. 경공은 나중에 “내가 늙었는지라 등용하지 못하겠다"
하니, 공자는 다시 노나라로 돌아갔다.
계씨는 공실(公室)을 업신여기고 배신(陪臣)이 국정을 잡으니, 이 때문으로
노나라에서는 대부 이하 모두가 바른 길(正道)을 무시하였다.
그리하여 공자는 벼슬을 포기하고 물러나 『시(詩)』, 『서(書)』, 『예(禮)』,
『악(樂)』을 닦으니, 제자가 더욱 많아졌다.
공산불요가 비(費) 땅을 근거로 계씨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사람을 보내 공자를 불렀다. 공자는 자신의 이상을 시험해 볼 곳이 없음을
답답해하고 있던 차였다.
그래서 말하기를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은 풍(豐)과 호(鎬) 지방에서 일어나
왕이 되었다. 이제 비 땅이 비록 작지만, 혹시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고,
가려고 했다. 자로가 화를 내며 공자를 막자, 공자는 말하였다. “나를 부르는
자는 어찌 아무 생각이 없었겠는가? 만약 나를 써준다면,
나는 동쪽의 주나라로 만들 것이다.” 그러나 성사되지는 못 했다.
그 뒤에 정공(定公)이 공자를 중도(中都)의 읍재로 삼았다.
일 년 만에 사방이 모두 그를 본받았다. 그로 말미암아 사공(司空)이 되었고,
사공에서 다시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
공자는 나이 56세에 대사구(大司寇)로서 재상의 일을 맡게 되자 기뻐하였다.
또 정치를 어지럽힌 노나라의 대부 소정묘(少正卯)를 죽였다. 공자가 정치를
맡은 지 삼 개월 만에 염소나 돼지를 파는 자는 값을 속이지 않았고,
남녀는 걸을 때 길을 달리하였고, 길에 떨어져 있는 물건을 주워 가지
않았으며, 읍으로 오는 사방의 손님들이 관리에게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되었고, 모두 대접받고 돌아갔다.
제나라 사람들이 이 일을 전해 듣고 두려워하며, “공자가 정치를 하면 반드시
노나라가 패자가 될 것이고, 패자가 되면 우리나라부터 먼저 합병할 것이다”
하면서, 계책을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제나라 가운데서 예쁜 여자 80명을
뽑아, 춤을 가르치고 화려한 옷을 입혀 장식을 한 말이 끄는 수레 30 대에
태워 노나라 임금에게 보냈다.
이에 노나라 임금 이하 신하들이 종일 구경하면서 정치에 태만했다. 그러자
공자는 제사 고기를 보내주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고 벼슬을 그만두었다.
공자는 위나라에 가서 자로의 처형 안탁추(顔濁鄒)의 집에 머물렀다.
위나라 영공(衛靈公)이 묻기를 “노나라에서는 녹봉을 얼마나 받으셨습니까?”
하자, “곡식 육 만(약 2000섬)을 받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위나라에서도 곡식 육 만을 주었다. 얼마 지난 뒤에 공자를 참소하는 일이
생기자 공자는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열 달 후 위나라를 떠났다.
진나라로 가면서 광 땅을 지나는데, 광 사람들이 공자를 노나라의 양호로
착각하고 공자의 행차를 멈추게 했다. 공자의 모습이 양호와 비슷한
관계로 5일 동안을 구금했다. 다시 위나라로 돌아와 거백옥의 집에 머물렀다.
위영공의 부인인 남자(南子)가 사람을 시켜 공자를 보기를 원한다고 했다.
공자는 사양했지만, 어쩔 수 없어서 만났다.
부인은 갈포(葛布)로 만든 발(휘장) 안 쪽에 있었다. 공자가 문으로 들어와
북쪽을 향해 머리를 조아려 절을 했다. 부인은 발안에서 재배를 했는데,
차고 있던 패옥이 쨍그렁 소리를 냈다. 공자가 말하기를 “우리 마을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 보지 않지만, 만나는 예로 답을 합니다.” 하였다.
이 일로 자로가 화를 냈다. 공자는 단호하게 말하였다.
"내가 만일 잘못하였다면 하늘이 나를 버릴 것이다.
