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영국의 산업혁명
서양에서 18C에 일어난 굵은 획을 긋는다면 세 개의 혁명으로 표현될 것인데, 그것은 정치적 혁명, 사회적 혁명, 산업혁명이다.
이 세 가지의 거대한 혁명은 모두 이마두와 진묵이 동양의 문명신과 도통신을 이끌고 서양으로 간 17C 후반부터 정치혁명은 아메리카에서, 사회혁명은 프랑스에서, 산업혁명은 영국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산업혁명은 다른 혁명들에 비해서 조용하게 진행되었다. 산업혁명은 영국에서 시작하여 서유럽의 다른 지역으로 번져갔다.
산업혁명이란 공장제 수공업에서 단순한 공장제 기계공업으로의 변화가 아니라 기계제 대공장을 출현시켜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확립한 진정한 변혁이었다.
그런데 왜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맨 먼저 일어났을까?
17C 후반 영국에서는 명예혁명이 일어나서 국왕의 권한은 별로 없었다. 이제 권력은 왕실(王室)이 아니라 의회(議會)에 있었다. 그리고 의회에 진출한 세력은 토지를 소유한 지주와 도시의 상인이었다. 이러한 사정은 유럽 대륙도 마찬가지였다. 의회 의원을 뽑는 선거가 행해졌지만 뇌물이 성행했고 투표와 의석의 매매가 비일비재했다.
영국에서는 위법행위가 난무했고, 이토록 혼탁한 정치적 상황은 경제적 현실로 나타났다. 의회 권력자들은 더 많은 정치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소농(小農)들을 내쫓고 소유지를 확대해 나갔다. 대지주들은 이것을 엔크로저 운동이라고 했는데, 엔크로저 운동이란 대지주나 농업자본가가 소농민의 토지를 매수ㆍ병합해서 생산성이 있는 농업을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자연히 소농민은 토지에서 유리되어 임금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때 형성된 임금노동자들은 영국 면직물 생산현장으로 진출하게 되었는데, 영국에서 면직물 공업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던 몇 가지 요인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유럽대륙에서의 종교전쟁은 개신교도들로 형성된 많은 상공업자들을 영국으로 건너가도록 했다. 예를 들면 네덜란드가 스페인에 대항해서 독립투쟁을 일으켰을 때 스페인이 네덜란드의 반란을 진압하려고 했다. 이때 많은 직인(職人:직공, 기능공)들이 도버해협을 건너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건너왔다. 이때 건너온 사람이 약 3만 명 정도 되는데 엘리자베스 여왕은 직인 1명이 영국인 도제(견습공) 한 명을 고용하는 것을 조건으로 이들을 정착하도록 했다. 이 정책은 영국이 면직물 산업을 확립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또 식민지 쟁탈전에서 승리한 영국은 광대한 식민지를 가지게 되어 인도, 북미(北美) 등의 넓은 시장을 확보하고 있었다. 물건만 있으면 얼마든지 팔아먹을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영국의 기계 발명은 이 면직물 공업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일찍이 1730년대 존 케이는 ‘나는 북(플라잉 셔틀)’을 발명하였다. 북이란 베틀에서 날실 사이에 씨실을 넣는데 쓰는 배 모양의 도구이다.
‘나는 북’이 나오기 이전까지는 북에 넣는 실을 직공이 손에 들고 세로로 걸려 있는 날실 사이를 일일이 통과시켜야 했다. 하지만 ‘나는 북’은 피커를 쳐서 날실 사이로 북을 넣는 구조로 고안되었다. 북은 좌우로 달리게 되고, 양쪽에 피커가 있다. 피커에는 끈이 달려 있고, 끈의 끝은 핸들에 잡아매어져 있다. 이 핸들을 조작하면 피커가 북을 번갈아 쳐서 북을 좌우로 보내게 된다.
이 ‘나는 북’은 영국 산업혁명 당시의 획기적인 발명품이었으며 영국의 산업혁명은 이 ‘나는 북’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는 북은 직조기계의 조작을 쉽게 했고 직물 생산을 능률화시켰다.
이것은 베짜는 사람이 실을 더 많이 소비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때맞춰 실을 공급하기 위하여 한꺼번에 여덟 가닥의 실을 뽑아내는 하아그리브스의 제니방적기가 만들어졌고, 뒤이어 기존에는 사람의 힘으로 움직이던 기계의 동력을 수력으로 바꾸어 놓은 아크라이트의 수력방적기가 발명되었다.
1799년에는 수력방적기와 제니방적기를 조화시킨 뮬(Mule)방적기가 발명되었고, 이러한 발명에 자극되어 카트라이트는 증기동력을 응용한 역직기를 발명하였다.
한편 1765년 와트는 증기기관을 발명하였다. 그것은 거대한 사건이었다. 18C초 탄광의 배수 작업에 사용되던 증기기관이 와트에 의해 개량되었던 것이다. 와트는 종전의 상하로 이동하던 증기기관의 동력을 회전하는 동력으로 탈바꿈시킴으로써 훨씬 싼 경비로 훨씬 강한 동력을 공급할 수 있게 하였다.
회전 동력을 생산하는 와트의 증기기관은 이후 각종 공업에 전면적으로 채용되어 대규모 공장 생산을 가능하게 했다. 새로 등장한 방적기와 역직기의 동력으로 와트의 증기기관이 이용되었으며 점차 다른 공업 분야에도 확산되어 석탄산업, 제철공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을 뿐 아니라 기차나 기선 등 교통기관에도 응용되어 전 세계의 모습을 뒤바꾸는 변화를 가져왔다.
영국이 산업혁명을 이루어내자 서양의 다른 지역에서도 연쇄적으로 산업혁명이 일어나 이후 19C 초에 미국의 풀턴은 증기선을 실용화하였고 스티븐슨은 증기기관차를 만들어냈다. 이 기차는 1830년 리버풀과 맨체스터 사이를 달렸는데 시속30마일(48Km) 정도였다고 한다. 이 운송 수단의 대 변혁은 교통과 통신혁명을 가져왔다.
1837년 모스에 의해 전신기가 발명되어 1844년 런던과 스라우 간에 공중 전신이 개설되고 1851년 영국과 프랑스를 연결하는 해저 전선이 부설 되는 등 19C에 전화, 전신, 전기등의 발명을 가져왔다. 이는 통신혁명, 수송혁명, 기계혁명의 제2과학 혁명으로 연결되었다.
제철기술의 발전은 1709년 에이브러햄 다비에 의해서 석탄 용광법이 발명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것은 종래 목탄에 의존하던 연료를 석탄으로 대체시켜 제철업의 쇠퇴를 구한 것이다.
또한 1784년 헨리 코트는 석탄을 연료로 하여 양질의 봉철(棒鐵) 제조에 성공했다.
영국의 선철(銑鐵), 봉철(棒鐵)의 생산량은 이러한 여러 발명에 의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으며 그 후 도가니 제강법에 의해 강철의 생산이 발전했다.