하늘이 나를 버릴 것이다!"
공자가 조(曹)나라에서 송(宋)나라로 가는 도중, 제자들과 함께 큰 나무
밑에서 예를 익혔다. 송나라 사마(司馬) 환퇴(桓魋)가 공자를 죽이려고
그 나무를 쓰러뜨렸다. 제자들이 떠나기를 재촉하자 공자는 말하기를
“하늘이 나에게 덕을 내리셨으니, 환퇴가 나를 어찌 하겠는가!” 하였다.
공자가 진(陳)나라에 이르렀을 때, 오나라 왕 부차(夫差)는 진나라를 정벌해서
세 읍을 빼앗았고, 월나라 왕 구천(句踐)을 회계에서 쳐부수었다.
공자가 진나라에 머무는 3년 동안, 여러 나라들이 계속 전쟁을 벌였다.
진나라는 항상 침략을 당하고 있어서 그 나라를 떠나갔다.
또 포 지방을 지나면서 반란자들이 공자를 붙잡아두고 괴롭히며 말하기를,
만약 위나라로만 가지 않겠다고 맹세하면 놓아주겠다. 하였다. 그러자 일행은
곧 맹세를 하고 동문으로 나갔다. 그러나 공자는 곧장 위나라로 갔다.
자공이 묻기를 “어찌 맹세를 저버릴 수 있습니까?” 하자,
공자는 대답하기를 “강요된 맹세는 귀신도 듣지 않는다.” 하였다.
위령공이 늙어 정사에 태만하고 공자를 쓰지 않자, 공자는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누가 나를 써주기만 한다면 1년만 되어도 좋고, 3년이면 성과를
낼텐데” 하고 위나라를 떠나갔다. 공자는 서쪽으로 조간자(趙簡子)를 만나려고
황하에 이르렀을 때, 두명독(竇鳴犢)과 순화(舜華)가 조간자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공자는 황하 강물에 서서 이렇게 탄식하였다.
“아름답다, 물이여! 저렇게도 출렁거리는구나! 내가 이 물을 건너지 못함은
운명이로구나!”
자공이 감히 그 까닭을 묻자, 공자는 말하였다.
“두명독과 순화는 진(晉)나라의 어진 대부였다. 조간자가 세력을 잡지
못했을 때는 그 두 사람 말을 들은 뒤에 정사를 했는데, 세력을 잡은 뒤에는
그들을 죽이고 정사를 하고 있다. 나는 들으니 ‘태를 쪼개 어린것을 죽이면
기린이 들판에 오지 않고, 연못의 물을 말려 고기를 잡으면 교룡이 음양을
합하지 못하고, 둥지를 뒤엎고 알을 깨뜨리면 봉황이 날아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왜냐? 군자는 자기와 같은 부류를 해침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새나 짐승도 의롭지 못함을 오히려 피할 줄 알거든, 하물며 사람이랴!”
마을로 돌아와 거문고 가락을 연주하며 슬퍼하였다.
가을에 계환자가 병이 들어 수레를 타고 노나라의 성을 보며
“옛날 이 나라가 흥성할 수 있었는데, 내가 공자에게 죄를 얻어 흥하지
못하였구나” 하고 탄식하며, 아들 계강자에게 “내가 죽거든 너는 노나라의
정승으로서 반드시 공자를 모셔와라”하고 당부하였다.
아버지를 장사한 다음 계강자가 공자를 부르려 하자,
공지어(公之魚)가 말하였다. “옛날에 우리 선군께서 그를 등용하여 끝까지
쓰지 못하고, 끝내 제후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등용하여 끝까지 쓰지 못 하면, 또 다시 제후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 대신 제자인 염구(冉求)를 불러들였다.
자공(子貢)은 공자에게 노나라로 돌아갈 생각이 있음을 알고 염구를
환송하면서 당부하기를 “자네가 등용되거든 곧 공자님을 부르게 하라”
하였다. 공자가 진·채의 국경에 있다는 말을 듣고 초나라에서 공자를
초빙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진·채의 대부들이 모의하면서 “공자가 초나라에서
등용되면 우리들은 위태롭게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공자 일행을
들판에서 에워싸고 억류하자 공자는 초나라로 가지 못하고 식량마저
떨어졌다. 따르는 제자들은 굶고 병들어 잘 일어서지도 못하였다.
그런데도 공자가 강송(講誦)과 현가(弦歌)를 그치지 않자, 자로가 성을 내며
“군자도 이처럼 곤궁할 때가 있습니까?” 하자, 공자는 “군자는 원래 곤궁한
것이다. 소인은 곤궁하면 혼란에 빠진다” 하였다.
공자는 제자들이 불만이 많음을 알고 자로를 불러 말하였다.
“시에 이르기를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를 헤매고 있구나'
했는데, 우리의 도가 바로 그런 격인가? 내가 여기서 어찌 한단 말이냐?”
자로가 말하였다. “우리가 아직 어질지 못한 것입니까? 사람들이 우리를 믿지
못하니! 우리가 아직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까? 사람들이 우리를 억류하고
있으니!” 공자가 말하였다. “대답이 그것뿐이냐! 자로야, 만약에 어진 사람은
반드시 남의 신임을 얻는다면 어째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수양산(首陽山)에서 굶어 죽었겠느냐? 또 만약에 지혜로운 사람은 반드시
사람들에게 억류되지 않는다면 어찌 왕자 비간(比干)이 있었겠는가?”
자로가 나오고 자공이 들어가니 공자가 말하였다. “자공아, 시에 이르기를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를 헤매고 있구나' 하였는데,
우리 도가 바로 그런 격인가? 내가 여기서 어찌 한단 말이냐?”
자공이 대답하였다. “선생님의 도가 너무 높기 때문에 천하에 어느 누구도
포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낮추시면 어떨까요?”
공자가 말하였다. “자공아, 솜씨 좋은 농부가 씨를 잘 뿌린다고 잘 수확하는
것은 아니다. 솜씨 좋은 기술자가 기술을 잘 발휘한다고 꼭 사람들 뜻을
맞출 수는 없다. 군자는 도를 닦아서, 강기(綱紀)하고 통리(統理)할 수는
있어도, 반드시 사람들에게 포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제 너는 네 도를
닦지 않고, 포용되기만을 기다리는구나. 자공아, 네 뜻은 원대하지 않구나!”
자공이 나가고 안연이 들어와 뵈니 공자가 말하였다. “안연아, 시에 이르기를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를 헤매고 있구나' 하였는데,
우리의 도가 그런 격인가? 내가 여기서 어찌 한단 말이냐?”
안회가 대답하였다. “선생님의 도가 지극히 크기 때문에 천하 어느 누구도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선생님께서는 밀고 나아가시면
되지, 남이 용납하지 않음을 어찌 걱정하십니까? 용납되지 않은 연후라야
그가 군자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도를 닦지 못함은 나의 부끄러움이나,
도를 크게 닦았는데도 써 주지 않음은 임금들의 부끄러움(잘못)입니다.
용납되지 않음을 어찌 근심하십니까? 용납되지 않은 연후라야 군자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공자가 흔연히 웃으며 말하였다. “그러냐, 안씨의 아들이여! 만약 네가 재물이
많다면, 나는 너의 재무 관리인이 되리라.”
이에 자공을 시켜 초나라로 보냈다. 초나라 소왕(楚昭王)이 군사를 일으켜
공자를 맞이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마침내 계강자가 폐백을 갖추어 공자를 불러들이자,
공자는 노나라로 돌아왔다. 노나라를 떠난 지 14년만이었다.
그러나 노나라는 끝내 공자를 등용하지 않자, 공자도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그 후 육예를 편찬하고 제자를 가르치는데 몰두하였다. 공자가 72세 때
자로가 위나라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공자가 병이 깊은 후 자공이 찾아왔다.
공자는 마침 지팡이를 짚고 문 앞을 거닐다가
“자공아, 왜 이제야 오느냐?” 하였다.
공자는 탄식하며 노래하기를 “태산이 무너지려나! 대들보가 부러지려나!
철인(哲人)이 시들려나!” 하였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천하에 도가
없어진 지가 오래 된지라 아무도 나를 받드는 이가 없구나.
어제 저녁 나는 은나라 식으로 제사 받는 꿈을 꾸었으니, 나의 선조가 은나라
사람임이라”고 말하였다. 그 뒤 7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노나라 애공은 만사(挽詞)하기를 “하늘이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니,
나는 괴로운 아픔 속에 있네. 아아 슬프다! 이보(尼父: 仲尼 존칭)시여!”
하였다. 이에 자공이 말하기를 “애공 임금은 노나라에서 죽지 못할 것이다.
살아서는 써 주지 않고, 죽어서야 만사하여 시호를 내는 것은 예가 아니다”
하였다. 공자는 노나라 성 북쪽 사수(泗水) 가에 묻혔다.
제자들이 모두 3년 동안 복을 입었다. 자공은 홀로 무덤가에 여막을 짓고
다시 3년이 지난 후에야 떠나갔다. 제자와 노나라 사람 중에 묘소 밑에서
집을 짓고 사는 사람이 100여 집이었다.
그래서 ‘공리(孔里: 공자 마을)'가 되었다. 공자 무덤에서 노나라에서는 대대로
세시(歲時:새 해를 맞을 때)에 제사를 드렸고, 선비들은 향음주와
대사의 예를 행하였다.
한나라 고조 황제는 노나라를 지나가다 태뢰(太牢: 천자에게 드리는 제사)로
제사지냈으며, 제후와 경상들이 오면 항상 먼저 공자 무덤에 참배하고
정사에 나아갔다. 사마천은 말하기를 “천하에 군왕에서 현인까지 많은 사람이
있었건만, 생시에 아무리 영화로웠던들 죽으면 다 끝이었다.
오직 공자만은 포의(布衣)로 죽었으나 대대로 전해오면서 학자들의
종주(宗主)로 숭앙되고 있다” 하였다. ( 『사기』 「공자세가」의 내용에서 발췌)
생애 연보
B.C.551 아버지의 숙량흘(叔梁紇)과 어머니 안징재(顔徵在) 사이에서 탄생
B.C.549( 3세) 아버지 죽음
B.C.535(17세) 어머니 죽음
B.C.533(19세) 결혼
B.C.532(20세) 아들 리(鯉) 출생, 자는 백어(伯魚)
B.C.522(30세) 자로, 증점, 염백우, 염구, 중궁 등의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함
B.C.518(34세) 노나라 맹리자가 죽으면서 맹의자 등 두 아들에게 공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예를 배우라고 당부함
B.C.517(35세) 제나라 경공이 정치에 대해 질문함
B.C.502(50세) 공산불요가 공자를 부름
B.C.501(51세) 처음 벼슬을 하여 노나라 중도재(中都宰)가 됨
B.C.500(52세) 다시 사공(司空)이 되고 다시 대사구(大司寇)가 됨
B.C.497(55세) 노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감
B.C.496(56세) 광 땅에서 액운을 만남. 필힐이 부름
B.C.495(57세) 위나라 영공을 만나 벼슬하고 남자(南子)를 만남
B.C.494(58세) 벼슬을 그만두고 위나라를 떠남
B.C.492(60세) 조나라를 거쳐 송나라로 가다가 환퇴의 액운을 당함
B.C.489(63세) 진나라 채나라 초나라를 거쳐 위나라로 돌아감
B.C.488(64세) 다시 위나라(출공 재위4년)에 벼슬함
B.C.484(68세) 노나라 계강자가 공자를 부르자 노나라로 돌아감,
고국을 떠난 지 14년만임. 이후 유약, 증삼, 자하, 자장 등의 제자를 가르침
B.C.483(69세) 아들 리가 죽음
B.C.481(71세) 제자 안회가 죽음, 제나라 진항이 임금을 시해하자
노나라 임금에게 토벌을 간했으나 실현되지 않음,
노나라 서쪽에서 기린이 사로잡히자 낙심하여 『춘추』 저작을 절필함
B.C.480(72세) 자로가 위나라 난리에 죽음
B.C.479(73세) 세상을 떠남(錢穆, 『공자전』, 삼련서점, 2002 참조)
관련자료 원문보기
공자 『논어』(해제)』(해제) (PDF 파일)
출처 : 제공 처 정보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http://philinst.snu.ac.kr/
[네이버 지식백과] 공자 [孔子, Confucius]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 4 ) 무함마드[Muhammad]
요약 610년 경 알라의 계시를 받고 이슬람교를 창시했다.
박해를 피해 622년 메카에서 메디나로 갔는데 이를 '헤지라'라고 한다.
메디나에서 신도들을 모아 630년 메카 함락에 성공한 무함마드는
이슬람 공동체 '움마(Ummah)'를 세우고, 이를 확장했으며,
이후 이슬람교는 아라비아 전역에 퍼졌다.
출생-사망 : 570.4.22 ~ 632.6.8
별칭 : 라술 알라(Rasul Allah:신의 사도)'
활동분야 : 종교
출생지 : 메카
무슬림들은 무함마드를 보통 '예언자 무함마드' 혹은
'라술 알라(Rasul Allah: 신의 사도)'라고 부른다.
마흔 살이 되던 해에 신의 계시를 받아 예언자가 되었으며,
이슬람을 창시했다.
그는 한 종교의 창시자인 동시에 이슬람 이전 시대의 고대 아랍 유목민
사회에 만연되어 있던 악습과 부도덕한 관습을 타파한 사회개혁
운동가였으며, 또한 모든 인간이 신 앞에 평등하다는 주장 하에 일생동안
박애정신과 인도주의를 실천한 행동가이기도 했다.
출생과 성장과정
무함마드는 570년 4월 22일, 메카의 지배부족이자 구약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일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쿠라이시족(꾸라이쉬족)의
하심(하쉼 Hashim) 가문에서 유복자로 출생했다.
하심 가문은 명문의 일족이었으나, 후일 우마이야조를 이루게 되는
아브두 샴스(압두 샴스) 가문 만큼 혜택받은 입장은 아니었다.
무함마드의 아버지 압둘라(압달라 Abdallah)는 시리아 쪽으로 나가던
카라반의 상인으로 그의 탄생 직전에 사망했으며,
어머니 아미나(Amina bint Wahb)도 그가 여섯 살 때 사망하여 어려서
고아가 되었다.
그 후 무함마드는 할아버지 압둘 무탈리브(압둘 무딸립 Abdul Muttalib)에게
맡겨졌으나, 2년 뒤 할아버지가 사망하자 하심 가문의 새로운 가장이 된
숙부 아브 탈리브(아부 딸립 Abu Talib)의 보호 하에 양육되었다.
결혼
어린 시절 양치기를 하며 평범하게 성장한 무함마드는 청년이 된 뒤
시리아를 왕래하는 무역상이 되어, 부유하고 고결한 성품의 미망인
카디자(Khadijah)의 대상에 고용되었다.
무함마드의 정직하고 성실한 성품에 감동한 카디자가 구혼하여,
무함마드는 595년에 25세의 나이로 40세의 미망인 카디자와 결혼했다.
그러나 둘 사이에 2남 4녀가 태어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카디자의 실제
나이는 그보다 적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함마드의 두 아들은 유년기에 사망했으며, 딸들 중에서도
파티마(파띠마 Fatima)를 제외하고는 모두 무함마드보다 먼저 사망했다.
알라의 계시
생활에 여유를 얻게 된 무함마드는 40세가 된 610년, 세속적 생활에서
이탈하여 메카 교외의 히라산(山)에 있는 동굴에서 명상생활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해 처음으로 천사 지브릴(가브리엘)을 통하여 알라의 계시를
받았다. 그 내용이 바로 《코란》 제9장(응혈)에 적혀 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알라의 계시를 받게 되어, 드디어 그는 '알라 외에는
신이 없다'는 유일신 신앙을 갖게 되고, 신으로부터의 메시지를 전하는
'신의 사도'가 되었다. 부인 카디자가 최초의 신도가 되었고, 이슬람교를 믿는
신도가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이것은 종전까지의 다신교(多神敎)를 부정하고 유일신(唯一神) 알라 앞에서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는 것이었으며, 처음에는 메카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하층민들과 중소상인 계층만 그의 가르침을 추종했다.
그의 지지자는 극소수였으므로 대(大)상인을 중심으로 하는 지도층은
그의 선교활동에 무관심했으나, 점차 추종자 수가 증가하여 메카 지배층의
이해관계를 위협하기 시작하자, 613년경 포교활동 개시 후 처음으로
박해가 가해지기 시작하였다.
메디나 시절
615년에는 신도 일부가 아비시니아로 피신하자, 그곳 그리스도교도에게 환영
받았으나 무함마드 자신은 전부터 타협을 해 두었던 야스리브(후의 메디나)로
이주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622년 9월 24일 아부 바크르 등 70여 명과
함께 메카를 탈출, 야스리브로 갔다.
이를 히즈라(헤지라:聖遷이란 뜻)라고 하는데, 훗날 이 해를 이슬람력(曆)의
기원으로 삼게 되었다(622년 7월 16일).
당시 메디나에는 내분이 있었으나 무함마드는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하여 사태를 수습하고, 메카에 대항할 수 있는 군대를 양성하는 동시에
이슬람 공동체 '움마(Ummah)'의 모체를 만들어내었다. 무하지룬(히즈라에의
동행자)과 안사르(메디나에서의 협력자)가 그 중추를 이루어 이슬람교도의
수는 계속 늘어났다.
624년에는 메카의 대상(隊商)을 습격하는 동시에 예배의 방향을 예루살렘에서
메카로 변경함으로써 메카 정복의 의지를 나타내었다.
이 대상 습격을 계기로, 바드르에서 메디나측과 메카측의 일대 결전이
벌어졌는데, 메디나측이 수적으로 우세한 메카측을 무찔러 의기가
충천하였다. 메카측은 무함마드 박해의 최선봉장이던 아부 자푸르가 전사한
후로는 아브두 샴스 일문(一門)인 아부 수피안이 부족장이 되어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듬해인 625년 우후드산(山) 밑에서 메디나측은 재차 메카측과 교전하여,
메디나측이 상당한 타격을 입었으나 무함마드의 사기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으며, 그 후로는 당분간 내정(內政)과 포교에 힘썼다.
이 무렵 이슬람교도에 대한 협력이 기대되었던 유대교도와의 관계가
악화되었으며, 메디나측에 대해 대항하던 쿠라이저족(族) 등이 무함마드의
명령에 의해 멸망되는 일 등이 있었다.
메카 함락과 사망
627년에는 메카군(軍)이 메디나를 포위하였으나, 페르시아 사람인 사르만의
헌책(獻策)을 받아들여, 도시 주위에 큰 도랑(한다크)을 파 방어에 성공하였기
때문에, 이 전투를 한다크 전쟁이라고 불렀다.
628년 메카 교외인 후다이비야에서 메카측과의 화약(和約)이 체결됨으로써,
이듬해에는 메카 시민들이 일시 대피한 가운데 메디나측 시민의 카바(Kabah)
순례가 행하여지기도 하였다.
630년 1월 무함마드는 메카로 군대를 진격시켜 10월에 메카에 도달하였다.
마침내 아부 수피안이 항복하고, 11월에 약간의 저항을 물리치면서
무함마드는 메카로 입성하여, 카바 신전에 안치된 많은 우상을 부수고
화상(畵像)도 지워버렸다.
그때의 감격은 《코란》 제17장(밤의 여행) 가운데 있는 “진리가 와서 허위는
망해 없어졌다”라는 말에 나타나 있다. 무함마드의 메카 정복 이후
아라비아 반도 전역의 각 부족은 속속 이슬람교를 받아들여 이슬람 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632년 3월에는 메카에서 예배를 지내고, 무함마드 자신이
순례를 지휘하였다. 그 후 그의 건강은 갈수록 악화되어,
같은 해 6월 8일(이슬람력 11년 3월 13일) 애처 아이샤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하였다.
평가
무함마드가 말한 계시와 설교는 《코란》 제114장 6,211구 속에 담겨져
있으며, 이것 외에도 많은 전승(하디스), 그리고 이븐 이스하크에 의한
전기(원본은 없어져 이븐 히샴의 採錄으로 전해졌음), 알 와키디와
이븐 사드 등의 저작이 무함마드의 전기 자료로 되어 있다.
유럽에서는 옛날부터 단테, 볼테르, 나아가 기번, 칼라일 등의 기술이 있으며,
그리스도교적 입장에서 무함마드상(像)이 이루어져 통용되어 왔다.
이것은 “한 손에는 《코란》, 다른 손에는 칼”에 나타나 있듯이, 호전(好戰)적인
무함마드가 이교도나 유대인을 가차 없이 멸망시키거나, 자기의 교리를
억지로 강요했다는 식으로 되어 있으며, 또한 그가 여러 여성과 관계하였다는 점을 들어,
무함마드가 호색(好色)적인 인물로 평가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근대 이후로는 뷔스텐펠트, 네르데케, 불, 안드라에, 와트 등의 연구를
통하여 단지 실증적으로 많은 점을 밝혔을 뿐만 아니라, 위에 언급한 견해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여 내면적 이해를 심화시키기에 이르렀다.
현대적 평가에 의하면, 무함마드는 이슬람의 창시자인 동시에 전통 사회의
악습과 부도덕한 관행을 폐지하고자 노력했던 사회개혁운동가였으며,
평등주의를 주창한 박애주의자였다. 또한 그의 인품은 인자, 중용, 인내,
용맹 등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신의 사도로서 뿐만 아니라 가족과 교우들
속의 한 구성원으로서, 정치가, 행정가, 군인으로서 모든 무슬림들이
본받아야할 인생의 표본이 되고 있다.
특히 그는 메카 정복 이후 신의 사도라는 지위를 빌려 인간위에 군림하는
초월적 존재나 절대군주가 될 수 있었으나, 오히려 평범한 지도자이기를
자처했다. 그는 왕관을 쓰지 않았으며, 옥좌 대신 마룻바닥에 앉아 통치했고,
스스로 옷과 신발을 고쳐 입었으며, 대추야자와 보리빵을 즐겨먹는 소박하고
겸손한 인간으로 남기를 원했다.
참조항목
메디나, 메디나헌장, 메카, 무하지룬, 사라센제국, 이스라, 후사인 이븐 알리,
하디스, 하디자, 헤지라
역참조항목
가니마, 라마단, 바이트알말, 앗사파흐, 12이맘파, 아부 바크르, 알라
[네이버 지식백과] 무함마드 [Muhammad] (두산백과)
위의 내용들은 사대성인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알려진 내용들입니다.
위의 내용들로 단순하게 비교를 해보면,
공통점
첫 번째로 종교의 탄생
예수 그리스도 : 기독교 ( 카톨릭, 그리스 정교, ... )
무하마드 : 이슬람교
석가모니 : 불교
공자 : 유교
사대성인들의 가르침을 통하여 세상을 주도하고 있는 종교가 생겨났습니다.
두 번째로 도덕의 개념이 생겨 남
예수 그리스도 : 율법을 뛰어 넘는 사랑으로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속
무하마드 : 할랄 문화, 신 앞에 정결한 삶을 위하여 먹는 것도 가려먹어야
하며, 하루 중에도 시간을 정하여 신께 예배를 드리며, 삶을 성찰
석가모니 : 자신을 수양하여, 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하여, 모든 인연을
끊어 가면서 자신과 싸우고, 모든 욕심을 내려놓아 신께서
원하시는 경지에 도달해야 극락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가르침
공자 : 세상을 통치하는 사람들과 백성들 사이에도 예의가 지켜져야 하며,
그러한 예의를 통하여 모두가 원하는 공평하고, 선의가 이루어지는
세상을 이루며 살 수 있다는 가르침을 근본으로 하는 사람의
도리를 원칙적으로 세운 가르침
세 번째로 사대성인의 가르침을 통하여 생겨난 종교는
생겨난 지역을 중심으로 큰 영향력을 현재까지 끼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 성경말씀을 기준으로 성경에서 말씀하시고 계시는 그대로
태어나셨고, 모계의 유전인자만을 받고,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으며,
성경 66권의 말씀을 따라서, 40명이 넘는 저자들이 약 1,600년에
걸쳐서 기록한 그대로 33년의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아버지의 뜻을
이스라엘에 전하시고, 뜻에 순종하여 성취하시고, 죽음에서 살아나서,
많은 신도들에게 보이시고, 보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승천
하셨고, 만왕의 왕으로 오셔서, 세상을 통치하실 것을 약속하심.
무하마드 : 사우디를 중심으로 아랍 국가들에 영향력을 끼쳤으며,
현재에는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부정적인 면에서 끼치고 있음
석가모니 : 인도 현재의 네팔에 왕자로 태어나서 깨달음을 전하였으며,
인도전역과 중국을 거쳐서 한국, 일본, 등 동남아와 아시아지역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가르침
공자 : 중국의 사상에 큰 기초 석을 놓았으며, 현재까지 중국의 국력을
통하여 아시아와 동남아 국가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가르침
사대성인들이 남겨놓은 가르침을 통하여 많은, 세상의 나라들은 부족국가에서
민족국가로 성장하면서 법을 통하여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기초를 놓게
되었고, 현재까지 그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대성인 중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의
몸을 입고, 하나님아버지의 영이신 성령으로 잉태하셨고, 성경에서
말씀하심을 따라서 30년 동안 목수의 아들로 평범한 인생을 사셨으며,
요단강에서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받으시고, 3년 동안 하늘나라에 대한
복음을 선포하시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배반한 죄의 값을 치르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시고,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시며,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주시며, 하늘나라로
승천하셔서, 하나님아버지께서 정하신 때까지 하나님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 때가 되면 다시 재림을 통하여 온 세상을 사랑과 공평의
법으로 순종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만왕의 왕으로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들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면서
성경말씀을 통하여 반드시 모든 민족들을 불순종한 것에 대하여 벌하실 것과
언제든 회개하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말씀에 순종할 것에 대하여 명령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세상에 있는 일들이 말씀하심을 따라서 성취되어지고 있는가?!
살펴보면 알 것이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15 주 당신들의 하나님은 당신들의 동족 가운데서 나와 같은 예언자
한 사람을 일으켜 세워 주실 것이니, 당신들은 그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16 이것은 당신들이 호렙 산에서 총회를 가진 날에
주 당신들의 하나님께 청한 일입니다.
그 때에 당신들이 말하기를
'주 우리 하나님의 소리를 다시는 듣지 않게 하여 주시며, 무서운 큰 불도
보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가 죽을까 두렵습니다.' 하였습니다.
17 그 때에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한 말이 옳다.
18 나는 그들의 동족 가운데서 너와 같은 예언자 한 사람을 일으켜 세워,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 줄 것이다.
그는, 내가 명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다 일러줄 것이다.
19 그가 내 이름으로 말할 때에,
내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내가 벌을 줄 것이다.
20 또 내가 말하라고 하지 않은 것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말하거나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예언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21 그런데 당신들이 마음속으로, 그것이 주님께서 하신 말씀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겠느냐고 말하겠지만,
22 예언자가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말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니 당신들은 제멋대로 말하는 그런 예언자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신명기 18 : 15 ~ 22절 - 새번역성경
모세가 기록한 신명기 18장을 통하여 모세와 같은 예언자,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실 것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성경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증거로 말씀의 성취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계시며,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나라를
세우셨고, 말씀하심을 따라서 성취하셨고, 성취하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약 AD 70년부터 AD 1948년까지 세상에서
사라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1948년 UN결의 찬성 33표를 통하여 다시금 세상에 나라로 현재에도
존재하고 있으며, 노벨상을 비롯하여 세상을 선도하는 민족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이스라엘마저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있기에 하나님아버지께서 예고하신,
마지막 세 번째 재앙이 기다리고 있으며, 이 예루살렘의 재앙을 중심으로
하나님아버지의 진노의 불 심판이 동시 다발적으로 온 세상에서 일어날
것이며, 이 때에는 현재에 땅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재앙들이
하늘로부터 함께 임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신앙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제 이의 출애굽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그 곳은 사막으로 변하였던 예루살렘, 즉 시온산성으로 하나님아버지께서
보호막을 쳐서 사막을 샘이 넘쳐흐르는 푸른 초장으로 만드셔서,
온 세상에 내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불 심판으로부터 보호하실 것입니다.
아직 기회가 있을 동안에 말씀을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성령님을 의지하여 살피고, 순종해야할 것입니다.
사대성인들의 가르침은 모두 훌륭합니다. 하지만 생명이 있는 가르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순종에 있음을 깨닫고,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